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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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돌아가시고 이제 한 해가 지났다. 겨우 그 만큼의 시간이 지났는데, 벌써 까마득하게 오래 전의 일인 것만 같다. 처음 겪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아빠가 돌아가셨는데도 일상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는 점이었다. 네 살짜리 아이와 하루 종일 함께 해야 하는 시간 속에서 엄마가 감정이란 사치를 누릴 수는 없었으니까. 나에게 애도의 시간을 가질 여유란 전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빵집에 들렀는데 이제 막 구운 소보로를 진열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다지 좋아하는 종류가 아니었음에도 별 생각 없이 집어 들어 고른 빵들과 함께 계산을 했다. 아이의 유모차를 밀면서 집으로 향하는데, 들고 있는 봉투 속 빵의 온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가슴이 꽉 메어져 왔다. 아빠는 이제 좋아하는 소보로 빵을 드시지 못하는 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를 데리고 거리를 걸어가는 중이었으므로, 눈물을 참고 꾹꾹 삼켜야 했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하루의 대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에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았지만, 시간은 여전히 째깍째깍 흘러가고 우리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살아 남은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인생에서 유일한 진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우리는 살아 가야 한다.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노인들을 생각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노인이 된 부모가 보인다. 당신들은....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을 바쳐 노인으로 다시 태어났을까. 그리고 지금 나와 더불어 노인이 될 게 분명한 아내와 노인이 된 우리를 기억해줄 딸아이를 본다. 혈통처럼 세월이 흐르고 꽃잎이 분분히 떨어져 사연처럼 쌓이고 해가 저문다. 삶이 이슥해지는 시간들. 사소하고 비범한 우리의 노년이 자박자박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p.62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올 해의 마지막 날 손홍규의 산문집을 읽었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라니 제목부터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가로등 아래 놓은 골목을 딸아이와 함께 걸으며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딸은 묻고 아빠는 답하고, 아빠의 대답에 담긴 질문을 아이는 새로운 질문으로 바꾸어 대답한다. 나도 부모의 입장이라서 '아이가 앞으로 새롭게 발견하게 될 언어들이 벌써부터 그리워'라든가, '아직 아이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는 말에 뭉클해졌다. 매 순간 부모는 그렇게 아이를 통해서 새로운 걸 깨닫고, 몰랐던 걸 배우고, 사소한 일상의 순간들에 감사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 한 마리 소를 사랑했던 소년이, 성년이 될 무렵 그 소를 떠나 보내기까지의 시간 동안 있었던 에피소드를 비롯해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저자의 어린 시절 풍경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소를 팔아 대학등록금을 마련해주며 그래, 소설이라는 걸 쓸 테냐.라고 물었던 아버지의 심정을 어쩐지 이해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건 내가 부모가 되어 버렸기 때문일까. 아마 몇 해전의 나였다면 이 장면에서 이해하고 싶었던 인물은 아버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위암으로 투병하던 고모의 부음을 들었을 무렵의 대학 새내기 시절, 애도와 잔치의 분위기가 뒤섞인 장례 풍습이 서먹했던 그는 '백 년 동안의 고독'속 마르케스 대령의 장례식을 떠올린다. 그렇게 저자의 삶 구석구석 문학이 함께 하고 있었다.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던 할머니의 죽음은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게 무엇인지를 천천히 깨달아가는 과정이라는 걸 알게 했다고 한다. 지난해 나란히 칠순을 맞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글들은 더 애틋하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속속들이 잘 알지 못해서, 알고 싶어서 소설을 쓴다는 저자의 고백은, 세상 모든 자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평생을 함께 해온,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온 우리의 부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항상 어른의 모습이었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처음부터 나이든 모습이었을 것 같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한때 반짝반짝 빛나는 시절이 있었을 거라고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도 한때 우리처럼 사랑에 설레고, 실패에 좌절하고, 상실의 아픔을 겪기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온 걸음마다 이야기를 남겨둔' 우리의 부모들에게 더 말을 건네고, 더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이야기를 줍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게 자식이 부모를 기억하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 방은 감옥의 혼거방만한 크기여서 원하든 원치 않든 내면을 들여다보기 좋다. 그러나 이따금 사람은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면서 동시에 세계와 대면하기도 한다. 글쓰기처럼 독서 역시 그런 행위다. 나는 아직 행복한 책 읽기가 무언지 잘 모른다. 내게 독서는 고달픈 행위였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건 마치 평소에는 존재를 감지할 수 없었던 평행우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일과 비슷하다. 낯설고 기이하지만 분명 내가 머문 시공간에 겹쳐진 또 다른 세계.    p.139

이 산문집의 많은 부분을 저자의 유년 시절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지만, 그 모든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아닐까 싶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읽으며,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아니 우리가, 시궁창에 처박히기 싫어서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들 한다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페이지 바깥으로 흘러 넘치고 있다. '한국의 작가들은 살롱에서 먹고 마시고 춤춘다. 그 아래 지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다' 라는 문장에서 읽히는 그 깊은 분노와 고통과 슬픔이 책을 덮고도 아릿하게 남아 있다.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현실에 발 딛고 서 있는 이들이 문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다 보면 '누구에게나 유독 마음이 기우는 문장'들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그러한 문장들은 대부분 할머니에 대한 것들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러한 문장들은 대부분 가족과 관련된 글들이었다. 그래서 이 산문집을 읽는 동안 문득문득 밑줄을 긋게 되고, 페이지를 멈추고 돌아보게 되고, 시간을 들여 행간에 숨어 있는 추억을 찾아 보게 되었던 것 같다. 가족과 관련되어서는 항상 상실과 결핍의 순간보다, 나는 그 이후의 시간들이 더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던 것 같다. 남아 있는 이들은 부재의 무게를 이겨내고 살아가야만 하니까. 아침은 매일 같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어제와 같은 아침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잃어버린 것은 영원히 되돌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누가 세상에서 사라졌든 말든, 계절은 바뀌고 시간은 흘러갔지만, 누군가에겐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그대로 일 테니까. 가끔은 나만 빼고 지구가 자전하기라도 하는 듯, 혼자 그렇게 제자리에 멈춰 선 듯한 기분도 든다.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또 듣기 위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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