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에 부역한 전범들 중 아이히만(Eichmann)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히틀러의 명령을 받아 유태인 숙청을 깔끔하게 수행 했던 인물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남미에 숨어있던 그는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의해 체포되었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넘겨진다.

그의 재판 과정은 전세계에 중계된다. 아이히만은 이 재판에서, 유태인을 의도적으로 살해할 의도는 없었으며 “단지˝ 상부에서 지시한 일을 수행했을 뿐, 이라면서 자신은 피해자이자 무죄임을 주장한다.

정치 사상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아이히만의 모든 재판과정을 지켜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쓰는데, 이 책에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라는 유명한 구절이 등장한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악의 평범성 대신 악의 진부성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아이히만은 유능하고 충실하고 순종적이면서 야망도 별로 없는, 쉽게 말해 부려먹기에 딱 좋은 인간유형이다. 이와 같은 인간은 자기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면서 사회에 거대한 악을 행하고도 죄책감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 피해자의 고통에도 둔감하다. 혹여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끼더라도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했을 일‘,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해야만 하는 일‘, ‘내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일 뿐” 등등의 이유를 들어 스스로 면죄부와 면벌부를 주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연쇄살인범만이 악마는 아니다. 우리 주변에 아이히만과 같은 평범한 악마는 얼마든지 많을 수 있다. 악마는 머리에 뿔이 나고 온몸에 털이 듬뿍난 괴물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TV 에서 또 한명의 악마를 보았다. 살아있는 악마인 그와 그의 부인에게 뉘른베르크 판결문 중 한 구절을 읽어주고 싶다.

˝실제로 피해자를 살해한 사람과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는 책임범위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책임의 정도는 자신의 두 손으로 치명적인 살해도구를 사용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증가한다.˝

내가 악마라고 부르는 그가 80년 어떤 도시에서 총을 들고 사람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80년 그날 벌어졌던 살육은 모두 그로부터 나왔다. 그 도시와 총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있었던 그에게서.

한나 아렌트가 80년 한국의 어떤 도시와 대머리 장군을 먼저 보았다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분명 <광주의 xxx>이라는 책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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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19-03-12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 정말 어울리는 멋진 문장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16세기 프랑스의 어떤 마을에 살던 불성실하고 소심했던 한 가장이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리면서 시작한다.

마르탱 게르라고 불렸던 그 가장은 몇년 후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친구, 친지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마을 사람들은 그의 무사귀환을 반기고 축하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마을 사람들 중 일부가 그는 진짜가 아니라고 의심을 품는다. 급기야 그가 친지와 상속재산 다툼을 벌이면서 그의 정체를 둘러싼 재판이 시작된다.

문제는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사람들의 기억/증언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기억에만 의존해야 한다니! 대다수의 사람은 그를 진짜 마르탱 게르라고 여기지만 그 기억이 정확하다는 보장은 없다. 물론,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있다. 그의 아내다. 하지만, 그녀는 중요한 순간에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해 ‘침묵‘ 한다. (책의 맨 마지막에 아내는 그녀가 왜 침묵했었는지 얘기한다. 스포일러가 될테니 여기까지!)

이 이야기는 이 재판을 실제로 담당했던 프랑스의 법관이 사건 기록을 남겼기에 알려졌고, 프랑스의 국민배우라는 제라르 드빠르디외 주연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야기의 주인공인 ‘마르탱 게르‘라는 이름이 책 제목에 담겨 출판된 책이 세 권이나 된다. 하긴 우리나라 영화인 광해도 비슷하게 생긴 가짜로 하여금 진짜의 역할을 대리하게 함으로써 벌어졌던 일들을 다룬 것이니 이 책의 소재가 아주 생소한 것만은 아니다.

사진, 주민등록, 지문, 생체정보 등으로 개인의 신분을 확인하기 어려웠을 과거에는 이런 일들이 꽤 많았을 것 같다. 하긴 지금도 유명인을 빙자해 사기치는 사람들이 많은데 과거에는 오죽했을까.

이 책은 일단 재밌다. 그래서 재미만으로도 읽어볼 가치가 있다. 거기에 더해 짧은 시간이나마 당신을 철학자로 만들어준다. 책을 읽고 나면 진짜와 가짜, 선인과 악인에 대한 판단 기준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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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판화 - 리놀륨.목판화 제대로 만들기
샌디 앨리슨 외 지음, 김하늬 옮김, 앨런 와이체크 사진, 스튜디오198 감수 / 그림씨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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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천재는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까 예술적 재능이 충만한 사람일까.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천재란 주로 전자를 일컫는 것이겠지만 나는 천재란 주로 후자라고 믿는 편이다.
왜냐면 예술에 꼭 필요한 직관과 창의는 영재교육이나 타고난 암기력만으로는 습득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책으로 읽으면 이리도 쉬운 예술이 책만 벗어나면 나를 힘들게 하는 까닭은 내가 천재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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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포의 유토피아 기행
엘포 지음, 우현주 옮김 / 서해문집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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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꿈꾸었던 유토피아, 문학작품 안에서 묘사된 유토피아, 어떤 용감한 사람들에 의해 실제로 만들어졌던 유토피아. 이렇게 총 22개의 유토피아 이야기들.

성경의 에덴 동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같은 상상 속에 존재하는 유토피아 뿐만 아니라 아미쉬 공동체, 장미섬 공화국, 아틀란트로파(Atlantropa)등과 같이 우리에겐 낯설지만 상상을 현실로 옮긴 유토피아도 있다.

전세계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이토록 다양한 유토피아를 꿈꾸고 만들어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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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은 능동태다
김흥식 지음 / 그림씨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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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박은 거칠지만 주장은 선명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1. 영어는 주어가 주로 생략되지만 국어는 주어가 원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2. 영어는 수동태 구문이 필요하지만 국어는 대체로 수동태가 불필요하다.
3. 순수 한글교육만 고집하지 말고 한자 교육도 필요하다.
고 주장한다.

2와 3은 나 역시도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던 것(아마 3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다)이어서 저자의 주장이 반가웠지만 1은 의외였다. 그치만 곰곰 생각해보니 영어와는 달리 우리 말 구어에서는 진짜로 주어를 콕 집어서 얘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얇은 책이라서 반나절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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