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 - 14년 차 번역가 노지양의 마음 번역 에세이
노지양 지음 / 북라이프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래도 가끔은 나의 수많은 하루 중 어떤 하루나 어떤 순간을 일부러 기억하기 위해서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번역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내 안에 영원히 남는다. 오래도록 나를 떠나지 않고 나만의 이미지가 되고 문장이 되고 내 인생의 일부가 된다. "그날 기억해?"라고 묻는 친구가 되고 과거의 한 시절을 함께 겪은 동지가 된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박제한 사진이 되고 영상이 된다.    p.75

문학소녀였다가 영문학을 전공하고 방송 작가가 되었다가 현재는 번역가로 14년 넘게 일하며 80여 권의 책을 번역한 노지양 번역가의 첫 번째 에세이이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헝거>를 비롯해 누구나 알만한 작품들을 꽤 많이 번역한 그녀는 이제 중견 번역가이다. 대표작이라 할 만한 번역서도 있고, 먹고 사는 데 별문제 없다고 봐도 무방할 만한, 그녀는 오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방송 작가 시절에는 원고를 쓰고 청취자 사연을 정리하느라 내 글을 쓸 시간과 여유가 없었고, 번역을 할 때는 종일 모니터 앞에서 문장을 다듬느라 지쳐서 일하는 시간 외에는 절대 노트북 문서창을 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매일 일정 시간 가사 노동을 하고 7시 반이면 집에 들어오는 남편과 성장기 아이를 위해 꼬박꼬박 저녁을 해야 하는 주부였다. 당연히 오후 6시 이후와 주말은 내 시간이 아니기에 글을 쓸 시간과 에너지를 도저히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일상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꾸준히 해보지 못한, 시작도 하지 못하고 묻어둔 꿈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이가 누가 있을까. 이 책은 더 이상 '머리로만 책을 쓰고' 싶지 않았던, 글을 쓰지 못해 만성 욕구불만이었던 문학소녀가 드디어 자신의 꿈에 첫 발을 내딛게 된 순간이자, 그녀와 같은 수많은 이들에게 아직 늦지 않았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다정한 마음이다. '먹고 살고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행복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다'는 걸 아는 당신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뭉클하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하고, 격려 받는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잠재력, 'potential'이란 보통 성취나 재능의 영역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다. 아직은 가능성이다. 본인의 노력 여하와 기회와 행운 여부에 따라 펼쳐질 수도 있고 영원히 잠재력으로 머무르거나 조그만 점이 되었다가 사라질 수도 있다.

가끔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청소기를 밀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이번 달에 번역할 책을 넘겨보면서 이 생활도 나쁘지는 않지만 '무언가 더 있지 않았을까?'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가 갈 수도 있었지만 가지 못한 길을 하나하나 헤아려본다.   p.127

이 책은 솔직하고, 재미있고, 맛깔 나는 에세이라 술술 읽혀서 좋았지만, 번역가로서의 장점을 살려 매 챕터를 영어 단어에서 시작한다는 점이 더 매력적이었다. 영어와 한국어의 경계에서 분투한 15년의 세월이 남긴 단어들을 그녀만의 독특한 시선과 감성으로 재해석된 단어들에 대한 에피소드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성공하다' 라는 뜻으로 쓰이는 ' go places'에 대한 챕터에서는 동네 마트를 벗어나고픈 주부로서의 열망이 그려져 있고, '소박한, 허세가 없는'의 뜻을 가진 'down to earth'의 챕터에서는 가족과 부모님에 대한 뭉클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스스로 자초해 비참하게 만들다'는 뜻으로 쓰이는 'embarrass'에 대한 챕터에서는 영화 <라라랜드>의 주인공 미아를 통해서 '간절함과 포기 안 되는 마음'이야말로 진짜 재능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그녀가 살아오면서 크고 작게 자존심을 다쳤던 수많은 실패의 경험들을 들려 준다.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해 궁금했던 이들이라면, 너무도 가감 없이 솔직하게 들려주는 번역이라는 일에 대해 속 시원히 알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미 이름이 알려진 중견 번역가이면서도, 자신의 번연가로서의 단점과 구차한 뒷이야기들과 일상에서의 허점투성이인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인간 노지양으로서의 매력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번역가 노지양이 아닌, 인간 노지양에게 관심이 생겼다. 까딱하면 좌절하기와 무턱대고 희망 품기를 무한 반복하는 특유의 철없음을 응원하고 싶어 졌고, 산책과 몽상을 즐기며 아름다운 단어에 매료되는 소녀 같은 모습들이 글속에 그대로 담겨 있어 사랑스러웠다. 언젠가 만나게 될 그녀의 '소설'이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