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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시험 보느라 바쁜 딸아이에게

이별 일기라는 책에 대한 글을 알려 주고 나니,

딸아이는 그 댓구로 <<무화과 숲, 황인찬>>의 시를 추천했다.

 

필사해서 블로그에 걸겠다고 약속하고 실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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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1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옥 2019-11-02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따님과 소통이 되시니 다행입니다
울 아들은 불통 내지는 무통이에요 ㅠ.ㅠ
˝나는 엄마랑 다른 세계에 살고 있어요.˝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yureka01 2019-11-02 11:35   좋아요 0 | URL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는 거라서요..
저도 통화는 되는데 소통은 다르더라구요.
아무래도 살아가는 저마다의 시간과 환경이 다르니까요..
맞아요.각자의 세계는 같을 수가 없으니 말이죠..^^..

2019-11-25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25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별 일기 - 삶의 끝에 선 엄마를 기록하다
최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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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이 만들어진다. 이게 작별이다. 인생에는 많은 만남에서 예외 없이 이별을 거친다. 만남에서 이별까지 이 절차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우리 인생 자체가 만남에서 이별의 과정으로 이어지는 단번의 타임라인이다. 작별 일기라니 시작부터 먹먹하고 한편으로 홀가분할 것만 같은 이중적인 감정이 뒤섞인다. 이 책은 작가의 모친과의 이별 과정을 표현한 감정의 내밀한 서사이다. 누구나 다 이별을 하지만 아무나 이별의 글은 쓰지 않는다. 어떻게 이별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지, 어떻게 기록으로 개인의 모친과 이별에 따른 상념의 서정을 공유할 것인지, 이런 기록으로써 우리는 공감하고 교감하며 장차 자신의 이별과 타자와의 작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나의 모친이 요양병원에 입원한지 햇수로 몇 년째인지 이젠 오래되다 보니 기억도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이별이 확정적이지만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은 나에게 있어서 너무 길었고 아직도 진행형이다. 앞으로도 언제까지인지 알 수도 없다. 당장 오늘 내일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몇년 더 지나야 할지는 모친의 천명에 달려 있다. 준비 없는 이별도 슬픈 감정을 생산한다. 반대로 이별의 준비가 너무 길어도 지친다. 치매의 고통은 이별의 준비를 너무 길게 끈다. 병원에 한 번 다녀가면 화약이 터져 일시에 산화하는 것같이 진이 일시에 빠져나가 탈진 느낌이 매번 들었다. 인간적인 고뇌가 없을 수가 없다. 서너 해 정도였더라면 적당한 이별의 준비기간이었다고는 하나 너무 빨리도 허탈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너무 길다. 이제는 가족들이 모두가 지쳐간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실감하기도 한다. 나도 진이 빠지고 빠지다가 이제는 무감각해질 정도로 더 이상 이별의 격정이 남아 있을까라는 의문도 든다. 치매는 이렇게 무서운 고통을 만드는 작별의 기록이 책으로 나오니 이왕 하는 김에 가족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것도 현재의 당사자가 안고 있는 고민들의 공유라 생각하게 된다.

 

치매란 그런 거다. 관계의 철저한 단절. 심지어 자신과 세계의 무기력한 단절이다. 뇌세포는 점점 죽어가며 인지력조차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데 몸은 의식만 제거된 상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흡사 로봇이 명령 프로그램 프롬프트를 점진적으로 잃어버린 채 쓰러져 있는 상태와 같은 몸뚱어리가 된 거나 비슷하다. 최소한의 본능은 살아 있으니 생리적인 현상은 유지하나 무의식으로 흡사 깊은 잠을 자듯이 모든 감각이 차단되어 버린다. 느낄수 없음의 상태. 본능적 상태를 말한다. 그런 치매 병으로 사람은 서서히 시간의 고갈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지켜보고 있으니 가슴만 답답할 뿐이다. 흡사, 부팅 프로그램은 남아 있으되, 응용프로그램이 하나 둘 지워져 버려 폐기된 채 우두커니 한자리만 차지하는 낡은 컴퓨터와 같다.

 

모친이 어느 해 한 여름에 탈진 상태로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의식에 낌새가 이상함을 느껴 뇌 사진을 찍었고, 중병으로 확정되었던 그때부터 마음은 항상 스탠바이 상태였다. 스탠바이 상태는 늘 조마조마한 긴장감을 유발했다. 안정을 하고 싶은 충동이 강렬할수록 조마조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긴장도가 높아감으로써 따라오는 심리적인 피로감도 등달아 후발 주자로 따라 붓듯이 기생한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조바심은 서서히 사라졌다. 이젠 언제 떠나더라도 더 이상은 조바심을 낼 것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떠나 보일 마음의 자세는 갖춰진 셈이다. 모친은 중증 치매로 병원 입원했고 첫해와 둘째 해가 제일 힘들어했다. 그러나 이후로는 귀도 닫아 버렸고 눈도 감아 더 이상 뜨지도 않고 의식도 사라져 버렸다. 식물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 간헐적인 고통 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말에도 정상적인 대꾸가 없었다. 대화도 전혀 할 수 없는,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늘어진 육신만 마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의식의 임계점은 이미 저 멀리 넘어가버렸다.

 

어느덧 또래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모두 부모 세대를 보내야 할 나이가 되었다. 모친이 병원에 입원한 이후로 장례식장으로 문상을 다녀온 것도 전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몇 번인지 횟수가 잦았다. 이렇게 저렇게 알고 업무차 관계하는 관계자들까지 합치면 얼마나 될지 헤아릴 것도 없이, 죽음이 어쩌면 우리의 일상이 될 나이라는 거다. 이렇게 죽음은 자신에겐 단 한번 거치는 특별한 통과 과정의 의례이지만 타자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지켜보는 일상이라는 것.

 

이런 일상적인 죽음에 대해서 제일 서럽게 통곡한 적이 있었다. 모친의 여동생, 즉 이모님의 별세였다. 언니는 병원에서 누운지 몇 해이고, 하나 있는 여동생은 긴 치매로 감금당하다시피 갇힌 채로 몇 해를 지났고 그렇게 이모님은 별세했는데 언니는 여전히 병원에 누워 아픔의 짧은 탄성의 단발성 소리만 내지르니 어찌 가슴이 먹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다. 서로의 의식이 없으니 만난들 무슨 소용도 없는, 무감각의 두 자매의 기막힌 비극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모님의 아들, 나에겐 이종사촌 형님은 나를 보고 같은 심정이라는 걸 대번에 느끼고도 남았다. "고생이 많지?" 이 한마디로 다음의 아무런 말이 없이 그저 손만 잡고 울먹일 뿐이었다. 그간의 관계의 조바심과 피로감은 극에 달했을 것이고 회한이 없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간병으로 모시는 하나하나의 과정을 떠올리고도 남았다. 그렇게 무언가 억울한 거 같기도 하는 그런 존재론적인 서러움이 복받쳐서 장례식장에서 실컷 울었다. 동생을 떠나보내는 것조차 알지를 못하는 인지력이 차츰차츰 사라져 가는 병이 무서운 증상을 동반했다.

 

의학적으로 육체의 사망진단서를 받아 들고서 나서야 우리들은 흔히 "운명하셨습니다"라거나,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한다. 운명하셨다는 것은 단 한번의 과정. 즉, 운명을 피할 수 없었으며 그게 모든 이들의 가진 운명의 절대성이다. 또한 돌아가셨다는 것도, 반드시 내가 없었던 상태로 환원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탄생은 실로 우연적이고 죽음은 절대적인 필연이다. 삶이란 운명이 우연에서 필연으로, 그리고 다시 필연에서 우연의 상태로 회귀를 의미하며,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나라는 객체의 무의미"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스스로가 만들어 낸 필연의 유의미에서 다시 무의미의 우연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치매는 의학적으로 정신의 사망진단서나 마찬가지이다. 몸은 살아 있으되, 마음은 벌써 죽어 버린 운명.

 

치매 노인의 방치는 간단하나, 병이 길수록 간병도 길고 심리적 슬픔과 어쩔 도리가 없다는 지쳐감과 체념의 영향이 환자를 포기하게 만들어진다. 더욱이 경제적인 문제까지 연결된다. 오늘날 노인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갈수록 요양병원 혹은 노인전문 요양소가 늘어나는 수요가 발생하며 이게 다 돈을 들여야 하는 비용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른바 실버케어 산업이며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한 영리적 장사이다. 나 또한 구체적으로 계산해보지는 않았다. 자칫 그런 모친의 간병 비용을 계산하는 것이 심리적으로도 위축되는 알게 모르게 받는 일종의 불경스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어머니 아픈데 어떻게 돈 계산부터 하냐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런 간병 비용을 부담하는 압박감 또한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다. 자본적 세계에서 태어나는 것도, 성장하는 것도, 죽는 거도 다 돈이 들어간다는 건 누구나 닥친 현실적 문제이기도 하다. 사회보장적 측면의 복지 비용의 투자는 투자로서의 경제성의 가치가 없다. 허나 사람이 살아가는 윤리성이 따르는 필수이기도 하다. 이별의 준비는 심리적인 준비도 아울러야 하는 등의 경제적인 준비 또한 무시할 수가 없다.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나이 또래의 세대가 부모를 봉양하고 모시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투자해도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는 마지막 세대라는 말을 틀리지 않았음을 느껴 가는 중이다. 나의 세대에 부모는 자신의 노후에 대해 크게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인지도 모른다. 윗 세대의 노인들이 대부분 자식에게 위탁하고 노년을 보냈던 것에 비추어 자신도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으나, 나의 세대는 자식에게 더 이상의 기대는 하지 않게 되었다. 자식으로써의 의무와 부모로서의 권리를 내려놓아야 할 첫 번째 세대가 된 거다. 인생의 재무적 대차대조표를 짜보면 늘 적자 상태를 자신의 땀으로써 커버해야만 하는 울증의 세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준비된 상태, 대비되어 있는 상태가 결국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방식과 방법론의 문제로 귀결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어떻게 살다 떠날 것인지에 대한 동격이며 여기서 삶의 자기 성찰을 요구한다. 물질적인 준비도 물론이고 아울러 심리적인 대비 또한 반드시 포함해야 할 삶의 목표이기도 하다. 내 나이 또래 친구들 대부분이 은퇴 시기가 다가옴을 점치고 은퇴 후의 삶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오래전부터 준비된 구체적인 계획서를 조금씩 체계적으로 조립되어 있지 못하다면 자신의 삶을 무방비로 방치할 때 찾아오는 준비 없는 이별에 대해, 그때 가서야 알아차리면 늦는다. 늦어서 후회스럽지 말아야 함은 곧 계획서의 작성과 스케줄의 이행, 혹은 스케줄의 오류나 형편에 따른 피드백일 것이다. 은퇴시기에는 꾸준히 수립한 계획을 실천할 단계이지 계획서를 작성할 단계는 지났다는 말과도 같다. 이마저도 안되면 임기응변으로 되는 대로 살다 무계획으로 인한 준비 없음에 대한 후회를 늘어놓게 된다는 것. 불행은 어떤 상황과 선택의 교집합에서 나오는 아주 고역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어떤 상황에 대처하는 선택은 오로지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기도 하다. 지나온 삶의 상황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선택은 그래서 남은 사람들이 반드시 심사와 숙고를 거쳐서 나와야 할 인생의 변곡점일 수도 있다는 거다.

 

세상 한 번 오는데 이유 없이 올 수 없듯이 죽음 또한 이유 없는 죽음도 없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타자의 죽음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는 길을 찾는 것이 오늘날 살 고 있는 사람들의 각자 저마다의 삶을 대하는 자기 임무가 아닐까 한다. 좀 더 근사하게 살았으므로 더 이상 회한이나 미련 없는 상태를 만들어 생을 완성해 가는 것도 앞으로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과정의 숙명이 되었으면 한다.

 

작가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치밀하게 표현했다. 자칫 가족들의 내밀한 부분까지 들어내므로 우리들 모두가 장차 부모를 보내야 할 사람으로서, 혹은 내가 죽어가야 할 문제에 대해서 각자가 저마다의 생의 과정을 복기해보는 계기가 되고자 하는 책의 의도를 충분히 감지하는 민감성을 높인다. 인생의 끝자락에 관한 과정은 누구도 예외 없이 거쳐야 하는 필연적인 부분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이 책을 통하여 각자가 주어진 상황에 따른 교감과 공감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당위성을 피력한다. 삶이란 그런 거다. 출생과 생존 그리고 끝의 마지막 날숨까지의 삶이란 과정을 타자의 관점에서 담담하고 묵묵히 기록한 점에서 삶을 경건함으로 지켜 성찰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다들 살아가느라 고맙다는 마지막 유언 같은 말 한마디에 결국 나는 또 눈물을 찔끔거렸다. 과연 나 또한 나의 마지막을 딸아이에게 어떻게 보여야 할지 내 삶의 의지가 작동하는 한 계속 고민해야 할 과제를 이 책을 통해 답을 도출해야 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이 책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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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4 04: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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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4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24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24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빵굽는건축가 2019-10-24 04: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삶을 경건함으로 지켜 성찰할 이유라는 후기가 맘에 옵니다. ^^

yureka01 2019-10-24 08:48   좋아요 2 | URL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눈앞의 작은 이익때문에 삶을 망치는 경우가 많이 안타깝죠..
그렇게 산다고 얼마나 살것도 아닌데 말이죠..

하나꼬 2019-10-24 04:5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의 저자인 최현숙이에요. 알라딘이 주최하는 <작별일기> 북토크 관련 상황을 알아보려고 검색하다가 선생님의 세세한 후기를 읽게 되었네요. 제 글에 대한 말씀도 말씀이지만, 선생님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읽기만 하는 저로서도 마음이 막막해지는 느낌이에요. 저야 그럭저럭 많이 힘들지 않게 보내드린 건데, 선생님의 마음과 몸의 고생이 깊이 느껴지네요. 비슷한 상황의 독자들을 위해 책에도 썼지만, 하는 데 까지만 하자는 마음으로,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마음으로, 자책이나 우울에 빠지지 않으셨으면 해요. 다만 선생님도 말씀하신대로, 부모의 죽음과정을 겪으며 우리들의 죽음은 어떻게 맞을 지, 하여 어떻게 살지에 대한 지혜를 얻자는 마음이네요... 혹 시간이 되시면, 북토크에서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힘 내시고요!!^^

yureka01 2019-10-25 17:03   좋아요 1 | URL
아 저자분의 댓글은 흔한게 아니네요..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네. 이미 마음 준비는 한지 몇해가 흘렀습니다.
네 힘냅시다..^..
알라딘 북토크는 아무래도 제가 지방이다 보니 시간 내는 문제, 스케쥴을 잘 모르겠어요..
여하튼 고맙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10-24 0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삶이란 여태까지 만났던 과정이고, 자신의 몸과의 이별이 끝나야 인생이 마무리되기에 누구나 이별을 겪겠지요. 그럼에도,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의 순간이 길어져 타인이 되면서 헤어지는 것은 견딜 수 없이 힘들 것이라 추측해 봅니다...

yureka01 2019-10-24 08:51   좋아요 2 | URL
물론입니다..자신과의 이별도..타자와의 이별도..그 과정을 거쳐야 하니까요....

2019-10-24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24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9-10-26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레카님 오랜만에 들러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제 엄마도 80에 들어서니 생각을 달리 하게 되어요.
많이 늙으셨으니.
좋은계절 누리시길...

2019-10-27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옥 2019-10-28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소설 ‘화장‘이 생각나네요.
화장은 소설이지만 이 책은 펙트네요.
목숨이란 게 참 허망하고도 끈질깁니다.
누구의 선택도 잘못도 인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완성한다고 하는데..... 삶의 완성이 죽음이겠죠?
누추한 육신을 남기고 가야 한다는 게 너무 싫어요. 소리없이 흔적없이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yureka01 2019-10-28 23:13   좋아요 0 | URL
지우당님 사진을 찍으시니 사진의 시간이란 게 결국은 시간의 죽음이자 생성....
이 시간 속에 우리의 존재가 있으니까요..
어떻게 잘 죽어갈 것인가는 다른 말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의 동일성이겠지요.

한 세상 잘 살았다 미련없이 갈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ㅋ

stella.K 2019-11-09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어머님이 어떠신가 궁금했는데 이제야 이 글을 읽네요.
제가 무심했네요.ㅠ
치매 부모 간병이 쉽지 않은데 꿋꿋하게 잘하고 계시네요.
가족이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훨씬 좋긴한데 나이들수록 가족에게 짐이 될까 봐
그게 걱정이고, 저의 엄니도 아직 건강하긴 하지만 그 건강을 언제나 장담할 수 없으니
삶은 살면 살수록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감사하며 안도하며 사는 것 밖엔...

yureka01 2019-11-09 17:29   좋아요 1 | URL
네 차도는 없고..점점 갈수록 하강곡선이죠..
아마 상승은 어렵죠...이게 자신이ㅡ 노년이 될수도 있거든요..
모쪼록 지금을 사는 분들은 꼭 자신의 노년을 그려 봤으면 합니다.
그래야 남은 가족들을 못살게 굴지 않도록 해야 하니까요.
부모 세대분들은 그런 대비가 전혀 없었기도 하거든요..
이젠 달라져야할 시기가 온듯해요..

자신의 상황 판단이 흐려지기 전까지는 꼭...자신이 결정 내려야 할 거같더군요..
 
일본 제국 패망사 - 태평양전쟁 1936~1945 걸작 논픽션 17
존 톨랜드 지음, 박병화.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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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자유의 실존적 가치를 잃어 버린
국가적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

전체 국민이 국가 이데올로기의 최면상태에 빠지게 됨으로써 발생한다.
결국 국민이 국민 스스로가 큰 불행에 빠진 줄도 모르고 죽어간다.
그게 종교든 이념이든 그 무엇이든간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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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9-10-22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몇 날에 걸쳐 겨우 모두 읽었다.
거의 벽돌 두께로 두꺼웠다.


강옥 2019-10-22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돌프 히틀러‘를 쓴 그 유명한 작가 (존 툴런드? 톨란드?)의 명작을 읽으셨네요.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기술하는 작가로 유명하던데
책이 너무 두꺼워 펼쳐볼 생각도 못했는데..... 대단하십니다~~~
세계대전의 아시아편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yureka01 2019-10-22 15:07   좋아요 0 | URL
아돌프 히틀러의 저자 맞습니다.
졸면서 읽었어요..분량이 많아서 한번에 못읽고 나눠서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10-22 14: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의 표지를 볼 때마다 영화 「태양의 제국」이 생각납니다. 벌써 30년도 지난 영화가 되었네요 ^^:)

yureka01 2019-10-22 15:08   좋아요 2 | URL
상당히 인상적인 영화였어요..벌써 그렇게 된건가 찾아보니..30년이라니..놀랍네요.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 - 힘껏 굴러가며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
최필조 지음 / 알파미디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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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재목은 사진을 오랫동안 찍어 왔던 경력이라야 표현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문장이다. 많은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에 어쭙잖은 글을 덧댔던 게 사진과 글이 각각의 한계를 자인한다. 사진만으로 전부를 다 말할 수 없었던 한계, 사진만으로 전부를 표현하지 못한 자기 부족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사진으로 전부를 보여 줄 수 없어서, 사진에 사족처럼 글로 보완하는 지속적인 미련이 더해졌다. 사진은 사진 프레임 속에서 현장의 제한적인 면적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제한적 면적은 그대로 표현의 제한으로 연결되고, 표현에 대한 의도의 제한으로 이어진다. 그 제한적 표현을 글로 표현의 부족함을 채우려 했다. 사진으로도, 글로도 완성되지 않는, 미완의 여운이 항상 따라다닌다. 전부를 다 보여줄 수도 없고 전부를 모두 서술할 수 없는 한계는 늘 타협을 만든다. 이를 우리 삶의 내면적 제한이라고 하자. 즉 무한의 불가능성이라고도 하자. 어쩌면 사진과 글은 유한한 우리들이 가진 무한의 도전성의 오기스러운 내포는 아닐까. 사진은 빼기라고는 했지만, 글은 더하기가 된 셈이다. 빼기와 더하기의 중화작용이라 그럴싸한 핑계를 댄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기표현을 할 수 없으면 살아 있다 말할 수도 없다. 소통은 표현에서부터 출발한다. 완벽한 소통의 차단이 곧 불소통이며 비록 전부를 다 표현할 수 없다 해도, 인간의 역사는 끝없는 유한적인 표현을 했던 타협의 소통 역사이다.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나 마찬가지다. 이나마 정도의 표현으로 소통에 이해 오늘날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원인 때문으로 살아왔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진은 사진 이 자체가 목적일까, 아니면 수단일까? 사진 자체만으로 표현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사진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배척하고자 할 것이고, 사진이 단지 표현적 수단의 일종이라 삼는다면 사진에 다른 어떤 매체를 추가시킨다 해도 표현의 목적에 비추어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나는 사진을 목적으로 보는가?, 수단으로 보는가에 따른 견해는 무엇일까? 결과론적으로 이때까지 사진은 수단이었다. 표현, 소통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대화가 목적이었고 이 목적을 위한 표현으로써 살아 있음의 소통이였던 것.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했다. 살아 있는 자도 말이 없다면? 살았다 말할 수 없다는 전제가 그래서 성립한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사진은 대체적으로 먹먹한 담백함이다. 옅은 파스텔 톤의 흑백 사진들이 주를 이루니 색채의 화려함이 다소 적었다. 사진 스타일이 간혹 흑백 아닌 컬러 스타일도 있지만 주류는 아니었다. 글 또한 미려한 문장으로 화려하게 수식하지도 않는다는 느낌이 은은하게 들었다. 그야말로 표현에서 첨가된 양념보다 피사체 재료, 이 자체의 맛같은 느낌이 들었다. 작가는 몇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표현된 장편 드라마 같은 구성을 이어 낸다. 때로는 밋밋하기도 하고 때론 소박하기도 한, 간이 덜된 피사체는 하나같이 시간의 늙음을 익음으로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어느 일부 사진작가들은 사진 주체나 화두를 하나의 공간에서 만들어 낸다.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시대의 모습을 담고자 한다. 그 속에서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정한 공간적 시간적 거리을 기록하는 르포 형식으로써 그 면면의 깊이 있는 탐색을 의도하려 한다. 같은 곳에서 매번 찾아갔을 때마다 발견되는 또 다른 면모의 사진은 그래서 익숙함에서 낯섬을 발견하는 상이점이다. 상이한 차이와 미세한 균열의 피사체에서 느껴지는 뉘앙스까지 보게 된다. 매번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에게서 그때마다 달라지는 삶의 표정의 차이와 삶의 분위기를 읽는 것. 이게 사진을 더 심도를 더해가는 주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처음 만난 낯선 이가 자주 찾아와서 대화의 물꼬를 트고 급기야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사진은 인위적인 것을 벗어나서 부담 없는 자연스러움 표정을 읽을 수 있다. 그만큼 사진가의 노력과 열정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피상적으로 한 번으로 쭉 주마간산처럼 흩고 지나가버리는 일회성의 사진이 아니라 자주 찾아서 그 속의 속속들이를 보고 싶은 의도. 이게 외형으로 다가가서 내형으로 전이하는 것. 사진은 모름지기 깊이 있게 작업해야만 하는 작가의 주제의식이자 작가주의의 모습이다. 시류에 따라 떠돌아다니는 유행 타는 사진이 아니라, 몇 가지의 카테고리를 자신의 사진 작업의 화두를 삼아 추구하는 자세가 그러하고 그런 태도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무장해제된 표정을 보이기 마련이다. 자주 찾아와서 안부를 묻고 삶의 대화 상대가 되어 줄 때 나오는 자연스럽게 옮아가는 감정의 이입은 꾸미지 않는 사진의 솔직함을 만나게 해주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사진의 지속성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누구나 꾸준하게 작업하는 것도 어렵다. 그런 점에서 사진작가의 집념이 보이는 부분을 높이 평가할만하다. 따라서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과 얼마나 많은 소통이 필요했을까라는 질문에 사진의 표정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인류의 역사는 부족하지만 이 결핍이라는 한계 속에서 끝없이 소통하려 했고, 표현하려 했고, 대화하여 그 뜻을 이해하려 했다. 세계의 이해는 소통에서 비롯된다. 마찬가지로 사진도 피사체의 대상들과의 소통이다. 사진 속에 사람이 있다면 사람과 소통이 필요하고, 자연이라면 나무나 숲이라면 그것과 소통해야 한다. 소통의 방식은 다를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고 교류로써 교감이 이루어져야 솔직해진다. 솔직해야 우리는 즐겁게 안심할 수 있는 본능적인 존재인 까닭이다. 나와 세계와의 소통. 이해와 교감으로 공감으로 확대 생산되는 선순환을 만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한다.


요즘은 소통의 수단인 매체는 나날이 다양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수단이 발전될수록 소통을 통한 공감력이 떨어진다. 수단은 기술적으로 높아졌으나 소통의 질은 손편지만도 못할 때가 있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이해의 바탕이 되는 전과 후의 전제를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저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세계와의 단절을 느끼고 외로움을 만들어 내고, 이는 사람들이 제각각의 파편화되어 버리는 결과로 연결된다. 다들 외로운 시대라고 한다. 그만큼 각자가 공감 불능 시대의 각자도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핵심은 외롭다고는 해도 누군가 다가와 주기를 바라기만 했지 먼저 손 내밀며 소통의 적극성은 주저한다. 이런 점에서 이 사진 책의 작가는 카메라로 사진을 담으면서 자신의 손을 먼저 내밀었다는 것이다. 외로움을 견디는 제일 좋은 방법은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나의 세계로 손을 먼저 내밀어 볼 일이다. 작가의 사진은 손 내밀기와 손잡기이다. 손잡기 사진이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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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10-13 0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말과 글 또는 다른 어떤 수단으로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리고 상대가 이를 알아들을 수 있다면 훌륭한 의사전달, 커뮤니케이션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언어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이를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사상 흐름은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언어 역시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하니까요.^^:)

yureka01 2019-10-13 22:13   좋아요 2 | URL
오해없이 완전한 전달이 사실은 어떤 수단이라도 불가능하죠..
그런 점에서 완전함과 불완전함의 그 어떤 지점에서 있으니까요..^^..
그러니 다양하고 많은 표현이 풍부할수록 오해가 이해로 바뀌겠지요~~~

2019-10-13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3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9-10-13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이 책을 사야겠어요.
이달의 리뷰 당선금으로다가 ^^

사람들의 뒷모습 사진은 저도 한번 찍어보고 싶었던 소재들이네요.

yureka01 2019-10-13 22:15   좋아요 1 | URL
사진이 아주 따뜻하면서도 느껴지는 사진 스타일입니다..
글도 좋더군요..
사진 참고 많이 될 거라 생각됩니다...

cyrus 2019-10-14 0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찍기를 ‘손 내밀기’와 ‘손잡기’로 비유하는 내용이 정말 좋았습니다. 이런 사진들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질 것 같습니다. ^^

yureka01 2019-10-14 09:13   좋아요 1 | URL
대화할려면 일단은 악수부터 하고 시작해야 물꼬를 쉽게 틀수 있는 거 같아요..^^..

강옥 2019-10-14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사상 10월호를 읽었는데요
나태주 시인이 올해의 소월시문학상을 받으셨더군요
시인은 I love 보다 I need you 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노시인에게 시는 인생 그 자체였다고 하네요. 간절하고 간절했다고.....
어느 방면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들은 그 내면에 사랑보다 필요가 간절했던 게 아닌가 싶고.
글로 못다한 얘기 사진으로, 사진으로 못다한 얘기 글로.....저도 이런 게 좋은데
어떤 사진가들은 사진에 글 붙이는 걸 질색하더라구요. 사진만으로 승부해아 한다나요? ㅎㅎ

yureka01 2019-10-14 09:13   좋아요 1 | URL
시인의 감수성으로 치면 더더욱 간절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런지요..

사진을 수단으로 삼느냐 사진을 목적으로 삼느냐 그 차이겠지요..
전 사진도 일종의 수단이라고 봅니다.
글도 수단이죠.
사진 이 자체의 완성도라는게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2019-10-18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8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려지는 사진 책이 드물어서 가끔 오래전에 출간된 사진 책을 종종 찾는다.  찾다 보니 걸려든 책이다. 저자 조민기라는 책에 포커스가 맞혀졌다.

 

훤칠한 외모와 영락없는 배우스러운 스타일, 연기력도 선이 굵고 성격도 짙은 지명도가 꽤 있는 배우였다. 언젠가 일전에 아빠와 딸이 함께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해서 예능성도 보였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자상하고 가정적인 그런 아빠였던 모습으로 연출된 프로그램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지방 사립대학에서 연기를 지도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어엿한 교육자였기도 하고 평교수가 아니라 학교에서 보직도 있는 공헌도가 상당했던 걸로 안다. 또한 그는 사진가로써도 명성이 적지 않았다. 배우이니 만큼 배우로서의 주목도를 바탕으로, 사진 관련하여 다큐 르포 프로그램에도 출연해서 그의 사진을 담아내는 모습을 기억하기도 한다. 이만하면 그의 이력과  타이틀 정도로 봐도 외적으로 보이는 부분으로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유명한 배우이자 연기 전공의 교수, 사진작가까지. 참 부러운 모델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른바 나름대로 보이는 부분은 잘 나가는 배우였다고 결론낼 수 있다. 더욱이 교수이기도 해서 책까지 내기도 하였다. 이 책을 찾아 주문하려 했지만 품절이었다. 물론 출간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터라 재고가 남아 있을 거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투 운동이 활발히 벌어질 당시 그도 역시 미투 운동의 중심에서 각종 피해자의 증언과 하소연을 하여 경찰의 조사 대상이 되는 와중에서, 그가 쌓았던 명성과 타이틀의 도덕적 타격은 심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안타까운 결말을 스스로 지어 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소위 잘 나가고 있던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불행의 중심에 있었고,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람이 잊힌다는 건 순간이다. 그런 인지도와 영향력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혀간 전직 배우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자신의 과오나 오류, 혹은 실수에 대해 스스로 드러내어 자성과 함께, 피해자들에게 정중하고도 진정성의 행동으로써 사과하며 형사적, 민사적인 죗값을 치르고, 그럼으로써 반성하여 다시는 그런 오류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잊고 사는 건 아닌가. 명성이 한순간에 추락해도 다시 반성과 용서로 재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얼마나 용기가 없었던 건지, 그저 자신의 삶을 마감시켜 버림으로써 덮어가려 할까? 우리가 뉘우치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잘못한 사람이 진정성 있는 용서를 구하고 반성하는 순수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래서 큰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그럼으로써 용서를 받고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천명을, 받들 수 있음에도 이를 활용하지 않는다.

 

더구나 무엇보다도 더 안타까운 것은, 그는 사진을 찍어 왔던 사진작가가 아니었던가. 사진은 피사체를 렌즈로 통해 사색의 근원을 짚으려 하는 모티브이다. 사진을 통해서 사유하고 자신에 대한 철학적이며 관념적인, 나아가 예술의 지향성을 추구하는 삶이다. 이는 껍데기의 사진이 아니라 사진의 철학적 근간으로 들어가려는 예술의 순수성에 대한 자기 추구이다. 당연히 자신의 삶을 사진에 이입시키는 사색의 골몰이다. 결국 그의 불행한 선택은 이런 사진의 가르침을 통해서 배운 삶이 아니었단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껍데기의 사진에 치중하는 부분이 있는지 다시금 한번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아닐까라는 질문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사진은 물론 보여주는 부분이 전부라 하지만 반드시 전부도 아니다. 자신에게 보여주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진은 자신의 삶에 이입시켜 투영하는 삶이라야 한다. 사진의 명성, 경력, 어디 수상 이력의 공명감 따위에 사진에 골몰하게 되면 사진에서 그 가르침을 배울 수 없다. 그런 공명심이란 것도 반드시 사진 아니라도  얼마든지 쌓을 수 있다. 특히 그는 배우였으니 배우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훌륭할 수 있는데, 굳이 사진은 왜 추가되었을까라는 부분이다. 따라서 성찰과 되돌아보는 계기의 사진이 되지 않는다면 사진은 그저 허영과 사치의 사진이 되고 만다. 특히 여기서 사진의 예술론으로써의 허영과 사치가 될 때, 사진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꼴이다. 사진의 허영과 사치는 결국 표피적 외형적인 보여주는 과시용으로 전락하고, 수상 경력과 사진 이력에 집착하기도 하고 때로는 카메라의 뽀대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경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작은 똑딱이 카메라로도 얼마든지 훌륭한 사진을 담는 작가들의 과시하지 않는 진솔한 모습은 그래서 더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은 사회적 위치와 명성, 혹은 권력이 높아갈수록 유혹에 빠질 위험성은 증가한다. 이는 욕망의 사이즈가 커지는 결과를 만들어 위험한 유혹에 빠지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으로부터 얼마만큼 자신을 절제시켜 제어할 수 있는 자성과 자각이 폭주의 욕망에 따른 위험성과 비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유혹의 파멸적 위험성에 비례하는 자성은 늘 부족하거나 따라가지 못하게 될때 사고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그가 사진으로 자신의 진실한 내면과 마주하였을까라는 점이다. 사회적 명성이 높아도 오롯한 자신의 내면적 사진이 아니었다는 결과적인 결론이 무척이나 아쉬운 점이다. 왜냐하면 사진은 끝이 없는 자신과의 대화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과의 질문과 대화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자각은 유혹의 위험성으로부터 조절되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물론 사진은 외형적 이미지로만 보일 뿐이고, 그게 자신의 내면적인 질문과 대화인지는 자신만이 안다. 그래서 사진심리학에서는 움직이는 동선과 행위로써 사진이 내면으로 오버랩으로 덧대진다. 많은 사진가들이 사진 따로, 삶의 행위 따로인 경우를 보게 된다. 사진과 삶의 합치성은 사진 활동에 중요한 덕목이다. 아무리 사진을 잘 찍고 외형적 이미지가 절묘해서 대단한 작품성으로 돋보인다 하더라도 그 삶이 사진의 보이는 의도와 전혀 다른 이중성으로 포장되었다면 사진의 철학은 자동 격하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외로 사람의 평가에 있어서 한 번의 실수를 너무 가혹하게 치부해버린다. 항변해도 아무런 소용도 없고 한 번의 낙인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다. 이와 비슷하게 사업에 실패하고 알거지가 된 사람도 극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재기할 여력조차 깡그리 박탈해버린다. 너무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세워 빠져나갈 구멍조차 없애 버리는 경향이 있다. 실수에 대한 온갖 비난과 매도, 살아온 삶의 전부 그 자체까지 부숴버린다. 한치의 용서조차 허락하지 않는 섬찟함이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누구라도 완벽한 사람이 없다고는 하나 전부 완벽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누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라고 예수께서 가르쳤으나, 우리는 비난 비판을 너무 쉽게 한다. 직간접적인 피해자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아무나 마구 돌부터 던지고 있는 셈이다. 세상엔 용서받지 못할 자는 없다. 세상엔 용서 구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용서에 어찌나 인색한지 사람 하나 죽이는 건 눈도 깜짝하지 않을 만큼 강렬하다. 욕먹을 짓 했다 해서 욕만 날리는 것도 아니었더란 거다. 역시나 비난은 쉽고 자성은 어렵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 다른 산의 돌을 보고 내 산의 돌을 생각하는 것. 이것을 타산지석이라고 했다. 타인의 행위에 돌을 던지기보다는 타인의 악행에 나를 비추어 나의 돌은 얼마나 연마할 것인지를 먼저 따지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어느 일방의 잘못을 매도하기에는 후순위가 되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그 가족일 것이다. 아빠를 잃었고 남편을 잃었다. 명망 높았던 교수라는 것에 가리어져 수치감에 치를 떨었을 학생들이었다. 정작 본인 스스로가 파국으로 끝을 맺어 버렸으나 그들이 입은 상처는 크고도 깊다. 앞으로도 상흔이 많이 남았다. 상처의 아픔을 이겨 내고 극복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애 버렸다는 점이 더 가슴 아픈 부분이다.

 

타산의 돌을 보고 내 산의 돌이나 더 갈고 닦아야 하지 않을까, 오점을 남기지 않고 상처 주지 않는 나의 돌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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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0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0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9-10-10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름 좋아했던 배우였는데 안타깝게 됐죠.
모르긴 해도 그런 일을 당할 때 자신이 어떻게 처신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선
아는 바도 들은 바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쪽에선 애꿎은 사람만 죽어나갔다고 미투운동을 비난하곤 하죠.
연출가 이윤택 씨는 복역중인 걸로 아는데 그의 책은 아예 품절되었더군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고은 씨도 그 리스트에서 제외된 것 같구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번은 통과해야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명예는 높은 도덕성과 함께 온다는 걸 이 나라 셀럽들은 이제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yureka01 2019-10-10 15:27   좋아요 1 | URL
명예는 도덕성과 함께라는 것이 핵심이네요..
누군가 억울하고 부당한 피해자가 있다면 그 명예는 허울이 되어 버리거든요.

왜 평생을 쌓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유념하지 못했을까 이게 너무 미스테리하거든요.
특히 남여의 성적인 부분은 예민한 거라서 말이죠.
흔히 권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자의적으로 해석해버리는 독선에 빠지게 될때. 발생하거든요..

매우 안타까웠던 이유입니다.

강옥 2019-10-11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네거티브에 약하더군요
여태 쫗게만 보던 사람도 나쁜 소문이 돌면 금방 손가락질 해요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일단 색안경을 끼고 보더라구요
한 사람을 지목해 그를 탈탈 털어 왕따시키는 행태가 서울 강남에서 횡행햇다고 하더군요
같은 무리들 속에서도 미운 넘 하나 골라 자빠뜨리는-
광화문파와 서초파가 격돌하는 작금의 세월이 내란같이 불안한데 과연 누굴 믿어야할까요?

yureka01 2019-10-11 11:46   좋아요 0 | URL
항상 크로스 체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단편적이고 일방적인 한쪽의 주장만으로 판단하면 자칫 오해할수도 있거든요.
주장에 타당성.주장의 신뢰성 이게 보완되어야 할 거예요.
요즘 뉴스가 뉴스라기보다는 의혹으로 소설같아서요.
일반적으로 팩트쳌라고는 하지만 이게 간단한게 아니라서요.

2019-10-12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3 0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