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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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면서 예쁘다, 아름다워, 하며 계속 말을 걸었다.

그것은 아주 어렸을 때 겐야가 할머니에게 배운 비밀 의식이었다.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단다. 거짓말 같으면 진심으로 말을 걸어보렴. 식물들은 칭찬받고 싶어 한단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칭찬해주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응해올 거야.

 

겐야는 고모 기쿠에가 여행 중 온천지의 여관에서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기쿠에 고모는 남편이 1년 전에 죽었고, 딸도 여섯 살 때 죽어, 로스앤젤레스에서 홀로 살고 있었다. 가족도, 친척도 딱히 없었기에 화장 절차는 일본에서 진행하기로 하고, 유골을 남편 묘 옆에 묻어주기 위해 겐야는 고모의 집으로 향한다. 미국에서 고모의 변호사를 만나게 되는데, 고모가 겐야에게 42억 엔이 넘는 유산을 남겼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유언장에서 여섯 살때 백혈병으로 죽었다고 알고 있었던 레일라가 사실은 유괴를 당해 행방불명 된 것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고모는 만약 레일라를 찾게 되면 겐에게 물려준 유산의 70퍼센트를 레일라에게 주었으면 좋겠지만, 찾지 못하면 레일라 같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회운동에 유용하게 썼으면 좋겠다는 문구를 썼었다.

겐야는 애초에 42억 엔이나 되는 유산을 상속받을 생각도, 그 돈으로 편하게 살아보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그보다 27년 동안이나 딸의 생사를 모르고 살았을 고모의 괴롭고 힘든 나날에 마음이 쓰여, 되든 안 되든 레일라를 찾아 보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고모가 홀로 생활했던 커다란 저택에서 비밀 상자에 있던 의문의 편지를 비롯해 작은 단서들을 발견하고, 사립탐정을 고용해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국에는 행방불명인 채 생사도 모르고 몇 년이나 지난 아이들만도 수만 명이었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레일라를 찾는 일은 그야말로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비밀을 감춘 채 생을 마감한 고모의 일생을 돌아보며, 과거에 있었던 그 날의 진실에 점점 다가갈 수록,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한다. 시종일관 잔잔하게 흘러가던 이야기가 도달한 것은 그야말로 반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파격적인 진실이었다.

 

 

 

 

겐야는 끓기 시작한 브로도에 잘 저은 달걀과 소시지를 넣어 충분히 섞고, 다시 한 번 끓었을 때 바로 가스 불을 끄고는 로잔느가 놓은 수프용 접시 두 개에 담았다.

"이건 굉장해요. 오늘 이렇게 호화로운 저녁을 먹을 수 있다니...... 할머니는 아침에 일어나면 인생에는 살아보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행복이 무진장 흘러 넘친단다, 하고 늘 말해주었어요. 주술처럼 말이에요."

 

미야모토 테루는 일본 서정문학의 거장이라 불린다. 국내에 소개된 <환상의 빛> <금수>라는 작품 역시 그에 걸 맞는 작품이었고 말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어느 정도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고 해서 더 기대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모토 테루 특유의 담백하고, 잔잔한 감성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죽은 고모에게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된 남자가 숨겨진 비밀을 찾게 되는 과정 자체는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형식이지만, 이 작품에 긴장감이나 서스펜스 같은 요소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남겨진 이들이 겪게 되는 상실의 아픔을 그렸던 전작처럼, 이 작품 또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선택과 그로 인해 달라져 버린 삶과 운명에 대해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는 수수께끼 자체가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미야모토 테루가 왜 서정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겐야의 고모가 살던 대저택에는 여러가지 꽃과 나무들이 가득했고, 넓은 정원이 숲을 이루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겐야는 경찰도 수사를 포기해버린 지 이미 20수년이나 지난 사건을 조사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 건지 고민하거나, 레일라의 생사를 비롯해 자신에게 닥친 미래 등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질 때 정원을 거닐었다. 그리고 풀꽃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꽃과 풀들에게 말을 건넨다. 너희들이 레일라를 위해 기적을 일으켜달라고. 겐야는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식물에게도 마음을 담아 칭찬하면, 반드시 응해오는 법이라고 말이다. 후반부에 숨겨졌던 비밀이 밝혀지고 나면 정원의 꽃들은 또 다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이 작품의 제목이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도 하고 말이다. 잔잔하고, 아름답고, 기품 있게 흘러가는 이야기지만, 그 속에 품고 있는 미스터리를 놓지 않고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있어 더욱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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