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의 밤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박솔뫼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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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은 이제 못 보게 된 아이들은 영영 못 보게 될 아이들처럼 여겨졌다. 아이는 사람의 인생에서 너무 짧은 시기여서 못 보게 된 아이들은 영영 만날 수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는 어른이 되고 뭔가 빼먹은 얼굴이 돼서 만난다. 그건 못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전혀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사람으로 다음 장면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겠지.   p.26

최근 한국 소설의 트렌드는 아무래도 경장편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한 두 시간이면 완독할 수 있는 가벼운 분량과 부담 없는 저렴한 가격, 그리고 가지고 다니기 편한 작은 판형까지 여러 모로 소설에 대한 접근성이 쉬워졌다고 하겠다.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은행나무의 '노벨라', 작가정신의 '소설향',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에 이어 이번에는 아르테의 '작은 책'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아르테 한국 소설선작은책시리즈는 이름 그대로 판형이 가장 '작은 책'이라서 주머니에 쓱 들어가는 크기라 휴대성에서는 가장 돋보이는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작은책’ 시리즈 그 첫 번째 작품은 박솔뫼 작가의 <인터내셔널의 밤>이다. 올해로 등단 10년을 맞은 박솔뫼 작가의 여덟 번째 작품집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에 탄 한솔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기차가 광명역에 도착하자 누군가 급하게 와 그의 옆자리에 앉았고, 앉자마자 자리를 바꾸자고 부탁을 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기차에서 만나게 된 한솔과 나미, 두 여행자로 시작된다. 한솔은 한 달 전 졸업 후 일본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가 보낸 청첩장을 받았다. 그는 결혼식에 가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들을 생각하며, 그곳에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친구에게 거절의 연락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미는 이년 넘게 책을 전혀 읽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 속해 있다가 교단에서 도망치고, 이모네 집에서 한 달간 숨어 살았다. 한솔과 나미 모두 각각 자신이 속해있던 곳으로부터 도망치듯 떠나왔다.

 

책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사라지고 지나간다. 어떤 함께하던 책들은 시간이 지나면 헤어지게 되는데 그걸 슬퍼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어떤 것들은 이미 변해버려 흔적이 없어졌을 수도 있다. 그래도 헤어짐은 있다. 한솔은 열여섯 열일곱에 읽던 책들을 지나가며 아 이미 헤어졌군 우리는 헤어지고 다시 만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만나지 않게 된 사람들도 가끔 생각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p.89

어떻게 주민등록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어떻게 모르는 사람으로 사라질 수 있을까.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되는 고유의 정체성이 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만들게 되는 정체성 말고, 처음부터 주어진 것들 말이다. 남성, 여성 등의 성정체성과 종교를 비롯하여 일상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 같은 것들로부터 벗어나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벗어나기 위해서 도망치거나, 떠나야 한다면, 살아온 모든 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야기는 가벼운 분량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게 읽힌다. 평범한 서사 구조 대신 인물들의 생각들이 드문드문 펼쳐지고, 해체되고, 두서없이 이리저리 보여지고 있으니 말이다. 인물들의 혼잣말을 천천히 따라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면의 풍경들이 손에 잡힐 듯 구체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사라질 생각은 없지만, 큰 잘못을 아직 저지르지 않았지만 어떻게 한국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대해서 말이다. 누구나 일생에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 지금의 정체성을 던져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그런 생각들. 그리하여 어딘가 불안하게 시작되었던 이 여행에서 어느 순간 안도와 같은 기분이 들게 된다. 어떤 면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는 필요한 것이다. 필요하지 않아도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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