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로빈 스턴 지음, 신준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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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에 감정 이입은 슬픔을 견딜 수 있는 위안을 주고 기쁨을 배가해주는 대단히 훌륭한 성품이다. 이상적으로 볼 때 감정 이입은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외로움을 덜 느끼게 도와주고, 사랑을 주고받으며 소통이 잘 된다고 느끼게 해주는 전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감정 이입은 간혹 덫이 될 수 있다.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바로 그 자질 때문에 가스라이팅에 쉽게 노출되기도 한다.  p.88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면서 타인에 대한 지배를 하는 것을 가스라이팅이라고 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는 심리스릴러 장르에서 특히나 자주 만날 수 있는데, 얼마 전에 읽었던 B. A. 패리스의 <브레이크 다운> 역시 가스라이팅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그 작품에서 여주인공은 최근에 자꾸 사소한 일들을 잊어 버리기 시작했는데, 돌아가신 엄마가 마지막에 치매로 고생하셨기에 자신도 혹시 그런 건 아닐까 걱정한다. 게다가 그녀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상황들은 남편을 비롯해 주변 지인들이 점차 그녀의 기억력을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는 <가스등>이라는 연극에서 비롯된 정신적 학대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이다. 이 연극에서도 남편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황에 대해 아내를 탓하고, 아내는 점자 자신의 현실인지능력을 의심하면서 판단력이 흐려지고, 남편에게 의존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학대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가스라이팅에는 항상 두 사람이 존재한다. 가해자는 배우자 또는 연인, 상사 또는 동료, 부모 또는 형제자매처럼 가까운 관계가 대부분이다. 피해자는 자신의 행동과 외부의 자극을 사실과 다르게 기억하거나 자신이 오해 또는 오인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믿지 못해 혼란스러운 상태가 된다. 이 책의 저자는 가스라이팅이 단순한 정서 학대가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관계'라고 말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만 가스라이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낭만적인 관계를 끝낸다는 것을 세상의 종말처럼 여긴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가해자와의 관계가 얼마나 불쾌하고 불만족스러운가를 직시하기보다, 가해자를 이상화하고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p.232

가스라이팅의 창시자이자 30년 넘게 정신분석가, 심리치료사로 활동한 심리전문가 로빈 스턴 박사는 이 책에서 가스라이팅을 세계 최초로 정립했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던 10년 전만 하더라도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일상에서, 뉴스에서 쉽게 사용되는 시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성범죄, 데이트 폭력의 일환으로 이 단어가 자주 사용되기도 하고, 가정폭력의 새로운 유형으로도 조명받고 있는 현실이다. 이번에 개정판으로 이 책이 다시 출간되면서 딱딱한 느낌의 표지에서 마치 에세이처럼 느껴지는 듯한 부드러운 분위기의 표지로 바뀐 이유도 그 이유일 것이다. 이제 가스라이팅은 심리학 용어로 딱딱한 이론으로만 설명되는 단어가 아니라, 흔한 연인 관계부터 부부 관계나 가족 관계에서 등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한 번씩은 해봤을 법한 일상적인 현상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니 요즘이야말로 이런 책이 꼭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왜 가스라이팅이 만연해 있을까? 왜 그토록 똑똑하고 강한 수많은 여성들이 1950년대 코미디를 보는 것과 같은 병적인 관계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왜 이러한 현상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일까? 이 책은 가스라이팅이란 대체 무엇이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단계별로,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매일 다투지만 헤어지지 못하는 연인,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가족, 나를 무능한 사람으로 만드는 직장상사 등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자존감을 훔쳐가는 사람들과 이별하는 법에 대해서 수많은 실제 사례들을 바탕으로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현실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들의 사연들을 하나씩 떼어 보면 모두 웬만한 심리스릴러 한 편은 쓸 수 있을 만한 에피소드들이다. 그만큼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이해되고, 공감이 되는 사연들이라 더 오싹하다. 왜냐하면 내가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도 예외일 수는 없다.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옭아매는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 책이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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