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을 걷는 게 좋아,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승민 옮김 / 정은문고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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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버지니아 울프는 1928 5 31일 일기에 '혼자 런던을 걷는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큰 휴식이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런던을 걷는 게 좋아,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는 그녀가 1931 12월부터 1932 12월까지 <굿하우스키핑Good Housekeeping>에 격월로 연재한 여섯 편의 에세이를 엮은 것인데요. 런던 부두에서부터 시작하여 런던의 주택가에 사는 크로 부인의 이야기에서 끝을 맺는 이 책에서 우리는 에세이스트를 기본으로 하여 다양한 느낌의 버지니아 울프를 만날 수 있습니다. 크로부인이 등장하는 어느 런던 사람의 초상에서는 버지니아 울프하면 떠오르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창작기법을 살짝 맛볼 수 있기도 합니다.

기중기를 상하좌우로 움직이고 항해중인 선박을 불러들이는 것은 바로 우리, 다시 말해 우리의 취향과 유행과 요구다. (p25)

사람들은 배를 보면 낭만과 자유를 생각하곤 하죠. 하지만 그녀는 그런 배들이 정해진 스케쥴대로 런던항에 정박하고, 그 배가 내려놓은 물건들이 이동하는 루트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서 다르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가 함께하지 못하여, 배를 보며 대리 충족이라도 하고 싶다는 듯, 투영해내는 낭만이 어떻게 다시 우리의 욕망 안에 갇혀 버렸는지를 말입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끊임없이 현재의 행복을 유예할 수 밖에 없는, 그렇게 자신의 욕망에 갇혀 쳇바퀴를 도는 사람들이 떠오르더군요.    

런던의 현대적 매력은 지속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런던은 사라짐을 목표로 세워진 도시다. (p36)

대한민국은 24/7, 말 그대로 항상 공사중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우리나라에도 고유한 매력을 가진 도시가 나올지 궁금할 때도 있지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 보니, 어떤 역사나 전통이 생기기 힘들어 보인다고 할까요? 그에 비해 런던은 전통과 역사가 살아 있는 곳으로 인식되곤 하죠. 버지니아 울프가 걸었던 옥스퍼드 거리 역시, 번화한 쇼핑의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시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매력과 낭만이 풍부하다고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그녀는 과거의 옥스퍼드 거리를 걸으며, 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더군요. 그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백년후, 서울의 거리를 걷는 사람이, 옥스퍼드 거리를 걸었던 저와 같은 매력에 빠져들게 될지에 대해서 말이죠. 그랬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도 생깁니다.  

이 책은 정은문고에서 나오는 '산책 에세이'중의 하나입니다. 이 책이 워낙 좋아서였을까요? '산책이란 자신이 살아온 생을 추억하는 것'이라고 말하던 일본의 탐미주의 소설가인 나가이 가후의 산책론을 담은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도 절로 궁금해지더군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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