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아 우주인
야로슬라프 칼파르시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까봐 보험을 들어두는 거지." 내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

"글쎄, 그건 중요한 사람이라는 말의 반대겠지. 사람들이 묻고 싶은 대상인 몸을 갖는 것."

"너희 언어로 쓰인 기록으로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겠군. 모든 인간은 중요한 사람 아닌가?"    p.132

이 작품은 굉장히 독특한 SF 소설이다. 기존 SF 장르에서 흔히 등장할 법한 그 어떤 클리셰도 없으며, 분명 한 남자가 우주로 향해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동안 만나왔던 유사 장르의 그 어떤 작품과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제목과 표지 이미지, 그리고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점 때문에, 그리고 <마션> <아르테미스>를 잇는 또 하나의 SF 소설이라는 문구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되는 스토리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체코계 미국인 작가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대담하게 개척해서 독창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우선 배경은 이렇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관측된 적 없었던 혜성 하나가 태양계로 진입하면서 우주 먼지 모래 폭풍이 일었다. 이 특이한 현상에 사람들은 '초프라'라는 이름을 붙였고, 초프라는 지구의 밤을 자주색 황도광으로 물들인다. 지구에서 관측한 우주의 밤은 더 이상 검정색이 아니었으며 움직이지 않은 채 자리를 잡은 초프라 구름의 모습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며 끔찍한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하여 세계 각국은 초프라의 입자를 채취해 우주를 연구하겠다며 무인 왕복선을 발사하지만 모두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오고 만다. 그렇다면 인간 조종사가 초프라 속에 들어가 직접 관찰하고 견본을 분석해야 한다는 얘긴데, 과연 어느 나라가 지구로부터 넉 달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고 치명적일지도 모르는 입자로 이루어진 우주먼지 속으로 사람들을 보낼 수 있겠느냐가 문제였다. 그리고 마침내, 체코의 외딴 마을에서 살던 야쿠프가 세계의 이목이 쏠린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된다.

 

 

나는 앞쪽 중심부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뭔가가 있었다. 어쩌면 내 죽음은 삶보다 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우주에 내놓을 다른 것이라고는 생각해낼 수가 없다. 나는 이기적인 남편이었다. 천재적인 아이를 낳지도 세계 평화를 이루지도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지도 못했다. 어쩌면 나는 살면서 뭐라도 만들려면 자신을 죽여야만 하는 남자들에 속했는지도 몰랐다.

"모든 걸 끝내기에 여기도 나쁘지 않군." 내가 말했다.   p.199

야쿠프는 카렐대학교 천체물리학과의 종신 교수로 우주 먼지 연구자였다. 하지만 체코공화국 항공우주국이 그에게 우주에 가는 첫 번째 체코인이 되어주기를 바란 이유는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충성스러운 공산주의자의 아들이었던 야쿠프의 아버지가 저질렀던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라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야쿠프는 체코가 공산주의국가가 되는 데 일조했던 아버지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이웃들의 눈총과 따돌림을 겪으며 자랐고, 이번 기회를 통해 무너진 집안을 일으키고 영웅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선택에는 위험하고 고독한 여정이라는 점 외에도, 사랑스럽고 헌신적인 아내 렌카를 떠나야 한다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영웅이 되는 걸 선택했고, 그로 인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걸 잃어 버리게 된다.

 

이 작품에는 전문 용어나 공식, 혹은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관이나 낯선 캐릭터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홀로 우주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남자가 겪어야 하는 극한의 고독감과 외로움, 그리고 그의 어린 시절과 가족을 다루며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서던 체코의 시대상이다. 당시의 사회적인 혼란과 사람들의 심리적 갈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과거의 그 시간들이 현재 우주에 떠 있는 남자의 심리에 고스란히 반영이 되고 있기 때문에 텍스트가 더욱 풍부해지고, 복잡해지고, 흥미로워지고 있다. 게다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밝히진 않겠지만, 우주에서 그가 홀로 겪는 시간이 매우 특별해지는 순간이 생기는데, 바로 그런 부분들이 이 작품에서 가장 재미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특별한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면, 어렵지 않은 SF소설을 읽어 보고 싶다면,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굉장히 색다른 경험을 안겨주는 우주 오디세이를 만나게 될 테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