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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요란을 떨더니

언제 그랬냐는듯

부는 바람에 구름을 밀치고

물끄러미 얼굴을 내민다.

봄볕이다.

중력을 거슬러 오르고 또 오르는 일이

매순간 버겁기만 할까?

눈맞춤하는 잠깐동안의 힘이 있어

콩짜개덩굴은 다시 오른다.

봄은 색으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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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십우花中十友

ㆍ방우芳友 : 난초

ㆍ청우淸友 : 매화

ㆍ수우殊友 : 서향瑞香

ㆍ정우淨友 : 연蓮

ㆍ선우禪友 : 치자꽃梔子花

ㆍ기우奇友 : 납매蠟梅

ㆍ가우佳友 : 국菊

ㆍ선우仙友 : 계桂

ㆍ명우名友 : 해당화海棠花

ㆍ운우韻友 : 차마

*宋나라 증단백曾端伯은 일찍이 열 가지 꽃을 골라서 화중십우로 삼았다. 그가 벗으로 삼은 꽃에 담긴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엿보며 오늘날 꽃을 보는 이유를 살펴본다.

언제부턴가 꽃은 벗과 더불어 생각하게 되었다. 혼자 산과 들로 다니며 꽃을 보는 것은 여전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꽃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을 만났다. 꽃이 피고지는 계절이 몇번이나 바뀌는 동안 이제는 일상과 삶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에 접근 한다. 꽃 아니었으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이다.

작은 꽃이 피고지는 이치가 사람 사는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안다. 식물에 비해 비교적 긴 생애의 주기를 갖는 사람이 짧게는 한 철 길어봤자 두 해를 건너는 동안에 꽃 피어 열매 맺는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식물의 세계를 통해 사람의 일생을 엿보았다. 꽃의 사계를 보고 지나온 내 시간을 돌아보니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꽃이 벗이었다가 벗이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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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22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마는 어떤꽃일까? 원예와 꽃가꾸기가 취미라서 이 글이 눈에 띄네요.
 

소박하고 단정하고 때론 천연덕스럽기도 하지만 우아함 속에 화려함까지 갖추고 있다. 같은 꽃을 보더라도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른 느낌이다. 사람이 달라지면 그 감흥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다른 이의 시선을 보는 이유 중 하나다.

좋아하는 꽃을 이런저런 사연으로 찾아다니지만 그중에서도 애써 놓치지 않고 찾아보는 모습 중 하나다. 막 피어나는 중이지만 자신의 상태를 온전히 드러낸 모습이다.

이제 남쪽에선 노루귀를 보기는 조금 늦은 때라지만 믿는 구석이 있어 나선 길에 기대한 모습을 만났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듯 빤히 처다보는 모습이 야무지다.

너나 나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은 버거울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랴 엿보이는 마음이야 달리 도리가 없기에 감당할 수밖에 없다.

짧은 시간에 주고 받은 이야기가 제법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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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夜喜雨 춘야희우

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 호우지시절 당춘내발생

隨風潛入夜 潤物細無聲 수풍잠입야 윤물세무성

野徑雲俱黑 江船火獨明 야경운구흑 강선화독명

曉看紅濕處 花重錦官城 효간홍습처 화중금관성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봄이 되어 내리네

바람따라 조용히 밤에 찾아와, 소리없이 만물을 적시네

온통 구름이라 길은 어두운데, 강 위 배만 불빛이 밝구나

새벽에 이슬 맺힌 꽃을 보면, 청두 시 전역에 꽃이 만개했으리라

*杜甫두보의 시 '春夜喜雨춘야희우'다. 시간을 건너띄고 사람이 다르더라도 봄비를 품는 감흥은 그대로다. 간밤에 뒤척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토닥토닥토닥,

긴 밤을 쉬지도 않고 토닥거리더니 아직도 여운이 남았나 보다. 지난 비에 깨어난 뭇 생명들의 목마름을 어찌 알고 이토록 살갑게도 다독거리는 거냐. 땅을 비집고 나온 숨구멍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풀들의 재잘거림과 가지 끝으로 온 힘을 쏟는 나무의 아우성이 빗방울로 맺혔다.

희우喜雨, 호우好雨, 시우時雨

봄비는 참 다정도 하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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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좋아하고
또한 술을 좋아한다. 다만 땅이 궁벽하고 해가 흉년이어서 빌리고 사려해도 취할 곳이 없다. 한창 무르익은 봄볕이 사람을 훈훈하게 하니, 다만 빈 바라지 앞에서 저절로 취하게 되는 듯하다. 마침 내가 술 한 단지를 받은 것과 같이 시여취詩餘醉 일부를 빌릴 수 있게 되었다. 이상하다! 먹墨은 누룩이 아니고, 책에는 술그릇이 담겨 있지 않은데 글이 어찌 나를 취하게 할 수 있겠는가? 장차 단지를 덮게 되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런데 글을 읽고 또 다시 읽어, 읽기를 3일 동안 오래했더니, 꽃이 눈에서 생겨나고 향기가 입에서 풍겨 나와, 위장 속에 있는 비릿한 피를 맑게하고 마음 속의 쌓인 때를 씻어내어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즐겁게 하고 몸을 편안하게 하여, 자신도 모르게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 들어가게 한다.

아! 이처럼 취하는 즐거움은 마땅히 문장에 깃들어야 할 것이다. 무릇 사람이 취하는 것은 취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요. 굳이 술을 마신 다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붉고 푸른 것이 휘황찬란하면 눈이 꽃과 버들에 취할 것이요, 분과 먹대로 흥겹게 노닐면 마음이 혹 요염한 여자에게 취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이 달게 취하여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것이 어찌 술 일석과 오두보다 못하겠는가? 읽어서 그 묘처를 능히 터득하는 것은 그 맛의 깊음을 사랑하는 것이요. 읊조리고 영탄하며 차마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은, 취하여 머리를 적시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때떄로 혹 운자를 따서 그 곡조에 따르는 것은 취함이 극에 달해 게워내는 것이고, 깨끗하게 잘 베껴서 상자에 담아두는 것은 장차 도연명의 수수밭을 삼으려는 것과 같다. 나는 모르겠노라. 이것이 글인가? 술인가? 지금 세상에 또한 누가 능히 알겠는가?

*이옥(李鈺, 1760~1812)의 글 묵취향서墨醉香序이다. 명나라 반유룡이 편찬했다는 사선집詞選集을 읽고 난 후에 붙인 서문이라고 한다. 이옥의 독서론과 문장론에 대해 채운의 책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다'의 '취하고 토하라'는 쳅터에 담긴 글이다.

몇 번이고 읽기를 반복하고 있다. 글 맛에 이끌려 머물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취한다는 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곱씹어 보기 위함이다. 책을 손에서 놓지는 않지만 딱히 나아지는 것도 없고 술은 마시지도 못하고, 겨우 꽃에 취해 몇해를 건너왔다. 그것도 경험이라고 '취하고 토한다'는 말의 의미를 짐작케는 하니 귀한 경험으로 여긴다.

그동안 책에 취하였고 요사이 꽃을 핑개로 사람에 취하고 있으니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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