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물론 달변가는 아니다. 한마디 말에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는 달변가라면 나쁘지는 않겠지만, 사실 말을 잘한다는 게 이 또한 천성이나 재능의 일부분이다. 타고난 말재주는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비상하고도 탁월한 능력이다. 협상에서도 두말할 것도 없고 강의라든가, 교육이라든가 이런 분야에 달변이야말로 최고의 능력이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소위 유명한 대형 교회를 개척한 목사들의 설교를 보면 달변의 흡인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재능인지 알수 있다. 어디 유능한 강사라는 것도 다 말의 달인급이다. 달변가에서 웅변가로 최고는 히틀러나 괴벨스일 것이다. 하나의 제국 건설에 그의 언변은 국민 전체를 감복시켜 버렸으니 그런 특별한 재능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좋은 것에 쓰이는 것과 불행한 것에 쓰이는 용도에 따라 차이가 별개로 치더라도, 웅변가 혹은 달변가는 청중에게 이목을 집중 시키는 덕목일 것이다. 가끔 유튜브에서 만나게 되는 유명한 강사의 언변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되는 힘이 있다. 유명한 강사의 첫 번째 조건이 바로 조리와 재미로 신나게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말이란 생각의 전달하는 수단이고 말을 잘한다는 것은 생각의 전달을 효율적으로 주목하는 기술이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학식과 학위가 고매한 교수도 말이 어눌하고 버벅대는 경우라면 그 강좌에 수강생이 잘 모이지도 않고, 반대로 시간강사로 소위 보따리 장사하는 교수도 달변에 강좌가 재미나면 수강신청이 치열한 경쟁률을 보이기 마련이다. 다 말의 기술이 특출하기 때문이다. 물론 말 잘하기 위한 기본적 조건이 지식이겠으나 말의 기술은 많이 아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여하튼 오늘날은 말의 홍수시대를 살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합실이나 공항이나 터미널을 가보면 금방 느낀다. 웅성웅성하는 말소리들의 울림이 얼마나 큰지, 이태원의 솔개라는 노랫말 가사 첫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 그렇다. 우리는 말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그러나 어느 산사에 가서 대웅전에 들어갈라치면, 정확히 보이는 단어 팻말. 묵언. 이는 말하지 않는 것을 요구한다. 수행에 묵언이 필수라고도 한다. 말이 많으면 수행할 수 없다는 것으로 등치 시킬 수도 있다. 말을 하면 수행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묵언이긴 하지만 말로 대신하는 언어로 수행하라는 뜻도 된다. 말의 홍수 시대에 말로 사고 나기도 하고 뜻하지 않는 갈등을 낳기도 하고 말 한마디로 뼈에 비수를 꼽는 악랄함이 나오기도 한다. 싸움에는 먼저 말싸움부터 시작하기도 하고 말로써 언쟁을 벌이기도 한다. 말이 씨가 되는 경우도 있기도 하고, 하다못해 성경에는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도 했다.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그 말 한마디에 내 가슴은 녹아들든 터져 버리든 말은 우리 삶에 주장과 표현과 마음의 심금을 터는 무지막지한 효과는 부인하기 어렵기도 하다. 평생토록 들어 보지 못한 말 한마디. 홍길동은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했는데 아비에게 "아들아 사랑한다"라는 말 한마디, 못 듣는 사람이 가슴에 담긴 말 한마디의 무게는 무엇으로 개량될 수 있을까. 몇년 동안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던 여자친구에게 끝까지 사랑한단 말 한마디 못 듣고 헤어진 상사병의 총각은 그야말로 말 한마디에 생사를 건다. 시집와서 시댁일 종종 거리며 온갖 수고를 다하고도 시어머니에게 늘 핀잔 듣고 갈굼 당하고 인정 못 받다가 시어머니 숨지지 며칠 전에, "며느라,우리 집에 시집와서 고생 많았다. 미안하다"라는 말 한마디에 며느리는 그간의 회한들이 얼어붙었던 가슴을 일순간에 녹여 버리고 눈물로 터져 나오는 상황들. 이게 다 말의 힘일 것이다. 이처럼 말 한마디에 천 냥도 걸 수 있고 인생을 걸 수도 있다.
그런데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감상하다 보면, 가끔 그런 말을 듣는다. 말이 필요 없네. 뭐 기막히도록 말문이 막히는, 그러니까 무슨 말이든 떠오르지 않는 감탄사나 혹은 비토어가 그런 경우일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도 한다. 백 마디의 말보다 한번 보는 것으로 백 마디 말조차 필요 없는 시각의 힘이란 것. 말조차 아울러 버리는 이미지는 그래서 수백 마디 보다 강력하다. 빨간색의 사진을 보고 말로 빨간색이라고 할 때 언어가 다르면 빨간색이 어떠하다는 전달이 불가능하다. 빨간색을 보여주고 이게 레드라고 한다면 서로의 빨강은 공유되기 때문에 굳이 말이 필요 없는 지점이 있다. 사진은 그래서 말을 뛰어넘기도 한다. 수백 줄의 설명서 보다 몇 장의 사진이나 그림을 통해서 예시를 보여줄 때 말보다 이미지의 전달력은 더 크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사랑한다는데...라고 하면 긴 말을 추가하지 말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이 필요한 때가 다 있다. 꼭 말이 필요할 때는 그 말 한마디가 간절할 때일 것이고, 꼭 해야 할 말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듣고 싶은 말 한마디. 하고 싶은 말 한마디. 그래서 우리는 말의 힘을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가려야 한다. 말이라고 다 말같지는 않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사진을 찍으면서 말이 필요 없을 만한 사진을 그리 많이 찍어 보지를 못했다. 하기야 무슨 사진 지식이 출중하거나 사진 감각이 탁월해서, 내가 찍은 사진 한 장에서, "이야, 말이 필요 없네"라는 감탄문을 들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일까 사진에 자꾸 말을 붙였다. 사진에서 말이 필요한 사진을 찍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단 하나의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이미지 한 장을 얻는 사진가의 궁극의 꿈을, 나는 품어 보지도 못했다. 사진에 말이란 사족을 덕지 덕지 붙이고 이게 사진인지 사진 글인지도 모를 글을 자꾸 사진에 덧대어 왔던 습관들이 있었다. 언제쯤 사진 한 장에 "우와 말이 필요 없네"라는 사진 제목을 붙여 볼 수 있을까.
종종 사진을 찍으면서 허탈하게 자신에게 자주 묻는다. "뭐 하러 자꾸 찍어. 쓸데도 없이." 그럴지도 모르겠다. 말이 필요 없는 사진일런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