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장 잔인한 칼날, 여성 할례 -감비아-)


흔히들 '법의 영역'을 사회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반응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 '법의 영역'에서 이미 사문화 된 규정이었던 낙태죄에 대해 응답했다.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를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했다.

우선 헌법재판소의 의견을 큰 틀에서 지지한다. 

그러나 찜찜함이 있는데..? 위헌이면 위헌이고 합헌이고 합헌이지 불합치 판결은 뭘까?


헌법불합치 판결은 해당 법률 조항을 곧바로 위헌 무효로 판결한 경우에 생길 수 있는 규범적 혼란과 입법의 미비를 방지하고, 국회의 입법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내리는 '변형 판결'중 하나다. 

넓게 해석하면 '위헌 판결'의 일종이다. 

헌재가 다시 공을 국회로 넘겼다. 국회에서는 20년 12월 31일까지 헌법에 합치하도록 개정해야한다.


마땅히 정치권에서 해결해야될 문제를 최후의 영역인 사법에 떠넘긴 것은 좋은 사례는 아니다. 

정치권에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내가 해결하기엔...좀 그렇고. 사법에서 답해준다면 뭐.. 생각해볼께." 인 꼴인데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집단임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 사법조차 과감하게 위헌을 내리지 못하고 헌법불합치라는 결정을 내리며 마지막 책임을 다시 정치권으로 돌렸다. 2년의 동안 낙태죄는 숨이 붙게되었다.

이러한 판결조차 과거와 비해 역사의 진보라면 진보일까?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낙태죄'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법률적 처벌 규정으로 묶어버렸다.

남성의 출산 선택을 가족을 중요시하는 훌륭한 선택이고 여성의 임신 중단은 이기주의자이고 불법을 저지르는 자로 규정해온 것이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이렇게 인류는 여성의 몸을 가만두지 않았는데 이 책 『여자전쟁』1장에 나오듯이 '할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할례' 하면 이슬람 문화권에서 자행되는 전근대적인 악습으로 알고 있긴 했으나 1장을 읽으면서 더 심각한 일임을 느꼈다.


종교(신)이 문제인가 남자가 문제인가.


그는 능글거리는 눈빛으로 답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요. 당신은 일반적인 여자들과는 좀 다른가보죠."

앞선 무식한 주장보다도 이 웃음에서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만일 그가 진심으로 어린 여성들의 성기 절제가 신의 섭리이고, 여성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웃지 않았으리라. 그는 자신이 내뱉는 말이 상식에 어긋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바로 그 점이 재미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 자체가 성기 절제는 오직 여성 통제를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그가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p. 43~44)


'이맘'(이슬람교 교단의 지도자를 지칭)의 이러한 태도로 보면 사실 그들도 다 알고 있다. 

할례가 숭고한(?) 종교적 의식로써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 당연히 잔인한 일이라는 것을.

심하게 말하면 즐기고 있다고 할까. 결국은 종교를 떠나 여성 통제에 도움이 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해야 한다는 신념은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훔친 이래로,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여성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된다고 경고해왔다. 기독교의 기풍은 성 삼위일체의 교리부터 오늘날 남성 중심적인 교회의 계층 구조에 이르기까지 가부장제를 확고하게 지켜왔다.

(…)

성경이 가르쳐온 창조론의 오류를 폭로했던 19세기의 혁명적인 과학 사상가조차도 이러한 성차별적 시각에는 굴복했다.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은 아담과 이브의 신화는 부인했을지 몰라도 그의 자연선택설은 인간 종의 수컷을 편애했다. 약하고 지능이 떨어지는 여성은 자연선택의 영향을 덜 받고, 덜 진화될 수밖에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p. 44~45)


여성의 통제는 앞서 읽었었던 책에도 여러번 봤듯이 뿌리 깊은 역사가 있다. 기독교의 기풍은 오늘날까지 남성 중심적인 교회의 구조에서 보듯 가부장제를 확고하게 지키는 역할을 했고 창조론의 오류를 지적했던 과학 사상가도 끝까지 수컷 중심적 사고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또 다른 이맘은 이렇게 말했다.


"예언자가 행했고, 평화는 그분과 함께 있으니, 이는 이슬람 율법에 의해 합법화된 것입니다."

 이 답변은 예언자 마호메트와 코란에 대해 익히 일려진 역사를 뻔뻔하게 무시하는 행태였다. FGM(여성 성기 절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p. 55)


그들 마저 작게나마 느끼는 찜찜함(?)마저 결국 종교의 이름으로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종교라는 벽 뒤로 숨어버린 꼴이다.

이렇게 누가 보더라도 '할례'라는 행위는 전혀 여성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의식이다.

그럼에도 하루아침에 없애는 것이 힘든 것이 현실이다.

왜 그런지 FGM 반대 운동가 나왈 엘 사다위는 이렇게 말한다..


"법만으로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그런 관습을 근절할 수 없습니다. 개별 가정의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할례가 여성들에게 유익하다는 잘못된 정보가 너무 많지만 모두 거짓말이죠." 통상적인 무슬림 가정이 아카카의 이맘 같은 사람에게서 주로 정보를 얻는다면 진정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p. 56)


뿌리 깊은 역사적인 관습으로서 맹목적인 믿음으로 오랫동안 굳어져있기 때문에 악습을 없애는 작업 또한 쉽지않다는 것이 

다.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 이순간도 행해져 피해자가 속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없애야 하는 악습이다. 


국가든 인류든 오랫동안 여성 통제에 힘써왔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일을 바로 잡는 일은 지난난 과정을 필요로 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물고넘어져야 겨우 한 걸음 갈 수 있겠지만 그 겨우 한 걸음때문에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많은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으니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하는 이유다.


나는 자문했다. 도대체 왜 전 세계 인구의 51퍼센트나 되는 여자는 21세기에도 여전히 평등하고 인간적인 대우를 받기 위해 운동을 벌여야 하는 걸까? 마치 우리가 박해받는 또 하나의 특정 소수민족인 것처럼.

(p. 11)


마지막으로『여자전쟁』의 저자 수 로이드 로버츠는 안타깝게도 이 책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출처 및 참고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7824

미디어오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남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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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4-20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완성이라서 정말 아쉬운 책이에요. 그래도 딸이 쓴 마지막 내용도 좋았어요. 이 책의 마지막 장이 이 책의 백미라고 생각해요. 딸이 저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정말 울컥한 마음이 들 정도로 감동했습니다.

블랙겟타 2019-04-20 12:1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아쉬워요.
아직 저는 마지막 까지 읽지 않았지만 cyrus님 말 대로 다 읽으면 감동받을 것 같네요.

단발머리 2019-04-23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자가 이 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읽다가 갑자기 뚝! <여기까지가 저자가 남긴 글이다>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딸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그녀를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는지 알게 되서 좋았구요.
전 다 읽었는데, 아직 페이퍼를 ㅠㅠ

블랙겟타 2019-05-01 12:1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끝까지 읽으면 저도 그런 느낌을 받겠죠?
제가댓글을 다는 시점에 단발머리님께선 올리셨고..
저는 아직 다 읽지도 못했...ㅠㅠ 얼른 다 읽고 페이퍼도 부지런히 쓸께요. ^^

다락방 2019-04-24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문화적 차이를 받아들이고 관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때때로 닫힌 문 뒤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학대를 허용하기도 한다˝

할례에 대해서 수 로이드 로버츠가 한 말인데요, 관용이라는 핑계로 우리는 학대를 방치하고 있는 꼴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나라로 거주지를 옮겨도 문화 혹은 전통은 유지가 되는게 끔찍해요. 게다가 그 유지가 되는 문화는 다 여성에게 심각한 해를 입히는 거고요.

자, 블랙겟타님 힘내서 열심히 읽어요! 저는 다 읽었습니다. 음화화화홧.

블랙겟타 2019-05-01 12:2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락방님, 어떤 것이 관습, 문화화 되어버린 것이 얼마나 다시 되돌리기 어려운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것을 문화라는 포장으로 외면해야될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바꿔야죠. 그 문화라는 포장으로 얼마나 특히 여성이 피해를 지금도 당하고 있는지를 안다면요.

저는 러시아로 잠깐 외도를 하는 통에 읽는 것이 조금 지체되었네요.
얼른 따라가고 5월의 책도 합류할께요. ^^
(언젠가 부터 조금 뒤쳐지는 것같아 제가 같이 으쌰으쌰를 못하고 있는것같아 죄송하네요 ㅠㅠ)
 
가부장제의 창조
거다 러너 지음, 강세영 옮김 / 당대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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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권의 여성주의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성평등이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큰 이유중 하나가 '가부장제'라는 무시무시한 제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부장제'라 한다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단어다. 특히 내가 살고 있는 한국에서는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는 유교 한스푼을 더 넣어 옛날 옛적부터 그냥 가부장제도 아니고 유교적인 가부장제가 이 땅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낯설지 않은 가부장제라는 것이 세계적인 제도(?)였다는 것을 안 것은 그렇게 오래지 않았다. 결국,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가부장제란 유용한 제도였기 때문에 자본주의형으로 변형이 되어 아직까지 굳건하게 살아남았다. 


한편, 자본주의는 특히 자신의 입맛에 맞는다면 모든지 자기 것으로 변형하여 어느정도 수용하는 특징이 있다.

최근의 자본주의하에서는 기계화와 고도산업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노동생산성으로만 성장하는 시대는 지나면서 오히려 기존의 자본주의하의 전형적인 체계였던 남성육체노동자-여성가사노동자의 모습이 어느정도 붕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곧바로 가부장제의 붕괴로 이어진 것은 아니고 굳건한 가부장제의 흐름에 특이점이 온 상태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균열은 냈다고 볼 수 있지만서도.)


그렇다면 한국에서나 다른나라에서나 자리잡고 있는 이 '가부장제'는 언제 부터 시작된 것일까?

『가부장제의 창조』의 저자 거다러너는 가부장제가 역사적인 산물이라고 확신하며, 역사 속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답한다. 특히 역사를 공부해보면 전형적인 남성의 역사인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듯이, 사회의 기록된 대문자 역사를 보면 수천년에 걸친 관한 이야기가 오직 남성들에 의해서만 기록되고 그들의 말로써 얘기되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들의 관심은 대부분 남성들에 관한 것이었다.

(p. 29)


러너는 기존의 역사를 대문자 역사History와 기록되지 않은 과거인 소문자 역사history로 구분지어 여성의 역사는 이 소문자 역사로부터 재발견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했다.


양성간의 가부장적 관계의 모체는 경제·정치적 발전이 국가를 충분히 제도화하기 전에, 그리고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발달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처럼 초기단계에서도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의 이동은 여전히 매우 유동적이었고 최하계급에까지도 상향이동은 분명히 가능하였지만, 점차 특정 계급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이 세습되기 시작하였다.

(p. 130)


놀랍게도 역사적으로 살펴보니 가부장제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발달하기 이전에 이미 가부장적 관계의 모체로서 자리잡고 있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은 전통적 설명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프로이트에 있어서 정상적 인간은 남성이었다. 그리고 그의 정의에 의하면 여성은 남근(男根)을 가지지 못한 일탈적 인간이며 여성의 모든 심리적 구조는 이 남근결핍을 보상하기 위한 투쟁에 모아져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p. 38 ~ 39)


여성은 늘 남성에서 부터 해석되어져 왔다. 특히 프로이트는 이런 설명을 강화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인간은 남성이고 여성은 남근이 없는 결핍적 인간으로 해석하는데서 출발했으니 말 다했다..


남성이 가구와 혈통에 '속해 있었다면', 여성은 그들에 대한 권리를 취득한 남성에게 '속해 있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 쉽사리 주변인이 된다. 죽음, 별거 혹은 더 이상 성적 파트너로 소용이 없어짐으로써 남성의 보호를 잃게 되면, 여성은 주변적이 된다. 국가가 형성되고 위계와 계급이 확립되기 시작한 그 시점에, 남성은 여성집단에 있는 더 큰 취약성에 주목하였고 차이(difference)가 한 집단을 다른 집단과 분리 시키고 나누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음이 분명하다. 이런 차이는 성과 나이처럼 '자연스럽고' 생물학적인 것일 수도 있고, 감금과 낙인찍기와 같이 사람이 만든 것일 수도 있다.

(p. 139)


따라서 노예제는 처음 잉태된 시기부터 남성과 여성에게 뭔가 다른 것을 의미하였다. 일단 노예가 되면 남성과 여성 모두 다른 사람의 권력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자율성과 명예를 상실하였다. 남녀노예들은 보상없는 노동을 하고, 종종 주인에게 개인적인 서비스를 해야 했지만, 특히 여성들에게 노예상태는 주인 혹은 주인의 대리인을 위해 성적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

분명히 계급억압은 결코 남성과 여성에게 같은 조건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다.

(p. 156)


거의 천년 동안 '노예제'에 대한 관념은 '여성'이라는 바로 그 정의(definition)에 반영되는 양식으로 현실화되었고 제도화되었다. 이전 시기의 결혼교환에서 자신들의 성적·재생산 서비스가 사물화된 여성은 공적·사적 영역과의 관계가 남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간주되면서 그 시대의 막바지를 맞이하였다. 남성은 그 계급위치가 강화되고 재산 및 생산수단과의 관계에 의해서 정의되었다면, 여성의 계급위치는 성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었다. 

(p. 166 ~ 167)


역사적으로 남성에게 '속해 있었던' 여성은 남성집단에 비해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고 남성들은 이 부분에 주목하였다. 이는 곧 구분짓는 데 사용될 수 있음을 의미하였다.  

노예가 생겨난 시기를 살펴봐도 그렇다. 최초로 노예가 된 사람들 대부분이 여성임에도 역사가들은 이 사실을 가벼이 여겼다. 점차 여성을 넘어 남성 노예까지 생겨난 것도 사실이었으나 노예로서 받는 계급적 억압을 남성과 여성이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노예라면 공통적으로 노동력을 주인에게 종속되어있음은 물론이고 여성에게는 플러스 알파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결국 여성의 계급위치는 성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었다.


함무라비법전은 국가권력의 한 측면인 가부장적 가족의 제도화가 시작되었음을 표시한다. 그것은 여성의 지위가 남성 가장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에 의해 결정되는 계급사회를 반영한다. 빈곤한 평민의 부인은 그녀의 의지나 행동과 무관하게 남편의 지위변화에 의해 존중받을 만한 여성에서 채무노예나 매춘부로 바뀔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남성도 자신의 성적 행동 때문에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지 않는 데 비해, 간통 등 결혼한 여성의 성적 행위나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순결을 상실하면 그녀의 지위가 낮춰질 수도 있었다. 그 시대부터 지금까지 여성들의 계급적 지위는 항상 남성들의 계급지위와는 달리 정의된다.

(p. 248 ~ 249)


함무라비법전에서도 마찬가지로 가부장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여성의 지위가 남성 가장의 지위와 재산에 의해 결정되는 계급사회로 부터 출발되어 쓰여졌기 때문인데 결국 지금까지도 여성들의 계급적 지위는 항상 남성들의 계급지위와는 다르게 정의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서에서도 가부장제의 흔적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성서에서 성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은유는 남자의 갈비뼈로 창조된 여자에 관한 은유와, 신의 은총에서 인간의 타락을 초래한 유혹자 이브에 대한 은유이다. 이 두 은유는 여성의 종족을 신이 승인했다만 증거로써 2천년 동안 인용되어 왔다. 동시에 이들 은유는 그 자체만으로 성별관계에 관련된 가치와 실천을 정의하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창세기와 같은 시적·신화적·풍습적 복합체에 대한 해석은 해석하는 사람의 욕구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라고 예상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해석의 전통이 지나치리만큼 가부장적이었다는 점과, 지난 700년 동안 여성들이 개인적으로 구축해낸 다양한 페미니스트 해석들이 그동안 굳건히 지켜졌고 신학적인 인가도 받았던 기독교신앙 이전의 오랜 전통에 대해 대항해 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p. 318 ~ 319)


남성들이 주요 설명체계 속에 우주와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서열화하기 시작했을 때, 여성의 종속은 이미 너무도 완벽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어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연스럽게'보였다. 이러한 역사적 전개의 결과로, 서구문명의 주요 은유들과 상징들 속에 여성의 종속과 열등성에 대한 가정들이 통합되었다.

성서의 타락한 이브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훼손된 남성으로서의 여성이라는 개념과 함께, 우리는 본질, 기능, 그리고 잠재력에서 차이가 있는 두 종류의 인간-남성과 여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가정하는 두 개의 상징적 구성물들의 출현을 보게된다. "열등하며, 채 완결되지 않은 여성"이라는 이 은유적 구성물은 사실성의 힘과 생명을 취하는 방식으로 모든 중요한 설명체계 속에 각인되게 되었다.

(p. 368)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런지 성서에도 가부장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 감흥을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세히 이정도로 쓰여져 있을 줄은 몰랐다. 성서에 여자의 탄생부터 남성의 갈비뼈로 시작되었다는 유명한 은유와 신의 은총으로부터 인간의 타락을 부추긴 인물로서의 이브를 묘사하고 있는 것은 이후 성별관계 정립에 있어 그 어느 것보다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느끼고 있다.


이 책『가부장제의 창조』는 가부장제의 기원과 전개를 역사적으로 설명하는 책이다.

남성인 사람이 읽어나갔기 때문에 여성독자가 읽었을 때의 그 것과는 완벽히 같다고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남성의 눈으로만 바라봤기 때문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소문자의 역사 history를 살펴보는 것은 충격과 놀라움의 연속이다.


역자는 "가부장제는 역사적 산물이며, 그러므로 역사를 통해 종식될 수 있다는 러너의 기본전제를 받아들인다면,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성서시대를 통해 형성되고 공고화된 가부장제의 역사이자 여성과 남성의 역사에 대한 면밀한 탐구와 이해는 그것이 어느 장소와 어느 문화에서 일어난 사실에 대한 것이든 우리의 현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고 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실패하고 오류를 범했는지도 배울 수 있다.

(p. 455)


우리가 기존의 History가 아닌 history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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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4-08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생 많으셨습니다, 블랙겟타님.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이렇게 리뷰도 적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같은 밑줄을 보게되면 그건 그것대로 반갑지 뭡니까!


가부장제의 창조는 어려웠고 제가 그 내용을 백프로 이해했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 전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게된 것 같아요. 아마도 그래서 책을 읽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열심히 함께 가요!

블랙겟타 2019-04-08 22:36   좋아요 0 | URL
네 저야말로 좋은 분들과 같이 읽게된 덕분에 이렇게 한권 한권 읽게되는 걸요 뭘 ㅋㅋ ♪( ›◡‹ )
대신 처음으로 참여했던 2월에 비해서 글쓰기 빈도라던가 읽는 속도도 현저히 느려진 것은 반성 해야 겠어요 ^^;;;

저도 한권한권 읽으면서 많은 것들을 아는게 쪼꼼(?) 느껴집니다.
아직 여전히 부족하지만요.

4월부터는 심기일전해서!! (•̀ᴗ•́)و ̑̑
네네!! 열심히 함께 가요!

단발머리 2019-04-08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블랙겟타님처럼 우리 나라의 유교적인 문화가 남녀차별, 여성혐오의 최전선인줄 알았어요. 동양이 서양보다 더 심각하다고 생각했다고 할까요. 가부장제의 역사에 대해 읽어가면서 동서를 막론하고 이미 인류 역사 초기때부터 여성이 소수자로서 약자로서 ‘제2계급‘으로 강제 강등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읽어갈수록 알아갈수록 더해지는 막막함 ㅠㅠ

그나저나 위의 사진에 읽은 기록 남기는 프로그램은 무엇인가요? 무척 고급스러워보입니다^^

블랙겟타 2019-05-27 21:15   좋아요 1 | URL
네 단발머리님.
저도 한권한권 읽으며 알아가는 것이 있지만 이 앎이 유쾌한 것인가라고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었거든요.. ㅠㅠ

저는 스티키가 없는데 읽은 티는 내야겠고..(?) 해서 첨부한 사진인데요.( ・ワ・)?
무려 8년동안 쓰고 있는 책 기록 관리 어플 ireaditnow HD라는 어플이에요. 근데 제가알기론 ios한정으로만 있어서 안드용은 아직 없는 것 같더라구요..;; 아이폰을 가지고 계신다면 강추하는 앱입니다.

제가 지금 쓰는 버젼은 유료 프리미엄버젼인 ireaditnow HD이지만 (앱 가격이 3천원대, 연간 사용료도 3천원대로 알고 있어요) 무료버전인 ireaditnow 도 있습니다.

둘다 기본적인 기능(기록 관리)는 다 있구요. 차이라면 유료버젼은 아이폰-아이패드 간의 동기화가 되어 패드에서도 큰화면으로 볼 수 있고 몇가지 자잘한 기능이 추가된 정도라고 볼 수 있어요. ^^
 
혁명의 영점 - 가사노동, 재생산, 여성주의 투쟁 아우또노미아총서 44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옮김 / 갈무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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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위대하다. 엄마는 강하다. 

이런 류의 말은 꽤 예전부터 익히 자주 듣던 말이다.


몇주 전 지상파 예능을 보고 있는데 (남자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이다.) 한 남자 출연자의 부인에게 잠시 휴가(?)를 준 후 자신의 아이를 나머지 남자출연진들과 함께 돌보는 에피소드였다. 뭐 흔히 예상하듯 좌충우돌에 어색하기도 하고 땀 뻘뻘. 겨우 아이를 재우는 듯 했으나 금방 깨고.. 어쨋든 하루는 아니고 반나절? 정도 체험한 뒤에 한 남자 출연자가 한마디 한다. "이야- 역시 엄마는 강해.남자 5명이서도 못하는걸 엄마들은 해내잖아" 그리고 나머지 출연자들도 그래그래. 동조한다. 

하지만 뭐. 다음날에 원래대로 엄마한테 일이돌아가며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겠지..


나도 어릴적 부터 듣던거라 의심(?)없이 엄마는 강한 줄 알았다. 그런데 왜 엄마가 되고 부터 난 뒤는 다 칭찬 일색일까? 

진짜 칭찬일까?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있을까? 가사의 일은 물론이고 육아도 엄마가 하는 것이요. 요즘엔 일까지 병행해야되니 예능의 제목처럼 아빠가 슈퍼맨이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던 엄마는 초초 울트라 슈퍼히어로겠네.


여성운동에 참여하면서 나는 인간의 재생산은 모든 경제 및 정치 시스템의 기초이며, 여성들이 집에서 하고 있는 막대한 양의 유급가사 노동과 부불가사노동이 이 세상을 돌아가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하지만 어머니가 그 노동을 당연시하고, 절대로 자신만의 돈을 따로 챙기는 일이 없었으며, 한 푼이라도 쓸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아버지에게 의존해야 했던 역사 속에는 얼마나 큰 희생이 감춰져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p.15 ~ 16)


무임금의 가사노동덕분에 남성노동자들은 집에서 편안히 체력을 충전하고 다음날 일터로 가서 열심히 일을 할 수 있는 패턴이 자본주의가 탄생과 더불어 생겨났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잘 굴러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야말로 가사 노동을 무임금으로 당연시하고 희생을 감내해야했던 여성들이다. 

실비아 페데리치는 전작의 『캘리번과 마녀』에서 자본주의 이행기에 시초축적으로 인한 결과로 여성의 계급적인 하락에 주목했다면 이 책『혁명의 영점』에서는 자본주의 이후 여성이 온전히 짊어지게 된 무임금의 가사노동에 집중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혹자는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더 심했어! 요즘에 누가 손빨래 하냐. 세탁기가 해주지.. 청소도 빗자루 쓸 필요없고 청소기가 다하지...

『그림자 노동의 역습』의 저자 크레이그 램버트는 이 부분에 이렇게 말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가사 노동 또한 확대되었다. 각 가정은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했고, 일반적으로 더 많은 소비는 더 많은 그림자 노동을 야기한다. 청결 기준도 높아지고 주택 또한 커졌는데, 이는 더 많은 가구와 물건, 공간을 더욱 철저하게 청소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게다가 노동을 덜어준다는 장치가 반드시 노동력을 아껴 준 것은 아니었다.

(…)

그러나 1800년대 여성들에게 가사 노동은 한 세기 내내 "조금도 손쉬워지거나 덜 지루한 일이 되지 않았다. 노동력을 덜어 주는 장비가 그렇게 많은데도 일이 조금도 줄지 않은 듯 보이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모순이었다."

『그림자 노동의 역습』, (p. 75)


아니 그렇게 노동력을 덜어 주는 장비가 많이 생겨났음에도 조금도 줄지 않은 현실은 뭘까..?

집은 더 커졌고, 청결기준도 더 높아지면서 오히려 가사 노동이 확대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우리는 자본이 우리의 노동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데 대단히 성공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본은 여성을 희생하여 진정한 걸작을 만들어냈다.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불을 거부하고 가사노동을 사랑의 행위로 바꿔 놓음으로써 일거다득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먼저 터무니없이 많은 양의 노동을 거의 공짜로 획득했고, 여성들이 이에 거부하는 투쟁을 일으키는커녕 인생 최고의 일로 가사노동을 추구하게 만든 것이다(마법과도 같은 말: "그래. 여보, 당신은 천생 여자야"). 동시에 자본은 여성이 남성노동자의 노동과 임금에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남성노동자 역시 통제했다.

(p. 40)


가족은 본질적으로 여성부불노동의 제도화이자, 무임금으로 인한 남성에 대한 종속의 제도화이며, 결과적으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을 규율해 온 불평등한 권력분배의 제도화이다. 남성들이 일을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자신의 월급봉투에 의존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에서 여성의 무임금상태와 종속은 남성들을 노동에 묶어 놓는 기능을 해 왔다.

(p. 69)


자본은 완벽하게 불평등한 가족의 틀을 정립해버렸다.

무임금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여성에 의존해야만 하는 남성노동자와 여성들 또한 남성노동자의 임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하는 상태말이다. 양쪽을 모두 통제했지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여성이기에 피해는 여성이 더 컸다.

가사노동을 교묘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의무적인 노동 때문에 남편에게, 아이에게, 친구에게 꾸준히 분개하다가도 자신이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는 데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여성취업의 오랜 역사가 보여주듯, 부업을 한다고 해서 이 역할이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업은 우리의 착취를 가중시킬 뿐 아니라 여러 형태로 우리의 역할을 재생산한다. 우리는 곳곳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는 그저 주부라는 조건의 모든 함축이 표현된 단순확장임을 확인할 수 있다.

(p. 47)


분개하다가도 여성 스스로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곧 포기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성이 임금을 벌어 남성에 대한 의존을 줄이면 되지않을까?

하지만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역할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여성의 착취를 가중시키고 여러 형태로 역할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예전과는 다르게 요즘에는 예전과는 다르게 남성들이 가사일을 하는 편이잖아?


하지만 최근의 조사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가사노동의 탈중성화 경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가사노동은 아직도 여성들이, 심지어는 부업을 가진 상태에서 하고 있다. 좀 더 평등주의적인 관계를 확립한 부부들마저 아이가 생기면 상황이 뒤바뀐다. 이 같은 변화가 나타나는 이유는 남성들이 아이를 돌보기 위해 직장에서 휴가를 얻을 경우 그 만큼 임금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는 남성의 유급노동시간 단축과 생활수준의 하락이 맞물린 상태에서는, 근무시간자유선택제 같은 혁신만으로 가사노동의 동등한 분담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또한 집안에서 가사노동을 재분배하려는 여성의 시도는 가사노동에 대한 남성들의 견고한 태도보다는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받는 저임금 때문에 좌절될 가능성이 더 높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p. 95~96)


 예전보다는 남성의 가사노동의 참여는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보조적인 형태에 머무를 뿐이고 게다가 아이가 생기면 휴직으로 인한 임금하락이 여성에 비해 남성이 더 크기 때문에 결국은 육아는 여성의 몫으로 가게 된다. 1차적으로 남-여 간의 임금격차가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육아휴직으로 인한 손실이 남성쪽이 더 크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여성이 휴직 또는 퇴직을 하게 된다. 이런 선택은 곧 여성의 '경력 단절'로 이어지고 남-여 간의 생애주기 전체의 격차를 야기시킨다.


경력 단절은 개인이 축적한 기술, 지식, 역량에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주류경제학에서도 30대 초반에 경력단절을 겪으면 역량의 투자의 적기를 놓치는 것이라고 했다. 단절로 인한 당장의 임금 손실뿐만 아니라 역량을 쌓아야 할 경력 초기에 단절을 경험함으로써 오히려 역량의 저하로 나타나  미래의 임금수준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복귀나 재취업 과정에서 기존의 임금보다 더 적은 임금수준의 일자리로 복귀를 하게 돼 이는 곧 남-여 임금 격차가 왜 줄어들지 않는 큰 이유가 된다.


한국에서 '저출산' 문제가 최근의 가장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역대 정부 모두가 이 문제를 타파하고자 뻘짓도 하고 어쨋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여성학자 정희진은 한국의 상황을 아래의 책 『아내 가뭄』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과 관련하여 한국 사회의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자. 일과 가정의 양립? 이미 많은 여성들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가장 먼저 일자리를 잃고 있으며, 더 이상 가정을 구성하지도 않는다.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남성이 가사 노동을 절대로, 죽어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출산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아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다(기혼 부부의 출산율은 1.9명으로 두 명을 육박한다). 대한민국에는 결혼한 여성을 위한 인프라와 사회적 존중 문화가 전무하다. 여성들은 더 이상 국가, 사회, 남성 개인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여성들은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아이를 낳지 않음으로써, 사회를 구하고 자신을 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 출산은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아내 가뭄』, (p. 14)


일시적이고 하나마나한 정책을 통해 출산을 국가적으로 장려하는 시대는 지났다. 당연히 국가가 나서면 따라고 오겠지가 아니다. 국가도 사회도 남자도 과거의 틀로 이 문제를 바라본다면 저출산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인식의 변화도 중요하다 『혁명의 영점』에서도 보여지듯 당연히 가사를 담당해야하는 사람은 없다. 

역사적으로 오히려 남성임금노동자 - 여성무임금가사노동자의 틀은 자본주의 이행기에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애들을 데리고 저녁이나 점심을 먹으러 나가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미소를 지어. 얼마 전에는 어떤 여자 종업원이 우리 애들한테 "모처럼 아빠랑 점심 먹으니까 신나지?"라고 묻더라고. 나는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어. 왜냐하면 나는 애들을 데리고 나와서 빌어먹을 점심을 먹인 다음, 다시 집으로 데려가서 또 밥을 먹이고 숙제를 같이하고 재워도 줄 예정이었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 여자 종업원은 "와우- 아빠랑 특별 데이트를 하는구나!"라는 거야. 젠장, 아니라고. 이건 그냥 다른 일과 다를 바 없이 아빠랑 보내는 심심해죽을 거 같은 시간일 뿐이라고.

『아내 가뭄』, (p. 359)


우리 사회는 아버지들에게 육아에 젬병이 되도록 허용할 뿐만 아니라 젬병일 거라고 기대한다. 젬병이 되라고 권장한다. 그래서 막상 젬병이 아닌 아버지를 보면 매번 놀란다.

『아내 가뭄』, (p. 259)


이제 젬병인 아빠도, 강한 엄마도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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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3-19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그림자 노동의 역습 몰랐던 책인데 읽어보고 싶네요. 덕분에 담아갑니다.

캘리번과 마녀, 혁명의 영점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블랙겟타님.
게다가 이렇게 글 쓰시느라 또 수고하셨고요. 좋은 책도 함께 담아주셔서 감사해요. 헤헷.

블랙겟타 2019-03-19 11:23   좋아요 0 | URL
네. 저야말로 감사해요. ^^
가부장제의 창조도 함께 열심히 읽어요!!

공쟝쟝 2019-05-26 12: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크으~ 그림자노동의 역습! 넘나 적절. 아내가뭄도 읽고 싶네요 ^0^//

블랙겟타 2019-05-26 20:09   좋아요 1 | URL
쟝쟝님, 특히 아내가뭄은 한번 읽어보세요. 저도 어렵지 않고 재밌게 읽었어요. ^^
 

이미 3월이 반 이상 지나갔지만 이제야 올리는 구매리스트 ^^;;


1. 알라딘에서 산 종이 책, eBook















가부장제의 창조

3월의 같이 읽는 여성주의 책이었기 때문에 3월 초에 샀었고 지금 읽고 있다. 

역사적인 이야기가 많이나와 한번 읽어서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여러번 반복해서 읽어야겠지만 그래도 읽어놓으면 뿌듯할 것 같다.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의 최신작이다.제목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고 매번 우석훈 박사의 책을 사지만 또 이 책의 주제는 흥미로워 이북으로 구매하게 되었다. 

왜 회사 내의 민주주의는 어려울까?


 













파토 원종우의 태양계 연대기

유명 과학 팟캐스트 「과학하고 앉아있네진행자 원종우씨가 쓴 SF과학소설이다.

예전에 다른 이름으로 발행되었다가 개정판으로 바뀌면서 제목도 바뀐듯 하다.















여자 전쟁

알라딘 이북의 신작을 보다 발견한 책인데 눈에 띄어 얼른 사게 되었다.

옮긴이를 보다가 심수미? 들어본 이름인데 했더만 역시 JTBC 현직 기자이셨어!




 











야바위 게임

평소에 이북 중에 눈길이 가는 게 있으면 당장 사지 못하더라도 쿠폰 신공으로 사려고 보관함에 놔두곤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이 2월에 보관해놓았다가 이제 산 책이다. 현대만큼 불평등이 완연한 사회가 없다고 하는데 불평등을 유지하는 규칙을 보여준다는 이 책이 나에게 당연히 눈에 띄지.


2. 동네서점에서 산 책



디디의 우산

작가 황정은의 신작 디디의 우산이다. 

알라딘에서도 살 수 있지만 동네서점엘 갔다가 동네서점에디션으로 있다는 것을 알게된 후 우산이 펼쳐진 표지인 이 책을 얼른 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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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3-18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여자전쟁은 같이읽기4월도서로 생각중입니다. 잘 사셨어요!! 꺅 >.<

블랙겟타 2019-03-18 20:29   좋아요 0 | URL
응? 그럼 자연스레 4월 참가확정인건가요? ㅋㅋㅋㅋ
예상하고 산건 아니였지만 아싸! 돈 굳었... ㅎㅎㅎㅎ

다락방 2019-03-19 10:36   좋아요 1 | URL
제가 이렇게 같이읽기에 대놓고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블랙겟타 2019-03-19 11:22   좋아요 1 | URL
٩(ˊᗜˋ*)و ~
 
캘리번과 마녀 -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 아우또노미아총서 31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김민철 옮김 / 갈무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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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맑스는 '시초축적'이 자본주의 이행과정에서 폭압적으로 벌어진 것을 밝혀냈지만 그 시초축적의 과정에서 여성은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노동의 재생산'에 주목했다.  


달라 코스타의 말에 따르면 임금노동자의 착취, 즉 "임금 노예제"는 여성의 가정 내 무임노동이라는 기둥 위에 세워졌고, 이 무임노동이 임금 노예제의 생산성의 비결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과 남성의 권력 차이는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적 축적과 무관하기 때문도 아니고, 문화적 기획이 영원히 존속하기 때문도 아니다. 특히 여성의 삶을 지배했던 엄격한 규칙들을 고려하면,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적 축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남녀간의 권력차는 특정 사회적 생산체제의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남녀간의 권력차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생산체제란 노동자의 생산 및 재생산에 들어가는 무임노동의 이익을 보면서도 그것을 사회경제적 활동이나 자본축적의 원천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연자원 또는 개인적 봉사로 신비화하는 체제를 말한다.

(p. 21)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 '노동의 재생산'이다. 

지속가능한 노동을 만들기 위해서는 남성 노동자들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며 노동력을 회복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다시말해 노동자가 집에서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자식을 낳고 청소, 빨래등의 일을 뜻하는데 이는 '여성'들이 당연히(?) 해준 덕분에 노동의 재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누군가가 하고 있었던 '노동의 재생산'을 맑스는 자본주의 연구에 있어서 간과하고 말았다. 

무노동 가사노동은 자본주의 이행과정의 시초축적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 사회적 생산체제가 있었기 때문에 견고하게 오랫동안 자본주의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럼 자본주의탄생이전의 상황은 어땠을까?

14-15세기는 봉건제의 모순이 드러나면서 농민폭동등이 일어났던 격동기였다.


서유럽 농민과 도시노동자중 다수에게 15세기는 그들이 전례 없는 힘을 가졌던 시대였다. 노동력 부족이 그들에게 유리한 입지를 가져다주었을 뿐아니라, 고용주들이 그들의 노동력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더 잘 알게 되었고, 여러 세기에 걸친 수모와 굴종을 잊을 수 있었다.

(p. 90)


14세기의 당시 일어난 흑사병의 여파는 엄청났다. 유럽이 인구의 대략 30~40%가 죽었다. 역병으로 인한 노동력의 부족현상은 일시적으로 권력관계에서 하층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런 유리한 조건속에서 농민계층의 불만이 가득찼고 봉기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15세기 말이 되면 반 혁명이 사회적·정치적 삶의 모든 수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먼저 정치당국들이 가장 젊고 반항적인 남성 노동자들에게 자유로운 성관계를 허용하는 악랄한 성(性) 정책을 통해 그들을 포섭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 인해 계급적대가 프롤레타리아트 여성에 대한 적대로 바뀌게 되었다. 

(p. 92)


그러나 15세기 말로 오면서 지배계급도 반격을 시작했다. 혈기왕성한 젊은 남성 노동자들을 상대로 성(性)정책을 펼치며 포섭하기 시작했고 먹혀들었다.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강간을 묵인하였고 이러한 움직임은 계급에 상관없이 광범위한 여성혐오의 흐름을 이끌어냈다. 프롤레타리아트 남성의 적대의 시선이 여성에게 옮겨갔다. 계급의 문제를 성의 문제로 전환하는데 성공을 거둔 것이다. 결과적으로 노동자계급층 내를 분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주인과 하인 모두에게 그토록 무정하게 희생당한 프롤레타리아트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치러야 할 대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강간을 당한 사람은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쉽사리 회복할 수 없었다. 평판이 망가지면 마을을 떠나거나 매춘으로 전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노동자의 저항을 흐트러뜨리고자 불화를 유도하는 제후들과 지방당국의 성 정책의 또 다른 측면은 매춘의 제도화였다.

(p. 93)


점증하는 계급갈등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부르주아지와 귀족이 새로이 동맹하게 되었는데, 이 동맹이 아니었다면 프롤레타리아트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반란이 실패한 것은 봉건권력의 모든 세력들(귀족, 교회, 부르주아지)이 전통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란에 대한 공포로 합심하여 공동보조를 취했기 때문이다. 

(p. 95 ~96)


점점 가속화되는 계급갈등에서 이 당시 상업의 발달로 부상한 신흥 부르주아지와 기존의 봉건세력이 서로가 전통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적앞에서 손을 잡게되자 자신들을 위협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성공적으로 진압할 수 있었다. 


이렇게 봉건제의 위기를 유럽의 지배세력들은 사회적·경제적 구조조정을 실시하였고 이는 곧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 때 대대적으로 벌어진 사회적·경제적 구조조정을 시초축적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적 부의 원천은 부자들의 금욕과 절제가 아닌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분리라는 점이다. 


노동자가 노동력을 팔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을 상태로 만드는 시초축적의 과정이 필요했다.

이 시초축적의 과정 속엔 노동의 성적 분업도 이루어졌다.


19세기 전업주부가 생겨나면서 정점에 달했던 이 역사적 변화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그리고 남성과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지위를 재정의했다. 그로부터 나온 노동의 성적 분업은 여성을 재생산 노동에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남성에 대한 의존을 더욱 심화시켜서, 국가와 고용주들로 하여금 여성의 노동을 좌지우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남성의 임금을 이용할 수 있게끔 했다. 이처럼 상품생산이 노동인구 재생산과 분리되면서 무보수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임금과 시장을 자본주의적으로 이용하는 전략이 발달하게 되었다.

(p. 121) 


자본주의 이행과정에서 벌어진 인클로저등의 시초축적 과정 끝나고 여성은 남성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완전히 가치를 박탈당한 재생산 노동에만 한정되었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인구의 재생산은 자연적인 사명이자 "여자의 일'이란 꼬리표가 붙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노동에 대한 가치가 더이상 인식되지 않게 되었다. 여성이 임노동을 하는 경우에도 남성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임금을 받았다.


현실에서 출산과 인구변화는 자동적이거나 "자연적"인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발전의 모든 단계에서 국가가 노동인구의 확대 또는 축소를 위해 규제와 강압에 의존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특히 노동자의 육체노동이 생산의 제1수단이었던 자본주의 출범기에 더 잘 들어맞는다. 그러나 그 후 오늘날까지도 국가는 재생샌에 대한 통제권을 여성의 손에서 빼앗고 어떤 아이가 어디서 언제 얼마나 많이 탄생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여성은 종종 자의에 반해서 출산하도록 강요받았고, 신체로부터, "노동"으로부터, 심지어는 아이로부터의 소외를 경험했다. 이 소외는 다른 어떤 노동자가 겪은 것보다도 더 심각했다.

(p. 149 ~ 150)


여성으로서는 역사적인 패배였다. 동업조합에서 여성들이 쫓겨나고 재생산 노동이 평가절하 되면서 빈곤은 여성의 몫이 되었다. 또한 여성노동에 대한 남성의 "일차적 전유"를 이행하기 위해서 새로운 가부장적 질서가 구축되면서 여성들은 고용주와 남성이라는 이중적 종속관계에 얽매이게 되었다. 자본주의 출현 전에도 남녀 간에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존재했다고 해서 위의 평가가 무색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이번 시기 유럽에서는 여성이 공유지를 비롯한 공동체의 자산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남성에 대한 여성종속이 상당히 완화되었던 반면,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여성의 노동이 교환의 영역을 벗어난 천연자원으로 정의되면서 여성자체가 공유재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p. 157 ~ 158)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은 중요한 요소다. 인구의 변화는 자연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음에도 자본주의하에서는 통제해야 했다. 노동력의 원천인 출산을 통제하기 위해 여성의 자궁은 국가와 남성 소유하에 놓여졌다.


자본주의 사회가 발달하고 근대적인 프롤레타리아트가 형성되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마녀사냥'이 있다. 

예전에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이미지는 '중세시기에 일어난 종교적인 사건이었던거 아닌가? 

저자는 그렇게 간단한 사건이 아니라고 하였다. 자본주의 이행기에 벌어진 여성시초축적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의외로 중세에는 마술에 관대했고 마녀를 우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세의 봉건제가 끝나고 근대로 넘어가는 자본주의 이행기에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왜 이시기에 벌어졌던 걸까? 

자본주의에서는 잘 훈육된 부지런한 노동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전부터 마술 혹은 미신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규칙적인 통제가 불가능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손을 봐야만 했다. 타인의 의지를 구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출산과 재생산을 통제하는 '마녀'들과 자본주의적 노동 규율은 애초부터 양립이 불가능했다. 

이로서 국가로 부터 대대적인 마녀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런 관점(마녀사냥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미친 영향에 집중하는)에서 보았을 때, 마녀사냥이 여성들이 출산을 통제하는 데 사용해 왔던 수단을 악마적인 방법이라고 몰아붙임으로써 이를 파괴해버렸고, 여성의 신체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제도화함으로 써 여성의 신체를 노동력 재생산에 종속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음은 분명해진다.

(p. 272 ~ 273)


마녀사냥은 여성에게 새로운 성적 능력이나 승화된 쾌락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대신 "깨끗한 이불 속의 깨끗한 성"을 향한 기나긴 행군의 첫 출발로서, 여성의 성적 활동을 노동과 남성에 대한 서비스, 그리고 출산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출산과 무관하고 비생산적인 모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반사회적이로 사실상 악마적이라는 이유로 금지한 것이다.

(p. 285)


물론 '마녀'뿐만이 희생의 대상은 아니었다. 많은 여성또한 마녀사냥이란 미명 하에 희생되어갔다. 

마녀사냥은 자본주의와 어울리지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여성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자 여성에 대한 전쟁이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모든 악의 근원이라며 비난했던 마녀사냥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노동규율에 순응하여 가족 내에서의 재산상속과 출산을 위협하거나 노동에 들어갈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곳에 낭비하게 만드는 모든 성적 활동을 범죄화하는 광범위한 성생활의 재구조화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p. 288)


그러므로 합리주위와 기계론은 세상이 자연의 착취에 열을 올리게 만드는 데 기여하긴 했지만 마녀박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마녀사냥을 선동할 때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중세 말에 이르러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권력을 위협하던 존재양식 전반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느끼게 된 유럽 엘리트들의 필요였다. 이 과업이 완수된 시점에, 다시 말해서 사회적 규율이 복원되고 지배계급이 자신의 헤게모니가 확립되었다고 느끼는 시점에서 마녀사냥이 중단된 것이다. 그때부터는 마법에 대한 믿음이 조롱의 대상이 되어 미신으로 매도당하면서 기억에서 사라져 가게 되었다.

(p. 304)


이 '마녀사냥'이 단순히 어떤 여성집단의 박해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노동규율하에 철저하게 성역할의 재구조화해 버렸고 이는 여성들을 배제한 새로운 가부장적 질서가 구축되었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마녀사냥이 일어난 이후 재구성된 질서에 대해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의문을 제기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마녀사냥은 아프리카에서도 위세를 떨쳤고 오늘날에도 많은 나라, 특히 나이지리아와 남아프리카처럼 노예무역에 한때 연루되었던 나라에서 분열의 핵심수단으로 지속되고 있다. 여기서도 마녀사냥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자원을 둘러싼 강력한 투쟁으로 인한 여성의 지위 하락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p. 341)


마녀사냥은 불행히도 17세기 이후에도 벌어졌다. 유럽인의 아메리카 정복 사업에서도 마녀사냥이 벌어졌다. 원주민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집단적인 저항을 와해시키기 위해 중세의 마녀사냥과 닮아있는 새로운 마녀사냥이 이루어졌다.  


맑스는 자본주의 이행기에 일어난 시초축적 과정이 잔인하고 폭압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혀냈었다. 

저자인 페데리치는 더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여전히 보여지는 여성의 지위하락의 결과물 또한 시초축적의 과정에 있음을 이 책을 통해 밝혀냈다. 당시 맑스가 외면하고 있던 '여성'을 맑스주의식의 자본주의 이행 서사에 포함시켰으며 '여성' 역시 자본주의 이행의 희생자였으며 오히려 프롤레타리아트 남성보다 더 큰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2019년 현재도 이 질서를 벗어났다고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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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2-28 0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무리를 지어버리셨군요.... 다들 대단하시네요.
나만 쓰레기야.....-_ㅜ

블랙겟타 2019-02-28 10:02   좋아요 1 | URL
너무 자책하실 피..필요는..
syo님은 저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계시잖아요.
저는 한권씩 읽어서.. 하하..;;

다락방 2019-02-28 09: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은 도움이 되네요. 이 글 읽으면서 어제 막 읽기를 마친 혁명의 영점 생각이 나요. 이건 또 이렇게 연결되겠구나, 하는 머릿속의 흐름 같은 게 생기면서, 이렇게 읽기를 반복하면, 좀 어려웠던 혁명의 영점 정리도 가능하겠구나 싶고요. 그리고 우리 같이 읽기 도서이긴 하고 또 힘겹게 여기까지 오시긴 했지만, 블랙겟타님, 이렇게 정리하셨으니 혁명의 영점도 같이 읽으시라 꼭 권해드리고 싶네요. 지금 정리하신 내용이 혁명의 영점에서 다시 한번씩 언급되거든요. 같이 읽으면 좋을 책이에요. 아, 강요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시무룩)

잘 읽었어요, 블랙겟타님.
같이 읽어서 너무 즐거웠고요!! 같이 읽기 너무 좋고, 저랑은 또 다른 글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너무 좋아요.
게다가 다른 사람 글 읽으니 더 정리가 되는 것 같고요.

읽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그리고 3월에도 우리 꼭 만나요. 자주 만나요!

블랙겟타 2019-02-28 11:45   좋아요 1 | URL
네. 저도 다락방님을 포함해 여러분들의 글을 읽으면서 도움이 되었어요. ^^
혁명의 영점도 사실 2월 안에 읽으려고 했던건데.. 오늘 시간이 좀 있어서 최대한 읽어보려구요.
저도 관심있는 분야라서 잘 읽어질 것 같아요. 잘하면 하루 이틀내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는 의미로 혁명의 영점도 곧 글로.. ㅎㅎㅎ

같이 읽는 덕분에 한권 한권 이렇게 읽어갈 수 있는 것 같네요.
저도 같이 읽어서 좋고 같은 책으로 이렇게 이야기 나눈다는 즐거움도 만끽 하고 있네요. :))
책 읽고나서 글을 쓰면서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되더라구요.
글을 쓰는 과정에서 다시 책을 들춰보고 밑줄 긋기한 부분 앞뒤로 다시 읽어보고 모르는 단어는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하면서 그냥 책만 읽었을 때 보다 정리가 한번 더 되었어요.

네. 3월에도 같이 해요!
글로도 자주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