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거기쯤이야, 너를 기다리는 곳 - 테오의 여행테라피
테오 글.사진 / 예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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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어디든 너와 함께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이 말에 여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떠난 본 사람만이 있던 자리를 훌쩍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으며, 많이 다녀본 사람만이 적당히 쉴 곳도 금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계절이 바뀌어 그 무덥던 날도 바깥 나들이하기에 좋은 날로 바뀌었다. 이른바 여행의 계절 가을이 온 것이다. 우리에게 가을은 파아란 하늘과 울긋불긋 물든 단풍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이러한 계절의 변화를 먼저 생각하는 여행이란 어쩜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치우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일상에 묶여 그마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숨 쉬게 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여행을 떠올리게 될까?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때? 매진하던 일에 실패했을 때? 사랑이라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버림받았을 때? 살다 보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 꿈, 일, 사랑, 목표 등 갖가지 이유를 들더라도 여행을 생각하는 상황은 결국 자신을 찾고 싶을 때가 아닌가 싶다. 스스로가 자신을 잃어버리고 상황에 매몰되어 헤맬 때 어디로든 자신이 처한 현실을 떠나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고자 하는 것이 여행의 출발점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막상 떠나려고 해도 어디로 갈 것인지 막막할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떠나지 못하고 주저앉아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다시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테오의 ‘바로 거기쯤이야, 너를 기다리는 곳’은 그러한 현실적인 고민에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여행 테라피스트’라는 저자의 경험을 한껏 살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적절한 여행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여행지를 알려주는 형식의 여행서가 아니라 본래 여행을 생각하게 된 그 이유를 놓치지 않으면서 여행지에서 얻을 수 있는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24가지 주제를 네 가지 큰 틀로 나누고 국내 여행지와 해외 여행지를 번갈아 소개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울 때는 아르헨티나의 탱고 마을에서 탱고 배우기를 시작으로 비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홍대의 작은 카페를 골라 이야기를 시작하기, 삶의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결정하지 못할 때 볼리비아의 티티카카 호수 마을에 머물다 오기, 갖고 싶은 사랑이 있을 때 태국의 치앙마이를 찾아가 풍뎅이들의 결투 보기, 미운 사람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는 새벽이 아침과 닿는 시간에 광안리 해변을 걷기, 가슴 떨리는 사랑이 시작될 때 금오지 주변을 두 번 돌아 걷기, 무작정 어디로든 떠나고 싶을 때 인천공항 출국 라운지 카운터 D를 방문하기 등과 같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벗어나거나 극복할 수 있는 적절한 처방을 내놓고 있다.

 

‘우리는 참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똑똑합니다. 그런 우리들의 여행이 정교한 사업계획서와 출장보고서 형태를 갖추는 건 그래서 당연합니다. 남들보다 천 원만 더 비싸게 지불해도 실패한 여행이 됩니다. 조금만 돌아서 당도해도 미련이 따라 옵니다.’

 

여행마저도 빈틈없이 짜인 일상처럼 대하는 사람들에게서 여행은 무엇일까? 여행을 생각하게 된 근본 이유도 잊어버리는 것이 과연 여행일까? 저자 테오의 ‘여행 테라피스트’라는 말에는 결국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면해 보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과 다름이 아닐 것이다. 하여 일상에 지쳐,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 내면의 자신과의 만남이 필요한 여행은 어쩜 특별한 장소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곳이 어디던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면의 자신과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굳이 먼 해외를 떠올리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가는 주변 어디든 여행지는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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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서재에서 딴짓한다 - 박웅현·최재천에서 홍정욱·차인표까지 나다운 삶을 선택한 열두 남자의 유쾌한 인생 밀담
조우석 지음 / 중앙M&B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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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보통의 남자들은?

 

‘모여 봤자 전날 마신 술 이야기가 화제의 전부이고, 더 나가봤자 자동차와 골프, 진부한 정치 뒷이야기 말고는 나눌 수다가 없는 요즘 대한민국 남자들’

 

이보다 더 적절하게 우리들의 현실을 표현한 글이 있을까 싶다. 나도 이제는 중년이며 내일이면 공자가 말한 지천명의 나이를 먹게 된다. 살아갈 날의 희망보다는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고가 더 많은 시간이 될 것이 뻔 한 시간이 아닐지 모르겠다. 지난 10여년 그런 날을 예상하고 준비한 것이 몇 가지 있다. 우선 혼자인 시간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 악기를 배우는 것과 작은 공간이지만 나만의 서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악기는 우리 악기 대금을 배우는 중이며 서재 또한 마련했다. 이제 서재라는 공간에서 나 만의 시간으로 어떻게 채워가야 하는지 온전히 내 몫이다. 거창한 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악기를 연주하고 마련된 서재에서 마음 맞는 사람과 차 한 잔 나누며 마음 넉넉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현실의 무게감을 감당하기도 벅찬 사람들에게 역시 거창한 꿈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현실이 아닌지......

 

몇 년 전, 대한민국 남자에게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적이 있었다. 암담한 현실을 가냘픈 어께에 짊어지고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는 남자들 말이다. 아니 정확히 아버지란 이름의 남자에게 사회적으로 동정의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그것도 이제는 시들해진 것일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의 남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 주인공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날은 오기나 할까?

 

광고인 박웅현, 사진가 윤광준, 가수·화가 조영남, 진화생물학자 최재천, 공간 디자이너 마영범, 수학자 강석진, 전 국회의원·발행인 홍정욱, PD 송창의, 배우·작가 차인표, 만화가 이원복, 영화인 김동호, 화가 이왈종

 

여전히 주목받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 속에서 보여 지는 일부의 모습이 마치 대한민국 모든 남자들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못난 사람의 의기소침해 하며 삐딱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이 책 ‘남자는 서재에서 딴짓한다’을 읽으며 내내 드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우리시대 성공한 남자들이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더불어 자신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어쩜 선택받은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하는 것 말이다.

 

그렇더라도 이들의 삶 속에는 부러운 점이 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삶에서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 점이 이들이 그 ‘딴짓’도 과감하게 실행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딴짓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부럽더라도 그들의 딴짓에 마음이 가는 이유다. 공간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서재라는 독립공간이 주는 매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독립공간은 곧 자신과의 만남을 전재로 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동반하는 것이 자기성찰일 것이다. 그 자기성찰이 스스로를 삶에서 주인공으로 만드는 근원이라 본다. 또한, 그들의 공통점 하나는 인문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다. 인문학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며 그 사람의 근본에 대한 성찰로부터 출발하고 있기에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시대 보통의 남자들도 자신만의 독립공간을 만들어 스스로 주인공의 삶의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 진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기회를 제공하는 이 책이 내가 주목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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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3대 논쟁
이재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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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은 진실을 담고 있을까?

책과 더불어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가끔씩 이런 의문이 들곤 한다. 같은 일을 두고서 책과 책 사이에 다른 의견을 접할 때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분간하기 힘들 때면 무엇을 근거로 삼아서 그 진위에 접근할 수 있을까?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에 담긴 내용에 앞서 우선 그 책의 저자에 대한 정보를 먼저 확인하게 된다. 다양한 경로로 접한 저자의 책이나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 얼마나 객관적인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살펴 그 저자를 판단하고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다. 특히, 저자의 가치관이 더욱 중요한 ‘역사의 해석’에 관한 내용이라면 저자의 중요성은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사학계에서 지금도 진행 중인 역사해석에 관한 문제의 중요성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는 사례가 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덕일과 일부 학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역사논쟁이 그것이다. 동일한 사건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나 다른 해석의 차이를 보이는지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된다. 이와 비슷한 경우를 이재호의 ‘조선사 3대 논쟁’을 통해 다시 접하게 된다. 이 책은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사칠신 묘소가 있는 이유, 이이가 주장했다는 십만양병설의 진위 여부, 의도적으로 폄하된 이순신에 대한 평가’ 등 조선시대의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왜곡되고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담고 있다.

 

'사육신, 유응부인가 김문기인가'는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와 어용학자들이 사육신 중 유응부를 김문기로 대체하려는 역사 날조극을 자행했고 1978년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 조성 당시 권세가(김문기의 후손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작용으로 기존 사육신의 묘와 함께 김문기의 허묘와 위패를 추가로 봉안함으로써 사칠신 묘소가 되었다는 것, 또한 ‘율곡 이이는 실제로 십만양병설을 주장 했나’는 ‘선조수정실록’을 비롯한 ‘율곡전서’에 수록된 김장생의 ‘율곡행장’, 이정귀의 ‘율곡시장’, 이항복의 ‘율곡신도비명’, 송시열의 ‘율곡연보’ 등 몇몇 기록에서 율곡 이이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전쟁을 예견해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으나 서애 유성룡이 반대하여 무산되었으며, 이 때문에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전란을 초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그리고 ‘이순신과 원균, 누가 진정한 구국의 명장인가’는 ‘인물한국사’와 ‘원균 그리고 원균’이라는 책에서 기존의 이순신과 원균의 이미지를 뒤집는 일이 있어났다.

 

왜 이처럼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이나 폄하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가치관에 의해 사물을 보게 된다. 여기에 하나를 더해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보고 싶은 것 만’을 보게 된다. 그것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역사 왜곡의 이유가 아닐까 한다. 제한된 기록물을 현대를 살아가는 자신의 시각으로 바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인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이 틈이 역사해석의 어려움이며 또한 왜곡이 발생하는 지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특정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를 이용하는 학자라면 그 사람이 이미 학자로써의 이미 자존심을 버린 사람일 것이다. 한 개인의 일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치더라도 역사는 개인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 책 ‘조선사 3대 논쟁’에서는 세 가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이는 지난 역사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이 그 역사를 잘 못 이해하게 만드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는 역사를 이어 받아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근본을 흔드는 문제가 될 수 있으며 결국 개인과 역사를 함께하는 한 민족의 미래와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역사를 올바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와 맥을 함께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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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탐식가들
김정호 지음 / 따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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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식과 미식의 차이는 무엇일까?

맛 집으로 넘쳐나는 세상이다. 어딜 가든 맛있는 음식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음식점들이 부지기수다. 먹을거리가 넘쳐나는데도 막상 무엇을 먹을지 난감할 때가 많다. 음식이란 사람의 삶을 영위하는데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의식주 중에 하나다. 하지만, 먹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사람에게 음식이란 그저 배고픔을 면할 수 있을 정도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피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여기에도 해당된다면 꼭 맞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탐식이나 미식가들이 그들이 아닐까? 아니 그들은 먹는 것 자체를 좋아하고 찾아다니기까지 하는 사람들이기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은 맞지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은 많다. 즐기는 것을 넘어 즐긴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음식을 탐하는 경우를 ‘탐식가’라고 한다. 음식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 음식의 맛을 찾아다니며 것을 두고 왈가불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과유불급이라고 지나친 것은 피해야 옳다는 말이다. 맛을 찾아다니거나 음식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경우는 현대에 들어 생긴 일이 아니다. 역사를 보면 다양한 시대에 지나친 음식에 대한 몰두가 지탄의 대상이 되거나 정적을 제거하는데 이용되기도 했다. 서양의 역사뿐 아니라 우리의 경우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렇게 음식에 주목하여 조선시대 ‘탐식가’와 ‘미식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 김정호의 ‘조선의 탐식가’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조선은 성리학이 지배하는 사회이기에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음식 또한 제한을 받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살생을 금했던 불교국가였던 고려이후 조선에 들어서면서 고기에 대한 금기가 풀리면서 음식문화에 대한 폭이 넓어졌다. 그것이 조선의 사대부들 사이에 음식을 탐하는 문화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계급에 의해 12첩 반상이니 9첩, 7첩, 5첩 등으로 밥상까지 규제했던 사회에서도 탐식가들은 있었다. 조선의 탐식가들 경우 저자에 의하면 김안로와 윤형원과 같이 권력과 부의 맛을 밥상에서 느끼려 한 경우와 서거정과 허균처럼 진귀하고 맛난 음식을 찾아 먹고 기록한 이른바 '맛집 탐방형'도 있었다. 이들이 주목했던 음식으로는 우심적이나 두부, 순채 등이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소박한 밥상론의 이덕무나 정약용처럼 소박한 식단을 지키며 살았던 사람도 있었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시대의 음식철학을 구현한 사람들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살았던 사대부들 보다는 이덕무처럼 ‘중인’ 신분인 사람들이었다.

 

정약용과 개고기, 어쩜 부적절한 조합이 아닐까? 하지만 정약용은 형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생활에서 몸이 상했다는 것을 알고 개고기를 추천하며 그 요리법까지 알려주고 있다. 홍길동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은 귀양을 가면서도 먹고 싶은 것이 있는 고장으로 가게 해달라고 했다. 개고기를 뇌물로 받고 사람을 추천한 김안로도 있다. 모두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다.

 

소중화로 자처하며 중국의 문화를 따라하는 것이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것으로 생각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음식문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누가 무엇을 먹었다는 기록의 의거하여 자신들도 그것을 좋아했다. 우심적이나 두부 등이 그 대표적인 음식이다. 또한 중국의 열구자탕이나, 일본으로부터 승기악탕과 같은 외국음식들도 당시에 유행했다는 것을 통해 당시 음식문화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다. 저자는 소박하고 담박해야 할 성리학의 밥상을 뒤엎은 조선 시대의 탐식과 미식을 파고들었다.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 전국 곳곳이 맛 집이지만 ‘맛’에만 집중할 뿐 음식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는 드문 것이 현실이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는 것’ 보다 ‘음식에 담긴 삶을 맛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이 책 ‘조선의 탐식가들’은 각종 기록을 찾아 조선 시대의 음식문화를 살필 수 있게 한 것이지만 이를 통해 현대인들에게 음식의 가치와 의미를 살필 기회를 제공해 주는 책으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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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문장 - 조선조 500년 글쓰기의 완성 이건창
이건창 지음, 송희준 옮김 / 글항아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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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담아야 할 진정성은 무엇일까?

수 많은 문학가들 중에 유독 그 문학가의 작품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특정 작가의 글은 빼놓지 않고 찾아서 읽을 정도로 주목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 이러한 경향성은 소설이나 시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인문학 분야의 글에도 그러한 현상은 나타난다. 무엇이 이러한 현상을 불러오는 것일까? 우선은 그 작가나 학자의 글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용에 앞서 작가나 학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독특한 글 맛에 매료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내가 조선의 역사와 사람들에 주목하면서 관심을 가진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조선의 후기를 살았던 이덕무로 그의 책과 글에 대한 관심이 조선 역사를 알가가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다른 한 사람은 조선과 현대인 사이에 다리를 놓고 있는 이덕일이 그 사람이다. 이덕일은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이를 독자들과 공감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사는 시대도 하는 일도 다르고 두 사람의 글에서 느껴지는 글 맛도 다르지만 강한 매력을 발산하는 그들의 글을 대하다 보면 지금 내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역사 속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글쓰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놓고 있다. 글이 단순한 글자의 나열이 아니기에 글은 글을 쓴 사람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가지는 진정성이 여기서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조선의 마지막 문장 ’을 통해 만나는 사람 이건창은 글쓰기와 관련되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우선 ‘이건창’(1852~1898)은 어떤 사람일까? 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건창은 강화도에서 출생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그의 문학적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 김택영(1850~1927), 황현(1855~1910)과 함께 구한말의 3대 문장가로 꼽힌다. 또한 김택영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우수한 고문가 9명을 뽑았던 가운데 들어가 ‘여한구가’에 속했을 정도다.

 

‘조선조 500년 글쓰기의 완성 이건창’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 ‘조선의 마지막 문장’은 그런 이건창의 문집인 ‘명미당집’을 저자 송희준이 번역하고 이 속에서 이건창을 잘 나타낼 수 있는 뛰어난 명편들과 당대 현실을 잘 보여주는 것을 선별해서 역고 자신의 해설을 붙여 발간한 책이다. 이 책은 총 7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건창의 다양한 면모 중에서 ‘문장가’로 주목되는 부분과 백성들의 생활에 대한 관찰자이자 기록자로서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편집되어 있다. 문장 이론을 모은 제1부, 논설과 평론을 모은 제2부, 충성과 절의와 관련된 글을 모은 제3부, 가족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쓴 산문을 모은 제4부, 백성들의 삶을 기록한 제5부와 제6부, 다양한 문체를 엿볼 수 있는 걸작들을 모은 제7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건창은 ‘문장이란 뜻을 얽는 것이기에 뜻이 연속하고 관통하게 하는 것을 가장 우선해야 하고 뜻을 통하게 하려다보면 “어조사 따위의 쓸데없는 말을 구사할 겨를이 없으며, 속어 사용을 꺼릴 겨를이 없다”고 강조한다.’이는 저자 송희준이 이건창의 문장을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부분이다. 나아가 ‘언어를 다듬는 법’, ‘敵意로 主意를 공격케 하는 법’, ‘말과 뜻이 서로 넘침이 없게 하는 법’, ‘소리와 리듬을 울리는 법’ 등 문장을 만들어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이 담긴 글들을 통해 이건창의 글쓰기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글로 여겨진다.

 

이러한 문장론을 바탕으로 다양한 글에서 보여 지는 이건창의 삶과 글은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부와 3부의 글들은 관료와 학자의 시각으로 본 당시 조선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과거에 급제하고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보여준 그의 태도가 글쓰기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글은 기록으로 남아 후세에 전해진다는 특성을 한껏 발휘하여 백성들의 삶을 기록한 모습도 그의 삶의 태도를 알 수 있다.

 

‘현실의 모순과 타협하지 않고 싸우고 싸운 흔적이 역사를 상고하고 문예를 비평하고 정책을 논하고 취미를 완상하고 삶을 철학하는 과정에 순고정대하게 녹아있는 것’, 이것이 이건창의 글이며 삶이라는 저자는 ‘그가 글쓰기의 온갖 요소를 두고 치열한 고민을 전개한 그 귀하고 아까운 현장이 아직 우리의 현재와 접속하지 못했고, 이 시대의 문장론 속으로 갈무리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이러한 저자의 안타까운 심정은 이건창이 남긴 몇 편의 글 속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어 공감을 불러온다. 하여 이건창의 평전이나 전기가 나와 독자들과 만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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