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니
톤 텔레헨 지음, 김소라 그림, 정유정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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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불로 들어서며 귀뚜라미는 생각했다. 이제부터 슬픔은 끝나는 즉시 없애 버려야겠어. 그나마 분노 상자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것도 버리려던 참이었는데, 만약 실수로 사자가 그 상자를 받았다면....

귀뚜라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오래된 분노 상자를 가져와 열고, 그 속에 담긴 분노를 수천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어 하나하나 땅에 묻었다.   p.25~26

동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인들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톤 텔레헨의 신간이다. <고슴도치의 소원>, <코끼리의 마음>에 이은 어른을 위한 소설 시리즈이다. 전작들을 읽으면서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랬어.' 라고. 토닥토닥 위로해주고 싶은 기분도 들고, 안쓰러워 보듬어 주고 싶은 기분도 들고, 다들 그런 거라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톤 텔레헨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겪어 봤을 법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람쥐는 우울했다. 반가운 편지 같은 건 전혀 오지 않았고, 아무도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외로웠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부엉이였다. 부엉이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내 생각을 전혀 안 하니까 난 그다지 잘 지내는 것 같지 않다고. 어느 날 하마는 회색인 데다 거추장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자신의 모습이 지겨워 메뚜기에게 서로 몸을 바꿔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몸이 가벼워져서 사뿐히 춤을 추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지지만, 다른 친구들이 자신을 하마가 아니라 메뚜기라고 생각하고 말을 건네자 갑자기 우울해진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에 빠지게 된 것이다.

 

다람쥐는 다시 생각했다. 나는 바로 지금 존재할 뿐인데, 나중으로는 가 본 적이 없고,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다람쥐는 항상 자기 자신보다 앞서 나갔던 생각들을 더 이상 좇을 수가 없게 되자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그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지금이 아니면 아무 때도 아닌 거야." 그러고는 곧바로 잠이 들었다.   p.67

생일을 맞은 사자가 귀뚜라미에게 슬픔이 가득 담긴 상자를 선물로 받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받고 싶은 외로운 고슴도치에게 다람쥐가 편지를 보내게 되고, 모든 게 불필요하고 쓸모 없다고 생각한 흰개미는 누워서 보이는 태양과 하늘마저도 내다 버리고 싶어 진다. 그러다 하나도 쓸모 없는 자신의 생일에 동물 친구들이 찾아오고, 진심으로 쓸 데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눈이 오고, 얼어붙고, 폭풍이 불고, 춥고, 끔찍하고, 으스스한 곳에서 사는 펭귄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생일을 맞이 한다. 혼자 얼음 케이크를 먹고, 눈을 맞고, 코를 얼리며 점차 생일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런 순간이 가끔은 좋을 때도 있다고. 바로 지금처럼.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해서 엉뚱한 고민을 시작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타인과의 소통에 대해. 누구나 삶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고민해봤을 법한, 철학적이며 보편적인 질문들은 소소하고 불필요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가장 근본적인 고민들이다. 앞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원서에는 없는 일러스트가 포함되어 사랑스러운 그림을 보는 재미가 더해져 더욱 따뜻하게 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잘 지내니. 요즘 별 일은 없니. 애정 어린 마음을 담아 누군가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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