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륵에 관심이 간다. 문학을 좋아하고 즐기는 나로서 한국과 독일을 연결시켜주는 가장 단단한 고리가 바로 이미륵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미륵의 도서는 압록강을 흐른다.’정도를 제외하고 거의 읽지 못했지만 그의 문체는 상당히 매력적이고 맑고 순수하다. 지난번 전공어 탐구 보고서를 위해 이미륵 작가에 대해 알아보고, ‘압록강은 흐른다.’를 다시 들추어 보기도 하다가 그만 이미륵에 대해 관심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샘솟았지만 시간이 부족하여 이루지는 못했다. 대신, 독일과 나의 연결고리인 이미륵씨의 평전을 샀다. 지금, 나는 독일에서의 이미륵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내가 물론 그 유명하다는 독포자이지만 평전 사이사이 한국어와 함꼐 등장하는 독일어는 반가웠다.

 

 

본명 이의경인 이미륵작가는 유럽행 유학길에 올랐다. 함꼐 유학을 시작한 친구들은 대부분 프랑스에 남았으나 이미륵은 독일행을 택했다. 독일경험이 있는 안봉근의 권유로 머무르게 된 것이다. 이의경이 독일에 도착해 여유있고, 무료한 삶을 즐긴지 1달정도, 조선에서는 이의경에게 출판법 위반으로 2년형을 내린다. 이로인해 그는 조선과의 서신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어, 이방인의 고독은 날로 깊어져만 갔다. 이미륵은 독일에서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글도 쓰고 열심을 다했다. 세계 피압박 민족 대회에서 태극기를 걸고 조선의 독립을 확정지어 달라고 목소리를 내었지만 그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나는 이미륵의 삶을 통해 당시 독일의 모습과 조선의 모습을 동시에 살펴 볼 수 있었다. 세계 1차대전에서 패배를 안고 배상금을 물어내기 위해 독일은 화폐의 가치를 엄청나게 낮춰야 했다. 192310월 미화 1달러가 독일화폐 120억 마르크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환율을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과잉 인플레이션에 빠지고 만 독일을 많은 한국 유학생들은 떠났고, 이미륵은 홀로 외롭게 버텨야만 했다. 한차례의 엄청난 고독과 힘겨움을 겪은 이미륵은 변화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여러차례의 이사를 감행하게 된다. 하이델뷔르크 대학에서 의학과정을 밟기도 했고, 뮌헨에서 학위과정을 밟기도 했다. 잠시 달콤한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그에게 많은 변화를 선사했다. 독일의 경제 위기 속에서 이방인인 이미륵이 직업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과제였고, 학위 과정을 끝낸 뒤에는 장학금마저 맞을 수 없어 엄청난 가난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엄청난 가난은 그가 의사에서 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하는 계기가 된다.

 

가난했던 그는 3명의 가난하지만 정신적 부유를 추구하는 독일 친구들과 함께 기숙을 하게 되고 이들과 함께 지내며 육체적 곤궁을 정신적 가치로 승화 시키며 활기찬 삶을 살아갔다. 그들의 평범치 않았던 일상은 예술로 숙성되었고 그가 아르츠바하에서 3달간의 휴식을 취한 뒤 뮌헨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원고뭉치가 들려 있었다. 그의 내면에서 들려 준 이야기를 쉬지 않고 받아 적어 내려간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작가의 길을 걸었다. 1931년 동물학 박사에서 작가의 길로 선회한 그는 그의 대표작 압록강은 흐른다를 출간해 독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독일의 신문사들은 찬사를 쏟아내었고 심지어는 올해 독일어로 쓰여진 가장 훌륭한 책은 외국인에 의해 발표되었는데, 그가 바로 이미륵이다.’라는 기사까지 나왔다.

 

한국인인 내가 보아도 아름다운 소설이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였다. 독일인의 눈에 비친 압록강은 흐른다는 얼마나 아름다웠고 신비로운 이야기였을지 짐작이 간다. 내가 이미륵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소설 속 순수함 때문이다. 그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의 삶을 통해 그가 다른 한국의 작가들과 달리 어리고 맑은 글을 써 낼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일제의 치하 아래서가 아닌 한 발자국 밖인 타국 독일에서 조선을 기억하고 추억했기 때문이고, 그가 글을 시작한 계기가 그의 피 속에서 끓어오르는 문학적인 욕구때문이었기에 그의 글은 때묻지 않고 상처받은 글이 아닌 맑고 깨끗한 글일 수 있었다.

 

진로학술동아리를 통해 일제치하당시 조선의 소설들을 살펴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대부분 비판적이고 슬프고 어둡고 반항적인 내용의 소설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그 시대에 조선을 아름답게 한 장의 사진처럼 남겨준 소설을 써 준 이미륵에게 감사했고, 타국에서 한국이란 나라를 기억하고 찬사를 받게 해준 그에게 감사했다.

독일의 작가, 그리고 조선의 작가인 이미륵. 그는 문학평론가의 꿈을 키우는 내가 독일에 관심을 갖게 해준 첫 번째 열쇠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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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래 2016-02-05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십니까?
선생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www.mirokli.com) 유족대표인 李榮來 (010-2228-1470. 032-815-1950)입니다.
선생님과 통화를 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