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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속의 소녀들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얼음 속의 소녀들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노블마인 2014년 11월 17일 초판 1쇄

 

이 소설의 주된 화자인 틸데는 스웨덴의 정신병원에서 막 퇴원해 영국으로 왔다. 그녀는 아들, 다니엘에게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주장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이야긴 요약해서 들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

 

<틸데는 과연 미쳤는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광인 취급을 받는 상황에서, 그녀를 대하는 이들의 태도가 중요하다. 우틀란닝. 이 땅의 바깥쪽에서 온 사람이라는 스웨덴어가 이를 설명해준다. 틸데는 모종의 사건으로 16살에 부모님을 떠나게 된다. 고향마을에서, 그리고 부모님에게 그녀는 우틀란닝이었다. 독일, 스위스를 거쳐 가정을 꾸리고 정착한 영국에서도 그녀는 우틀란닝이었다. 은퇴 후 돌아간 고국에서도, 그리고 남편에게도 그녀는 우틀란닝이 되어버렸다. 그녀에게 남은 건 아들, 다니엘 뿐이었고 영국으로 찾아와 그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신을 믿어 달라고. 내가 <왜> 이야기를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달라고.

 

소설은 다니엘이 깨닫는 것처럼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안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스웨덴의 아름다운 자연을 벗하는 삶은 이웃의 도움이 없으면 유배지에 불과하고, 작은 지역사회일지라도 권위가 가지는 위력은 진실을 덮는다. 익숙한 것을 떨쳐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사건이 일단락된 후, 다니엘이 스웨덴으로 떠나기를 결심한 이유는 틸데의 이야기가 더 정교해지고 윤색을 더했기 때문이었다. 이 여정을 통해 다니엘은 한층 더 성숙하게 되고 엄마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는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하게 된다.

 

원제는 『The Farm』인데, 한국어 제목은 『얼음 속의 소녀들』이다. 얼음은 자연을 연상시킨다. 겨울이 와서 얼어붙은 강을 건너 다니엘이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것처럼, 자연은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하고 동시에 얼어붙은 사람들의 마음, 고립된 삶과 폐쇄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얼어붙은 강 아래로 물은 계속 흐르듯이, 해결된 것처럼 보이던 틸데의 상처는 봉합만 되었을 뿐 여전했다. 미아 문제를 해결한 후, 보다 중요한 틸데의 유년시절을 짚어나가면서 이 소설에서 가장 잔인하고 역겨운 문장이 나온다. <꼬마 틸데는 아프다.> 결국 얼음 속에 갇힌 소녀는 미아, 틸데 그리고 무수히 존재할 잠재적 피해자들을 이른다. 때로는 소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곤경이 찾아와 내 지지기반인 가족이 흔들릴 때 우리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가깝다는 이유로,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목소리를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가.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려야 한다.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정말로 <함께>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시기를 잘 버텨내면 한결 나아진다. 진짜다.

 

소설을 읽기 전 가장 궁금했던 것은 톱 롭 스미스가 장르 소설에서 과연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느냐 하는 점이었다. 사회고발적인 소재는 전작을 떠올리게 하지만 익숙한 것이 낯설게 다가올 때의 불편함과 공포 역시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거부당하는 상황의 미묘함들 역시 잘 잡아내었다. 다음은 틸데가 스웨덴에 도착해 농장으로 향하는 날의 날씨를 묘사하는 인상깊은 장면이다.

 

농장까지의 후미진 길을 따라 황량한 갈색 들판이 있는데, 겨울에 내린 눈은 녹아서 사라지고 없지만 표토는 단단한 데다 얼어서 삐죽삐죽하단다. 거기엔 어떤 생명의 징후도, 작물도, 트랙터도, 농부도 없어. 오직 정적뿐이지만 하늘을 흐르는 구름은 어마어마하게 빨라 마치 태양이 지평선에서 싱크대의 마개를 빼는 것처럼 뽑혀나가고 햇빛을 따라 구름도 싱크대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지. 난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빨리 움직이는 구름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나자 어질어질해지면서 머리가 빙빙 돌기 시작했어. 넘어올 것 같아서 크리스에게 밴을 멈춰달라고 했지. 64-65p

 

아름답고 강한 틸데와 섬세한 다니엘을 영화로도 볼 수 있다니 이 소설의 영상화 소식이 반갑다. 책을 덮었지만 찜찜한 기분이 남는 것은 얼음이 녹더라도 그 속에 갇힌 소녀들은 여전히 소녀일 거라는 것. 여전히 그 곳에 갇혀있을 것이라는 것이 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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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빼빼로가 두려워
박생강 지음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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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빼빼로가 두려워, 박생강

2014년 10월 30일 초판 1쇄, 열린책들


여기 작가의 내공이 있습니다.

 

마흔 둘의 심리 상담사 민형기에게, 스무 살 같지 않은 한나리가 찾아온다. <애인이 빼빼로포비아입니다. 어떻게 하죠?> 라는 고민거리를 들고서. 예리한 눈빛으로 한나리의 비밀을 캐낸 민형기가 빼빼로포비아에 대한 짤막한 보고서를 읽고, 두 남자의 만남이 성사되려는 순간- 소설은 번지점프와 같은 워프(실리칸이 지구에 올 적 사용했던 기술)를 독자에게 시전한다. 스릴러물에서 치정으로 갈 듯, 액자소설 인 아웃, 그리고 실리칸과 검은 푸들의 등장으로 SF로 장르를 바꾸면서.


예사롭지 않은 래디언트 오키드(판톤이 선정한 2014년의 색상)의 표지를 마주쳤을 때,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은 골 때리는 이야기라는 걸. 제목은 <나는 빼빼로가 두려워>. 상,하체가 분리된 빼빼로인간 같은 존재 주위를 행성과 알약이 공전하는 표지. 작가 소개를 보면, Saint gang이라 불리우길 원하지만 사실은 우리 집에 있는 생강편의 그 생강이 필명인 작가. 세계문학이 아닌, 열린책들의 한국문학 1호로서의 이 소설.


알고 있었다. <정신차려. 커피믹스 한 봉지만도 못한 인생아.>와 같은 알약의 따귀 사례와 함께 나이 든 남자의 뻔뻔한 욕망이 두렵다는 데에서는 작가의 통찰력을 느꼈다. 소설과 소셜, 랑그와 파롤을 으깨어 소설에 묻혀 놓았다는 그런 소설가의 소설, 이야기.


-민형기는 군청색과 하늘색이 어우러진 바둑판무늬 롱코트를 입고 다니는 남자를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흰 빛깔의 살결과 긴 손가락, 가려진 턱선까지 겸비했으나 유약해 보이지는 않는 사내의 인상과 멋들어진 한 쌍이 된다는 것을. 69p.


작가의 서브캐릭터라 짐작되는 시간강사가 나타나는 (빼빼로 모양을 교차시킨 모습으로 보아주길)장에 이르기 전까지는 짐작도 못했다. 소설의 장르가 바뀌리라는 것을. 왜냐하면 바로 위 문단을 읽었으니까! 빼빼로포비아라는 남자는 이렇게 멋들어진 외양의 변태 싸이코였단 말인가?! 이 묘사가 나오기 직전에 한나리가 민형기를 찾아온 이유가 되는, 빼빼로로 인해 <두 눈이 붉어진> 그가 주는 오싹함! 그러나 외양 묘사를 보면 그는 진정으로 <그을리지 않는 마시멜로 같은 청소년>이었던 시절을 보낸 남자였던 것이다! 내 머릿속을 휘저어놓은 작가에 부르르 떨기를 잠시, 그 생각은 곧 깨어지고 말았다. 현실 속 스윗스틱의 사장은 손등에 검은 털이 숭숭 난 버터 스카치 목소리의 기백이 넘치는 야수에 가까운 남자였으니까.


북에서 온 만철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었다. 스윗스틱의 오후 알바 만철을 <호송아ㅏ트>로 호송하여, 402호로 초대한 스윗스틱의 사장은 자신이 실리카라는 별에 서 온 <실리칸>임을 털어 놓는다. 스타트렉의 벌칸을 연상시키는 이름의 실리칸. 이성을 유지하려는 벌칸과는 달리, 실리칸은 호기심 많고 이타적인, 플라나리아와도 같은 외계종족이다. 만철은 사장의 고백을 믿지 않는 듯 하지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에 기꺼이, 실리카 문명의 꽃인 주술사 다섯의 숙주가 된다. 그리고 그가 살아있는 막대 과자의 향을 풍기면서 소설은 걷잡을 수 없는 국면에 돌입한다.


고민을 털어놓는 만철에게 개똥 같은 듯 개똥같지 않은 철학을 얘기하는 형기 아저씨의 말이 인상깊다.


-이 시대의 인간은 어쩌면 빼빼로 피플이네. 인간은 태어나기를 딱딱하고 맛없는 존재로 태어났지. 하지만 거기에 자신의 개성이란 달콤한 초콜릿을 묻히지. 타인을 유혹할 수 있는 존재로 특별해지기 위해. 하지만 그 개성의 비율 역시 언제나 적당한 비율, 손에 개똥 같은 초코가 묻어나 불쾌감을 주지 않는 적정선의 비율로 필요하네. 그게 넘어가면 괴짜라거나 변태 취급을 받기 쉽지. 그렇게 이 시대의 인간은 모두 독특한 개성을 추구하는 양 착각하지만 실은 모두 똑같은 봉지 안에 든, 더 나아가, 똑같은 박스 안에 포장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초코 과자 빼빼로와 비슷하다네. 145-146p.


주술사들이 등장하는 곳에서는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대사를 주고 받는 등장인물들 사이에서는 아멜리 노통브가 튀어나올 듯 하다. 등이 근질근질하며 움직이는 부분에서는 만철의 말대로 그레고르 잠자가 생각나며, 그것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에서는 댄 시먼스의 <히페리온> 속 십자형을 지닌 신부가 떠오른다. 스윗스틱을 만들어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행위는 방향성은 다르나, 프랑스 영화 <약지의 표본>이 생각난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가루처럼 존재했었던 기억을 남기고 사라진 실리칸을 보면서, 이처럼 다양한 텍스트의 변주가 이뤄지는 모습들은 지극히 포스트 모던적인 요소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빼빼로라는 소설을 쓴 사람은 누구야. 지금 이생각을 하는 나야? 아니면 이 과자를 만든 제과업체야? 아니면 이 과자를 통해 욕망하는 우리 모두야? 245p


그렇다. <나는 그럴듯한 소설을 쓸 생각이 없다>는 작가가 그럴듯해 보이려고 미하일 불가꼬프의 <개의 심장>을 문두에 넣었을까? 그럴 리 없잖아! 아는 만큼 보이는 소설, 다시 읽을 때는 새로운 글처럼 느껴지는 소설, 작가의 내공이 엄청나다.


생염다생맛, <생을 진정으로 염원하는 사람은 다른 생을 맛볼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과연 준비되었는가? 생염다생맛을 상상하며, 나는 소설 속에 나오지 않은 빼빼로 하미멜론 맛을 어금니로 씹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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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페리온
댄 시먼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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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히페리온
댄 시먼스 지음, 최용준 옮김
2009년 8월 30일 초판 1쇄

 

때는 먼 미래, 인류는 은하계로 뻗어 나간다. 호킹 드라이브 우주선이나 파캐스터 네트워크를 통한 이동은 인류가 헤게모니 연방을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인류는 인공지능의 융합체인 테크노코어의 조언을 가장한, 사실상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헤게모니 연방은 많은 개척행성들을 월드웹에 합류시켰다. 한편, 인류 최후의 적으로 분류되는 아우스터는 히페리온이라는 행성에 집착하고, 아우스터와 월드웹은 접전을 앞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영사는 헤게모니 연방의 CEO 메이나 글래드스턴으로부터 초광속 통신을 받는다. <당신은 히페리온에 돌아갈 사람으로 뽑혔습니다.>

 

난폭한 신은 일곱 명의 순례자 중 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고, 나머지는 죽을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에 희망을 거는 사람, 히페리온 행성에서 자신의 운명을 마무리하려는 사람, 자신의 뮤즈를 찾으려는 시인 등이 이 순례단을 구성하고 있다. 댄 시먼스의 <히페리온>은 제프리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처럼 등장인물들이 돌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잔혹한 신 슈라이크는 어떤 형태로든지 그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있음을 알게 된다. 슈라이크는 정체와 그가 취하는 행동의 목적을 알 수 없는 유기체(무기체일까?)로서 시간을 조절하는 능력을 지녔다. 그리고 왜인지 히페리온 행성의 시간의 무덤이라는 장소에 발이 묶인 듯 하다. <히페리온>은 바로 이 시간의 무덤으로 향하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이다.

 

첫번째 순례자의 이야기에서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쓴 건지 작가의 상상력이 놀라웠고, 주인공이 원치 않은 영생을 얻은 대가로 치러야 했던 고통이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태인의 이야기에서는 성경 속 이삭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암시된다. 히페리온의 원 저자인 존 키이츠와 그의 연인 패니 브라운을 연상시키는 브라운 라미아(라미아는 키이츠의 시 제목)의 이름, 그리고 그녀가 슈라이크 교회의 <성모>라 불리우기까지 감춰진 이야기가 많다. 테크노코어와 옛 지구의 관계와 대치되는 타이탄과 올림푸스 신들과의 전쟁은 히페리온이 타이탄 중 하나였음을 상기시킨다. 대미를 장식하는 시리 이야기에서는 시간빚과 상관없이 이뤄지는 로맨스와 강제합병에 저항하는 세력과 문화, 사회, 환경문제까지 정치적인 이야기가 다뤄진다.

 

이 소설은 함께 하는 순례자들의 이야기가 끝나고 시간의 무덤으로 넘어가는 것에서 끝이 나는데, 그것은 원래 <히페리온>과 <히페리온의 몰락>이 하나의 책이기 때문이다. <히페리온>은 프롤로그나 마찬가지인 이야기이다. 다행히도 나는 품절되었던 <히페리온의 몰락> 초판 2쇄를 구입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 책을 읽어야 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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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으로 지은 집 - 가계 부채는 왜 위험한가
아티프 미안 & 아미르 수피 지음, 박기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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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으로 지은 집
아티프 미안, 아미르 수피 지음 박기영 옮김
2014년 10월 30일 초판 1쇄, 열린책들

 


미국 연준의 테이퍼링이 마무리되면서 내년 미국 금리 인상이 예상되고 있다. 이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내년 금리 인상으로 한계가구 중 일부가 디폴트할 것으로 예상되나 통화정책을 포기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한편 정부는 하우스푸어 정책을 진행하다 포기했는데 이유는 주택경기의 회복에 따른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하우스푸어로 상징되는 가계부채의 상황은 어떠할까?


이 책은 미국의 대침체와 관련하여, 세계를 뒤덮은 암울한 경제상황이 가계부채에서 시작되었음을 가정하고, 다양한 통계자료를 통해 가설이 사실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데이터를 올바르게 분석하기 위해 <레버드 로스 프레임워크>를 도입한다.


2008년 찾아온 미국의 대침체는 지난 대공황 시기와 놀랍도록 비슷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 내 가계 부채는 급격하게 늘어났으며, 가계 지출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가계 부채의 원인이 되는 모기지 대출은 어찌해서 늘어나게 되었는가? 저자들은 지난 90년대 동아시아 위기에서 그 단초를 찾고 있다. 경제위기 이후 이 국가들은 미국 국채를 사들이기 시작했고 해외 자금이 미국 내로 흘러 들었으나, 이 자금들이 불태화되지 않은 것이 재앙의 시초라는 것이다. 은행에서는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이들에게도 대출을 제공하기 시작했고, 이와 관련한 사기도 성횡하였다. 결국, 신용팽창으로 인한 자산가격의 거품이 가계 부채를 불러온 것이다.


이는 가난한 이들이 더 가난해진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집값이 하락하면 순자산이 적은 가계에 충격을 준다. 집값이 떨어지더라도 갚아야 할 대출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빈털터리가 된다. 채무자들은 자산을 팔아야 하고, 그들은 자산을 시장가격보다 낮게 팔게 된다. 문제는 잠재적 구매자와 감정평가사가 이러한 투매된 가격에 맞춰 해당 지역의 다른 집들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지역의 모든 집값이 동시에 하락한다.


이렇게 가계부채가 많고 집값이 크게 떨어진 지역에서는 주택 소유자의 순자산이 대폭 감소하면서 소비도 줄었다. 가계 부채의 증가와 자산 가격의 폭락 그리고 심각한 경제후퇴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하지만 이들이 욕심부려 진 빚을 왜 다른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갚아야 하는가? 있을 수 있는 얘기다. 여기에 대한 해답 또한 <채무자 섬과 채권자 섬> 모델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미국의 자동차 산업과 관련한 실제 사례도 등장한다. 이유는 바로 <경제문제는 채무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결과는 자산과 부채의 분배 상태가 불평등하기 때문에 일어났다. 주택과 금융 자산, 즉 순자산을 많이 소유한 계층은 그들이 투자한 주식의 거품이 붕괴하더라도 큰 타격을 입히지 않았다. 이미 그 위험성을 알고 투자하기도 했고, 그들의 자산구조는 주택이 순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한 저소득층의 자산 구조와 달랐기 때문이다. 결국 주택 시장의 붕괴는 한계가구에 타격을 입혔고 총수요를 감소시킴으로써 미국의 대침체를 불러온 것이다.


저자들은 <책임 분담 모기지>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직접 가계 부채를 공략하자고 주장한다. 금융 중개 기능도 중요하지만 스페인 사례와 같이, 결국 은행도 가계 부채의 증가로 총수요가 감소하면 타격을 입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이 되는 가계 부채를 주식의 형태를 띤 채무 재조정을 통해 해결해보자는 것이다. 이 모델은 도덕적 해이가 불러올 상황까지 마크하고 있으며 앞에서 열거한 자료들에 의거,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채권자들과 정부 당국이 과연 새로운 형태의 이 모델을 받아들일 것인가? 저자 역시 현실적으로는 실현가능성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결국 이 책에서 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통화 정책, 재정 정책만으로는 경기 침체를 극복할 수 없으며 환부를 도려내듯이 가계부채부터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용어, 도표의 등장 없이도 현 경제상황을 투시할 수 있게끔 하는 좋은 책이다. 이보다 더 쉽게, 그리고 와 닿게 경제를 논할 수 있을까? 지역 경제블록이 덩치를 키우면서 글로벌 시장의 벽이 사라지고 있는 요즘, 미국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문제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가계부채가 1000조를 넘어섰으며, 급격한 가계지출 감소로 가계수지가 흑자로 돌아선 우리 한국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2014년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가계부채는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보아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책날개에 씌어진 2014년 최고의 경제학 서적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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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내
마리 다리외세크 지음, 최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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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경험은 소중하다. 첫 사랑, 첫 연애, 첫 직장, 첫 아기... 처음이란 별 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뒤잇는 일들에 있어 지표가 되기도 하고 또 영향을 준다. 하지만 이 소설에선 이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쉬워.〉

 

태양과도 같은 아이, 솔, 솔랑주Solange는 프랑스 남서부 지방 클레브에 산다. 18세기의 고성이 있지만 그 외엔 평범해서 따분하기 짝이 없는 곳. 엄마, 아빠는 항상 바빠서 옆집 비오츠씨가 아이를 돌봐준다. 솔랑주 나이 10살, 생리를 시작하면서 뭔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신체적 변화와 남녀의 다름에 대해 반응한다. 섹스는 무엇일까 백과사전을 펼쳐봐도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옆집 개 륄리가 다른 개들 밑에 깔려 있는 것을 보고 돌을 던진다. 아빠의 그것과 비오츠씨의 그것은 다르게 생겼다. 까날 플뤼스에서 포르노를 보다가 들킨다. 해부학적으로는 이해한다. 남자의 끄트머리가 튀어나와 있고 여자는 그 반대이니, 전자가 후자에 들어간다. 이 정도면 알만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해변에서 비웃음 당하던 비오츠 씨를 자신처럼 느끼고 또 보호해주고 싶던 솔랑주는 13살이 되었다. 친구들은 섹스 얘기를 한다. 로즈 어머니가 읽어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떠올린다. 여자는〈소유〉되는 것이던데 나도 나를 누군가에게 주어야 하나.

 

소설은 불친절하다. 이야기는 조각난 기억들을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진행된다. 초점은 언제나 섹스에 대한 관심이고 이야기 중반 쯤 아빠는 왜 사라졌는지(이혼으로 추정), 델핀은 왜 자살 기도를 했는지 그리고 엄마가 솔랑주를 옆집에 맡길 수 밖에 없던 상황은 무엇이었는지 설명되지 않는다. 솔랑주 역시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감정적인 반응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독자만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ㅡ너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너는 돌 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 그게 진실이야! 286p

 

ㅡ네 가족은 공중분해되고 있는데 너는 아무 생각 없이 편히 쉬고 있어. 호텔 방에 있는 것처럼 마음 편히, 손톱에 매니큐어 바를 생각만 하고, 모든 사람이 너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 287p

 

솔랑주에게 첫 경험은 자랑할만한 것이기도 하고 얼른 치러야 할 통과의례 같이도 느껴진다. 가장 친한 친구 로즈는 첫 경험을 한 후로 왠지 멀리 느껴진다. 어른스럽기도 하고 여자로서 완성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마음을 털어놓을 데 없는 외로운 소녀 앞에 〈그럴듯해 보이는〉아르노가 나타난다. 사르트르가 어떻고 세상이 어떻고 마리화나를 말며 이런저런 말을 주워섬기는 이 오빠, 솔랑주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주도 아닌 암캐 취급을 하는 그에게 푹 빠진 소녀는 충격적인 첫 경험을 하지만 무엇이 잘못된건지 모른다. 원래 이런 건가? 처녀를 부담스러워하는 아르노에게 가기 위해, 솔랑주는 어른 남자 비오츠를 끌어들이고 마침내 귀찮게만 느껴지던 처녀를 잃는다.

 

ㅡ팬티를 다시 입을 때, 작은 핏방울 하나가 보인다. 이러려고 그 난리를 떨었다니, 잘하는 짓이다. 289p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사랑의 사막』에서 마리아 크로스는 레몽 쿠레주를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그는 허상이었음을 깨닫는다. 레몽 역시 그녀를 둘러싼 루머에 편승하여 사춘기의 열정을 발휘하려 했었다. 17년이 지나고서야, 그는 사랑의 다른 얼굴을 보게 된다. 비슷한 관점에서 『가시내』의 비오츠를 보자. 어른들의 태도를 통해 어렴풋이 그를 〈루저〉라고 파악해왔던 솔랑주도 느낄 정도로, 〈사랑〉의 힘은 그에게 생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진실은 어떠했던가. 그가 기저귀를 갈아주며 사랑해왔던 아이는 그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간편했기에 그를 유혹했다. 비극적인 진실 앞에 쓰러진 그의 옆에서 오리고기 조림을 먹을 걸, 생각하는 솔랑주는 잔인할 정도의 이기심을 보여준다. 아르노에게 솔랑주가 정부에 불과하듯이, 비오츠도 그러했던 것이다. 어리석은 아이는 보르도로의 탈출을 꿈꾸며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성가셔 한다.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 『팻 걸』에서 엘레나는 페르난도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자신의 처녀를 준다. 영화 첫머리에서 엘레나의 동생, 아나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첫경험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할 거야. 날 사랑하는 척 했다는 걸 알고 슬플 일이 없을 테니까.」

 

첫경험을 좀 더 나이가 들어서, 사랑하는 이와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상적인 일이다. 현실적으로는 솔랑주처럼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아나이스 또한 솔랑주 또래의 아이였다. 결핍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아나이스는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선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솔랑주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그 애는 그냥 발랑 까진 애라고 말하고 싶지만은 않다. 10대라고 왜 성욕이 없겠는가? 어른들이 강조하는 피임이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보다는 이제는 탐폰을 쓸 수 있다는게 더 크게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을 어찌 탓하겠는가. 다만 솔랑주가 헤프다고 생각했던 나탈리가 처녀라는 것, 진실된 순간을 위해 자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좀 더 씁쓸해졌을 뿐이다.

 

마리 다리외세크가 적나라하게 솔랑주의 내면을 파헤치면서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사춘기, 인생관이 형성되어가는 중요한 시기. 좁지만 꽉 찬 세상 속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영혼을 담은 육체는 어른과도 같지만 아직 그 내면은 보호받아야할 존재이다. 솔랑주에게는 역할상을 보여줄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부모는 제대로 된 관심을 주지 못했으며, 부모나 마찬가지인 비오츠도 그녀를 이끌고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아빠 친구는 솔랑주의 앳된 가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아빠는 딸을 불러 못 알아들을 소리를 하며 피임교육을 한다. 엄마도 무기력한 모습만 보여준다. 그나마 제대로 된 것처럼 보이는 로즈 부모님도 로즈의 말에 의하면, 잠자리가 없다고 하니 성적인 것에 관심을 쏟는 솔랑주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소외된 솔랑주는 자신을 이해하는 것 같은 아르노에게 이끌리게 된다. 아르노는 될 대로 주워섬기는 것에 불과하건만.

 

클레브 공작부인은 사랑과 욕망의 차이를 구분해냈다. 그녀가 쌓은 다양한 경험과 자아성찰은 가질 수 없는 것, 결핍된 것을 욕망하는 인간의 속성 그리고 그 덧없음을 알게 했다. 오지 않을 연락을 기다리는 아이, 철 없는 솔랑주도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불안정한 현재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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