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리뷰나 페이퍼가 뜸했습니다.
업무에 치이다 보니 집으로 퇴근하면 파김치 한 접시 먹은 기분입니다.
책은 고사하고 손가락 까딱하기도 싫어지더군요.
그렇게 좋아하는 평생의 업인 사진조차 찍으로 간지 언젠지 기억도 안납니다.
저녁은 있으되, 피곤이 저녁을 압도해버립니다.
그런가 봐요.
먹고사는 일이 이렇게 지난하죠.
네 지난함. 난제들의 줄줄 딸려서 쿨하지 않습니다.
내부적으로 업무에 게을러서 미루는 거라면 얼마든지 열심과 노력~할 수 있지만 대부분 업무에 브레이크가 걸린 이유가 외부적이거든요.
아무리 혼자 발버둥 친다 한들 내부적 외부적인 요인들이 합쳐져서 시너지가 없으면 별 소용도 없죠.
왜 일을 이렇게 꼬이게 만들까라고 생각해보면, 대부분은 과욕을 부리니 정상적이지 않는 절차를 밟아 나가려 하니 매끄럽지 못하고 순조롭지 않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일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과욕. 자본의 과잉을 바라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여튼 이 업무를 언제까지 해야 할지 참 피곤함이 밀려듭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다고 어디선가 그랬죠.
네 태어난 이유가 일하고 돈 벌고 밥 벌어먹고 자 태어난 목적이었습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고 일하지 않고 돈 벌지 않아도 되고 밥 안 먹어도 되면 또 왜 안되는 겁니까?
혹자는 말합니다.
태어남이 축복이라고 합니다.
전 글쎄요?라고 의문스럽습니다.
삶이란 굴레와 구속과 부자유스러움이라는 이 한계를 가졌는데, 왜 축복이라고 까불었을까요?
축복된 삶이란 대체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 본 적은 있습니까?
축복은 고사하고 행복은 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큰 문제가 없는 한 그럭저럭 불만은 없다거나 그럭저럭한 행복은 하고 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진정으로 스스로가 지금이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솔직하게 답을 내는 몇이나 될까요?
몸은 사람으로 태어났을지언정, 살아가는 모양새가 꼭 멍에를 뒤집어쓰고 밭을 갈며 시간의 쟁기를 끄는 소를 닮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밭이라도 갈아엎어서 작물을 심는 누군가의 소 주인에게 노~~력을 지불하고 받아먹는 여물을 닮은 자본이 연봉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싶더군요.
넓은 초원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사육장 안에서 갇혀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에너지를 뽑아내어야만 산다는 것,
어깨를 짓누르는 굴레와 멍에가 무겁고 땅기는 힘도 부칩니다.
결국 더 이상 쟁기를 당겨도 힘에 부칠 때, 용도 패기 당하는 것이죠.
시골 가면 소에게 한번 물어봐야겠습니다.
소야 넌 행복하냐?라고.
큰 눈망울을 하고 눈만 끔뻑 끔벅하며 여물을 되새김질로 대답을 대신할 것인지도 모르죠.
소의 큰 눈에 달린 눈곱은 지난밤에 흘렸던 고단한 눈물이 말라버린 흔적이었다는 것을요.
"이랴, 이랴.. 오늘따라 이놈의 소가 말을 안 듣네,
소 주인의 휘두른 채찍이 등줄기에 사정없이 날아옵니다.
아파라~~삶이여~
그리고, 아픔에 비명 한마디 내지릅니다.
음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