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는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 P27

난 신의 말씀을 경외한다. 시적인 그 힘을 사랑하므로, 난 신의 말씀을 혐오한다. 그 잔인함을 증오하므로, 이 사랑은 아주힘든 사랑이다. 말씀의 광채와 자만하는 신이 만드는 엄청난 예속을 끝없이 구분해야 하니까. 이 증오도 아주 힘든 증오다. 이세상의 멜로디인 말씀을, 우리가 어릴 때부터 경외하라고 배운말씀을 어떻게 증오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다음부터 우리를 봉화처럼 비추던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지금의 존재가 되도록 이끌어준 그 말씀을?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친자식을 동물처럼 도살하라고 요구했음을, 이런 말씀을 읽을 때 느끼는 분노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자신과 논쟁하려 한다고 읍을 비난하는 신은 도대체 어떤신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자기가 겪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욥을? 욥을 그렇게 만든 게 누구던가? 신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이, 평범한 사람이 그러는 것보다 덜 부당할 이유는 뭔가? 욥이 불평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았던가? - P17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유리창의 반짝임과 서늘한 고요함과 명령을 내리는 듯한 정적이, 오르간의 물결과 기도하는 사람들의 성스러운 미사가, 말씀의 신성함과 위대한 시의 숭고함이 필요하니까. 나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자유와 모든 잔혹함에 대항할 적대감도 필요하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무의미하다. 아무도 나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말기를.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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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9-11 2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표지는 영화 포스터 느낌이네요. 찾아보니 이전 표지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두 가지 표지 모두 품절인 걸 보면, 다음엔 새로운 표지로 보게 될 수도 있겠어요.
mini74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mini74 2021-09-11 22:30   좋아요 1 | URL
영화 먼저 보고 좋아서 중고로 샀어요 서니데이님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그녀가 말했다. "패싱‘은 정말 알 수 없다니까. 우리는 패싱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용서하잖아요. 경멸하면서 동시에 감탄하고요. 묘한 혐오감을 느끼면서 패싱을 피하지만 그걸 보호하기도 하죠."
"살아남아서 번성하고자 하는 종족 본능이지."
"말도 안 돼! 생물학적 일반론으로 모든 것이 설명될수는 없어요."
"전적으로 모든 게 그렇게 설명될 수 있소. 백인이라불리는 작자들을 봐요. 지구 곳곳에 애비 없는 자식들을만들어 놓는 것도 마찬가지라고요. 생존하고 번성하고자하는 종족 본능이란 그런 거요."
그 말에 아이린은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보다 남편이 더 훤히 알고 있는 분야에 싸움을 걸어 봤자 부질없다는 사실을 과거의 많은 논쟁들을 통해 알고 있을뿐이었다. 아이린은 그의 호언장담을 무시하며 그 주제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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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의 문화사 - 조선을 이끈 19가지 선물
김풍기 지음 / 느낌이있는책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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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로 주고받던 선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젓갈부터 고급 벼루에서 청심환, 갖옷까지 소소한 정을 나누는 물품부터 왠지 뇌물의 느낌이 나는 최고급 물품까지 선물로 보내졌던 다양한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관료들은 매월 녹을 받고 매 계절의 초입에는 봉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지방관청의 경비로 쓰일 땅에서 나오는 름. 그걸로는 아무래도 부족했다. 이동수단이나 상거래가 발달하지 않았기에, 서로의 친분을 매개체로 한 물물교환을 닮은 선물들을 서로 주고받은 것이다.
바닷가 근처의 친구들은 말린 청어를, 산 근처엔 말린 나물등을. 이런 선물들은 등가값어치에 비례해 주고받기도 했지만, 그저 심리적 상징적 등가로 호혜성으로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매화 가지, 선물을 받았지만 형편상 값어치가 비슷한 선물을 보내지 못할 때, 마음 가득 감사함을 담아 매화 한 가지 버드 나무 한 가지를 시 한 수와 보내기도 했다고 하니 이 부분은 꽤나 낭만적이다.

절기나 때에 따른 선물들도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책력! 지금도 매년 말이면 서로 달력을 주고받기도 하니 예전과 닮았다. 물론 그 시절의 책력은 나라에서 관리했으며, 주로 임금이 관리들에게 하사하면, 그 관리들이 또 지인들과 주변에 나눠주었다고 한다. 이 책력엔 절기에 따른 다양한 행사와 농사법, 그리고 오늘은 빨래하기 좋은 날이라는 등의 일상생활에 대한 지혜도 담겨있었고, 그런 책력 밑에 있었던 일이나 약속 등을 적기도 했다니, 지금의 다이어리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연신방위지도라고 해서 한 해동안 각 방위의 길흉도 적혀 있었다고 한다. 엄마가 절에서 받아 오시는 달력에 손없는 날, 오늘은 동쪽이 길한 날 등이 적혀 있는데 이 것과 비슷했나보다.
단오면 서로 주고받던 부채를 단오선이라고 하는데, 워낙 대량으로 주고 받았기에 첩선장(부챗살에 종이나 비단을 붙이는 장인)과 원선장(둥근부채)이라고 불리던 공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부터 송선(소나무나 물버들껍질로 만든 부채) 접선 등이 유명해서 중국인들도 좋아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이 이 접부채는 주로 하인들이 썼다고 한다. 신분이 높은 분들을 만나면 하인들은 얼굴을 가려야 했다고.
그리고 나라에서 노인공경하는 마음으로 하사하곤 했던 지팡이. 특히 유방이 항우에게 쫓겨 숨어 있을 때, 비둘기가 갑자기 날아올라 (비둘기가 있으니 사람이 숨어있진 않겠구나 하며 항우편에서 그냥 지나가버렸다고 한다.) 목숨을 구한 적이 있는데, 그 후로 지팡이 손잡이에 비둘기를 조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지팡이로는 척촉장이라고 철쭉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사대부들이 주고받았던 인기 선물은
매화, 종이, 앵무배 (앵무라는 소라껍데기로 만든 술잔)와 벼루 그리고 사인검(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만든 호랑이 검)등이라고 한다.
사치의 대명사인 가죽으로 만든 갖옷은 민란을 일으킬 정도로 문제의 소지가 많았다고 한다. 담비 60여마리는 있어야 옷 한 벌이 나왔다고 하니, 백성들의 힘듦이 느껴진다. 백성들의 고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 한 가지 더 바로 귤이다. 비바람이 불면 제주도 사람들은 귤나무를 부여잡고 통곡을 했다고 하니, 진상해야 할 귤이 떨어지면 목숨도 위태로웠다고 한다.
중국사신들이나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선물은 종이, 청심환, 합죽선이었다고 한다. 조선사절단이 가면 다들 청심환 등을 얻고 싶어했다고 한다. 박지원 또한 작고 휴대가 간편한 청심환과 종이 등을 넉넉히 챙겨가서 같이 물물교환도 하고, 도와준 이들에겐 사례도 했다고 한다. 간혹 밥값으로 대신 치루기도 했다고 한다.

가끔 명절이나 어린이날이면 받고 싶은 선물 순위가 기사에 오르곤 한다. 휴대폰, 현금, 컴퓨터 등 예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내가 어릴 적 기억하는 건?
아빠가 어린이날이나 노동절에 회사에서 받아오시던 양과자 세트, 명절에 갖고 오시던 설탕세트다. 우리집이 큰집인데다가 할머니가 오래 살아계셔서, 손님들이 북적였는데, 술이 제일 선물로 많이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간혹 과자세트가 들어오면 그렇게 좋았다. 그러면 엄마는 떡이며 생선이며 따로 포장해서 가시는 손님들께 드리곤 했다. 그래서 명절에 우리집은 조기도 한 가득, 떡도 한 가득, 무슨 공장같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떡이며 조기를 갖고 가는, 술을 들고 오는 손님들도 없지만, 대신 9명의 손주와 10명의 자식들과 사위와 며느리가 북적인다. 작년부터 순번제로 돌아가며 찾아가는 명절이 되었지만.

선물인 듯 뇌물인 듯 아슬아슬한 경계의 물건들도 있었지만, 그 시대 서로의 편지와 함께 오고가던 젓갈과 청어와 나물과 각종 서적들과 종이들, 감사의 편지와 싯구들이 정답게 느껴진다. 클릭 한 번으로 집 앞까지 배송되는 편한 세상이지만, 그 클릭 한 번엔 참 많은 고민과 좋아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담겼다는 걸 우리 조카들이 알아줬음 한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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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09 15: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1등 👐^ㅅ^

mini74 2021-09-09 15:52   좋아요 5 | URL
ㅎㅎ 고맙습니다 스콧님 *^^*

scott 2021-09-09 16:29   좋아요 5 | URL
오! 이책은 우리 조상들의 선물? 문화, 관습에 관한 책인가봐여 ㅎㅎ

선물과 뇌물-공물 ㅋㅋㅋ
조기는 엄청 값진 선물이였겠죠!

요즘 중국인들도 한국산 약 무진장 좋아하고 무한 신뢰! ㅎㅎ

일본인들 자신의 나라 제품이 최고 라고 생각했는데
동일본 지진 이후 세대 부터는 신뢰가 땅으로 !

[마음 가득 감사함을 담아 매화 한 가지 버드 나무 한 가지를 시 한 수] 같은 낭만적인 선물 보다 요즘은 클릭 한번으로 기프트 보내고 별다방 쿠폰 쏴주는 시대!


새파랑 2021-09-09 17:2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선물의 역사에 대한 책이 있군요~!! 선물은 받는것도 좋지만 주는것도 좋더라구요. 상대방이 좋아할지 안할지 많은 고민을 해서 주는 🎁을 상대방이 좋아할때 그 기쁨이란~!!

mini74 2021-09-09 17:31   좋아요 5 | URL
맞아요. 받는 기쁨도 있지만 주는 가쁨도 크지요 ~

미미 2021-09-09 17:2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미니님♡ 저는 앵무배가 마음에 드는데요? 술을 따라 마시면 덤으로 바다향이 날것만 같아요! 어릴때 저도 삼촌이 과자세트 사준거랑 빨간색 컨버스 운동화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그래도 결국 가장 오랫동안 버리지 못했던건 편지였던거같네요😊

mini74 2021-09-09 17:33   좋아요 5 | URL
역시~~ 앵무배, 비싸고 고급진 잔, 선비들이 앵무배로 짠 하면서 시를 지었다고 해요 ㅎㅎ저도 친구들이며 받은 편지들을 가지고 있어요 *^^*

레삭매냐 2021-09-09 17:5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려서 어린이날 어머니가
사다 주신 돈키호테 책이랑
소공녀인지 소공자가 너무 기억
에 납니다.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지요.

mini74 2021-09-09 18:03   좋아요 3 | URL
정말 좋은 추억이네요. 소공자 소공녀. 저 혹시 부자 할아버지 있는 건 아닌가 막 상상했던 기억이 나요 *^^*

붕붕툐툐 2021-09-09 18: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니님이 잘 읽으시는 책 스타일 딱 알거 같아요! 저라면 손에 안 갈 거 같은 책인데 미니님이 읽고 쓴 리뷰 읽는 건 넘나 재미나네요!! 자연스레 추억 소환되는 부분 너무 좋아용~😍
전 유학생 삼촌이 보내시던 미제 쪼꼴렛. 언니들이랑 정확히 1/3로 나눴는데, 예를 들어 스니커즈 한봉투 나눴는데 1개가 남으면 그거 뜯어서 또 1/3로 나눴어요.ㅋㅋㅋㅋㅋ

mini74 2021-09-09 18:29   좋아요 3 | URL
당근 저희도 무조건 1/5씩. 나이도 의미없더라고요 ㅎㅎ 스니커즈 맛있지요 ㅎㅎ재미있게 읽어주셔서 제가 더 고맙지용 ~~

초딩 2021-09-09 18: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버드나무를 좀 많이 준비해야겠습니다 ㅎㅎㅎㅎ

초딩 2021-09-09 18: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상세한 요약 감사드려요~!!

서니데이 2021-09-09 21: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조선시대 선물들은 당시에도 고가품 같은데요.
예전에 과자 선물세트 생각나서 그런지, 요즘도 쿠키 세트 같은 것들 좋더라구요.
좋은 선물을 받게 되면 기쁜 마음도 들지만, 선물 잘 고르기는 참 어려워요.
mini74님 좋은 밤 되세요.^^

행복한책읽기 2021-09-10 0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있군요. 미니님도 관심사가 정말 넓어요. 리뷰 읽다 보니 얼마전 본 <자산어보> 생각났어요. 기록물이 있으니 이런책도 나올 수 있었겠죠. 조사하고 연구하고 읽고 쓰고. 저자가 애를 많이 썼겠다 싶어요. 미니님 덕에 저는 아. 그랳구나 할 수 있게 됐어요^^

페크pek0501 2021-09-11 1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릴 때 건빵을 아버지가 사오시곤 하면 그 이상 행복한 게 없었는데
요즘 애들은 현금을 제일 좋아하죠.
이 책은 처음 보는 책입니다. 검색해 보겠습니다.
 

도련님 열차 타고 소세키 맥주를 마시는 여행이라 작가님의 나홀로 시리즈~ 잔잔하게 웃으며 볼 수 있는 만화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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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 2021-09-08 2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국의고장 에치고 유자와, 시라카와고와 더불어 정말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

mini74 2021-09-09 01:00   좋아요 2 | URL
저도 도련님 열차 꼭 ! 타 보고싶어요 ㅎㅎ

scott 2021-09-09 0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세키 맥주 도련님 열차타면 마실수 있는 건가여? ㅎㅎ 다카기 나오키 표 유머 좋아합니다 ^ㅅ^

mini74 2021-09-09 15:52   좋아요 2 | URL
저도 다카기 나오코 책들 애정합니다 *^^*

잘잘라 2021-09-09 15: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오옷! 큰일이네요. 다카기 나오키는 또 누구신가요. 진짜. 아이쿠. 이런 만화는.. 대환영입니다!😄

mini74 2021-09-09 15:52   좋아요 1 | URL
이 분 혼자 시리즈 재미있어요 ㅎㅎ

han22598 2021-09-10 0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여행 팩키지 취향저격인데요....도련님 열차에..소세키맥주라니...대환장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우산의 역사 - 로빈슨 크루소에서 해리 포터까지, 우리 삶에 스며든 모든 우산 이야기
매리언 랭킨 지음, 이지민 옮김 / 문학수첩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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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끝물을 알릴 때쯤이었다. 봄꽃들이 떨어지고, 여름잎사귀들이 연한 초록빛으로 담장을 드리울 쯤 이면, 엄마는 이제 오실 때가 됐는데하며 기다리곤 하셨다.

 

바로 우산 고치시는 분,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때쯤이면 우산고쳐요~ 하며 아저씨 한 분이골목을 누비곤 했다. 항상 모자를 쓰고 칙칙한 색의 옷을 입은 그 아저씨는 우리집 마당 한켠에 몇 개 되지 않는 장비를 펼쳐 놓곤 우산을 고치셨다. 아버지의 커다란 우산에 난 구멍을 촘촘히 매꿨고, 녹슨 우산살을 갈아 끼우고, 기름칠을 하셨다. 그렇게 우산 수리가 끝나면, 수리비를 받아들곤, 끼이익 소리가 나는 우리집 철대문을 무심한 듯 칙칙 두 번 기름을발라주곤 가버리셨다. 그러면 한동안 철대문이 소리 없이 닫히고 열렸다.

 

내게 우산은 사는 물건이란 개념이 아니었다. 그냥 언제나 우산꽂이에 담겨 있는 물건.

잃어버려도 집에 가면 비슷한 우산들이 있는, 우산은 그냥 그 곳에 있는 물건이며 미적취향이나 개성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언제나 검은 색이었고, 커다랬고, 무거웠다. 그래서 우산은 언제나 좁은 어깨에서 밀려 내려왔고, 책가방은 반쯤 젖어 있었다.

그러다 학교에서 사귄 친구의 빨간 디즈니 우산을 봤다.

, 그거 어데서 난기고?”

? 선물가게에서 샀지, 어데서 나기는

선물가게. 우산을 선물가게에서 사는 거라고? 그냥 집에서 화초 나듯이 잡초처럼 그냥 솟아 나오는 게 아니고?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나도 우산을 사달라고 졸랐지만, 엄마는 단호했다.

 

우산이 천지삐까리다. ”

 

그 후 용돈을 모아 산, 빨간 땡땡이 내 우산은, 언니들이 마치 자기 것처럼 들고 다니는 통에 두세 번도 들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우산에 대한 집착은, 알라딘 사은품으로 이어졌다. 우산만 나오면 가져야 할 것 같은, 그래서 지금 우리 집 우산꽂이에는 온통 알라딘 사은품용 우산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우산의 역사라니..

 

남자들이 창이나 칼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자, 섭섭한 맘에 들고 다닌 우산이라던가, 우산을 들고 전쟁에 참전해서 공을 세운 영국군인에 대한 이야기 등 우산의 역사에 대해선!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럼 무엇이?

바로 우산이 등장하는 소설들과 에세이에 대한 책이다.

 

우산하면 바로 떠오르는 건?

도롱이? 울 남편의 대답이다. 도롱이라니!!

 

우산하면 메어리 포핀즈, 손잡이에 새 모양이 새겨진 우산에 대한 그녀의 자부심은, 자신의 미모에 대한 자부심에 견줄만 하다.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만든 가죽 우산.

킹스맨의 우산, 상류층 신사라면 떠오르는 중절모에 긴 우산까지.

그리고 보바리 부인에서의 우산 등 소설 속 문구와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멸시와 조롱의 대상에서 신사의 필수품으로 혹은 유혹의 도구로 변한 우산, 그러고보면 과거에서 지금까지 엄청난 것들이 변했지만 우산의 모양이나 쓰임새만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미래엔 어떤 우산이 나올까.

 

중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리는 노나라의 공수반이 아내와 산책 중 비룰 만났고, 그때 아내가 정자가 있으면 비를 피할 수 있으니 좋겠다고 한 말에 착안해, 들고 다니는 정자를 만든 게 우산의 시작이라고 한다.

 

서양은 우산보단 양산이 먼저였다. 햇빛을 가리는 역할도 했지만, 신의 보호 아래 있다는 의미가 더 강했다고 한다. 그 후 비를 막는 우산은 서양에선 여성들이 사용하는 물건으로 치부되었고, 남자들은 우산을 쓰는 행위가 남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다. 그 후 조나선 한웨이가 우산을 쓰기 시작했고, 온갖 오물과 돌로 야유를 받았다고 한다. 그 후엔 남자들은 장우산으로 위엄을 표현했고 오히려 신사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임금 등이 쓰던 일산, 지우산 도롱이 등이 있었고, 개화기때 서양의 양산이들어오면서 여성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산이나 양산이 그려진 그림들도 매력적이다. 모네가 까미유를 그린 그림엔 바람과 함께 날리는 하얀 드레스와 양산이 있다.

 

르누아르의 우산 속엔 말갛게 화가를 바라보는 듯한 수잔발라동이 있다.

 

천장 가득 채워진 우산들로 표현된 현대예술,

김홍도의 공원춘효도에 그려진 커다란 우산 속엔, 과거 시험의 비리들이 속닥거리고 있다.

 

마네의 봄 그림 속 화려한 레이스의 양산

   

 

우산을 비스듬히 지팡이처럼 의지하고 있는 매리 카사트를 그린 드가의 <루브르의 매리카사트 >

 

 

카유보트의 비오는 파리거리는, 반듯하게 정비된 후의 도시와 그 곳을 걷는 신사들과 숙녀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잭 베트리아노(표절논란에도 여전히 사랑받는 작가)의 노래하는 집사

 

박순철 작가의 비는 내리고 에서는 쓸쓸한 뒷모습을 우산 하나가 힘겹게 받쳐들고 위로하는 듯 하다

우키요에의 그림에도 우산은 자주 나오는 단골소재, 연인들이 함께 쓰는 우산도 좋지만 두 처녀가 나란히 쓰고 가는 우산도 보기 좋다. 스즈키 아루노부의 <우산 아래의 두 처녀>

 

그리고 내게 가장 익숙한 우산을 든 남자, 비광이다. ㅎㅎ( 일본의 유명 서예가 오노도후라고 한다. 젊은 시절 글씨가 잘되지 않아 포기하려 했지만, 비가 와서 불어난 강물 위에서 몇 번이나 시도해서 버드나무에 올라가는 개구리를 보고는 감명받았다고 한다. 그 후 그 또한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서 멋진 서예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광에는 우산과 개구리 버드나무가 그려져 있다 )

 

발자크는 우산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팡이와 컨버트블이 낳은 사생아정말 그렇게 말했을지는 의문이지만.

내게 우산은? <홀리데이>에서의 최민수의 금니? 혹은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이성재가 햇빛에 말리던 우산, 친구랑 나란히 쓰던 우산, 그리고 잃어버린 우산들.

잃어버린 우산들의 나라가 있다면, 내 것이었던 우산도 여러 개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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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08 11:16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1등~! 아 사투리 ㅋ 웃겨요 ㅋ
모네가 그린? (첫번째) 그림은 볼때마다 신비한 느낌을 주네요.

우산도 역사가 대단하네요. 우산그림 너무 좋아요~!! 그런데 저에게 우산은 사는게 아니라 그냥 굴러다니는거 쓰고 다니는거 ㅎㅎ

mini74 2021-09-08 11:32   좋아요 7 | URL
제게 이제 우산은 알라딘 사은품 ㅎㅎㅎ 비가 오면 앤을 들고 갈까 프랑켄슈타인? 모비딕? 이러고 있습니다 ㅎㅎ

scott 2021-09-08 11:21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잭 베트리아노! 화보집 소장 하고 있는데 이 화가는 유명인들 전부 모방!ㅎㅎ 그래도 벽에 걸어두면 주변 분위기가 확 살아 나여 저역시 좋아 하는 화가들 작품 프린팅 인쇄된거 그럴듯한 액자에 끼워 넣는뎅 ㅋㅋㅋ 요즘은 유럽에서 우산 쓰고 다니는 사람들은 관광객들과 어른신뿐 비가와도 눈이 와도 전부들 맞고 다님 ^ㅅ^

mini74 2021-09-08 11:34   좋아요 6 | URL
가난해서 모델비용이 없어서 그랬다는 설도 있더라고요. 정말 확 살아나는 예쁜 그림 ~ 전 그 영화에서 가끔 보이는 영국아주머니들 비닐모자 보면서 뭐지? 하다가 하나 갖고 싶었다는 ㅎㅎ

막시무스 2021-09-08 11:37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박순철 작가의 그림이 참 좋네요! 작은 우산으로 커버하지 못하는 고뇌, 발 내딛을 때마다 바닥물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느껴지는듯요!ㅎ

mini74 2021-09-08 12:48   좋아요 8 | URL
막시무스님 감상평이 더 좋아요 ! 고뇌가 젖은 어깨에 가득한 듯 느껴지지요 ㅠㅠ

미미 2021-09-08 11:43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마지막 문단에 끼울 영화 하나 더 있어요! <늑대의 유혹>에 강동원이 들어올리는 우산.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사투리도 달달해요~♡
그림들에 붙은 저런 설명을 올릴 수 있는 미니님 사릉함 오늘 페이퍼는 재밌는데다 뭔가 뭉클하기까지해요ヾ(*´∀`*)ノ

mini74 2021-09-08 11:46   좋아요 7 | URL
아! 강동원 맞아요. 흉내내다 등짝 맞는 애들 많았지요 ㅎㅎ 고맙습니다 미미님 *^^*

막시무스 2021-09-08 11:48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우산 천지삐까리다=우산 천지다!=우산 쎘다 아이가!=우산 억수로데이! ㅋ 비경상권은 이해 못함!ㅋㅋ

mini74 2021-09-08 11:49   좋아요 8 | URL
ㅎㅎ 저희엄마가 저 어릴적 뭐 사달라고 하면 매번 하던 말씀. ~~가 천지삐까린데 뭘 사달라카노. 했어요.

scott 2021-09-08 11:56   좋아요 8 | URL
오 그런 의미가 있어군요 ^ㅎ^

행복한책읽기 2021-09-08 12:20   좋아요 8 | URL
저는 다 알아들었음요. 쎄~빌맀다 도 있음요^^ 학창시절 사투리 유머로 친구들이랑 많이 웃었는데.

행복한책읽기 2021-09-08 12:18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저도 박순철 작가 그림이 젤 눈에 들어와요. 쓸쓸합니다. ㅡㅡ 이 책 찜했더니 미니님이 넘 맛깔나는 리뷰를 써주셨네요. 우산 역사 아닌 작품 속 우산 이야기라니요. 더욱 흥미가 당깁니다. ^^

mini74 2021-09-08 12:48   좋아요 5 | URL
에세이랑 소설 속 이야기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

coolcat329 2021-09-08 12:4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점심 먹으며 짜잔~~진짜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 고쳐야 할 우산 있는데 우산 고치시는 분이 안보이네요.
저도 박순철 작가 그림이 제일 생각나네요. 우산이 이리 재밌다니~^^
발자크 말도 참 발자크다워요~♡

mini74 2021-09-08 13:15   좋아요 4 | URL
그렇지요 우산 고치시는 분 못 본지 오래된 것 같아요 *^^*

페넬로페 2021-09-08 13:06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와, 천지삐까리인 우산에 대해 이렇게도 많은 해석과 재미를 주시다니요👍👍
양산과 우산에 대한 그림도 너무 좋아요.
몇 개 퍼 갑니다♡♡
요즘은 주민센터에서 한번씩 무료로 우산을 고쳐 주더라고요.
갑자기 초등학교때 비 오는데 엄마가 데리러 오지 않아 비 맞고 엄마 원망하면서 집에 돌아오던 기억이 나네요.
우산은 추억도 펼쳐 주네요🥰😍

mini74 2021-09-08 13:13   좋아요 7 | URL
ㅎㅎ 저도 그런 기억있어요 집에 갔더니 동네엄마들과 전 구워 드시고 계시던 ㅎㅎ

초딩 2021-09-08 14:4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르누아르 그림 참 좋운 것 같아요.
정말 다양한 소재로 멋지게 책을내는군요!

붕붕툐툐 2021-09-09 00: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ㅎㅎㅎ저도 그런 거 있어요~ 어릴 때 못했던 거 커서 왠지 집착하게 되고 자꾸 손이 가는 거요!ㅎㅎ
미니멀 한다며 우산 딱 하나 두고 다 정리했는데, 어디서 스멀스멀 나와서 현재 3개나 있어요ㅎㅎㅎ
우산 그림들 다 너무 좋으네요~ 미니님 덕에 눈호강을!! 저도 맨 마지막 그림 좋아합니다.. 하하하!

mini74 2021-09-09 00:25   좋아요 4 | URL
저 ㅠㅠ 실바니안도 모아요 ㅎㅎㅎ 엄마가 안 사줬거든요 ㅎㅎㅎ

레삭매냐 2021-09-09 17: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옷 비광 그리고 통닭 ~~~

생뚱맞게도 오널 저녁엔
통닭이 생각네요...

scott 2021-10-08 15: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추카~
미니님 똘망이 지금 고구마 간식 먹고 있겠쪄! ㅎㅎ

주말 행복하게 ^ㅅ^

mini74 2021-10-08 16:23   좋아요 4 | URL
둘 다 배가 뽈록합니다 ㅎㅎ 고맙습니다 ~

미미 2021-10-08 16: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니님 당선 축하드려욤ㅎㅎㅎ~^^*♥(엄지척)

mini74 2021-10-08 16:33   좋아요 4 | URL
고맙습니다 미미님 *^^* 이 영광을 똘망이에게 ㅎㅎ

새파랑 2021-10-08 16: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니님 완전 축하드려요 오늘 우산 잘 챙기세요 ^^

mini74 2021-10-08 16:53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 고맙습니다 ~ 새파랑님 퇴근길엔 비가 뚝 하고 그치길 ~ 바라며 즐거운 불금 보내세요 ~~

겨울호랑이 2021-10-08 17: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우산을 고쳐 쓰는 것보다 우산을 새로 사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 수선점 등이 주변에서 사라져 가는 듯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산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우산과 관련된 문화는 많이 바뀌게 되었음을 미니님 글을 통해 실감합니다. 미니님 당선작 축하드려요! ^^:)

mini74 2021-10-08 23:56   좋아요 3 | URL
고맙습니다 호랑이님~~ 안녕히 주무세요 *^^*

그레이스 2021-10-08 18: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비오는 날, 이 리뷰 당선^1^, 축하드려요~

mini74 2021-10-08 23:55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그러고 보니 비 오는 날에 우산으로 당선되네요 ㅎㅎ 안녕히 주무세요 ~

서니데이 2021-10-08 18: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mini74 2021-10-08 23:56   좋아요 3 | URL
고맙습니다 서니데이님도 편한 밤 보내세요 ~

bookholic 2021-10-08 23: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비광 화투장이 포함된 최초의 이달의 당선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축하축하합니다.~~~

mini74 2021-10-08 23:56   좋아요 4 | URL
ㅎㅎㅎ 비광! 생각해보니 웃겨요. 편한 밤 보내시고 꿀잠 주무세요 *^^*

러블리땡 2021-10-09 00: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mini74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좋은 밤 되세요~

mini74 2021-10-09 00:11   좋아요 3 | URL
고맙습니다 러블리땡님도 좋은 밤 꿀잠 주무세요 *^^*

페넬로페 2021-10-09 01: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니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우산과 관련된 얘기들과 그림들이 넘 좋았어요**

mini74 2021-10-09 08:5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thkang1001 2021-10-09 06: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mini74님! 이 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을 많이 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연휴 보내세요!

mini74 2021-10-09 08:51   좋아요 0 | URL
앗 고맙습니다.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

thkang1001 2021-10-09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mini74님! 감사합니다!

하나의책장 2021-10-19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mini님, 늦었지만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서곡 2022-07-07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넘 이쁜 그림이 많군요 잘 보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