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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레이디
윌라 캐더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12월
평점 :
지금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켜고 앉아 있으니 조지 기싱의 『짝 없는 여자들』 서평을 쓰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던 기억이 난다. 조지 기싱의 책은 술술 잘 읽히고 아주 재미있으며 메시지도 정확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나에게 좋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문장 하나하나에도 더 나은 표현이 없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느꼈던 격렬한 감정을 반절이라도 전달할 수 있을까 등등. 갖가지 고민에 휩싸여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느라 시간과 정신을 어마어마하게 소모했어도 더없이 즐거운 경험이었다. 나에게 코호북스가 '믿고 읽는' 출판사가 된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고. 하지만 정작 이번 신간이 출간되었을 땐 너무 바빠서 나중에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북마크만 찍고 창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완독 후 서평을 쓰는 일은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기대만큼 이 책에 쏟아부은 시간이 아깝지 않은 독서였다.
『로스트 레이디』는 서부 개척시대 스위트워터에 사는 메리언 포레스터의 이야기이다. 포레스터 부인은 빼어난 용모와 거부할 수 없는 그녀만의 매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여성이다. 그녀의 남편 대니얼 포레스터는 철도 건설업자로, 흔히 포레스터 대령이라고 불린다. 소설의 주된 서술자 닐 허버트 역시 포레스터 부인을 동경한다. 평화로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조금씩 다가오던 불행이 실체를 드러낸다. 포레스터 대령이 임원으로 있는 은행이 파산한 것이다. 대령은 예금주들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살신성인하고, 이 일로 인해 상류층이었던 포레스터 부부는 궁핍한 처지로 전락한다. 닐은 실망스러운 광경을 목도하면서 포레스터 부인에게 실망감과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몇 장 진도가 나가지 않았을 때 포레스터 부인이 대령보다 스물다섯 연하라는 설정에 살짝 당황했지만, 상대는 코호북스니 침착하자고 마음을 다독이며 독서를 이어나갔다. 초반부의 불편함이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를 읽던 당시와 유사했다. 이 소설에서도 모두가 우러러보는 포레스터 부인은 고결하고 자애로우며 상냥하면서도 우아한 마력이 있는, 그야말로 '여성적인' 여성이었다. 이제는 그런 참하고 순종적인 여성 캐릭터에 이골이 난 참이라 답답했다. 후반부로 가면서 이 답답함은 자연스레 뻥 뚫렸다. 다소 처참한 방식으로.
내가 너무 모든 일을 쉽게 생각하는 걸까? 포레스터 부인은 분명 누구보다 빠르게 무너져 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나는 그런 데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부서졌다"거나 "망가졌다"라는 평에 공감할 수 없을 정도로. 오히려 그녀에게 끝없이 실망하는 닐의 실용성 없는 순정에 '그렇다면 어떻게 하기를 바라느냐'고 묻고 싶었다. 첫사랑과 이상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에 공감하면서도, 자신이 그간 쭉 덧씌워 바라봐 왔던 이미지를 잣대로 멋대로 실망하거나 거리를 두는 태도에 불만스러웠다. 포레스터 부인을 망가졌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언제부터? 대령의 고백을 받아들였던 때의 기억을 풀어놓으며 촉촉한 미소를 지었을 그녀는 닐이 그 순간 비로소 깨달았듯이, 한때 그가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라면 살고 싶다는 아주 간단하고 원시적인 욕구를 품었다는 점, 그것을 실현시키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는 점 뿐이다. 메리언이 마지막까지 보살핌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 "다행"이라고 느꼈던 것은 비단 닐뿐만이 아니었다.
제목에 걸맞게 그녀의 인생에 집중하는 한편 생기 넘치는 묘사 또한 쉬이 넘기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구태여 애쓸 필요 없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생생한 묘사가 새로이 눈 앞에 펼쳐졌고, 그 안에 흠뻑 젖어들었다. 200페이지 남짓한 지면에 조금의 급박함 없이 아름다운 한 시대와 그 쇠락, 나아가 시대 비판까지 완곡한 날카로움으로 담아내다니. 내내 감탄하느라 어느덧 막바지에 이른 줄도 몰랐다. 이 소설이 쓰인 지가 벌써 거의 백 년이 다 되어 간다. 그동안 급속도로 황폐해지고 바싹 메마른 지금은 당연하게도 포레스터 부부 같은 인물을 찾아보기 더 힘들어졌다. 아이비 포터스가 마침내 아득바득 포레스터 플레이스를 빼앗은 것처럼 결국 우승은 그들 차지였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칼을 들고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자신의 일에 순수히 집중하고 있는 딱따구리들을 잡으려, 그 눈을 도려내려 칼을 쥔 채 기다리는 이들만 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다행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손해를 볼 필요까지는 없고, 적어도 자기 잇속만 챙기려 들지 않는다면 그걸로 충분할 텐데.
『로스트 레이디』 소설 뒤에는 스콧 F. 피츠제럴드와 윌라 캐더가 주고받았던 편지가 실려 있다. 사실 장례식 장면에서 개츠비를 떠올렸던 일을 제외하면, 읽는 동안 피츠제럴드에 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두 작품이 크게 겹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화가 있었던 만큼 교집합을 떠올려보자면 둘 모두 사라져가는 순수성에 대한 애틋함을 피력한다는 점이다. 다만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에게 유추를 통한 막연한 공감밖에 할 수 없었던 데에 비하면, 『로스트 레이디』에서는 한층 깊은 이해와 이입이 가능했다. 이번에도 역시 서평을 완성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서두에 적었듯 뒤도 생각 않고 덥석 이 책을 잡은 데에 대한 후회는 없다. 코호북스 덕분에 벌써 두 작가를 조금 더 알게 되었고, 나아가 그 둘 모두의 팬이 되었다. 과연 이 출판사는 백발백중이다.
※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