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왕이 온다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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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참아도 되는 일은 없단다."

무슨 뜻인지 몰라서 가만히 있자 할머니가 입술을 떨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계속 참기만 하면 마음속에 나쁜 게 쌓이는 법이지. 오랜 세월이 지나면 그 대가가 온단다. 계속 참는 게 좋은 일은 아니야. 나는 참았어, 그러니까 용서해줄 거야.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란다. 세상은..... 이 세상은."   p.31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제22회 일본 호러소설대상 대상 수상작으로, 미야베 미유키, 기시 유스케가 극찬한 작품이다. 사와무라 이치의 충격적인 데뷔작은 평범한 현실 속 뒤틀린 인간 심리를 건드리며 극한의 공포를 끌어내고 있다. 평범한 일상을 파괴해가는 정체불명의 괴물보기왕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딩동. 초인종이 울린다. 그러나 대답하면 안 된다. 문을 열어줘도 안 된다. 절대 그것이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그것이 온다.

다하라 히데키는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방학 때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홀로 집을 보다 이상한 경험을 한다. 누군가 벨을 누르고 가족의 이름을 불렀는데,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면 안 된다고 말을 한다. 이후 중학교 3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로부터 할아버지의 고향에서 전해 내려오는 요괴, 보기왕에 대해서 듣게 된다. 그게 오면 절대로 대답하거나 들여보내선 안 된다고. 문을 열면 잡혀서 산으로 끌려간다고. 기이한 전설이야 어디에나 있었으니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린다. 그날 오후에 할머니 집에 찾아왔던 회색 그림자와 그때 느꼈던 공포가 고스란히 다시 기억이 난 것이다. 그리고 서른 두 살, 가나와 결혼을 하고 이듬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회사로 누군가 그를 찾아온다.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아내의 배 속에 있는 아이 치사의 이름을 대면서. 하지만 로비에 그를 기다린다던 손님은 보이지 않았고, 그 방문을 알려준 회사 후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부상으로 입원하게 되고 점점 상태가 나빠진다.

 

"인간은 옛날부터 생각했지. 자신과 똑같이 생긴 건 무섭다고. 봐서는 안 된다, 보면 죽는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왜일까?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어. 적어도 알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자신의 추악함과 교활함, 나약함, 어리석음을 자기 눈으로 보는 건 견디기 힘들 만큼 괴롭기 때문이지. 선생을 보면 지긋지긋할 만큼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어. 덕분에 지금 내 기분은 최악이야."    p.267

이후에도 히데키의 주변에서 이상한 전화나 메일이 오는 등 괴이한 일이 반복된다. 그는 직감적으로 생각한다. 오래 전 그날 할머니 집을 찾아온 손님이 25년이 넘게 흐른 뒤에 나를 찾아오려고 하고 있다고. 할아버지 고향에서 전해지는 보기왕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말이다. 누가 들으면 망상이라고, 어린애 같은 공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요즘 세상에 괴물이라니 무슨 말이냐고. 하지만 실제로 회사 후배는 뭔가에 물려서 오랫동안 입원한 끝에 회사를 그만두었고, 집에 괴이한 전화가 걸려왔으며, 집 안의 부적이 모두 찢어지는 등 아내와 딸이 끔찍한 일을 겪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히데키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그래서 민속학 준교수인 옛 친구의 도움을 받아 초자연 현상에 관한 글을 쓰는 오컬트 작가 노자키를 만난다. 노자키는 히데키에게 필요한 것이 주술과 퇴마라는 사실을 깨닫고 히가 마코토라는 영매사를 소개해준다. 과연 그들은 '보기왕'이라는 알 수 없는 괴물의 정체를 밝히고, 왜 히데키의 주변에 나타나는 것인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인가.

여기까지가 1장의 내용이다. 히데키가 화자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1장이 끝나면, 2장에선 히데키의 아내 가나, 3장에서는 오컬트 작가 노자키가 화자로 나선다. 사실 1장의 내용만 보자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호러 소설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2장으로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펼쳐진다. 우리가 읽어 왔던 그 모든 무서움의 근원을 파헤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에 생겨나는 틈'에서 비롯된 공포를 그려내고 있어, 단순히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실재하지 않는 괴물이라는 존재로 인한 무서움보다 더한 작품이었다. 괴담이나 호러와 관련된 작품을 꽤 읽어본 편인데,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이 특별했던 이유는 아마도 다 읽고 나서공포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상대에 따라 같은 사실도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입장의 차이를 이용한 반전도 훌륭했고, 화자를 달리한 구성도 탄탄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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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 2018-11-15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모처럼 호러 대상에 걸맞는 작품을 만난 것 같았어요.^^

피오나 2018-11-16 14:40   좋아요 0 | URL
그죠? 저도 오랜만에 읽은 호러 소설이었는데 만족스럽더라구요. 표지만 빼고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