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의 날개
아사히나 아스카 지음, 최윤영 옮김 / 미래지향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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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했던 ‘과거의 현재‘를 ‘현재의 과거‘로 다시금 되돌아볼 수 있게 해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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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30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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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하게 쓰여진, 하지만 스스로와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들에 대한,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무지를 정곡으로 찔러 되돌아 보게 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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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 - 20세기 한국사의 가장자리에 우뚝 선 이름들
강부원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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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을 위해 굳이 전력을 다해야 할까?" - 제임스 F. 웰스, 인간은 어리석은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 중 p482, 이야기가 있는 집, 2017.

사전(辭典)적 의미에 따라, '역사'란 당연스럽게 과거의 사건(에 대한 해석)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프리퀄로 되돌아보는 방식의 과거가 존재할 수는 있겠으나, 과거의 특정 시점이 '현재'였었을 당시에 그려볼 수 있었던 '미래'가 (반드시) '현재의 모습'이 되리라,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는 점은, 이전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변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그런 점이 포함되어 --- 마르크스가 주창했던 '역사 발전 단계론'에 대한 위 인용구의 질문이 (혹자들에 의해) 이른바 '마르크스의 역설'이라 (비아냥 어리게) 불리우지요. 그렇다고, 

"역사에 있어서의 필연이란 예측에 따라 결과가 오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따라 소급된 예측으로 구성될 수도 있는 것이다." - 이문열, 영웅시대 중 p675, 민음사, 1984. 

(마르크스의 이론이 틀렸음이 증명된 '현재'에서 주창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승리 - 즉, 자본주의로 인류 역사는 마무리지어질 것이다! - 가 애초부터 역사적 필연이었다라는 주장에도 동의해서는 안 됩니다. 어제까지의 데이터를 포함한 오늘에의 예측 모형을 이용하여 '과거들'의 모습이 옳게 그려진다고 하여, 그 모형이 '오늘'과 '내일'까지도 옳게 그려낼 것이라는 추측은,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측'이 아니라 (사고의 방향이 뒤바뀐) 'backward induction' (혹은 '소급된 예측') 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과하는 오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이와 유사하게,

"근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90퍼센트는 아침마다 일어나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땅을 가는 농부였다. 그들의 잉여 생산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 살렸다. 왕, 정부 관료, 병사, 사제, 예술가, 사색가 … 역사책에 기록된 것은 이들 엘리트의 이야기다.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 p153, 김영사, 2015.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라도 굴러가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성석제, 투명인간 중 p364, 창비, 2014.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현재가 (그것이 각 개인에게 행복/불행 혹은 만족/불만의 대상이건에 상관없이) 지금과 같은 모습의 '현재'가 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의 (의도적인) 노력 혹은 방해가, 각 시대에 맞는 형태로 뒤섞여 깃들어 있다라는 (즉, system에의 변화가 부정기적으로 발생했었다라는) 점을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생각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잊고, '현재'가 마치 과거들로부터 생성된 당연한/필연적 디폴트 값이라 여기는 우(愚)를 범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 시점에서야 '현재'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지만, 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었기 위해선, 수많은 사람들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했었듯 보이지 않는 누군가들에 의한 노력/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 이걸 계속 잊지 않고 새겨내기 위해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것이겠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문자 역사'에 이름을 새길 정도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건 아니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들 …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인물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 여기에 소개된 사람 전부를 20세기 한국사의 주역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최소한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의 생을 크게 변화시키고 감정을 격발한 존재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지금껏 누려온 성숙한 제도와 풍요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주역이며, 일상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가장 앞선 곳에서 적극적으로 노력한 존재들이다.(pp5~6)

책을 읽기 전, 목차에 표시되어 있는 스물 여섯 명의 인물들을 ①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②이름을 알고 있으나, 생애에 관해선 기본적인 내용마나알고 있는, ③ 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 의 세 카테고리로 먼저 분류해보았었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①~③의 분류 속 인물들의 이력이 아닌, 그들이 왜 우리의 역사에 (가장자리에라도)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하는에 대해 , 읽기 전보다는 당연히 (어떤 면에서건)  잘 알게 되었다라는 ('만족'이나 '기쁨'이라고는 표현하지 못하겠는) '사회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성숙해졌음'을 스스로 느껴보았고, 

성석제가 '노력하고 있는 누군가'로 지칭했던 스물 여섯 명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이 책의 부제(副題) 속에 '가장자리'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영화 <라디오 스타> 속의 "스스로 빛나는 별은 없다. 어디선가 빛을 받아서 빛나는 거다"란 대사처럼, 중심부가 중심부이기 위해선 반드시 가장자리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겠죠. 혹은 그 당시엔 그들이 가장자리였을 수 있겠으나, 그들의 존재로 인해 현재의 중심부가 변했을 수도 있다는 …… 그렇게 책은, '가장자리'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간을 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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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을 선택할 수는 있다." - 박주영, 고요한 밤의 눈 중 p123, 다산책방, 2016.

2022년 현재 시점에서도 놀라움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의지를 실현해갔었던 1900년대 초중반 시절 김향안의 삶, '물 좀 주소'라든가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로만 인지되고 있는 한대수의 삶 속의 파격적인 모습, 이전엔 알지 못했으나 이 책을 통해 보다 적확한 문장으로 새로이 다가온 '전태일' 이란 이름이 지닌 의미등을 비롯, 이 책에 담겨 있는 스물 여섯 명의 삶이 --- (일 개인으로서는 거스른다거나 바꾸어낼 수 없었던) 각기 당시의 삶에 주어진 조건들에 (저와 같은) 범부(凡夫) 마냥 그저 순응한 것이 아닌, 본인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때로는 사회가 용인한 '범위'를 뛰어넘으며, 최선의 (감히 '노력'이란 한 단어로는 표현하지 못하겠는) '무엇인가'를 행동에 옮겼던/'전력을 다했던'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이라는 규정 받기에 그 어떠한 부족함도 없겠으나... 

스물 여섯 명의 인물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삶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자세하게 알려지기를 원하는 것이 이 책의 지닌 진짜 의미는 아니지 않을까 합니다. 그 진짜 의미는 아마도, 


"기억되지 못한 기억엔 늘 기억해선 안 되는 '역사적인' 이유가 숨겨져 있다." - 역사채널 e, 역사 e의 김진혁이 쓴 추천사 중, 북하우스, 2013.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

대학입시에서의 낙방이라는 '인생 최초의' 실패를 겪은 후, 혼자 설악산과 동해안을 돌았던 그 때 그 시절, 대학 합격이라는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감정을 비롯한 모든 것을 감추고 제거하겠노라 다짐했었던 저의 그 때 그 시절. --- 제가 살던 목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부천의 고강동에선, 저와 비슷한 연배의 한 사람이 가슴 속 감정을 차마 다 내뱉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해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다라는 사실을, 저와 그가 88년의 서울 올림픽을 즐기지 못했었으나, 그 이유는 (개인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이유라는 점에서) 너무도 달랐었다라는 점을 알게되었다라는 것 ---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역사 속에 감춰져있던/감춰질 수 밖에 없었던 또 다른 역사에 대한 안내가, '가장자리'라는 단어로 수식되어 있는 이 역사 속 인물들에게 주어졌던 '현재'로서의 당시에 대한 (다른 점에서는 '이해'일 수도 있겠을) 반성이, 이 책이 지니고 있는 참된 의미이지 싶습니다.

법치의 근간은 누구나 억울하고 분한 일이 없도록 법률이 사회와 그 구성원을 보호하는 것이지만, 사회적 약자들에게 법은 무섭고 어렵고 멀리 있는 것이기만 했다. 음습한 사회일수록 법은 강자의 '장난감'이거나 시민들을 억압하는 '몽둥이'로 사용되었다.(p135)

"그 모든 일들이 당신과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엄연한 현실로 존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라는 한 역사가의 기록을 인용하는 것조차 주저하게 되는, (그 상황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이 필요치 않은 상황인) '시민들을 억압하는 몽둥이'로 기능했던 대한민국 법치의 현실이 --- 제가 존재했었던 시절의, 제가 알지 못했었던 우리의 역사로 (많은 이들의 '기억'에서는 사라졌겠으나) '기록'되어 있다는 점 또한, 이 책이 독자들에게 건네주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이해의 일 가르침일 것이라 생각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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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 류동민,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중 p109 (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의 서문 중 재인용), 위즈덤하우스, 2012. 

'사회적' 존재란 것이, 일 개인만의 능력이나 노력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될 수 없다라는 점은, 앞으로도 제가 더 배우고 깨쳐야 할 지점이 아닐까 싶네요. 단순한 머리 속 이성으로만 이해해왔던 위 구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 마르크스가 의도했던 바였던가를, 보다 더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 수많은 '노력했던/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책이자, 가볍게 읽어낼 수 있었으나 여운만큼은 가볍지 않게 남는 책입니다.




[1] 네이버 국어사전은 '역사'를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2] 진화학자 스티븐 제이굴드는 “지구 역사의 테이프를 되감아 다시 틀어보라. 인류와 같은 존재도 없을 것이며 전혀 다른 생물군이 나왔을 것”이라 예견했었죠. '충분조건'과 '필요조건'의 치환이 반드시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논리와 유사하다고나 할까요?

[3] 이를 역설이라 규정하는 주장에 대해, '전력을 다한다'라는 전제 하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 일어날/나는 것이다라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의 '전력을 다한다'는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계급들 사이의 투쟁'으로 표현될 수 있겠죠. 이 역설에 큰 의미가 없음은 다음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마르크스는 '대체로 말해', 인류 사회가 원시공산사회 → 노예사회 → 봉건사회 →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 (하지만) 모든 나라나 지역이 이런 단계들을 밟았다든가 밟아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 김수행, 「자본론 공부」 중 pp142~143, 돌베개, 2014.

[4]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역사에 필연이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 p342, 김영사, 2015.

[5] 회귀 모형이 비교적 정확한 '오늘' 혹은 '내일'에의 예측값을 산출할 수 있으려면, '과거-현재-미래' 로 이어지는 time-series 상에 그 어떤 system의 변화도 없어야 한다는 (현실적으로 대부분 깨어지곤 하는) 조건이 충족되어질 때에만 가능해집니다. 

[6] "20세기 한국사의 가장자리에 우뚝 선 이름들"

[7] 저자가 쓴 '대문자 역사'의 의미는, "역사책에 기록된 것은 엘리트의 이야기"란 유발 하라리의 규정과 같은 맥락이겠죠.

[8] "혼인을 반대한 부모와 연을 끊고자 그녀는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꾼다. 서양의 풍습을 따른 것인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김환기의 성을 따오고 이름은 김환기의 아명을 가져다 썼다. 김향안의 결혼과 개명은 여성의 사랑마저 봉건적으로 통제하려는 전통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고, 사랑을 위해 어떤 장애물이라도 뛰어넘겠다는 주체적인 의지의 발현이었다. 단호한 결심과 폭풍과도 같았던 실천을 통해 '변동림'은 '김향안'이 되었다."(p32)

[9] "다른 남자와 재혼한 전 부인이 이혼한 뒤 딱한 처지가 되었을 때, 한대수는 (재혼해 함께 살고 있었던 당시의 부인인) 옥사나에게 전 부인의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한 뒤 셋이 함께 한집에서 산 적도 있다."(p80)

[10] "1970년대 한국 노동 운동을 이끈 핵심 세력이었던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된 것도 그의 죽음 직후였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선언을 남긴 전태일의 분신 이후 청계천에서도 비로소 기계와 사람을 구별했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자는 물론 한국 사회의 시민 모두가 전태일에게 일정한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p210)

[11] "역사란 결국 나를 포함한 우리의 소소한 삶을 세밀하기 기록한 이야기"(p9)

[12] 에른스트 H. 곰브리치, 「곰브리치 세계사」 중, 2010,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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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괴담 - 오류와 왜곡에 맞서는 박종인 기자의 역사 전쟁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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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드러난 사건이나 현상 이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실체가 있다고 의심한다. 사람 위의 사람, 세상 위의 세상, 뉴스에 나오는 모든 기사가, 권력이 말하는 것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정보는 가공하는 조직의 구미에 맞게 교묘하게 재편집되거나 주장하는 바를 가리키기 위해 재배치된다. 그 과정에서 사실이란 왜곡하거나 조작하기 위한 원재료에 불과하다." - 박주영, 고요한 밤의 눈중 p290, 다산책방, 2016

'진실의 진실성'에 대한 문학의 유려한 비판입니다. 이 책의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괴벨스의 명언(?)은 보다 직적이죠. 

거짓말을 오래 하게 되면 진실이 된다. (If you tell a lie long enough, it bocomes the truth.)(p6)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현재에도 역사적 사실(fact)들로 인식되고 있는 총 16건의 사건들에 덧입혀 있는 조작과 오해들을 '괴담'이라 명명하며 그 가림막을 벗겨내고 있습니다. 

저자가 들고 있는 16개의 괴담들이 현재 '진실'이라 믿어지게 된 과정은 다양합니다. ①사소한 실수로부터 비롯된 것들도, ②사실(史實)에 대한 무지 혹은 오해가 낳은 경우도 있지만, ③의도적인 조작으로 인해 탄생된 괴담들도 적지 않다는 점이 꽤나 놀랍더군요.

저자는 ②번의 주인공으로 유홍준과 승효상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일례를 들며, 저자가 유홍준 교수와의 통화에서 유교수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묻자 그가 했던 대답 "모든 사람이 전설을 인정하게 되면 전설이 사실이 되는 것이다."(p201) - 은 (기자가 직업인 저자에게는 물론이었겠거니와) 저같은 일반 대중에게도 사뭇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논리였지요. 적어도 유홍준 교수의 위 언급이 사실이라면, 그는 '객관적인 시선'을 이미 포기한 것이라고 밖에는, 또한 (제 의견이 아니라 발타사르 그라시안이 규정한 바에 의하면) 어리석은 대응이었다라고 밖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또한, 건축가 승효상은 진실이 밝혀지자, 자신의 기존 주장을 정반대로 뒤집는 것으로 나옵니다. 일 개인의 주장이 뒤집혀지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니겠으나, 잘못된 그의 최초 주장만이 살아남아 (순종적인 일반 대중들에게) '사실(fact)'이자 '사실(史實)'로 굳어져 버렸다는 건 큰 문제이겠죠. 

대개 괴담은 맹랑할 정도로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하며 자극적이다. 그렇기에 일반 대중은 '괴담을 인용한 전문가의 주장'에 슬프리만치 순종적이다. 그래서 괴담은 위험하다. 특히 전문가라 자칭하는 사람들이 괴담을 사실인양 내세운다면.(p85) …… 아무런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알지 못하는 전문가, 현장에 엄존하는 지형지물을 무시하고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전문가. 이들이 괴담 생산을 담당한 사람들이다.(p87)

유홍준 교수와 건축가 승효상 각 개인들에게 위와 같은 책임을 묻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권력을 쥐고 있었던 시기에, 자신들의 해석을 현실로 옮겼으며, 그 과정에서 엄청난 액수의 (쓰이지 말았어야 할) 세금이 사용되었다라는 점에 대한 반성을, 또한 여전히 법률과 국가가 쥐고 있는 (정권이 바뀌면서 달라지는 것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진실의 상대성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주어지는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려는 대중의 속성에 대하여는 자각의 경고를 주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게 맞다고 봅니다. 어쨌든, 

①번과 ②번의 경우는, 훗날의 교정으로 (쉽지는 않겠으나) 진실의 실체가 드러나고 또한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의도적 조적이 가미된 ③번의 경우에는 그 실체가 사회에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저자가 이 책에서 들고 있는 예시만을 본다면) 거의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특정한 질서를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인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믿으면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상상의 질서(imagined order)는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상의 질서를 보호하려면 지속적이고 활발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노력 중 일부는 폭력과 강요의 형태를 띤다. … 하지만 상상의 질서는 폭력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일부 있어야 한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중 pp165~167, 민음사, 2015.

저자는 책에서 추사 김정희의 예를 들며, 그가 단순히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권력'으로 존재하고 있다라 주장합니다. 추사와 더불어, 세종이나 다산 등은 흠집을 잡아서는 안 되는 '완성된 위인'이며,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은 그 어떤 변명도 주어질 수 없는 악마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규정은 사실(fact)에 근거하여 완성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부정적입니다. 앞서 읽었던 혁명과 배신의 시대에서 '역사에 대한 객관적 관점'이라는 렌즈로 보았을 때 해당 책의 일부 내용에 제가 동의할 수 없었던 것과 동일한 이유라 이해됩니다. 한 마디로, '그러하다'이기 때문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러하여야 한다'라 믿(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하다'라는 것이죠.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 사실이 아닌 (조작 혹은 무지에 의한) 괴담들은 지금 현재에도 공식적인 교육 과정을 통해, 유발 하라리가 위 인용문에서 언급한 '진정으로 믿는 사람'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미시적인 작은 사실들이 모여서 거대한 역사를 만든다"(p291)라는 저자의 일갈을 뒤집어 보면 미시적인 작은 오해들이 모여서 하나의 전설이 될 것이고, 유홍준 교수의 (객관적이지 못하고 어리석은) 주장대로라면 그 오해가 곧 진실이 되는 것이겠죠.

국민 사기 양양을 참작해 분사(憤死)라 해도 자살로 해두는 것이 타당하다. 분사라 하면 '열사' 칭호는 사용할 수 없다. 현 시기상 애국심을 고취하는 의미에서도 그 사인을 밝힐 필요의 유무부터 고려해보자.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 사건은 더 문제 삼지 않는 것이 어떤가. 이준 씨는 성격상으로 보아서 자살할 수 있는 분이다.(p286) - 이준 열사 추모 단체인 '일성회'가 1956년 이준 열사의 사인에 대한 조사위원회에 요구한 내용

존 르카레의 기가 막힌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주인공 리머스에게 주어진 임무는 적국의 군 지휘부에게 "사실을 사실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리머스가 사실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라는 점을 알게되는 부분에서는 말 그대로의 전율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죠.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이 눈 먼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맹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내는 내용인 겁니다. 그 소설의 메시지를 적용해 본다면,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16가지의 괴담들이, 저자의 주장대로 모두 다 거짓이라면, 그 실체적 진실은 고작 거짓을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작용할 수 있을 뿐, 그 자체로서의 (역사적) 효용은 이미 바래졌다라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 석사 논문에서는 'critical mass'라 적었던 내용은, 말콤 글래드웰의 'tipping point'와 정확히 동일합니다. 집단에 중점을 두느냐, 시점에 중점을 두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티핑 포인트를 완성하는 방법은 소수의 법칙, 고착성의 요소, 상황논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소수의 법칙이란 극소수의 극단적인 사람들이 일을 만들고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고착성의 요소란 쉽고 지속할 수 있는 전염성이 강한 메시지를 던져주라는 것이고 세 번째로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의 행동을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 <괴물과 티핑포인트>, 조선일보 email club 2006.08.26. 기사 중.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핵심이, 위 인용문에 다 들어있지 않나 싶습니다. (티핑 포인트의 긍정적인 활용을 위한 제안인 위 인용문과는 달리) 현재 우리나라에 '사실(fact)이고 사실(史實)'이라 인식되고 있는 수많은 괴담들이 현재의 주류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그 비합리적인 과정들 모두가 위 인용문의 티핑 포인트로 거의 모두 설명이 되기 때문이죠. 

'일성회'의 요구가, 그들이 지니고 있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말이야 '애국심의 고취'라는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만, 까고 보자면 그들의 (경제적이건 비경제적이건) 이익을 위해서로 읽혀집니다. 제가 이 감상문의 초반에 '의도적인 조작으로 인해 탄생된 괴담들'에 대한 오해의 불식이 거의 불가능할 듯 하다라 적은 이유는

"캐즘(chasm)은 혁신자와 얼리어답터를 포함한 초기 시장(early market)과 주류 시장(mass market)을 갈라놓는 지점입니다. 즉, 초기 시장에서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 성공이 그대로 주류 시장까지 연결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캐즘이 생기는 원인은 얼리어답터와 전기 다수의 성향 차이 때문입니다. 얼리어답터가 선도자(visionary)라면, 전기 다수는 실용주의자(progmatist)입니다. 선도자들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포착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신제품을 채택합니다. …… 그러나 실용주의자는 위험을 싫어하기 때문에 제품이 아무리 매력적이더라도, 쓸모가 있다는 완전한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구매하지 않습니다. …… 따라서 캐즘을 건너 주류 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얼리어답터와는 전혀 다른 실용주의자 맞춤형 마케팅 전략이 필요합니다." - 이학연, 「경영을 넷플릭스하다」 중 pp153~155, 넥서스Biz, 2020.

(엄밀하게 보자면 티핑 포인트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겠으나, 무언가 hurdle을 넘어야 한다라는 면에서 보자면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을) '캐즘'의 목표 방향을 반대로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순방향을 목표로 하고 그 캐즘을 뛰어넘는 것도 벅찬데, 일단 캐즘을 넘어선 이들 에게 넘어선 캐즘을 역방향으로 다시 뛰어넘게 하는 것은 그 목표의 설정에서부터 쉬울 리가 없을테니 말이죠. 


"믿음은 논리가 아닙니다. 소망이 되게 하십시오." - 이문열, 영웅시대 2권 중 p717, 민음사, 1984.

목사가 정인에게 세례를 주며 했던 말입니다. 소설에서의 쓰임새는 신앙의 세계에 해당되는 용도였겠습니다만, 이 책 광화문 괴담에 등장하는 인물/단체들의 행위에 대입해 보면, (그들의 어떠한 이익을 위해) 논리가 아닌 소망을 진실로 둔갑시킨 속칭 전문가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억이 현재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명제는 구체적으로 있었던 일, 즉 사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생각했던 바, 즉 의식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과거의 의식을 재현하는 데는 이미 현재의 의식이 개입한다."(p148) …… "일종의 '아름다운 시절'의 이미지는 자기모순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p151) …… "과거를 아름다운 시절로 생각하는 태도와 짝을 이루는 것은 현재는 구질구질한 그 무엇이라는 태도이다."(p152) - 류동민, 기억의 몽타주 중, 한겨레출판, 2013.

"창야에서 사람들은 남들과 같은 말을 하고, 말의 흐름에 동참함으로써 안도했고, 그 안도감 속에서 소문은 소문의 탈을 쓴 채 믿음으로 변해갔다."(p161) …… "방조제가 들어서기 전에는 삶이 건강했고 평화롭고 충만했다고 말할 때, 그들은 그 말의 대부분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더 큰 거짓이 작은 거짓을 눌렀다. 그들의 말 속에서 방조제 이전의 삶은 늘 평화롭고 충만했다."(p241) - 김훈, 공무도하 중, 문학동네, 2009.

사회과학자와 소설가의 표현이 다를지언정,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거짓으로서의 현재'는 동일합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기자인) 저자는 "대수술과 각성"이 필요하다라는, 지극히 기자스러운 (또한 출판되는 책이기에 그러할) 교과서적이고 평이한 수위의 제언만을 남기고 있습니다만, (다시 한 번) 문학의 표현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괴담이 실제 모두 괴담이라는 전제 하에),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의 제 감정을 훨씬 더 정확하게 대변해주고 있다는 의미에서, 더 적절한 결론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하면서도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 존 르카레,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 중 p275, 열린책들, 2009.

무엇이 진실인지보다, 무엇을 사람들에게 진실이라 믿게 하느냐 / 사람들이 믿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세상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이 비단 일반 민중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기를 또한 바라(願)봅니다. 

감상문의 초반에 인용해 놓은, 괴벨스의 "거짓말을 오래 하게 되면 진실이 된다"는 구절 역시 사실은 괴벨스가 한 말이 아닌, 그저 괴벨스가 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는 '괴담'의 하나라는 점. 참 많이도 속으며 살고 있네요.


※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 : 기억의 몽타주」 ·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 순교자」 · 당신들의 천국」 · 근대 조선과 세계」 · 징비록




[1] "진실이라고 확정돼 버린 역사적 가짜뉴스를 필자는 '괴담'이라고 규정했다. ……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친 가짜뉴스들이 필자가 말하는 '괴담'이다. 스스로 권력자가 돼 버린 전문가들이 무책임하게 유통시킨 가짜뉴스들이다."(p11)

[2] "거짓이 진실보다 전파되기 유리한 이유는 … 거짓의 규모와 가짓수 자체가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이다. …… 거짓말이란 현실에 부합해야 한다는 제약이 없으니 존재할 수 있는 가짓수 자체가 엄청나게 많다." - 톰 필립스, 「진실의 흑역사」 중 p29, 윌북, 2020.

[3] "'객관적' … 이 말은 개인적 편향과 편견 너머에 있는 진리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 네이트 실버, 「신호와 소음」 중 p157, 더퀘스트, 2021.

[4] "어리석음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른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실수를 감추고 미련한 자는 그것을 드러낸다." - 로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중 p530, 웅진지식하우스, 2009.

[5]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사실(fact)은 다르게 보이지 않는가. 중요한 것은 무엇이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보여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우리가 딛고 사는 세계에서 해석은 늘 강자들의 몫이었다. 진실의 상대성은 법률과 국가의 이름으로 오용되어왔다." - 손아람, 소수의견의 <작품해설> 중 p439, 들녘, 2010.

[6] "근대사 연구에서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가 '역신뢰(Reverse Credibility)의 역설'이다. 어떤 뉴스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오히려 그 뉴스 주인공에게 신뢰를 주게 되는 역설이다.(Credibility conferred on a speaker ot writer because of the alleged reference's negative ethos) 한국사에서는 역신뢰의 역설이 심각하다. '근대사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문제는 일본이라는 악마(Demon)가 원인'이라고 몰아붙이면 웬만한 대중적인 논쟁은 종식되고 공감대가 형성돼 버린다. …… 이게 한국 근대사에 조악하고 편협한 가짜뉴스와 괴담이 횡행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다."(pp 7~8)

[7] "문화 분야에서 대표적인 영웅은 추사 김정희다. 김정희는 '명필가요 명문장가요 뛰어난 정치가며 예절바르고 인격적으로도 완성된 위인'이다. 아니, '이어야 한다'라고 사람들은 믿는다. …… 그래서 김정희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권력이다. …… 김정희와 세종과 정약용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전문가로 인정받는다. 그 전문가들은 이제 스스로 권력자가 된다."(p9)

[8] "​기억을 되살려 내야 할 사람에 대한 현재의 평가가 그것을 돌이키는 사람들에게 기억을 왜곡 · 편집하게 한다. 가령 유명한 학자가 된 사람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기억은 "어릴 때부터 머리가 남달리 뛰어났다"라는 식으로 편집되곤 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학자로 성공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학자에 어울리는 특성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 결과 자신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몇 가지 조각들을 사후적으로 주어진 논리에 꿰어맞추려 하기 마련이고 그러한 시도들은 대부분 성공한다. 왜나하면 그들의 기억 속에서 대상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면서 말하는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편집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류동민, 「기억의 몽타주」 중 pp163~164, 한겨레출판, 2013.

[9] 존 르카레,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중 p243, 열린책들, 2009.

[10] 존 르카레, 위의 책 p270.

[11] 이학연의 표현을 빌자면 "완전한 확신"을 가진 이들이 되겠죠.

[12] "의사는 냉정해야 한다. 의사는 환자나 보호자를 위로하는 대신에 병명과 경과, 향후 조치를 냉철하게 설명해야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위로는 위한 괴담과 조작이 아니다. 아프지만 견뎌야 하는 대수술과 각성이 필요하다."(pp286~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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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한 일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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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 시작인 창세기에 실려 있는 다섯 편의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패러프레이즈'격의 소설들입니다. 비교적 (비신앙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①소돔과 고모라("소돔의 하룻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유명할 듯한) ②아들 이삭을 번제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사랑이 한 일"), 그 외에도 ③야곱이 형 에서를 가장해 아버지 이삭에게서 축복을 가로채는 이야기("허기와 탐식"), ④아브라함의 아이(이스마엘)를 가졌던 하갈의 이야기("하갈의 노래"), 마지막으로는 ⑤야곱이 꿈 속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던 이야기("야곱의 사다리") 들이, 작가가 이 책을 통해 해낸 패러프레이즈의 소재들입니다. 이들 중에서도,

이 소설집은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에 대한 <창세기>의 일화를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태어났다. …… 나는 바칠 것을 요구하는 신이나 그 요구에 순종하는 아버지 대신 그 요구에 의해 제물로 바쳐지는 아들의 심정 속으로 들어가 이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이해하고 믿으려고 했다.(p244) - <작가의 말> 중

비기독교인에게는 물론이고 (저를 포함한) 기독교인들에게도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의 기준에서 평가한다면) 결코 쉬울 수 없을, (그래서 가장 유명하기도 혹은 가장 악명 높기도 한) '아케다'에 대한 이해가, 작가 스스로에게도 하나의 도전이었던 듯 합니다. (이 책에 담겨 있는 창세기의 다섯 이야기들 모두가 어느 정도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해되지 않는 면들을 갖고 있습니다만, 단연코) 아브라함의 '아케다' 사건은 설정 측면에서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보다 현실적인 감정 이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도, '과연 아브라함은 일말의 고민조차 없이 신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일까?'란 도전적 질문을 던져 주고 있지요. 

우선, 이 '아케다'에 대한 후대인들의 (제가 읽어 본) 비판들을 적어 보자면 ---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소설 카인을 통해 "대단한 개자식"이라는 짧은 욕설 한 마디를 적는 것으로, 외려 그 황당함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크리스틴 스웬슨은 "사라와 이삭이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라며, 행위의 주체자인 아브라함이 아닌 (직접적 피해자였던) 이삭과 (간접적 피해자였던) 사라의 입장을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 모두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신을 비난하고 있지요.

"결국 신이 농담을 했던 것이다. 신은 아브라함을 '유혹하고' 믿음을 시험했을 뿐이다. 현대의 도덕주의자는 그런 심리적 외상을 아이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의 도덕 기준들로 보면, 이 수치스러운 이야기는 아동 학대이자,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핍박이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때 나오는 것 같은 변명이 처음으로 기록된 사례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중 p365, 김영사, 2007.

위와 같은 비난/비판에 대한 기독교의 공식적인 답변이 있을 리 만무할 듯 하나, 일단 (모태신앙인이시자 여전히 성경을 매일 읽고 계시는) 제 어머님께 여쭤본 바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대변되는) 우리 인간을 보다 더 굳건케하시려는 뜻을 보이신 것이라라는 (제 이해가 정확한지는 자신 없으나) 설명을 들었습니다. (기독교의 공식 의견은 아니겠으나, 한 목사님의 설명을 링크 걸어놓겠습니다. " "'아케다'와 하나님의 외면")

"성서의 역사는 일어난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보도로서 기록된 것이 아니다. …… 성서는 신앙의 책으로서, 삶의 모든 경험을 신앙의 눈으로 해석한 신앙인들이 쓰고, 베끼고 편집한 것이다. 성서가 말한 대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개연성이 높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사실에 가깝든 가깝지 않든, 성서의 이야기들은 예외 없이 신앙의 전승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크리스틴 스웬슨, 가장 오래된 교양 중 p56, 사월의책, 2013.

제 어머니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신앙의 눈을 제가 갖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비신앙인들에게도 (적어도 그럴듯하게정도로는) 이해시킬 수 있는 어떤 인간적 관점의 설명/해석이 궁금했었었고, 작가 이승우의 소설 <사랑이 한 일>로부터 기어이 "이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대한 '이해'의 일 가능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를 읽고 쓰는 행위는 일종의 '게임'이다. …… 역사적 상상력이 동원된 게임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상상 게임'이라 불릴 만하다. '상상 게임'을 하는 데는 팩션이 빠질 수 없다. 내가 말하는 팩션은 사실과 허구를 적당히 버무리는 것이 아니다. 허구라 해도 역사적 상상이 빚어낸 허구라 하겠다. …… 역사적 지식을 통해 얻어진 상상이 개입된 허구는 말 그대로의 허구가 절대 아니다. …… 이 경우의 허구란 깨진 청자 조각과 조각 사이를 이어주는 접착제 같은 것, 달아난 부분을 메워 항아리의 원형을 보여주는 보철 같은 것이다." - 백승종,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 중, 지식의풍경, 2000.

기에 실린, 다섯 편의 창세기 속 이야기들에 대한 작가 이승우의 '패러프레이즈'가, 성경의 한 구절과 그 다음 구절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나게 큰 간극에 대한 (신학적 지식을 갖춘)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상상력은 과연,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브라함의 '아케다'를, 더 구체적으로는 주제 사라마구가 제기했던 의문에 대한 (답변이 있을 수 있다면) 답변에 어떠한 단초를 제공해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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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매력적인 표현인 '사랑이 한 일'이라는, 이 작은 소설의 제목은 우선! --- 자신의 아들을 번제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와, 이에 순응했던 아브라함의 결정,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거역하지 않았던 이삭의 순응 모두가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라는 작가 이승우의 해석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줍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사랑하더라도 조금만 사랑했다면 신은 나에게 바치라는 요구를 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요구하지도 않은 것을 바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사랑하더라도 조금만 사랑했다면 너를 바치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p100)

창세기에는 그저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라고 단순하게 아들의 출산을 아브라함이 기뻐하는 정도만 기술되어 있습니다만, 100세가 되어 낳은 독자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컸었을지는 쉽기 짐작할 수 있지요. 창세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 적음으로써, 애초부터 이삭을 번제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을 것임을 미리 독자들에게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허나, 

이것이 하나님의 진짜 요구인지 혹은 자신을 시험하시려는 일종의 테스트인지 알 수 없었을 아브라함의 고뇌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지요. 그냥 하나님의 요구대로 일을 진행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시점과 이삭을 번제 제물로 바치는 시점인) 두 행위 간의 간극 도중, 아브라함의 내면에서 있었을 수도 있을 심적 고뇌를 결국에는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작가의 상상은 '사랑'으로 꼽고 있는 것이죠. 

신은 나에게 나를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왜 그랬겠느냐. …… 나에게 속한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이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더 사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분이 그걸 알았기 때문이다. …… 신이 원한 것은 불가능한 것을 하는 것이었다. 지나친 사랑 때문에 불가능해진,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 그것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거나 조금 덜 사랑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 불가능한 요구를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p101) …… 사랑하지 않는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신이 어디 있겠느냐. 사랑하지 않는 아들을 바치라는 요구가 어떻게 시험이 되겠느냐.(p98) …… 사랑하지 않는 무엇이나 누구를 '바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랑하지 않는 것을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는 바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p99)

여기까지만 보면,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 제물로 바치라 했던 하나님의 명령이 '사랑으로 인해 일어난 일'일 뿐, 아직은 '사랑이 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행여,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사랑이 자식 이삭을 향한 사랑보다 더 컸기에, 이 역시 '사랑이 한 일'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는 생각도 있을 수 있겠으나, 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두려움'이 가미되었을 수도 있겠는) '경외'일 수는 있어도 '사랑'이라는 단어로 쓰여질 수는 없다고 이해합니다. 이제 두 번째로, 

어린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의 배를 갈라 불 위에서 태우는 번제의 제물로 삼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를 봅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비난처럼) "아동 학대이자, 비대칭적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핍박"이라고도 표현되는 '아케다'의 피해 당사자인 (하지만, 당시에는 자신이 번제의 제물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삭의 감정을 성경을 단 한 줄도 적고 있지 않습니다만, 작가 이승우의 패러프레이즈는 이에 대해서도 역시나 '사랑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 적고 있습니다. 

맞아요,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 아버지의 신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까요.(p102) …… 신은 사랑하지 않는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는 분이지만 사랑하지 않는 아들에게 바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 분이지요. 신이 바치라고 요구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거라고 나는 생각해도. ……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사랑하는 아들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도 어려워요. 더 어려워요.(p103) …… 사랑하는 무엇이나 누구를 바치라는 요구 또한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사랑하는 이가 바치는 것을 받고 싶어 하는 것 아니겠어요? 아무에게나 바치라고 요구하는 않는 것은 아무에게서나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바치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라면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은 더욱 큰 사랑의 표현이에요.(p104)


브라함과 이삭이 각기 토로한, 자신들의 감정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저의 가치관/생각으로 인해 거부감이 드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제가 풀어내지 못했었던 (각주 [8]에 기술되어 있는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지적에 대한 의문은 ('신뢰'의 문제가 아닌, '사랑'의 차원으로 이해함으로써) 해소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제목이자, 이 작은 소설의 제목인 '사랑이 한 일'이라는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 제목처럼 매우 매력적인)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여전히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시험 대상자들이었던 아브라함과 이삭이 겪었어야 했던 일들은, 그들이 보기엔 그저 '사랑으로 인해 일어난 일'들일 뿐이죠. 

인간만큼 축소된 신은 우리들이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그를 시험에서 통과시켜주었기 때문에 안도했다. 그 자리에 시험하는 이는 없었다. 사랑은 시험하는 것이 아니고 시험을 뛰어넘는 것도 아니고 시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p118)

제가 이해한 바 이 소설의 제목은 --- 명령자로서의 신/하나님, 그리고 그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인간이라는 '지배-피지배'의 관계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으며, 신과 인간의 관계는 '사랑으로 연결된 관계'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가는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라 여겨지는) pp113~115에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왜 이런 시험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상상을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성립될 수 없었던) '사랑이 한 일'이라는 제목의 내용을 기어이 완성해내고 있습니다. (제가 굳이 이 부분을 인용하지 않는 건, 여기가 이 소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해서이지만 그보다는, 앞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감정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하등의 무리가 없었었거늘, 작가가 풀어놓은 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시험하는 행위나 시험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사랑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으나, 그 시험의 (출제자로서 혹은 수험자로서) 당사자가 된다라는 것/되기로 결심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 한 일' 이라는 것이지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사랑의 매'라는 단어가 떠올랐었습니다. 작가 이승우가 말하는 의미를 지닌 '사랑'이라는 단어가, '사랑의 매'와 같은 되도 않는 용법으로 사용된다라는 것에, 이제 저와는 상관없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뜬금없는 짜증이 올라오더군요.)


"성경은 …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무슨 '인식 내용(cognitive contents)'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비춰서 내 속에 있는 내 자신의 어떠함을 보고 뭔가를 깨닫게 해주는 거울'이다. 매일매일 더 높은 차원의 깨달음을 향해 매진하도록 도와주는 '일깨움(evocativeness)'을 위한 것이다. 한 가지 시각으로 고정된 절대적 해석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전통적 용어로 하면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매일매일 성경의 더욱 새롭고 깊은 뜻을 찾아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 오강남, 「예수는 없다」 중 p124, 현암사, 2017.

경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소설들은 아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그 배경이 되는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낯설고 지루한 사변으로 읽혀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원문인 성경을 읽지 않고, 이처럼 소설이나 성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사뭇 위험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서) 해볼 수 있는 (의도에는 없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성경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점을 떠나, 소설이라는 형식의 문학으로만 보아도, 

이 성에 오기로 예정되어 있는 손님은 없다. 오는 사람이 누구일지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른다. 올지 안 올지 모르기 때문에 기다릴 수 없고, 올지 안 올지 모르기 때문에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p16) …… 롯은 나그네가 혹시 올까봐 걱정하며 기다리고, 그래서 조마조마하고, 그러니까 그의 기다림은 기다림이 성취되지 않기를 바라는 기다림이고, 성안의 남자들은 나그네가 자기들 앞에 나타났을 때 벌어질 일을 상상하며 기다리고, 그래서 느긋하고, 그러니까 그들의 기다림은 기다림을 선취한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사람은 안절부절못하지만, 기다리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사람은, 흥분을 예열하고 있다.(p19)

<소돔의 하룻밤>과 <사랑이 한 일>에는, 위의 인용구와 같은, 김훈의 남한산성에서 만나보았었던 문체의 문장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런 류의 만연체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 수 있겠으나, 주제 사라마구 / 구병모의 만연체와 김훈의 음조(rhyme)를 너무도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전에 읽었던 생의 이면 속, 현재에는 어울리지 않는 낡은(?) 문장들로부터 받았던 어색함이 언제 있었냐는 듯한 반가움을 이 두 소설에서 찾을 수 있기도 했었죠. 특히,

위에 인용해 놓은, p100에 실려 있는 문장은, 이렇게 따로 떼어놓고 읽어보아도 매력적이지만, 소설 속에서 만났을 때의 놀라움은 정말 엄청났었었습니다. '올해의 딱 한 구절'로, 아직까지는 단연코 선두!


※ 읽어 본, 작가 이승우의 작품 : 생의 이면

※ 함께 읽어보면 좋을 책들 : 가장 오래된 교양 · 만들어진 신 · 카인」 · 예수복음


[1] "이미 쓰인 것을 다시 쓰고 풀어 쓰는 것."(p243)

[2] "책의 한복판에 있는 세번째 단편 <사랑이 한 일>은, 서사의 흐름에서 볼 때에도 정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일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건은 단지 아브라함에게만 중요한 사건인 것이 아니라, 그를 진정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는 기적이어서, 구약의 믿음 체계에서 이념의 최고봉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 <해설> 중 p218.

[3] "이삭을 묶음" - 크리스틴 스웬슨, 「가장 오래된 교양」 중 p236, 사월의책, 2013.

[4] 주제 사라마구, 「카인」 중 p95, 해냄, 2015.

[5] 크리스틴 스웬슨, 위의 책 p236.

[6] 이런 관점의 비판은 또 있습니다. : "애초에 아브라함은 갈등을 하기나 했을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복종와 아들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마침내 신앙을 선택한 순간 하나님에게 축복받는다는 '이삭의 희생' 장면만을 보면 제법 감동적이지만 앞서 그가 해왔던 일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그는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아내를 왕에게 바칠 때도, 애인과 자식을 황야로 내쫒을 때도, 뒤를 이을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도 확고한 신앙이 있었으니 고민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 무엇보다 이 모든 시련을 아브라함이 겪는 것이라면 괜찮다. 그런데 항상 쓰라린 일을 겪거나 목숨이 위태로웠던 이는 그가 아니라 그의 아내나 첩이나 아들이었다!" - 나카노 교코, 「명화의 거짓물」중, 북폴리오, 2014.

[7] "나는 전쟁규칙과 정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유언 중 일부.

[8] "여호와는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아들 이삭을 죽이라고 명령했지요. 여호와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데, 왜 그 사람들은 여호와를 신뢰해야 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 주제 사라마구, 위의 책 p163.

[9] 창세기 21장 8절 중.

[10] 창세기 21장 1절 중.

[11]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는 창세기 21장 12절은, 어쩌면 아브라함에 심적 고민조차 하지 않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도 해줍니다.

[12] 이삭은 그저 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제물은 어디 있느냐 물었고,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는 아버지의 중의적 답변을 듣습니다. (창세기 21장 7~8절)

[13] 성경이 이삭(이나 사라)의 감정에 대해 아무런 기술이 없는 것은, 어린 아이나 여자의 의견은 무시되어 마땅한 것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가치관에 의한 것일 수도 혹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삭의 시선으로, 그러니까 영문도 모르는 체 번제의 희생양이 될 뻔했던 사람의 시선으로 사태를 바라본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p223)라는 해설자의 의견처럼, 그것이 성경의 기자(writer)에게도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봅니다.

[14] "칸이 오면 성이 열린다는 말과 칸이 오면 성이 끝난다는 말이 뒤섞였다. 칸이 오면 성은 밟혀 죽고, 칸이 오지 않으면 성은 말라 죽는다는 말이 부딪쳤는데, 성이 열리는 날이 곧 끝나는 날이고, 밟혀서 끝나는 마지막과 말라서 끝나는 마지막이 다르지 않고, 열려서 끝나나 깨져서 끝나나, 말라서 열리나 깨져서 열리나 다르지 않으므로 칸이 오거나 안 오거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있었다. 칸은 서쪽으로 명을 몰아 대고 있으므로 요동을 비우고 오기가 어려워 심양에 머물면서 소문만 내려보낸 것인데, 소문의 뒤를 따라 칸이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므로 온 것보다 무섭고 오지 않는 것보다도 무서우며, 소문이 이미 당도하였으므로 칸이 오지 않더라도 이미 온 것과 다름없다는 말은 삼거리 북쪽 술도가 쪽에서 흘러나왔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낮게 깔려서 뒤섞이고 부딪치는 말들은 대부분 '마찬가지'로 끝났다. " - 김훈, 「남한산성」 중 pp181~182, 학고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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