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등록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7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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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정보에 관한 법안이죠. 경찰수사에 이용 가능한 정보에 DNA정보를 추가합니다. 그 법안이 통과되면 모든 수형자의 DNA 정보를 관리할 수 있게 됩니다. 경찰청에서는 국민을 대상으로 범죄 방지를 위해 DNA 정보를 등록하라고 홍보할 수도 있죠."

"그런 법안이 통과될까?"   p.36

 

오래 전에 <플래티나 데이터>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던 작품이 세련된 표지로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제목이 완전히 달라져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인 줄 알았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작가와의 면밀한 상의 끝에 한국어판 제목을 새로 붙였다고 하는데, 원제와는 다르지만 작품의 주요 키워드라서 크게 의미가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국내 출간작들을 거의 다 읽었는데, <플래티나 데이터> 는 투박하고 촌스러운 표지 때문에 읽지 않았던 책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덕에 뒤늦게 만나게 된 책이었는데, 역시나 히가시노 게이고다운 면모가 돋보이는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시부야 외곽에 있는 러브호텔에서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된다. 여성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은 남아 있지 않았고, 지문도 찾지 못해 유일한 증거는 체모 몇 가닥 뿐이었다. 아사마는 과장의 지시에 따라 경찰청 특수분석연구소로 향한다.  그곳에서 소장 시가와 연구원 가구라는 체모만으로 DNA 프로파일링을 해서 범인에 대한 정보를 예측한다. 기존에 DNA 감정이라는 것이 용의자 이름이 추려진 상태에서 기존 데이터에 구축된 DNA와 비교를 통해서야 정보를 얻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용의자는커녕 단서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현장에서 수집한 DNA 정보만으로 범인을 예측하다니 말이다. 이는 정부가 국민의 DNA 정보를 수집해 관리하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DNA 수사 시스템덕분이었다. 물론 DNA 정보 등록이 강제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대다수 국민들이 정보 제공에 난색을 표하고 있는데다, 하루에 1만 건이 모인다 해도 전 국민의 정보를 모으려면 수십 년이 걸리니 이것이 완벽한 범죄 예방 시스템이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긴 했다. 그럼에도 디지털 데이터를 통한 범인 검거율은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그럴 리 없어. 솔직히 말해줘. 정보가 필요해."

거울 속의 그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정보, 정보. 네 머릿속에는 그거뿐인가. 나이를 먹어 귀가 안 들리면 오히려 장수한다는 말도 있지. 정보를 얻는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건 아니야. 모르고, 안 보고,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더 행복할 수도 있어."    p.190

전 국민의 DNA 정보를 채집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성하면, 범죄 현장에서 수집한 작은 증거만으로도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게 된다는 설정 자체부터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극미량의 증거만 남겨도 체포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범죄자의 싹을 잘라 종국에는범죄 없는 세상이 실현되리라 기대할 수도 있을 테니, 정부의 계획은 그야말로 완벽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DNA를 바탕으로 수사를 진행하기 때문에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 전원에게 혐의를 둘 수밖에 없고, 덕분에 가해자 친족이 부각된다는 단점도 생긴다. 가해자만이 아니라 혈연관계인 사람에 대한 차별까지 유발하는 게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하는 보도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게다가 DNA 법안 통과를 비웃듯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렇게 ‘NOT FOUND일치하는 정보 없음으로 처리되는 사건이 거듭되던 어느 날, 시스템 개발자가 갑작스럽게 살해당하고, 연구원 가구라가 범인이라는 시스템의 결과가 나오게 되는데... 가구라는 살인범 누명을 쓰고 어떻게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도망치고, 사건을 파헤치는 형사 아사마의 추적이 이어진다.

전기공학을 공부한 뒤 엔지니어로 일했던 이력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에서는 유독 과학과 공학적 요소를 미스터리에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작품 역시 작가의 그러한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특히나 과학과 기술이 사회 속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될 때 벌어질 수 있는 무시무시한 폐해를 짚어내고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기술과 과학의 순수성에 물음표를 던지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표 롤로코스터에 탑승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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