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 - 혼자여서 즐거운 밤의 밑줄사용법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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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좋아지는 순간은, 더 이상은 단 한 줄도 고치지 못할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입니다. 그때 눈 감고 딱 한 번 더 고칠 수 있다면, 소설은 좋아집니다.

비약적 도약이 아니라 점진적 발전인 것이죠.

진정한 재능이란 지루한 반복을 견디고 지속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에요.

지구인에게는 지구력이 필요합니다.    p.130

 

한때 온라인 서점 직원으로 일했던 그녀는, 서점 직원에게 가장 부족한 건 정작 책 읽을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오랫동안 소설가가 꿈이었지만, 소설을 쓰는 대신 소설 리뷰를 쓴 시간이 더 길었다. 소설가가 되는 대신 소설가를 인터뷰했다. 대신 인생. 나쁘지 않았다. 좋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에 잠겨 걷던 늦은 퇴근길, 멍한 얼굴로 정류장에 서 있다가 놓쳐버린 버스가 막차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궁색한 청춘이었던 그로부터 7년 후, 그녀가 놓친 버스에 장편소설 출간을 알리는 광고판으로 그녀의 얼굴이 붙게 된다. 과거의 그녀가 현재의 그녀 모습을 알았더라면.. 그때 조금 덜 힘들었을까. 막막하고 답답했던 시간이 조금 편했을까.

이 책은 1년에 500여 권의 책을 읽는 '활자 중독자'이자 '문장 수집가'인 백영옥 작가가 오랫동안 차곡차곡 모아온 밑줄 가운데서 고르고 고른 '인생의 문장들'을 소개하는 에세이다. 힘들었던 시절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으면, 책 속의 글자 하나하나가 울먹이는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것 같았다는 그녀. 백영옥 작가는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텔레비전을 보다가, 길에서 마주친 글귀에서 문득문득 마음을 흔들었던 문장들을 꼼꼼하게 모아, 위로가 필요할 어느 날, 누군가를 위해 밑줄 처방전을 만들어왔다고 한다. 평소에 분야를 가리지 않고 시와 소설, 산문집, 자기계발서 등을 다양하게 읽고, 세상 곳곳 삶의 모습에 관심이 많은 그녀의 성격 덕분에 이 책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중요한 건 시를 눈이 아닌 입으로 소리 내어 읽는 겁니다. 또박 또박, 한자 한자, 쉼표 하나까지 밥알을 꼭꼭 씹어 넘기듯 말이에요. 그러면 시란 본래 읽기 위한 게 아니라, 아름다운 노래처럼 듣기 위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세상에 누구도 없는 듯 아픔이 찾아오면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위로의 말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해요. 이 시를 서랍 안에 포개어 잘 넣어두세요. 저처럼요.   p.222

 

시인은 세상의 흩어진 단어를 고르고 골라, 가장 적확한 말들을 우리에게 쥐어준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렇다면 소설가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 독자들이 잠시 동안 현실을 잊어 버릴 수 있도록 완벽하게 허구로 만들어진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이 아닐까. 백영옥 작가의 에세이가 좋은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소설가'가 쓴 '에세이'라는 점이었다. 비슷비슷한 종류의 에세이들이 엄청나게 쏟아지는 요즘이다. 누구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하고 흔한 문장들과 사적인 일기장에다 쓰여야 할 것 같은 보통의 사유들 속에 공감하거나, 감탄할 만한 지점을 찾기란 사실 어렵다. 그렇게 겉멋으로 글을 쓰는 것과 오랜 시간 책을 읽고, 책과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만들어 왔던 이가 쓰는 글이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백영옥 작가의 글은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는 평범한 일상을 그리고 있지만, 그 속에 진심이 새겨져 있고, 문장들이 아름다우며, 깊이 있는 사유가 담겨 있다.

이 책에는 아픈 사랑과 답이 안 나오는 관계와 막막한 꿈에 대해서, 그리고 평소 지나쳐버리기 쉬운 풍경들과 매일 넘기는 페이지 속의 문장들이 담겨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약해지는 일인지, 때로는 약함을 내보일 수 있는 것이 진짜 용기라는 것, 누군가를 믿는 다는 것의 의미, 진정한 재능이란 한 순간의 천재적인 반짝임이 아니라 지루한 반복을 견디고 지속하는 힘이라는 것 등등... 그녀가 알려주는 독서 노하우와 수많은 책들 속에서 밑줄 그어 수집한 문장들로 쓰인 이 책에도 나는 종종 밑줄을 긋게 된다.

 

 

매일 읽고 매일 쓰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그 매일이 모여 좋은 책이 되게 해주세요.

 

부디 그녀의 바람이, 그녀의 그 마음이 변치 않고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래본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내게 와준 고마운 것들에 대해, 내가 숨쉬는 이 순간의 소중함에 대해 깨닫게 되는 밤이다. 바로 이 책 덕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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