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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릅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바로 당신 입으로, 완벽한, 그리고 전혀 쓸모없는 공연...... 이유도 모른 채 까르르 웃는 아이들..... 아름답지 않나요 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p. 147




리뷰 못 쓰는 이야기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는 것은 그것을 독서라고 불러도 될까 싶을 정도로 몸과 마음을 꺼내 놓아야 했던 '일'이었다. 이상한 체험이었다. 이것을 쓴 사람의 기운을 생각하고 읽는 것만으로도 깔아졌던 '나'까지 생각하는 일은 쉬웠으나. 이때를 지나온 사람들과, 그때 있었으나 이곳으로 넘어오지 못했던 사람들과, 나 역시 사람. 임을 떠올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거대한 마음에 대하여. 악다구니. 내 손으로 활자를 만들어 소화시킬 여력이 없었음을 고백한다. 읽느라고 모두 소진된 마음은 그것에 대해 한 바닥 써야 할 이유도 알기 어려웠다. 나를 통과해서 다른 색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느니만도 못한 것이 될 염려가 아주 컸던 책이었다. 한 달 동안 세 번 읽었으나 세 번 모두 책을 읽는 것으로 그냥 끝났다. '그냥'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만 역시 마땅히 설명을 붙이기 어렵다. 이 마음에 듦을 나중에 자세히 설명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리뷰 못 쓰는 이야기 2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를 읽고 역시 리뷰를 쓰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좀 더 리뷰를 쓸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것으로 기운다. 독서 외에는 이 글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내게 없고, <소년이 온다>와는 다른 이유에서 "리뷰를 쓰고 싶지 않음" 거부, 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것은. <소년이 온다>를 이해하기 위해 내 몸을 나 이상으로 부풀려서 읽었던 것에 비해 이 책에게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 보통의 나보다 아주 협소한 부분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배꼽'이란 실은 어떤 상황에서도 잘 웃지 않은 것임을 생각하면 나의 움직이려 하지 않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지는 있을 것이다. 책에 대해 다르겠지만, 말하고자 하는 마음 너머로 이해할 수 있고, 하려는 이가 있고 책이 읽으라고, 친절하게 써 내려간 제목조차도 이해하기 어렵거나 이해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다. 아둔을 고백하고 싶지 않지만 불행하게도 이 책에 대해서는 후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뻣뻣하게도 다시 공들여 읽고 싶은 마음도 없다. 서툴게나마 확신하는 것은, 쿤데라는 자신의 짧은 글을 어려운 행간에 버려 둠으로 인해 이해 할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는 책 이상의 독서를 선사하려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 뿐이다. 두 번 읽었고 두 번 그리워졌다. 폭 좁은 행간을 만들어 주느라 많은 말을 쏟았던 그와 두꺼운 독서에서 마음 충분히 흔들렸었던 날들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오랜만에 기억했다.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고 한다. 내게는 몇 개의 밤이 더 필요합니까. 




*김경주,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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