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필날 - 오늘은 나의 꽃을 위해 당신의 가슴이 필요한 날입니다
손명찬 지음 / 좋은생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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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소한 삶이 빛날 때
무엇하나 특별한 것이 없는 일상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일상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는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서야 알게 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에서 행복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아닐까 싶다. 기대가 큰 만큼 현실에서 만나는 소소한 일상은 멀리 있는 행복에 가려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닐까? 

요즘 들어 청명한 가을 햇살이 그리운 날이 계속된다. 흐린 하늘에 때때로 비까지 내리는 날이 이어지다 보니 가을날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을 본 것이 언제인가 싶다. 늘 보아오던 하늘이지만 그 하늘에서 느끼는 감정이 매번 다르듯 우리들의 소소한 일상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끔 할 것이다. 무엇을 중심으로 어떤 것에 가치를 두냐에 따라 같은 일도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봄날 꽃씨를 심는 마음은 희망이 함께 한다. 씨앗이 무사히 싹을 내밀고 성장하여 꽃을 피울 날을 소망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씨앗을 뿌리는 마음에는 사랑이 또 함께 한다. 사랑의 마음으로 씨앗을 심고 자연의 너그러운 품속에서 자라날 꽃의 미래를 짐작하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꽃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일상을 바라본다면 이미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세상과 이웃 그리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작가가 있다. ‘꽃필날’의 저자 손명찬은 ‘사랑’을 가슴에 안고 주변의 소소한 일상에서 만나는 대상에 대해 깊은 철학적 성찰을 하고 있다. 그 속에서 작가가 찾아내는 사랑은 ‘특별하고 큰’ 무엇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람의 따스한 가슴을 전달하고 있는 ‘좋은생각’ 편집인인 작가가 매주 한 번씩 ‘좋은생각’ 홈페이지에 연재한 글과 새로 집필한 글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 ‘꽃필날’이다. 

‘꽃필날’에는 우리들이 일상에서 만나는 만만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어린 시절 누구나 읽었던 옛 이야기, 아이가 커가는 동안 아이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담은 마음이 청춘인 사람들, 사계절이 바뀌는 동안 변화되는 계절이 주는 신선한 감동을 놓치지 않고 가슴에 담아낸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그 이야기들은 봄날 아지랑이를 만드는 따스한 봄볕처럼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스함과 함께 희망을 전달해 준다. 아지랑이를 보며 꿈꾸며 따스한 미소를 떠올리듯 말이다. 

작가의 글들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런 따스함 뿐만 아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대상들을 사랑으로 보듬고 자신을 성찰한 내공이 담겨 있어 때론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삶의 지혜가 있다. 아름다운 시든 짧은 산문이든 깊이 읽기를 통해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사랑’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꽃필날’에는 이야기가 한창 진행 중이다. 매 글의 하단에 짧은 이야기로 본문에 답하거나 이어지는 물음을 던져 놓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봐’,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어’, ‘내 말이 맞지?’, ‘거봐 너도 사랑하고 있잖아?’ 등 온갖 상상을 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이 ‘꽃필날’은 이미 완성된 글이 아니라 독자가 자신의 감정 상태에 따라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가는 이야기책으로 남을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지 책의 어느 페이지를 살피더라도 이런 경험을 확인할 수 있다. 

꽃을 피우는 식물에게 핀 꽃은 그 식물이 절정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표현일 것이다. 대부분 매년 꽃을 피우기에 매해 절정의 시기를 맞이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언제가 꽃필 날일까? 죽는 순간까지 내 인생에서 꽃필 날을 찾는 것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 인생의 매 순간이 꽃피는 날이 아닌 날이 없음을 알게 되는 날이 ‘내 인생의 꽃필날’이 아닐까? 지금 이 순간보다 활짝 핀 삶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사람들의 삶이기에 지금 이순간이 사람들에게 꽃필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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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의 집
새러 그루언 지음, 한진영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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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과 자연의 공존 무엇이 전재 되어야 할까?
수년전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물행동학을 전공한 제니퍼 모건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다니’(지안출판사)를 통해 야생 활동을 하는 동물에게 수화를 가르쳐 그들과 인간이 소통하는 이야기를 접했다. 인간과 유사한 동물과 인간의 소통은 굳이 자연보호나 야생동물 보호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매우 의미 있고 흥미로운 사실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흔히 동물에 대한 이러한 실험은 병원이나 제약회사가 인간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전에 행하는 실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동물 실험은 찬반 양자의 입장차가 분명하게 갈린다. 동물보호자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버젓이 행해지는 이러한 실험을 어떻게 봐야 할까? 

‘보노보의 집’은 소설 ‘다니’의 줄거리와 비슷하다. 멸종위기 동물에 대한 인간의 무지막지한 폭력에 대항하는 또 다른 인간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지만 ‘다니’와 ‘보노보의 집’의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점은 야생상태와 그렇지 않음의 차이다. ‘보노보의 집’은 대학 내 영장류언어연구소라는 시설 내에 갇힌 동물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이는 사소한 차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분명 야생의 자연활동과 연구소의 우리는 다른 환경이기 때문이다. 

처음 듣는 동물 ‘보노보’는 ‘피그미침팬지’(Pygmy chimpanzee)라고도 한다. 침팬지와 매우 흡사한 동물이며 이 둘을 구분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열대우림에 살면서 무리활동을 하고 음성체계가 사람과 다르지만 언어학습 능력이 있다. 이것으로부터 이 소설은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학습 능력이 있는 보노보를 대학의 연구실에서 수화를 가르쳐 간단한 소통을 하면서 보노보의 전반적 생활 습성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 연구소에 영장류의 언어와 인지능력에 관심이 있던 신문기자 존 티그펜이 찾아오고 그날 저녁 연수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폭탄테러를 당한다. 연구소의 연구원인 이사벨이 얼굴과 몸에 상처를 입고 병원에 입원하며 연구소의 보노보들의 상황에 애를 태운다. 이 보노보들은 대학에서 한 기업으로 팔려가고 만다. 여기에는 커다란 음모가 있다. 사업가의 돈과 연구소 관련자의 야망이 결합된 것이다. 돈벌이에 혈안이 된 기업가는 보노보들을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된 집안에 가두고 이를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송하여 리얼리티 TV쇼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린다.  

한편, 사고이후 보노보들의 행방을 찾던 폭발당시 상처를 입었던 연구원과 사고 당일에 연구소를 찾았고 리얼리티 TV쇼가 진행되는 ‘보노보의 집’에 취재를 온 기자가 서로의 필요성에 의해 만나게 되고 이들의 노력으로 보노보들은 안전하게 구출된다. 

동물의 언어와 인지능력을 알아내는 것이 인간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우리에 가두어두고 먹이를 공급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아낀다고 하는 것이 그 동물들 입장에서 본다면 결코 바람직한 환경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어쩌면 불가피하게 이러한 실험을 할 수밖에 없을 지라도 지극히 제한적인 조치가 필요하리라. 이러한 부정적 시각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이야기하는 동물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 대한 마음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동물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만이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전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멸종위기동물인 보노보를 알리고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동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오는 이 소설은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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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고 싶은 날 - 스케치북 프로젝트
munge(박상희) 지음 / 예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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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계속, 쭉, 내내, 쌓아 나가기
세상살이에 만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만한 나이다. 무엇하나 똑 부러지게 해내는 것이 없고 마음먹고 시작한 일도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고 만다. 살아온 날이 이런 것의 연속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런 생각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경험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바쁜 일상에서도 자신의 관심사를 지속적으로 해 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워만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남들과 같아도 좋고 다르다고 해도 굳이 흠 될 것이 없기에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시작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마음에 여유를 찾고 짜투리 시간이나마 알차게 보낼 수 있다는 가슴 뿌듯함도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내 오늘부터 지금 당장 하면 나 역시 행복한 생활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으리라. 

‘그림 그리고 싶은 날’은 바로 그렇게 망설이다가 그만 두었거나 나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지래 짐작으로 그만 두었던 그림 그리기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와 그 길을 갈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체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생각 속에 맴도는 이미지를 종이 위에 표현해 낼 수 있다면?', '어딘가에서 보고 느낀 것을 나만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면?'이라는 어쩌면 감상적이고 개인적인 이러한 욕망이 저자의 말처럼 그림 그리기의 시작일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이유로 인해 그림 그리기에 도전하는 자체를 시작도 못해보고 끝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 역시 어느 날 그림 그리기가 무서워졌다고 고백하면서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을 한다. 바로 두려움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확인한 스케치북의 적극적 활용을 이야기 한다. 그저 만만한 스케치북 하나를 장만하여 그 빈 공백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그려가자고 한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빈 스케치북의 공백이 메워지는 동안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스케치북이 여러 권 쌓이다 보면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은 훌륭한 삶의 기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자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바로 스케치북 프로젝트다. 그림 잘 그리려는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기까지 주변에 만만해 보이는 대상을 선택하고 그것을 스케치북에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해보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것이 우선 드로잉이다. 드로잉은 소묘나 데생과 같은 말로 일반적으로 채색을 쓰지 않고 주로 선으로 그리는 회화의 표현방법이라고 한다. 이를 시작으로 저자는 11가지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책을 따라 하나씩 자신의 스케치북에 옮기거나 표현하고 싶은 대상을 따라 그려가다 보면 마치 동료와 함께 그림을 그려가듯 나만의 그림그리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부러 그랬을까? 책에 담겨져 있는 드로잉들은 만만하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저자의 그림이 이정도 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책에 담긴 사례들은 친근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음은 시작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 체험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추고 만다면 결국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하는 것이나 같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도 이것이다. 꾸준히 연습하여 자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내고자 하는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기존 미술 입문서들이 가지는 도식적인 방법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한다. 점, 선, 면을 가르치고 빛에 따라 명암을 구분하고 표현하는 방법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접근하는 방법을 바꿔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불러오기 위해서다. 

스케치북 만들기에서 드로잉에 필요한 도구들까지 알려주는 저자의 세심함에 이끌려 지금 당장 나만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나만의 스케치북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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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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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되었구나
풍경을 담은 사진이 있다. 그 사진에는 사람의 한정된 가시영역을 확장하여 시야에서 벗어난 측면까지를 보여준다. 일상적으로 볼 수 없는 부분까지를 보여주는 파노라마 사진이 그것이다. 이런 사진이 사람들의 눈을 끄는 것은 여러 번 고개를 돌려야 보이는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파노라마 사진뿐 아니라 시야를 벗어난 넓은 영역을 하나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선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본다. 이 말은 자신의 경험이나 환경에 의거해 세상을 본다는 말일 것이다. 즉, 자신의 가치관을 벗어난 부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위와 아래, 좌와 우를 통합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다. 이는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볼 때도 중요하지만 역사의 한 시대를 볼 때도 역시 그 중요성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는다. 권력을 잡은 지배계급의 시각으로만 보거나 그 권력에서 비켜난 백성의 눈으로만 볼 때도 한 측면만 부각시키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한 시대를 올바로 바라보고 통합적 시각을 갖기란 대단히 어려움이 있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호흡하는, 독자들에게 주목받는 작가 김훈의 말이다. 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을 대중과 공유하는 글쟁이의 말이기에 방점이 찍힌다. 어떤 의미를 가진 말일까? 매번 발표하는 작품마다 독자들의 주목을 받는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밖에 없다. 전작 ‘남한산성’이나 이번에 발표한 ‘흑산’에서 보이는 작가의 글쓰기에서 작가의 이 말을 비슷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흑산’의 주 무대가 되는 조선후기는 개혁정치의 수장이었던 정조의 죽음으로 인해 원상복귀 되며 보수와 개혁의 세력이 갈등하며 혼란을 거듭하던 시대였다. 여기에 제국주의 서양의 배들이 조선의 해안에 나타나고 성리학 일변도의 사회에 새로운 사상 천주학이 등장하여 그 혼란스러움을 가중시켰다. 위로는 대왕대비의 대리청정과 김씨가의 세도정치와 사대부들의 보수적 성향과 피폐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백성들 사이의 간격은 이미 멀찌감치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 사이 간극을 매우는 세력으로 기존의 학문과 사상적 경향성에서 벗어나 사회 전반의 새로운 변혁을 시도한 실학자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각기 자신의 길을 걸었던 시대다. 

‘흑산’에서 작가는 ‘그리 되었구나’라는 말이 절묘하게 어울리는 표현으로 다가오게끔 시대의 흐름은 담담하게 절제된 언어를 통해 서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해박해’로 수많은 백성들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거나 유배를 가야했던 당시 상황을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놓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자산어보’와 ‘황사영 백서’의 두 주인공 정약전과 황사영이 있다. 조선말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천주학은 당시 지식인들과 백성들이 갈망하던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기존 사회질서를 지키려는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흑산’에서 정약전과 황사영은 다른 길을 걷는다. 같은 천주교를 접했던 사람으로 천주교의 입장에서 보면 한 사람은 배교하여 목숨을 얻었고 다른 한 사람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그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가슴을 짓누르는 감정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목숨을 잃은 사람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의 밑거름으로 새로 태어난다. 또한 작가는 당시를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시키고 있다. 조정의 관료들과 양반 지식인, 중인, 하급 관원, 마부, 어부, 노비 등이 그들이다. 

작가는 이 주인공들을 통해 조선후기의 시대를 펼쳐놓고 있다. 위로는 왕에서 아래로는 노비, 좌우로 다양한 생활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 ‘흑산’ 속에 다 담겨있다. 작가의 후기에 담긴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이 말을 다시 한 번 살펴본다.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는 성공했다고 본다. 글을 읽어가는 동안 내내 가져야 했던 슬픔과 답답함이 그것의 반증일 것이다. 

하지만,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와 소망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는 점에선 오히려 강한 대안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정약전에 ‘흑산’을 굳이 ‘자산’으로 바꾸고자 했던 이유나 천주교의 교리를 육손이나 마노리가 이미 자신의 몸에 있던 자연스럽고 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을 통해 보면 작가가 정의나 소망을 벗어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어떻게 보면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파노라마식으로만 당시 상황을 펼쳐놓은 것에서 정의를 다투려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말에 수궁을 한다. 그렇더라도 어떤 글이든 작가 자신의 가치관은 담길 수밖에 없기에 작가가 의미하는 말이나 글로써 다투려 하지 않은 정의나 소망이 무엇일까에 관심이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리라. 이 의문에 답을 찾으려면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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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새처럼 살고 싶다 - 20그램의 새에게서 배우는 가볍고도 무거운 삶의 지혜
도연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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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자유로울까?
추수한 들판 한 가운데 난 길을 여유로운 마음을 운전할 때가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새까매지면서 수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새들이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분명 까마귀인데 이렇게 많은 수가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것을 본 경험이 없는지라 당황스러운 기분까지 들었다. 도로를 건너 논 한가운데 내려앉은 까마귀 떼들이 먹이활동을 위한 움직이었는지는 모르나 한참을 그 무리를 지켜본 경험이 있다. 도시 인근 시골로 이사를 오고 나서 아침 마다 새소리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참으로 좋다. 가장 친근한 참새무리지만 집 근처 이곳저것에서 보이는 그들로 인해 한결 여유 있는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새들의 종류를 구별할 수 재주가 없다. 겨우 몇 종류의 새들을 알아 볼 수 있지만 새들의 소리는 듣기에 좋다. 가끔 가는 공원에서나 길거리에서 저주 만나는 비둘기의 소리에 참새 딱따구리 정도의 구분이 전부지만 그나마 귀에 들어오는 새 소리는 기분을 맑게 해주는 느낌이다. 오래전 윤무부의 ‘새박사, 새를 잡다’라는 책을 통해 약간의 새에 대한 상식을 접하기도 했지만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새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관심의 정도가 그렇게 강하게 들지 않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런 나와는 달리 유독 새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그들 대부분이 계절 따라 우리나라를 찾는 철새들을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철새들이 자연의 순리에 의해 서식지를 옮겨 계절을 보내는 신비로움과 이제는 사라져 가는 새들이라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새들에 대한 흥미가 앞서기 때문이리라. 무엇으로부터 시작된 새들에 대한 관심이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에 대한 동경은 변치 않을 것으로 본다. 

10여년을 새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평범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불교에 귀의하여 구도의 길을 가고 있는 스님이다. 도연스님은 자신이 주거하고 있는 지장산 골짜기에 자신의 ‘비밀정원’에서 산새들과 더불어 생활하며 느낀 소감을 담은 책을 발간했다. 자연을 사랑하고 새들과 더불어 살며 구도의 길을 걷는 스님의 눈에 비친 산새들과 사람들의 삶이 교차되어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스님의 곁에서 삶의 지혜를 알도록 해준 새들로는 곤줄박이와 동고비, 딱새, 박새, 까막딱따구리, 청딱따구리, 오색딱따구리, 참새, 나무발바리, 두루미, 청호반새, 때까치, 까치, 파랑새, 노랑턱멧새, 덤불해오라기, 들꿩, 직박구리, 소쩍새, 수리부엉이, 되새, 콩새, 호랑지빠귀, 붉은머리오목눈이, 개개비, 붉은배새매, 독수리, 어치, 흰꼬리수리, 노랑허리솔새, 멧비둘기, 백로, 뻐꾸기, 오리, 되지빠귀, 팔색조, 휘파람새, 호반새 등 텃새를 비롯한 철새들로 40여 가지에 이르는 다양한 새들이다. 그냥 새들을 구분하는 정도가 아니라 각기 다른 새들의 특징과 생태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알려주고 있다. 

산속에서 살며 철원 지역 생태사진가로 활동하며 전국의 새들을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담고 새소리를 녹음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스님은 새들의 생활을 살펴 새들이 집을 만들고 알을 부하하며 새끼를 낳고 기르는 과정과 먹이활동에 대해 관찰하며 그 속에서 배운 지혜를 찾았다. 구도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음도 확인하며 이를 통해 올바른 생활 자세가 무엇인지에 대해 깨달음을 전해준다. 또한 스님의 생활도 새들의 그것과 닮아 있다. 굳이 무소유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삶이 그것이다. 새들이 살아남기 위해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먹이활동에 대한 규칙을 정하듯 스님의 삶 또한 이와 같아 보인다. 

“새는 자유롭고, 철이 지나면 애써 지은 둥지도 훌훌 버리고 떠날 정도로 욕심이 없으며, 날기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존재다.” 

‘나는 산새처럼 살고 싶다’라는 책 제목은 스님이 다시 태어나면 새로 태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일 것이다. 새가 살아가는 모습과 스님이 지향하는 삶이 통하는 지점이 바로 닿아 있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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