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투스의 심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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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건 환상일 뿐이라는 게 그의 오랜 철학이었다. 이 세상은 불공평과 차별로 가득 차 있다. 누구나 태어난 그 순간부터 다양한 계층으로 나눠진다.

언젠가 반드시 최상층의 인간이 된다, 지배자가 된다…….

그것이 다쿠야의 최종 목표였다.   p.26

히가시노 게이고가 1989년에 발표한 초기작으로 국내에는 2007년에 나왔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옷을 갈아 입고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초기작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답게, 30년 전에 쓰여진 소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가독성과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공대를 졸업하고 자동차 부품 제조회사에 다녔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경험과 지식을 십분 발휘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인공지능에 대한 인한 이슈가 한참 논쟁이 되고 있는 요즘에 읽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내용이다. 이미 30년 전에, 기계화 되어가는 사회를 배경으로 이런 소설을 써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통찰력과 뛰어난 감각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인공지능 로봇의 개발을 하는 다쿠야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성공지향형 인간으로 살아 오고 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술에 취해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를 미워하고 경멸하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회사에서 뛰어난 엘리트로 평가 받았고, 최근에는 윗사람도 그를 주시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임원실 직원인 야스코에게 접근해서 전무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 그의 딸인 호시코와 결혼할 기회에 가까워지게 된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어느 날, 내연 관계가 된 야스코가 임신 소식을 알리며 아이를 낳겠다고 선언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게다가 야스코가 관계하던 남자는 다쿠야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뜻밖의 호출을 받게 된 자리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두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아이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남자가 세 명, 그들은 야스코의 임신으로 발목을 잡힐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녀를 죽이기로 모의하게 된다.

 

인간이 도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거짓말을 하고, 게으름을 부리고, 겁을 먹고, 질투나 할 뿐이다. 뭔가를 이루려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대체로 인간은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살 뿐이다. 지시가 없으면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한다. 프로그램에 따라 하는 일이라면 로봇이 훨씬 우수하다.

게다가 저 녀셕들은 절대 배신하지 않아...... 늘어선 로봇을 등지고 다쿠야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p.165

이들이 모의한 살인 방법은 시체를 릴레이 하듯 운반하자는 거였다. 공범이 세 명이기 때문에 '릴레이'라는 독특한 트릭을 고안해낸 것이다. 계획에 따르면, 야스코는 오사카에서 죽이지만, 시체가 발견되는 곳은 약 5백 킬로미터 떨어진 도쿄가 된다. 실행 당일, A는 오사카, B는 나고야, C는 도쿄에 있고, 우선 A가 야스코를 죽이고는 시체를 차에 싣고 나고야로 향하면, B A가 두고 간 차를 타고 미리 정해둔 장소로 간다. 그곳에는 C가 와서 기다리고 있고, 차에 시체를 옮긴 후 C는 도쿄로 향하고, B는 나고야로 돌아온다. A, B, C가 공모했다는 사실을 경찰이 모른다면, 세 사람 모두 각자의 알리바이가 구축되는 것이다. 카드 뽑기를 통해서 A, B, C 역할을 정하고 살인 릴레이 주자 두 번째로 다쿠야가 시체를 전달받아 이동을 하는데, 놀랍게도 전달받은 시체는 야스코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미야베 미유키는 이 작품을 도서형 추리소설(트릭을 독자에게 먼저 알려주고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서술 방식)의 수작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시체를 바통 삼아 릴레이를 한다는 설정도 기발하고 트릭과 미스터리 또한 정통 추리물로서의 탄탄한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었다. 유독 과학을 소재로 한 추리 소설을 많이 써온 히가시노 게이고이기에, 이번에 만난 초기작이 그의 미스터리 세계를 이루는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목적을 위해 남자들을 수단화하는 여성 캐릭터나, 인간보다 로봇을 더 신뢰하며 주어진 운명을 바꾸기 위해 점점 인간성을 잃어가는 여성 캐릭터 역시 이후에 발표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여러 작품에서 더 발전되고, 변주된 형태로 등장하게 되니 말이다. 그의 최신 작품들만큼이나 뛰어난 트릭과 흥미로운 드라마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이번 기회게 꼭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라는 생각이 새삼 들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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