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
톰 말름퀴스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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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은 반쯤 잠든 것 같은 상태다.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가끔 눈을 떠서 산소마스크 안쪽을 긁어댄다. 내가 부채질을 멈추면 그녀는 금방 내 손을 찾는다. 카린, 내 팔에 감각이 없어. 내가 말한다. 이 망할 부채질을 계속할 수가 없다고. 카린이 산소마스크를 벗는데도 나는 제지할 힘이 없다. 카린이 단숨에 말한다.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 간호사가 뛰어 들어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 카린은 그녀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마스크를 벗으면 안 돼요. 간호사가 말한다. 이 사람도 압니다. 내가 간호사에게 말한다.   p.17

이 책은 스웨덴에서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하며 평단의 호평을 받은 시인  톰 말름퀴스트가 자전전 이야기를 써 내려간 첫 소설이다. 이야기는 임신 33주인 아내 카린 호흡곤란으로 병원에 실려 가면서 시작된다. 다행히 태아의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고 하는데, 가벼운 독감 증상으로 시작되었던 아내의 상태는 점점 심하게 악화되고 있었다. 급성 호흡부전으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카린의 증상은 심한 폐렴처럼 보였으나, 여러 검사 결과 급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한 뒤, 항암치료를 시작해야 했다. 카린은 심각한 상태였고,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어 시간이 없었다. 바로 1주일 전만 해도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피검사를 했는데 아무 문제도 없었다. 이틀 전만 해도 함께 영화를 봤고, 그들은 아직 하지 못했던 결혼도 계획 중이었다. 이 모든 평화로운 일상이 한 순간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이다.

그렇게 톰은 갑작스럽게, 한달 반이나 일찍 아빠가 된다. 그리고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백혈병으로 인한 아내의 죽음을 맞닥뜨리게 된다. 사실 모든 죽음은 갑작스럽다. 그러니 애초에 마음의 준비 같은 건 불가능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날들에 사실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지만 잊고 싶어 하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그 사건은 늘 불시에 일어나곤 한다. 가족의 예기치 못한 죽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언제나 남의 일 같지가 않게 느껴진다. 당장 내일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상실과 슬픔이니 말이다.

 

내 이름은 이제 아빠다. 아이가 또 나를 부르고 있으니 내게는 생각에 잠길 시간도 뭔가를 느낄 시간도 없다. 너처럼 리비아도 삶의 작은 것들을 눈에 담는다. 이를테면 쏟아진 기름의 다양한 색깔, 빗자루 손잡이 끝에 붙어 있는 벌레, 내 팔꿈치의 긁힌 상처,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크리스털 공들 사이에 걸쳐 있는 거미줄 같은 것들. 심지어 녹슨 병뚜껑조차 리비아에게는 마법이 된다. 아이는 네 사진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그 사진들을 침대의 내 옆자리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건네기 때문이다.    p.372~373

누군가의 삶이 멈추고 끝장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슬픈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지만, 저자의 문장은 시종일관 담백하고 건조하다. [뉴욕타임스]지금까지의 자전소설은과거의 회상을 의미했으나 말름퀴스트는 이러한자전의 의미를 완전히 전복시켰다고 평가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고통스러운 상실의 순간을 회상하는 과거의 시제가 아니라 모두 현재시제로 서술하고 있다. 마치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생생하게. 그러나 격한 감정의 폭발이나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이 모든 상황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드라마처럼 극적인 상황에서조차 그의 문장들은 담담하고, 사실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감정에 공감되고, 이해되고, 안타까웠다. 이미 벌어진 과거의 상황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모습들이 모두 현재시제로 그려져 있어 그가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더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게 마련이며, 따라서 우리는 늘 누군가를 잃고, 떠나 보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없지만, 그럼에도 바보 같은 삶은 계속된다. 그렇게 인간이란 상실을 숙명으로 삼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에, 이러한 작품이 전해주는 감정과 여운이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슬픔이라는 파도가 우리를 집어 삼켰을 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 그리고 살아가야만 하는 그 모든 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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