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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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이를 원했는지조차 모르겠는데, 왜 이렇게 슬픈 걸까?"

"저도 모르겠어요." 라고 했다가, 문득 알 것 같았어.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게 더 슬프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갖지 못한 것들은 상상으로만 존재하고, 상상 속에선 모든 게 완벽하니까." 이게 바로 내가 마리아노 도나텔로를 생각할 때 드는 느낌이거든.

"그래, 그게 맞는 것 같아, 루비. 넌 무척 현명하구나."   p.195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성추문을 일으킨 전직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가 클린턴 전 대통령과의 관계에 "엄청난 권력남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최근 미국 할리우드에서 시작해 전 분야로 확산된 성폭력 피해 고발 캠페인인 '미투' 운동이라는 "새로운 렌즈"를 통해 자신과 클린턴 전 대통령의 관계를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며 이같이 밝혔다. 당시 클린턴은 르윈스키보다 27살이나 연상이었고, 지구 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의 상사였다. 르윈스키는 마흔 네살이 되어서야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이라는 엄청난 권력 차이의 함의를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한다. 그녀와 클린턴과의 섹스 스캔들은 "르윈스키 스캔들"로 불렸고, 20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의 이름 뒤에 따라다닌다.

개브리엘 제빈의 신작 <비바, 제인>은 여러 모로 르윈스키 스캔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실제 이 작품은 '미투(Me too) 열풍'이 거세게 불던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당시 언론에서는 "르윈스키 다시 쓰기"라며 주목했다. 개브리엘 제빈은 "20대 때는 별생각 없이 르윈스키를 '젊고 야망 있고 이기적인 여자'라고 비난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둘 사이의 불균형한 권력 관계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나이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바라보는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라고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를 밝혔다. 유명 정치인과 젊은 여성 인턴의 불륜이라니 뉴스 거리로 딱 좋은 소재 아닌가. 하지만 그 인턴이 당신의 딸이라면 어떨까. 이야기는 하원 의원과의 스캔들 이후 딸에 대한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견뎌야 하는 엄마 레이철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이야기가 나쁜 결말에 도달하고도 남을 만큼, 형편없는 선택을 이미 잔뜩 해버렸다. 그것을 만회하는 유일한 방법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인데, 당신의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당신은 인간이지 <끝없는 게임>의 등장인물이 아니니까.

이 시리즈의 문제점은, 몇 번쯤 나쁜 선택을 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엄청나게 지루하다는 점이다. 항상 착하게 살고 언제나 올바른 선택만 하면, 이야기가 무척 짧아진다.    p.360

레이철의 딸 아비바 그로스먼은 하원의원 에런 레빈의 인턴으로 일하던 중에 그와 사랑에 빠졌다. 사람들은 아비바가 하원의원이 유부남이라는 걸 알면서도 유혹했고, 권력과 스포트라이트를 향해 달려든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여자라고 수군거렸다. 에런의 아내인 엠베스는 그를 용서했고, 티비 뉴스 인터뷰에서 불화의 시기는 지나갔다고 발표했다. 하원의원의 정치 생명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고 그의 일상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비바는 롤리타 인턴으로, 르윈스키 따라쟁이로, 난잡함의 다양한 유의어로 낙인찍혔다. 학교 측에서는 그녀에게 휴학을 강권했고, 레이철은 학교 교장 직에서 사임해야 했고, 이후 아비바는 졸업 후에 그 어느 곳에도 취직할 수 없었다. 아비바게이트는 다른 사건의 이슈에 묻혔지만, 그녀가 이력서를 내는 곳에서는 여전히 구글 검색만으로 그 과거를 찾을 수 있었으니 어느 회사도 그녀를 환영하지 않았다. ‘선정적 보도’ ‘관음증적 관심’ ‘신상 털기’ ‘낙인찍기’ ‘모욕 주기’ ‘배척’ ‘보호할 가치가 없는 정조 운운등으로 이어지는 성추문 문제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섯 개의 장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다섯 명의 여성 화자들이 풀어 나간다. 딸 아비바를 지키고 싶었던 엄마 레이철, 홀로 딸을 키우며 웨딩플래닝 사업을 하는 제인, 그녀의 여덟 살짜리 조숙한 딸 루비, 하원 의원의 아내로 남편이 벌인 일들을 수습하며 살았던 엠베스, 그리고 한때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 삶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 아비바. 5명의 여성 입장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스캔들 이후에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스캔들 자체보다는 그 후 여성이 겪어야 하는 편견과 차별에 집중하고 있어 자칫 신파로 흘러가거나,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작가는 시종일관 유쾌한 톤으로 유머를 잃지 않는다. 미투 운동으로 인해 여성의 인권 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이러한 사건 이후로 다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쉽사리 주지 않는다. 과연 성추문에 휩쓸린 여자에게도 새로운 인생이 가능할까. 세대와 처지가 다른 다섯 여자, 그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여성에게는 좌절의 상황에서재탄생이 결코 쉽지는 않아도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싶게 된다. 당신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바꿔나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당신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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