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보는 자들의 밤
빅터 라발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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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엄청나게 사랑하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는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와 아들을 두고 돌연 사라져 버린다. 도대체 왜?

아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자는 그토록 사랑하던 아이를 죽이고 잠적한다. 도대체 왜?

얼핏 생각해도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동시에 소설이 가질 수 있는 아주 좋은 질문들이다. 정말 궁금하지 않은가. 한눈에 반해서 8년 만에 겨우 첫 데이트에 성공한 뒤, 오매불망 사랑해 마지않던 아내와 아이를 두고 어느 날 돌연 사라져 버리다니. 운명과도 같은 만남 뒤에 이어진 진정한 사랑을 거쳐, 마침내 남편으로 맞이한 남자와의 사이에서 극적으로 태어난 아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아이를 다른 사람도 아닌 아이의 엄마가 죽여야만 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고. 빅터 라발의 <엿보는 자들의 밤>은 사라져 버린 남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아이를 죽인 여자의 남편인 아폴로, 주인공 아폴로가 사라져 버린 아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어떤 진실들에 관한 이야기다.

음, 다 읽고 난 뒤, 감상을 뭐라고 해야 할까. 우선은 매우 재미있다. 소설 치고는 매우 두꺼운 데도 불구하고(600페이지), 줄거리가 흡입력 있고 문장이 매끄러워서 굉장히 잘 읽힌다. 인물들의 캐릭터도 살아있고 독자로 하여금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사실 처음에 읽을 때는 엄청 흥분했다. 오오 이런 엄청난 소설을 또 발견했다!! 하고 기뻐 날뛸 뻔하다가..... 500페이지 넘어가면서 급 시무룩... 해져버렸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내게 있어서는, 미안한 말이지만 떡밥은 엄청나게 많이 뿌렸는데 회수가 잘 안 되는, 그런 류의 이야기였다.

사실 떡밥들이 아예 회수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름 다 회수를 하긴 하는데, 그걸 논리 정연하게, 납득 가능하게 수습하는 게 아니라 판타지스러운 어떤 설정으로 퉁쳐버린다. 그러니까 500페이지 정도까지는 현대물, 리얼 물이었다가 갑자기 비밀이 해결되는 지점부터 스티븐 킹의 환상소설 같은 분위기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르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냥저냥 받아들일 수도 있긴 한데, 이 전환이 도무지 부자연스럽다는 것도 문제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뭐 미국에서 여러 가지 상을 휩쓸고 엄청난 찬사를 많이 받았다는 걸 보면 나만 그런 건가 싶기도 하지만.

하지만 그런 부자연스러운 전환을 감수할 정도로 앞의 500페이지가 엄청나게 재미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읽으면서는 굉장히 즐거웠다. 이전에 읽었던 책, <베스트셀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베스트셀러들의 공통점이 설명된 적이 있었는데, 그런 면에서 이 책 또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요소를 빠짐없이 갖추었다. 전개가 빠르고,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다루고 있다는 점,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흥미를 느낄만한 낯설지만 친숙한 이야기가 세세하게 소개된다는 점, 주인공이 이방인이자 이단아로서의 기질을 갖춘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점, 등등.

결말에서 너무 급격한 전환이 일어난다는 것 외에 이 소설이 가진 또 하나의 치명적인 단점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것도 있다. 싱글맘, 여성문제, 직장 내 성적 위계, 육아의 부담감, 현대 기술의 위협, 인종문제 등등등. 작가인 빅터 라발은 어느 날 페이스북에 습관적으로 올리던 아이 사진의 좋아요 리스트를 살펴보던 중, 좋아요를 누른 사람 수백 명이 자기가 직접 알지도,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만약 그들 중 누군가가 혹 자신의 아이를 해하려고 할 때는 과연 어떡해야 하나 하는 공포심을 느끼고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그러므로 소설은 인터넷과 정보기술이 발달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위협을 굉장히 과장되게 그려내고 있는데, 그 부분도 좀 납득이 잘 가지 않았다. 인터넷에 매우 능숙한 인물이 나오는데 뭐 해킹해서 남의 계좌에서 돈도 마음대로 넣었다 뺏다 하고 남의 집에 카메라도 자유자재로 설치하고 별 짓 다한다. 근데 그러면서도 엄청 가난뱅이처럼 살고 있다는 것이 참.... 뭐랄까. 아무튼.

그러나, 그렇게 구멍이 많고 뭔가 미흡한 구석들이 있음에도 전반적으로 매우 훌륭하고 재미있는 소설임은 부정할 수 없다. 500페이지까지는 거의 뭐 우와 우와 하면서 봤을 정도니까. 그리고 또 하나, 그와 별개로 이 소설의 매우 흥미로운 지점은 작가 자신이 흑인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주인공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들이 흑인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뭐 흑인 캐릭터가 이제껏 한둘이었냐 그게 뭐가 흥미롭냐 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읽으면서 인물들이 ‘흑인’이라는 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부분이 참 재미있다. 분위기, 행동, 생각, 말투, 등등.

그렇다고 백인으로 느껴진다는 건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아예 흑인이든 백인이든 아시아인이든 어떤 인종으로서의 색채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겠다. 그런 와중에 중간중간 흑인 어쩌고 하는 대사가 나오는 걸 보고 아 맞다 이 사람 흑인이었지,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 스스로가 그동안 얼마나 흑인의 스테레오 타입에 젖어 있었는지를 여실히 느꼈다. 그동안 어떤 전형성을 갖춘 흑인 캐릭터만 접하다가 막상 그렇지 않은 흑인을 보니 흑인이라는 게 쉽사리 연상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최근의 인어공주 흑인 배우 캐스팅 논란이 다시금 떠올랐다. 우리가 어떤 캐릭터나 이야기를 생각할 때 인종, 성별, 직업, 외모 등에 있어서 얼마나 고정관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최근 몇 년간, 사회의 여러 층위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특히나 그 정치적 올바름은 예술 분야에서 가장 강하게 이야기되었고, 그로 인해 비판도 많았던 것으로 안다. 정치적 올바름이 창작의 자유를 제한한다거나, 예술의 지평을 좁힌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인어공주를 앞으로 영원히 흑인 배우만 해라, 제임스 본드는 앞으로 무조건 여성이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겠으나, 여성 제임스 본드, 흑인 인어공주, 남성 신데렐라 등등, 얼마나 매혹적이고 재미있는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함으로써 우리는 기존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전복시키는 과정을 거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오히려 더 다양한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다. 이 소설 역시 흑인 작가가 썼기에 이런 흑인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있었겠지만, 아무튼 이런 ‘평범한’ 흑인, ‘평범한’ 아시아인 등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난 인물들이 점점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여간 뭐, 여러모로 흥미롭고 즐겁게 읽은 소설이지만 후반부 100페이지 때문에 뭐라 딱 집어서 말하기는 어려운. 그래도 앞으로 더 알아보고, 읽어보고 싶은 그런 작가였다. 스티븐 킹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대략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듯. 모리스 샌닥의 동화와, 북유럽 신화와, 천재 해커와, 아이 돌보기의 고됨과, 중고책 상인의 애환과, 빛나는 사랑이야기와 기타 등등. 여러 가지가 엄청나게 버무려진 즐거운 소설이었다. 그중 몇 가지는 좀 빼도 되지 싶은, 아니 빼는 게 더 나았지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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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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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땅에 홀로 남겨진 7살짜리 소녀가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으며, 얼마 되지 않아 4명의 형제자매들도 차례차례 떠나버렸다. 결국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넷째 오빠 조디마저도 아버지에게 혁대로 두들겨 맞은 어느 하루, 꼭 살아남아야 해, 라는 말을 남기고선 소녀를 남겨두고 홀로 떠난다. 매번 술에 취해 돌아오던 무서운 아버지도 언제부터인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제 소녀는 완전히 혼자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짐승과 벌레들이 가득한 습지에서.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모든 사람에게 버려졌던 한 소녀의 이야기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던 한 소녀가 고독과 멸시를 딛고 일어서서 끝끝내 살아남고 무언가를 이루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 기본적으로는 성장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다. 본래 생태 연구자로 학술서적만을 집필하던 델리아 오언스는 70세가 넘어서 첫 픽션인 이 작품을 발표했는데, 알다시피 70세라면 소설가로서 데뷔하기엔 상당히 늦은 나이다. 당연히 사람들에게 주목받기도 어렵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묻혀버릴 줄 알았던 이 소설이 북클럽을 운영 중인 배우 리즈 위더스푼에 의해 우연히 발굴되었던 것이다. 그 뒤 입소문을 타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유명해진 다음 아마존에서 1위를 차지하기까지 했는데, 페이스북에서도 후기를 몇 번 보았을 정도이니 현지의 반응은 아마 엄청났을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베스트셀러를 무시하지만 대중은 생각 외로 냉정하다. 특히 경영경제나 자기계발서가 아닌 소설 분야는 더 그러하다. 마케팅 기술로 베스트셀러에 올릴 수는 있어도 책 자체가 별로면 오랫동안 그 자리를 유지하기는 힘들다는 말. 사실은 북클럽 추천 같은 것을 잘 믿지 않는 편이지만, 역시나 유행하는 것은 너무 궁금하므로 결국 읽어보게 되었는데.

소감을 말하자면 우선 매우 재미있다. 잘 쓰인 소설은 역시나 페이지가 빠른 속도로 넘어간다. 재미없으면 당장 덮어주겠어 하면서 경계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다가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늪지에서 시체가 발견되어 소란스러워지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7살의 어린 카야가 온갖 역경을 헤치고 홀로 버티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이야기와 살인 사건의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이 17년의 시차를 두고 조금씩 맞물려서 돌아간다. 누가 남자를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밝혀지는 부분에 이르면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그러므로 성장소설뿐만 아니라 미스터리 추리물, 법정소설의 느낌도 나고, 소녀의 사랑이야기가 등장하는 부분은 연애소설 같기도 하다.

다만 읽으면서 요즘 나오는 소설들 같지 않고 ‘옛날 소설’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 뭐 헤밍웨이니 피츠제럴드니 하는 고전 명작 정도까지는 아니고 1980~90년대 유행했던 미국 소설의 느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문체와 캐릭터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예를 들어 이런 대목들.

“테이트 부탁이야, 나를 잊어야 해.”
“한 번도 너를 잊은 적 없고, 앞으로도 잊지 않을 거야, 카야.”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잖아. 난 남들과 어울릴 수가 없어. 그 세상의 일부가 될 수 없단 말이야. 부탁이야, 이해가 안 돼? 무서워서 아무하고도 가까워질 수가 없어. 못 하겠어.”
“그럴 만도 해, 카야. 하지만....”

또는 이런 문장들.

“테이트는 아버지가 말한 진짜 남자의 조건을 생각했다. 거리낌 없이 울 수 있고, 심장으로 시와 오페라를 느낄 수 있고, 한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다.”

이런 문장들을 어디서 봤더라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청소년기에 열광했던 시드니 셸던 책들이 주로 이런 느낌이었다. 주인공 캐릭터도 그렇고. 플롯의 전개도 그렇고, 문장도 그렇고. 물론 저자의 나이(70세)가 나이인만큼, 또 소설의 시대적 배경(1960년대)이 배경인만큼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인물들의 캐릭터가 매우 전형적인 것 또한 사실이다. 마음속 깊이 외로움을 가지고 있는 숲 속에 사는 소녀, 소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감출 수 없는 야성미, 그리고 그녀를 잊지 못하는 남자들, 그들에게서 상처 받고 싶지 않아 가시를 세우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소녀의 마음.

그런 요소들이, 그런 소녀의 ‘성’을 다루는 방식이, 너무나, 너무나, 예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물론 소녀가 수동적이라거나 순종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가 여성혐오이거나 한 것도 아니고. 사실 주인공 카야는 죽을 뻔하던 위기 상황에서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했고, 자신을 해하려는 자들로부터 스스로 지켜낸 용감한 여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의 ‘독립적인 성향’마저도 80-90년대에 등장하던 여성 캐릭터들 분위기가 난다는 것. 뭐 좋게 말하면 고전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물론 이 역시 저자의 나이와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지점이기는 하다.

하여간 비록 그런 ‘전형성’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와 별개로 재미있는 소설은 역시나 재미있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7살짜리 어린아이가 홀로 살 궁리를 해나가는 모습, 하나하나 무언가를 이루는 과정은 마치 <대지>와 같은 농경 소설(?)을 연상시키며, 법정에서 공방이 이루어지는 장면은 초창기 존 그리샴 작품들처럼 흥미롭다. 또한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또 사랑을 키워나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시드니 셸던에 버금간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시들은 기품 있고 늪지의 생태를 묘사하는 장면들 역시 굉장히 아름답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대중소설을 즐겁게 읽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대부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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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주 오래전에 신점이라는 걸 한 번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졸업하고 취직 전 잠깐 다른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였으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생각해보니 아아아주 오래전까지는 아니네. 물론 처음부터 가려고 해서 갔던 것은 아니었고.

인턴은 나를 포함해서 총 3명이 채용되었는데, 인턴보다는 거의 비서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각자 임원 한 명씩 배당받아서 옆에서 딱 붙어서 시중을 들었다. 그렇게 임원실이 있는 곳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애초에 평직원들은 거의 만날 일이 없었고, 그러면서 같은 층에서 근무하던 행정 업무를 담당하던 몇 살 연상의 계약직 직원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었다. 점심도 같이 먹고 가끔 퇴근 후 디저트 같은 걸 먹으러 가기도 하고.

꽤나 오래전, 아주 잠깐 같이 했던 사이라 사실 지금에 와서 정확한 디테일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어떻게 생겼었고,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하는 것 등등. 오직 남아있는 것은 같이 신점을 보러 갔던 기억뿐.

그녀는 늘 친절하지만 미묘하게 악의가 섞여있는 타입으로(누구나 한 명쯤 이런 사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웃으면서 은근 미운 말을 한다든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묘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예를 들어 당시 만나던 애인이 취직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근데 남자친구가 첫 월급 받아서 뭐 사주진 않았나 보네? 하긴, 남자들은 마음 없으면 돈 안 써. 걔랑 결혼까진 힘들겠다.”라는 식으로 말을 한다든지.

아니 애초에 결혼 자체를 할지 안 할지 하고 싶은지 아닌지 모르는데 대체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고. 명확한 적개심이 아니라 더 기분이 나쁜 그런 종류의 미묘한 악의.

그때는 지금보다도 더 어려서 뭘 잘 모르고, 어차피 잠깐 만날 사이이기도 하고 해서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지만, 도대체 왜 저럴까 싶은 생각은 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지만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은 사람 특유의 어떤 마음이 그런 식으로 표출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그 마음은 주로 결혼에 대한 집착과 엮이곤 했다.

그녀는 타인의 애정사나 연애 문제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나를 포함해서 다른 인턴들의 연애 문제에 굉장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거기에 일일이 코멘트를 했는데, 그런 코멘트의 끝은 대부분 비슷하게 끝났다. “어휴, 나도 결혼을 하려고만 했으면 벌써 몇 번은 했을 거야.” 그러면서 결혼 직전까지 갔다가 헤어졌던 옛 애인들의 단점을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녀가 고작 30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무슨 일이든 결혼으로 귀결시키는 그녀의 집착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역시나 인생의 어떤 전환점으로서 결혼을 바라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마치 결혼을 하면 인생이 뭔가 풀려나가고, 결혼을 하지 못하면 지금 이대로 계속 꼬여있고 하는 식으로. 요즘에 와선 상상도 못 할 이야기들이지만, 아무튼.

하여간 분명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만 또 이상하게 친밀하게 굴어서 밀어내기는 어려웠던 그녀가, 어느 날 퇴근 전에 다가와서는 같이 신점을 보러 가자는 것이다. 압구정에 아무나 만나기 힘든 유명한 도사님이 있는데 자기가 무려 6개월 전에 간신히 예약을 잡았다나. 그런데 같이 가기로 했던 친구가 못 가게 됐다면서 너무 좋은 기회라 아까워서 그러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러겠다고 했다.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것도 있고 궁금한 마음도 컸다.

퇴근 후에 같이 지하철을 타고 압구정에 가서 로데오 거리를 지나 주택가 골목 안 쪽으로 굽이 굽이 들어갔다. 그러고서 그 ‘도사님’을 만났다. 이 도사님을 만난 부분도 지금은 흐릿해져서 거의 가물가물한데, 그녀의 “저는 결혼을 언제쯤 할까요?”라는 질문에 그 도사님이 “음... 못할 수도 있겠는데?”라고 답했던 것만은 기억난다. 옆에 앉아있던, 결혼 얘기는 묻지도 않았던 나에게는 의외로 빨리 할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유명한 도사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이다. 애초에 “할 수도 있다” 혹은 “할 것 같다”는 건 엄청나게 애매모호한 여지를 남긴 것 아닌가.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신점을 보고 나오는 길에 그녀가 했던 이야기였다. “용하다고 하더니 다 헛소리 같아. 다른 사람한테 가서 다시 한번 봐야겠어.”

오래된 이 이야기를 꺼내게 된 이유는 이언 매큐언의 신간 <검은 개>를 읽은 뒤 ‘믿음’과 ‘영적인 존재’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언 매큐언은 본래 서사의 제왕이라 불릴 만큼 서사를 구축하고 그걸 밀어나가는 힘이 대단한 작가인데, 이 <검은 개>는 굉장히 예외적이게도 서사, 즉 스토리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사위가 장인과 장모에 대한 회고록을 쓰면서 그들 두 사람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깨닫는 것이 전부다. 읽는 사람에 따라 엄청나게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같은 사안을 놓고 캐릭터들이 계속 토론과 논쟁을 하는 터라 거의 철학 서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논쟁은 대부분 믿음과 이성의 대립에 관한 것이다. 장인 버나드의 경우 이성의 힘을 믿고 과학과 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반면 장모 준은 영적인 관념을 중요시 여긴다. 당연히 많은 면에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처음에 열렬한 사랑에 빠졌던 두 사람은 계속 지지부진한 갈등과 싸움을 거듭하고, 결국 떨어져서 살게 되는데, 그런 와중에도 서로에 대한 집착이나 애정을 끝끝내 포기하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세상에는 사랑하는 감정과는 별개로 정말 서로 너무나 안 맞는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들 사이에 어떤 식으로 갈등이 발생하는지를 굉장히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그들이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는, 즉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이 ‘믿는 인간’, 그리고 ‘믿지 않는 인간’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에 버나드 쪽에 훨씬 더 가까웠던 사위 제레미가 버나드는 몰랐던 준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조금씩 생각이 변화하는 과정이다. 그렇다고 믿지 않는 인간이 믿는 인간이 되는 것까지는 아니고. 믿지 않는 인간이 믿는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한다고 해야 할까.

이것은 아마도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와도 일치할 터인데,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처럼 느껴지는 이언 매큐언이, 어떤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 이들의 생각에 뭔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해서 굉장히 흥미로웠다. 제레미는 준이 영적인 것, 믿음, 등등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진저리를 치고 짜증을 내지만, 후에 준의 그러한 믿음의 배경에 간단한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무엇이 있었음을 깨닫고 묘한 상념에 빠진다.

극 중에서 버나드는 사위에게 준의 영적인 신념을 두고 “나는 곤충 한 마리를 죽였다고 자연이 뱃속의 아기에게 복수할 거라고 믿는 기분은, 진심으로 믿는 기분은 어떤 걸까 상상해보려고 노력했어. 준은 너무 진지했어.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로. 그런데 나는 솔직히 상상이 안 됐어. 마법을 믿는 그런 생각이 내겐 너무나 생경해서...”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비록 버나드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소설에서는 마지막에 이르러서 준이 그런 믿음, 어떤 영적인 성향을 지니게 될 수 없었던 배경이 제시된다. 그걸 보고선 나 역시 어느 정도 준을 이해하게 되는 측면이 있었다.

나는 오래전 신점을 보러 갔다가 나오는 길에 그녀가 했던 말을 듣고서도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점을, 사주를, 타로를, 아무튼 일반적으로 ‘미신적’이라고 불리는 어떤 행위들의 근간에는, 사실 ‘믿음’보다는 ‘희망’ 쪽이 더 섞여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흔히 사람들은 미신이나 사주팔자 혹은 각종 종교를 가진 사람을 ‘믿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진짜 ‘믿음’이라면 그 믿음에 근거하여 도출된 결과, 즉 전달자의 말을 백 퍼센트 수긍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는 그렇지 않고,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이 나올 때까지 찾아다니는 것을 보면 결국은 믿음보다는 희망의 문제에 가깝다고 봤던 것이다.

<검은 개>를 읽고 오래전의 그 일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문득 기존에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어떤 ‘믿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물론 그때의 그녀와는 별관계 없는 일이지만, 변화를 직접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 일지 몰라도, 그 씨앗을 잉태시키는 것은 결국 ‘믿는 사람들’ 인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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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솔로몬 왕 앞에 두 여인이 아기 한 명을 데리고 찾아와 서로 자기가 진짜 엄마라며 다투기 시작한다. 솔로몬은 아기의 양팔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두 여자를 한동안 지켜보다가 조용히 해결책을 내린다. 아기를 반으로 갈라 여인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라. 그러자 한 여인이 울면서 저는 아기의 엄마가 아닙니다, 그냥 저 여인에게 아기를 주소서,라고 나선다. 그 모습을 본 솔로몬은 아기의 ‘진정한’ 안위를 걱정하는 그녀야말로 ‘진짜’ 엄마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결국 ‘진짜’ 엄마는 아기를 되찾는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솔로몬 왕의 명판결에 관한 이야기다.

어릴 때는 솔로몬 왕의 지혜에 감탄했다. 그래! 엄마라면 당연히 저런 모습을 보였을 거야. 정말 대단한 판결이로군!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문득 저 판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물론 아기를 먼저 포기했던 여인이 더 심약하거나, 혹은 정말로 아기를 더 사랑한 사람일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기를 더 사랑한 사람이 반드시 아기를 직접 낳은 엄마여야만 하는가? 솔로몬이 ‘진짜’ 엄마라고 판결했던 여인이 아기에게 더 좋은 엄마가 되었을 수는 있으나 그녀가 실제로 아기를 출산한 생물학적 엄마였는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직접 낳지 않았어도, 어쩌면 아기를 더 사랑했을 수도 있으니까.

예전에, 그러니까 임신이나 출산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던 시절에 나 역시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모성애라는 특별한 감정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위기 상황에 처하자 괴력을 발휘해서 차를 들어 올리고,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 아기를 안전한 곳으로 던지고, 총과 칼에 맞아가면서도 아기를 감싸 안아 보호하고, 기타 등등. 모성애를 다룬 위대한 신화를 보고 자란 나 역시, 엄마가 되면 그런 천부적인 감정이 자연스레 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아보며 겪은 일들은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묘사되는 것처럼 임신 시절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에게 말을 거는 행복한 임산부는 없었다. 임신 자체가 싫고 불행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출산이 아주 임박하기 전까지는 그만큼 뱃속에 든 어떤 ‘것’이 나의 ‘아기’ 라거나, ‘생명’이라거나 이런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출산을 기다리는 것도 아기를 빨리 만나고 싶은 기대감보다는 신체적 불편함을 빨리 끝장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조리원에서 봤던 몇 가지 광경도 생각난다. 전부 똑같아 보이는 빨간 신생아들이 네모나고 투명한 플라스틱 침대에 눕힌 채 나란히 늘어서 있는 장면. 엄마들은 신생아실의 커다란 유리창에 달라붙어 각자 자신의 아기를 찾아보곤 했다. 정말 특징이 뚜렷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엇비슷하게 생겨서, 엄마들조차 아기 발목에 붙은 이름표를 보지 않으면 누가 누군지 잘 알아보지 못했다. 남의 애는 물론이고 가끔씩은 자기 애 조차도. 젖을 먹이라는 연락을 받고 수유실에 앉은 엄마들은 아기의 작고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아주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눈길을 하곤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당시 그 무한한 애정의 증거가 오로지 발목에 달린 이름표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그 사랑과 애정은, 그냥 막연한 ‘믿음’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지녔다고 믿어지는 어떤 존재에 대한.

물론 나는 지금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고, 이런 특별한 감정은 다시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이런 감정들이나 특별한 끌림이 임신 단계부터 내재되어 있거나, 처음부터 특별하게 각인되어 있었다기보다는, 기르면서 조금씩 쌓였다고 믿는 쪽이다. 밤을 새워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열이 올라 보채는 아이를 안고 거실을 수십 바퀴 돌고, 목도 가누지 못하는 아기를 조심스레 안고 비누거품으로 씻기고, 30분에 한 번씩 일어나 아이의 체온을 재보고, 하루 종일 기저귀를 갈고 하는 그 매일매일이 누적되어서 만들어진 감정이라고.

한편으로는 ‘천륜’이라거나 혈육의 이끌림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해외에 입양을 갔는데 ‘진짜’ 엄마를 찾고 싶다고 고국을 찾는 2세들의 모습이라든가, 혹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기를 기를 수 없었거나, 혹은 아예 의도적으로 아기를 포기했던 사람들이 아주 오랜 시간 뒤에 문득 성인이 된 아이를 보고 싶어 한다거나 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나 인간 또한 생물의 한 종류로서 번식의 욕구가 남아있고, 자신의 유전자를 지닌 존재에 대한 어떤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구나 싶은 생각도 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모성애’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실레스트 잉의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는 오래된 솔로몬의 판결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소설이다. 아기를 버렸던 사람이 다시 아기를 되찾겠다고 나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가난한 중국인 노동자 베베는 남자친구를 따라 미국에 왔다가 그의 아이를 임신한다. 하지만 그는 임신한 그녀를 두고 중국으로 돌아가버리고, 혼자서 아이를 낳은 베베는 소방서 앞에 두 달 된 아기를 두고 온다. 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잣집 가정에 입양되었고, 온갖 보살핌을 받으며 편안하고 안락하게 자라는 듯했지만, 어느 날 베베가 다시 아기 앞에 나타난다. 그때는 아기를 기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직장도 구했고, 먹고 살 수도 있으므로 아기를 돌볼 수 있다고. 그러므로 아기를 돌려달라고.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진다.

만약 소설을 읽지 않고 어떤 사람이 자신이 입양 보낸 아기를 되찾으려 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나는 아마도 몹시 혀를 찼을 것이다. 아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자기가 선택해놓고선 너무 이기적인 것 아냐? 그럼 10개월간 고생 고생한 그 부부는 어쩌라고. 태어나서부터 첫 돌까지의, 가장 귀엽지만 그 이상으로 힘겨운 시기를 이미 두 번이나 겪어보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부모가 느끼는 감정이 어떤지를 잘 알기 때문에, 아마도 저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사람에 어떠한 공감도 동조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게 상식이고, 규칙이고, 세상의 이치이므로. 그러나, 소설을 읽는 것의 묘미는, 상식으로 생각해왔던,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의 이면을 알게되는 데 있지 않겠는가.

사실 이 베베는 메인 캐릭터도 아닐뿐더러, 베베의 재판이 중요한 분기점이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소설의 메인 플롯이라고 할 수는 없다. 주요 인물들은 별도로 존재하며 그 인물들에 얽힌 중요한 이야기들 또한 따로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추리소설의 트릭에 버금가는 책의 핵심 열쇠이므로 이 글에서는 따로 밝히지 않기로 하고. 다만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저 베베의 사건을 비롯하여,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소설이 대부분의 사람이 확고한 결론을 내릴 만한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계속해서 묻고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 이 질문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어머니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생물학적 요인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굉장히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읽는 이를 얼마나 생각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드는가 역시 좋은 소설의 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굉장히 다층적인 방향으로, 계급, 성별, 인종, 유전자 등을 끊임없이 대비시키며 독자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처럼 묵직한 주제를 다루는 많은 소설들과 다른 점은, 이야기 자체가 몹시 재미있다는 것이다. 페이지가 매우 빠르게 넘어간다. 이처럼 재미와 작품성을 고루 갖춘 작품은 확실히 드물다.

생물학적 요인과 사랑의 대결 외에 인상 깊은 점은 ‘불씨’의 이미지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씨’라는 일관된 이미지를 끌고 나간다. 사람들은 흔히 “그 사람이 그럴 줄은 상상도 못 했어.” 혹은 “걔는 그럴 애가 아니야.”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실제로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 불씨가 남아 있는 한 불은 언제든 활활 타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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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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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이나 전쟁이 배경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소설을 읽을 때면 자연스럽게 상상해보곤 했다. 나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할까. 위협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일수록 상상은 더욱 리얼해졌다. 대부분은 고개를 흔들며 아, 난 못해, 그냥 자살할 거야, 라는 것으로 끝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살이 최선일 것 같았다. 일단 굶주림 등 육체적 고통을 견딜 수 있을지 자신도 없고, 강간, 살인, 약탈과 같은 인간성의 말살과 함께 따라오기 마련인 폭력을 나의 나약하기 짝이 없는 멘탈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 상상의 끝은 항상 똑같이 흘러가곤 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죽어버리면, 자살하면, 아이들은 어떡하지? 7살과 3살, 아직 혼자 살 수 없는 아이들.

가끔 신문이나 뉴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가족 동반 자살이 근본적으로는 ‘부모에 의한 자녀 살해’라고 생각하고, 부모가 아이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앞으로 그 아이가 살아갈 모습이 뻔히 보이는데 그냥 두고 떠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전쟁이나 세기말 상황에서는 어떨까. 체계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이는 너무나도 쉬운 먹잇감이 될 것이다. 강간, 살인, 착취. 그런 상황이라면 부모는 아주 쉽게 같이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옳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다만 인간에게는 상상력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만약 죽을 수 없다면, 제 손으로 아이를 죽일 수 없다면, 결국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살아남는 것뿐이다. 아무리 죽고 싶더라도 끝까지.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세기말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아들을 데리고 유랑하는 내용이다. 세계는 멸망했고, 사방은 암흑뿐. 모든 것은 다 타버렸거나 사라져 버렸다. 날씨는 춥고, 먹을 것은 없고, 언제 누가 공격해 올지 모른다. 남자는 아이를 데리고 목적지가 없는 유랑을 계속한다. 목표는 오직 살아남는 것. 더 정확하게는 아이를 지켜내는 것이다. 남자는 계속된 위기 속에서 여러 번 죽고 싶은 상황을 맞이하지만 제 손으로 아이를 죽일 수는 없었고, 결국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자만 아이를 위해서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제가 죽으면 어떡하실 거예요?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 싶어. 나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요? 응, 너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 남자는 아이를 위해 살아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남자를 위해 살아있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결혼해서 직접 아이를 낳아보기 전에, 사람들은 대체 왜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해본 적이 있다. 물론 아이는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유전자를 보존해주는 역할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책임이 따르고, 돈도 들고, 귀찮고, 힘들고, 그런데 왜? 이것은 아이를 둘이나 낳은 뒤에도 마찬가지여서, 그냥 ‘낳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을 뿐 왜 그런지 답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번에 매카시의 <로드>를 읽고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람들은 사랑할 대상이 필요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세상은 너무 절망적이고, 희망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든 이유가 필요하고, 결국 그것은 사랑이라고. 물론 그 대상이 반드시 아이가 될 필요는 없다. 다만 사람에게는 무엇이 되었든 사랑할 대상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자주 죽고 싶어 지니까. 책임감이든, 집착이든, 행복이든, 미안함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으니까.

매카시는 70살 때 늦둥이인 10살짜리 아들이 자는 모습을 보며 이 작품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이미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강연이나 기고 요청 등을 거절하고 세상과 단절된 채로 평생을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는데, 거의 굶어 죽기 직전인 때마다 뜻하지 않은 도움의 손길로 간신히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 너무 자주 절망스럽고 죽고 싶지만, 아이 때문에 결국 죽을 수 없는, 혹은 아이로 인해 계속 살게 되는 그 마음이 읽혀서, 읽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또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 작품이 무조건 힘겹고 암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론 작품 속 인물들은 엄청나게 고생을 하기는 하지만.

작품 속에서 아빠가 거의 절망한 상황에서도 소년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존엄성을 잃지 않는다. 어려운 사람이 보이면 도와주고 싶어 하고, 남의 것을 빼앗을 때 미안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과 극적인 상황 속의 선량함으로 받아들이는 해석도 많다. 실제로 남자는 아이에게 좋은 사람들이 어딘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비록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를 몰라 숨어서 지켜보고 있지만, 어딘가에 반드시 있기는 있다고. 재미있는 사실은 그 말을 한 남자 자신은 스스로는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희망적으로 이야기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아이는 그 이야기를 믿는다. 정말로 믿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믿으려고 한다.

나는 세상이 악으로 가득한 상황에서 악해지지 않으려고 있는 힘껏 버티는 인물들을 좋아한다. 왜 이런 이야기들에 유독 끌리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것은 결국 나 스스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세상은 아주 나쁘고, 세상에는 선한 사람보다 악한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비관적인 세상이지만 어쨌든 악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용기를 얻게 된다. 더 악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세상에는 아직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있긴 있다는 것을 믿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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