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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얼굴들
황모과 지음 / 허블 / 2020년 6월
평점 :
황모과 작가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작 모멘트 아케이드를 통해서였다. 증강현실이라는 소재를 담으면서 괴로울 정도로 인간적인 감정을 선연하게 들어내는 단편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영상이 쉽게 그려지는 이야기는 흔하지 않다. 그래서 앞으로 기억해둘 작가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그 주에 서평 모집을 봤고, 응모했고, 당첨되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격언 아닌 격언을 떠올리기엔 사놓고 안 읽은 티가 나니 여기까지만 해두기로 하자.
밤의 얼굴들은 여섯 가지 이야기를 모은 소설집이다. SF 지만 SF 적인 요소는 거들 뿐 본질은 잊힌, 사라진, 그러나 분명히 존재했던 것에 대한 지극히 감정적이고 생경하면서도 우리에게 익숙한 것, 잘 알고 있는 것과 어우러져서 묵직하게 다가온다. 제목부터 밤의 얼굴이니 밝은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묵직하고 마음에 맺히는 이야기들이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무덤은 내 삶의 터전이다."
첫 문장부터 강렬한 "연고, 늦게라도 만납시다"는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그리고 과학이 주축인 이야기다. 앞에 두 가지는 쉽게 한 가지 비극적인 사건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저지른 쪽은 부정하고 있지만 당한 쪽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무거운 주제를 작가는 증강현실로 어떻게 남겨진 이들의 상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한편으로 데이터도, 데이터화하지 않았음에도 증강현실에 간섭해오는 잊힌 이들의 목소리를 그려낸다.
시간대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니시와세다역 B층" 역시 잊힌 이들,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게 된 이들의 목소리를 남기고 전하는 것에 유령과 증강현실을 구성하는 데이터. 어느 쪽도 실체는 없지만 그곳에 존재한다는 점이 공통점이고 이 공통점이 만들어낸 결말이, 잊힌 이들의 데이터를 잇는 전달자가 된 소라가 이름을 읽자 보인 결말이 굉장히 인상 깊다. 덧붙여서 때린 쪽은 기억 못 한다의 대표적인 표본 에즈라의 태도가 지금 현재의 어디를 보여주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서 참담하다. 반성을 모르고 역사를 잊은. 소설적인 장치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현실은 역시 씁쓸하다. 물론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작가는 작가 말에 분명히 밝혀둔다. 나 역시도 동감한다. 좋은 사람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 문제지.
잊으면 안 되는 기억을 다루는 또 하나의 이야기 "탱크맨" 에서는 아예 기억을 다룬다. 막 다룬다. 아예 교정시키려 든다. 미래 배경에서 헉 소리가 나게 만드는 작가는 여기서 처음으로 흐릿한 홀로그램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 그럼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거대한 탱크를 맨몸으로 막아서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선명함을. 이 단편이 부디 중국에서 출판되기를 바랄 뿐이다.
갑작스럽지만 증강현실이 실용화되고 있지만 왠지 미래 과학의 대표주자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핸드폰 하나로 뭐든 할 수 있는 요즘 이런 소릴 하니 되게 나이 먹은 것 같지만 느낌만 전달됐다면 오케이입니다.
제목에 유령이 나오는 걸 보니 과학과 비과학의 결합이 황모과 작가의 포인트라는 점을 잘 짚은 것 같아 뿌듯하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제일 읽기 힘들었고 아직도 힘든 "당신의 기억은 유령" 동물은 안돼, 동물은...
공감각 데이터 임베딩을 업으로 삼고 있는 무감각하고 무딘 내가 메모리 분열증을 안고 마지막으로 향하는 할아버지와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회상하는 이야기로 갑자기 튀어나온 메모리 분열증이 뭐지 싶은데 아주 자연스럽게 치매 예방을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 도리어 디지털치매를 일으켰다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를 전개가 이어진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유입된 데이터 리즐의 존재. 그의 이야기, 끝. 흐르지 못하고 고여버린 그를 통해 제이는 잃었던 것을 되찾고 끝내 이해하지 못한 이를 추모하며 기억의 일부를 남기는 것.
투명 친구를 기억하는가?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데 투명 친구의 존재를 어떻게 아느냐하면 빙봉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한테도 빙봉같은 친구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기억나지 않더라도 퍽 흐뭇해진다. 빙봉처럼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좀 많이 굉장히 슬프지만. "투명러너"는 그런 투명 친구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마치 오래전부터 전해져온 민화나 전승을 이런 식으로 과거와 미래를 접목시킨 설정이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이번엔 실체는 없는데 약간의 친근함을 더해 제3자처럼 만든 느낌이지만. 제일 훈훈한 이야기였다.
황모과 작가의 이름을 처음 알게 해준 "모멘트 아케이드"는 훈훈함보다는 오랫동안 엇갈렸지만 실체가 없는 곳을 통해 언니와 동생이 오래 묵은 악감정을 씻어내는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여기서도 손으로 잡을 순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에 대해 몸은 의식을 잃고 누워있지만 모멘트 아케이드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동생을 죽이지 말아 달라 읍소하는 언니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작가는 잊히지 않는 것에 대해 방식은 다르지만 꾸준하게 전한다. 잡을 수 없는 것, 지워진 것, 잊힌 것, 실체도 형태도 남기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를 독자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처럼. 다채롭다는 표현보다는 굉장히 공감각적인 글을 쓰는 작가라는 인식이 박히는데 눈을 끄는 작가 이력 중 하나, 오랫동안 만화를 만드는 쪽에 가까웠다고 하니 문장을 읽고 있으면 어렵지 않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유가 그래서인가 싶기도 하다.
사실 표지를 처음 보고 무섭다는 생각부터 했다. 감정이 없는 얼굴과 표정이 없는 얼굴과 아예 얼굴 형태도 아닌 게 껴있기도 하고. 여섯 가지 이야기를 전부 읽고 나서 다시 표지를 보면 첫 페이지를 넘겼을 때와 다른 느낌을 받게 되리라는 확신과 그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한다는 말로 끝을 맺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