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 전면개정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운전 때문인가요?" 여자가 물으며 포트에 든 커피를 따라주었다.

"그도 그렇지만." 별 지장이 없는 이야기만 해서는 여자에게서 뭔가를 끄집어낼 수 없을 것이다. "저는, 술은 혼자 마십니다."

"어머, 정말요? 외로운 술이로군요." 여자는 물을 탄 술잔을 들고 내 맞은편 자리로 돌아왔다.

"습관이 된 지 칠 년이나 되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도심의 화려한 고층빌딩숲 외각에 있는 허름한 '와타나베 탐정사무소', 그러나 그곳에 와타나베는 없다. 지금 홀로 사무소를 운영하는 것은 탐정 사와자키이다. 어느 날 그곳에 오른손을 주머니에 감춘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찾아 온다. 혹시 지난주에 르포라이터인 사에키라는 사람이 여기 찾아오지 않았냐고. 사에키 씨가 이곳에 들렀을 지난 주 목요일 이후 그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와자키는 사에키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남자는 사에키 씨의 신변에 위험에 있을 지도 모른다며 그의 행방을 쫓아달라고 돈뭉치를 남긴 채 가버린다. 이삼 일 안에 여기 다시 들르겠다는 말만 남긴 채. 그 뒤로 유명 미술 평론가 사라시나 슈조의 대리인이라는 변호사에게 연락이 와서 역시나 사에키 나오키라는 남자를 아느냐고 묻는다. 알고 보니 사에키는 사라시나 슈조의 사위였고, 위자료 오천만 엔을 받고 딸과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러 오기로 했었는데, 나타나지도 않고 그 뒤로 연락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사라시나의 딸인 나오코가 정식으로 남편을 찾아 달라고 사와자키에게 의뢰를 하게 되고, 사와자키는 알 수 없는 의뢰인과 영문 모를 의뢰 내용을 쫓아가기 시작한다. 아내의 애정을 받아들이고 얌전히 있으면 언젠가 그룹의 재산 절반을 자유롭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르는 데 위자료 오천만엔에 몸을 빼려고 하는 서른 살 청년 사에키 나오키라는 인물도 미스터리하고,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 역시 풀리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르포라이터의 실종은 결국 당시 세상을 발칵 뒤엎어놓은 도쿄 도지사 저격사건과 맞닿아 있음이 밝혀지는데, 거기까지 이르는 수사 과정이 차갑고 비정한 밤의 도시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애정과 진실을 배려하는 것이 증오와 거짓을 배신하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더 깊은 상처를 입힌다는 생각을 했다. 직업상 서로 기쁨을 나눌 수 없는 사람들의 배반을 보는 건 일상다반사지만 괴로움 또한 서로 나누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고 오히려 커지는 모양이다.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굳이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의심받는 길을 선택한 여자의 마음을 나는 이해하려고 해보았다. 어디선가 끊임없이 "진실은 털어놓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과작 작가로 유명한 하라 료는 데뷔 이래 19년 동안 단 여섯 권만 썼고, 사와자키 시리즈도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 가는데 6년이 걸렸으며, 네 번째로 가는 데는 9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니 그의 작품을 즐기려면 기다림과 인내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그래서 국내에서 출간되는 그의 작품도 역시나 그랬는데,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내가 죽인 소녀>에 이은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안녕 긴 잠이여>를 만나는데도 무려 4년이나 걸렸고, 그 이후 또 3년이 다 되어서야 시리즈 유일의 단편집인 <천사들의 탐정>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2년 뒤, 이번에 사와자키 시리즈 시즌 2를 알리는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가 출간되면서 절판되었던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도 새로운 옷을 입고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하라 료의 작품에 대해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단어는하드보일드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하드보일드는 스토리 그 자체로서의 매력보다는 문체와 스타일에서 묻어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라 료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광팬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텐데, 사와자키 탐정은 챈들러의 필립 말로만큼이나 시크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그래서 그가 툭툭 뱉어내는 말투, 그리고 행동에 대한 묘사에서 빚어지는 그 분위기가 정말 매력적이다. 불필요한 수식을 뺀 무덤덤하고 시크한 행동. 가끔은 위험한 순간에조차 무모하게 용기 있는 순수함(?) 이라고나 할까. 머릿속으로 손익을 계산한다거나, 자신이 피해를 볼만한 상황에서 빠진다거나, 정의롭지 못한 일에 가담한다거나 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캐릭터. 그야말로 온몸으로 '하드보일드'를 보여주는 인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매혹적이다. 음식으로 치자면 ''이 아니라 '풍미'가 좋다고 해야 할까. 논리적인 사고보다 인생관에 대한 사색을 중시하지만 사건 해결에 있어서는 날카로운 예리함으로 기지가 번뜩이고, 트릭이나 의외성보다는 분위기로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립탐정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을 따라가노라면 어디선가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진짜 보일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오래도록 절판되었던 책을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된 당신의 행운에게 감사하길. 정말 세련된 하드보일드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사와자키 시리즈로의 입문을 환영한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