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스 킬러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해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정한 것. 그것은 풍뎅이가 아들에게 하는 대사이기도 했다. '옳은 일을 해라'라거나,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마라'라거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라거나, 그런 훌륭한 것을 요구할 마음은 없다. 유일하게 풍뎅이가 전해 줄 수 있는 것은 '되도록 공정해라' 라는 그 말뿐이었다. 누군가를 비난할 때도 누군가를 옹호할 때도 공정하자고 생각하라고.

40대 중반, 문방구 제조업체 영업부에서도 베테랑인 풍뎅이는 겉으로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사실 업계에서는 알아주는 킬러이다. 킬러로서는 완벽한 일 처리를 자랑하는 전설적인 존재이지만, 집에서는 아내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전전긍긍하는 지독한 공처가이다. 목숨을 걸고 의뢰 일을 해결하고 밤늦게 들어가서는 아내가 깰 까봐 소리가 나지 않는 어육 소시지로 배를 채운다. 고등학생 아들 가쓰미는 그렇게 어머니의 눈치를 보는 아버지가 때론 한심해 보이기도, 안쓰럽게 보이기도 한다. 풍뎅이의 본업은 당연히 가족에겐 비밀이다. 그는 이제 업계에서 발을 빼고, 킬러로서 은퇴를 하고 싶지만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당신에게는 이 수술을 추천합니다." 하얀 옷을 걸치고 둥근 안경을 쓴 의사가 말한다.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밋밋한 표정으로.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킬러 업무를 중개해 준 의사이다. 펼쳐 놓은 진료 기록 카드에는 표적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다. 진료소에는 일반 환자의 진료 기록 카드와 그가 중개한 일의 자료를 위장한 진료 기록 카드가 뒤섞인 채 보관되고 있다. 개인 정보이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열람할 수 없어 비밀 보장에는 제격이다. 대화 역시 의료 용어로 위장한 암호거나 진찰 자료에 섞인 서류의 형태로 오간다. '수술'이란 살해하는 행위를 가리키고, '악성'은 표적이 프로인 경우를 의미한다.

나는 아들을 안아 무릎에 앉힌 후 "괜찮아. 아빠가 있으니까." 하고 말해 주었다. 아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입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진심이라는 것을, 스스로 말하고 나서야 실감했다.

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가며 체험할 무서운 것, 불합리한 것으로부터 내가 지켜 주고 싶다, 지켜 보이겠다고 당연한 일처럼 생각했다. 물론 그런 한편으로, 살아가면서 무서운 것이나 괴로운 것을 피해 갈 수 있을 리 없다는 것도 안다.

이 작품은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 중에서도 수많은 마니아들을 탄생시키며 누계 220만 부 판매를 돌파한 <그래스호퍼> <마리아비틀> 이후 무려 7년 만에 선보이는 '킬러 시리즈'의 신작이다. 냉혹한 살인청부업자들과 아내의 복수를 꿈꾸는 어수룩한 전직 수학 교사 스즈키의 쫓고 쫓기는 하드보일드 느와르를 그렸던 <그래스호퍼>와 그 후속격으로 생사를 헤매는 아들을 위해 놓았던 총을 다시 잡은 남자와 사사건건 충돌하는 기묘한 킬러 콤비 등 여러 인물들이 우연과 필연 끝에 절묘하게 얽혔던 <마리아비틀> 개정판이 곧 출간될 예정이기도 하다. 오랜 만에 출간된 '킬러 시리즈'의 신작은 킬러가 등장하는 여타의 추리, 스릴러 장르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 그야말로 이사카 고타로만이 그려낼 수 있는 독특한 캐릭터랄까. 단어 그대로 너무도 '인간적인' 킬러가 등장하는 작품은 만나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사실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을 '인간적'이라고 설명하는 것부터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느 정도 냉혹한 킬러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긴 하지만, 잔인하거나 폭력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저 킬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들을 중심으로 아버지와 아들, 아내와 남편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사회와 인간이 안고 있는 어둠과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읽힌다. 이사카 고타로 특유의 위트와 유머에서 비롯되는 재미는 여전하고, 최강의 킬러이자 공처가라는 전혀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는 풍뎅이라는 인물이 그려내는 부성애가 보여주는 감동도 인상적이었다. 전문 킬러가 등장하는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의 매력도 훌륭하고,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따뜻한 드라마로서의 전해주는 뭉클함도 멋진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