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버 드림
조지 R. R. 마틴 지음, 이수현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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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9.피버드림-조지 R. R. 마틴

그러나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대부분 힘, 무시무시한 힘, 마쉬의 꿈을 박살 낸 얼음만큼이나 불안하고 무자비한 힘이었다. 마쉬는 그 안개 속 어딘가에서 천천히, 몹시도 천천히 움직이는 얼음을 감지할 수 있었고 그의 배들과 의 모든 희망이 쪼개지는 끔찍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10~11)

밤과 안개 속에서, 작고 평범한 배들 사이에서 그녀는 환영 같았고, 어느 강 사람의 꿈에서 튀어나온 하얀 유령 같았다. 그곳에 서서, 마쉬는 숨이 멈출 만한 배라고 생각했다.(40)

나는 쾌락이다, 빌리. 나는 힘이다. 그리고 나의 정수는, 쾌락과 힘의 정수는 가능성에 있다. 나 자신의 가능성은 광대하고 한계가 없지. 우리의 세월에 한계가 없기에. 하나 이들 가축들에게는 내가 한계요, 이들의 모든 희망과 모든 가능성의 종말이야. 이제 이해가 좀 가는가? 붉은 갈증을 해소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죽을 자리에 누운 흑인으로도 갈증은 채워지지. 하나 젊은이, 부유한 이, 아름다운 이, 앞에 삶이 펼쳐져 있고 밤낮이 약속으로 반짝이는 이를 마시기란 얼마나 좋은가! 피는 피, 어떤 짐승이라도, 저들 중에 누구라도 마실 수 있지.(141)

친애하는 조슈아, 그대는 선이나 악 같은 것도 없고, 오직 강함과 약함, 주인과 노예만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해. 그대는 저들의 도덕,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들떴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그런 것은 저돌의 용어지, 우리의 말이 아니라네. 그대는 새로운 시작을 설파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시작하지? 가축들처럼 되나? 저들의 태양 아래 불타고, 그냥 빼앗을 수 있을 때 일을 하고, 가축들의 신에게 고개를 숙이나? 아니자. 저들은 짐승이요, 우리의 자연적인 열등 종족이며, 우리의 크고 아름다운 먹잇감이지. 그게 세상의 방식이야."

..

아, 가엾은 조슈아. ..."창조는 가축들이 하라고 해. 생명이든, 아름다움이든, 무엇이든, 그리고 우리는 그 창조물을 취하고, 이용하고, 내키면 파괴하기도 하지. 그게 자연스러운 방식이야. 우린 주인이야. 주인은 노동을 하지 않아. 그들이 옷을 만들고, 우리는 입기만 하면 돼. 그들이 증기선을 짓고, 우리는 그 배를 타지. 영원한 삶을 꿈꾸라고 해. 우리는 영원한 삶을 살고, 그들의 생명을 마시고, 그 피를 음미하지. 우리는 이 지상의 지배자고, 그것이 우리의 유산이야. 말하자면, 우리의 운명이지.(275~276)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갑자기 <뱀파이어와이 인터뷰>라는 영화가 생각나네요. 저는 어린 시절에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 봐서 그런지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대신에 뱀파이어로 분장한 브래드 피트와 톰 크루즈의 압도적인 비주얼만 떠오르네요. 그전까지는 뱀파이어라고 하면 무섭고 흉악한 존재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영화를 보고 '뱀파이어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라는 영화를 통해 아름답고 매혹적인 존재로서의 뱀파이어상을 생애 처음으로 마주했다고 해야할까요? 그 이후로 제가 그때 마주친 뱀파이어에 대한 이미지는 <트와일라잇> 시리즈까지 쭉 이어지더군요.

뱀파이어 소설로서 <피버드림>은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신비한 뱀파이어 이미지와는 거리를 둡니다. 대신에 이 소설에는 지적으로 사고하며 이상을 꿈꾸는 뱀파이어가 등장합니다. 1850년이라는 미국 증기선 시대의 전성기에 미시시피강에서 제일 빠른 배를 만들어서 몰고 싶어하는 뿌리까지 뱃사람인 애브너 마쉬 앞에 나타난 수수께끼의 인물 조슈아 요크가 그 주인공입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아버지를 잃고 사람들 사이에서 처절하게 살아온 그는 인간들의 피를 마시고 싶어하는 자신의 욕망을 싫어해서 처절한 노력 끝에 인간의 피를 더 이상 마시지 않게 된 뱀파이어입니다. 그는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고, 인간의 문화를 즐기고, 인간들과 뱀파이어가 공존하는 이상을 꿈꾸는 존재입니다. 또 그는 자신의 힘으로 다른 뱀파이어들도 자신처럼 만드는 고귀한 뱀파이어죠. 그래서 조슈아 요크는 이상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이자 몽상가인 뱀파이어입니다. 저는 이런 뱀파이어를 처음 봤습니다. 처음 본 만큼 아주 인상깊었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 사는 뱀파이어들에게 한 줄기 빛이 있다면 조슈아 요크가 아닐까요? 미녀 뱀파이어인 발레리가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로 조슈아 요크를 사랑하는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그는 다른 뱀파이어들이 가지지 못한 어둠을 밝힐 빛의 속성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죠.

빛이 있는 만큼 어둠도 있겠죠. 맞습니다. 이 작품에는 조슈아 요크와 대척점에 있는 어둠의 뱀파이어가 등장합니다.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길고 긴 시간을 살아온 뱀파이어, 너무 긴 시간을 살아왔기에 인간의 피를 갈망하는 욕망을 넘어섰지만 인간을 죽이고 피를 마시는 행위를 즐기기 때문에 살육을 일삼고 피를 마시는 뱀파이어 줄리언. 두 뱀파이어의 대립을 바라보면서 저는 그 둘의 대화를 토대로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봤습니다. 둘의 말에 따르면 둘의 차이는 명확했습니다. 둘은 차별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명확하게 갈라집니다. 조슈아 요크는 인간과 뱀파이어가 다르긴 하지만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인간을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같이 살아가는 존재로 여깁니다. 반대로 줄리언은 인간들을 자신들의 먹이감이자 자신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로 바라봅니다. 주인과 노예의 논리로 이 세상을 재단하는 그는, 뱀파이어가 인간보다 우월하며, 열등한 인간들은 노예로서 복종해야 하며, 인간을 존중할 필요 따위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를 인간차별주의자라는 말로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가 문제인건, 그에게 가득한 공허입니다. 너무나 오랜 기간 살아온 그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자신의 삶을 바꿀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바꿀 의도가 전혀 없는 만큼, 그에게 삶은 과거의 관성 그 자체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의욕도 열정도 없습니다. 그에게 가득한 건 권태와 공허, 허무,야성의 폭력입니다. 어쩌면 그 모든 걸 통틀어 '악'이라고 할 수 있겠죠. 줄리언은 요슈아의 반대편에서 어둠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어둠의 끝에 위치한 '악'의 모습처럼 보여집니다.

뱀파이어만이 구분되는 건 아닙니다. 둘의 곁에 위치한 인간들조차 차이가 납니다. 줄리언의 곁에서 줄리언을 돕는 인간 빌리는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줄리언과 비슷한 차별주의자입니다. 흑인을 인간 이하로 보는 차별주의자. 그는 뱀파이어가 되어 영생을 누리고 줄리언처럼 살육과 폭력을 행사하고 피를 마시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죠.(이 소설에서는 뱀파이어에게 물린다고 인간이 뱀파이어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 소설에 인간과 뱀파이어는 다른 종입니다.) 어쩌면 빌리는 불가능하기에 자신의 욕망에 더 집착하고 줄리언을 따라 폭력을 행사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조슈아 요크의 친구로서 조슈아와 같이 줄리언에게 저항하는 애브너 마쉬는 빌리와 반대편의 인물입니다. 뼛속까지 뱃사람인 그는 인종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사람을 구분합니다. 피부가 검다고 해서 사람을 무시하는 건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뱀파이어와 친구가 될 정도로 품이 넓은 그가 살육을 일삼는 줄리언 같은 인물을 용서할리 없죠. 그래서 둘은 마지막까지 철천지원수로 남죠. 어떻게든 줄리언을 포섭하려는 조슈아와 달리. 저는 이 소설의 결말이 빌리와 마쉬의 차이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인간을 도구로 보는 줄리언이 빌리를 마지막까지 도구로 본 반면에, 인간을 존중하는 조슈아가 마쉬를 친구로서 마지막까지 존중했기 때문에 이 소설의 결말이 가능했다고 본 것이죠. 만약에 줄리언이 빌리를 존중했다면 결말은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악의 모습을 간직한 줄리언의 삶에 변화는 불가능했기에 앞의 '만약에'는 불가능한 말일 겁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인종차별을 둘러싼 정치적 해석이 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나아가고 싶지는 않네요.^^;;

<피버드림>을 제 나름의 해석의 그물망을 통해서 한번 말해봤습니다. 사실 해석이란 게 다양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외에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선과 악을 통한 해석, 줄리언을 유럽이라는 구대륙의 문화로 보고 마쉬와 요크를 신대륙의 문화로 보는 해석 등등. 그 해석들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겠죠. 해석은 각자의 해석이 저마다 정답이라고 봐야할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해석의 그물망이 아닐 겁니다. 해석보다 더 중요한 이 책을 통해서 느끼는 '재미'일 겁니다. 장르문학을 읽고 재미를 느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저의 <피버드림> 독서는 재미를 느꼈기 때문에 성공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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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된 사실
이산화 지음 / 아작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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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8.증명된 사실-이산화

3년 동안의 학교 생활을 통해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배우기는 했으니까. 바로 세상의 법칙이란 바뀌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F는 ma와 화학반응 전후의 질량은 보존되며, 무슨 사립학교 연합회 회장이기도 한 교장이 대놓고 "고등학교는 애들 대학 잘 보내려고 있는 겁니다" 같은 소리를 해도 여전히 교장이고(27)

가만히 다가가서 어깨를 맞대고 선 나의 눈에도 같은 광경이 비쳤다. 노을빛을 받아 지옥처럼 붉게 타오르는 불빛, 자습실, 교실, 운동장, 지긋지긋한 이 작은 세상.(38)

3년 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세상의 공식적인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관계란 수능과 같아서,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든지 심판의 날에 친구인 사람이 진짜 친구인 법이었다.(39)

"나는 이제 온 세상을 파괴하는 자, 죽음 그 자체가 되었노라."(40)

증명된 사실과 싸우는 일은 무의미했다. 반증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한다.(70)

천문학의 역사란 곧 주제 파악의 역사니까. 광대한 우주 속에서 인류의 위치를 가늠하는 동안 우리는 매번 우리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직면해야만 했으니까.(130)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기 전까지 나는 어떻게든 팔을 뻗어 멀어져가는 네 손을 붙들려 해. 언젠가 네가 내 손을 잡아주었듯이. 이해하고, 고민을 들어주고, 공감해주려 해.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어. 한순간 손가락 끝이 스치는 것 같다가도, 그 찰나의 두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너는 벌써 먼지구름 속으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아. 다만 그 벨소리만이, 최후의 날 시계의 불길한 초침 소리처럼, 육교 저편의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이어지고 있어.(157)

화석의 질문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아니, 답은 오래전에 땅속에 파묻혀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고생물학자는 답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174)

<조커> 영화에 관련된 이야기를 늘어놓는 유투브 영상을 보면서 기억에 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조커가 '예의 없는' 인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는. 조커는 예의 없는 세상에서 예의 없는 자들에게 당해 미쳐버리고 예의 없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게 되죠. 예의 있는 사람은 살려주고요. 뜬금없이 서평을 쓰면서 영화 <조커>와 '예의' 이야기를 왜 하냐고 하실 수 있는데요(^^;;) 그건 <증명된 사실>이 굉장히 '예의 바른' 책이라서 일 겁니다. 첫 소설집을 내는 소설가 답게 저자는 이 책에 대한 애정, 이 책에 실린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뽑내며, 각각의 작품들에 대한 일종의 후기 같은 글을 작품들 뒤에 덧붙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각각의 작품들이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됐는지, 그리고 필요하다면 소설 뒷부분에 붙일 수 있는 작은 이야기들도 써내며 독자들에게 굉장히 친절하고 예의바른 모습의 책을 완성합니다. 작가 스스로가 예의 바르니, 저도 이 글에서 '예의 있는'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음... 잘 모르겠네요.(^^;;) 그냥 지금까지처럼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을 최대한 예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 '예의 있는' 말로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우선 '이야기'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이야기'에 관련된 이야기? 뭔가 동어반복같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이야기니까 한번 들어보세요. 저는 소설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이야기'라는 형태로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창작 양식이 시대를 거쳐 근대 문학이라는 영역에 들어와서 '소설화'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물론 토마스 베른하르트 같이 '이야기 파괴자'를 자처하는 소설가들은 제 말에 경기를 일으키겠지만(ㅋㅋㅋ), 저는 그들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소설은 이야기를 빼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여깁니다.(저는 소설에서 이야기를 파괴하려는 토마스 베른하르트 같은 소설가도 '이야기 없는 이야기' 혹은 '이야기가 사라진 이야기'를 쓰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하게도 저에게 SF는 이야기입니다. 과학이라는 외관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이야기. 과학이라는 외관으로 자신을 포장했기 때문에, SF는 과학적인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SF는 허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과학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가상과 비현실의 면모도 보여줍니다. 과학적이면서 비과학적이고, 비과학적이면서 과학적인 이야기. 제게 SF는 그렇게 다가옵니다.

<증명된 사실>도 제가 생각하는 SF에 속하는 책이었습니다. 과학의 외피를 둘러쓴 과학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허구의 이야기들로. 물리학자가 귀신 보는 여인의 도움을 받아 사후 세계의 진실을 밝혀내는 이야기를, 고생물학자가 한 성당 신부의 부탁으로 공룡의 후예와 인간의 사랑을 다룬 모험담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곤충학자가 지옥의 생물일지도 모를 벌레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를, 다리가 불편한 한 여인이 할아버지가 남긴 유물을 조사하여 자신의 추리력으로 중국 명나라 때의 자기 조상들의 행적을 재구성하는 이야기를, 살아남은 공룡 인간들이 인간을 사냥하는 이야기를, 수수께끼의 대기권 생물이 자신의 윤리성을 지키기 위해 사로잡힌 인간을 돕기 위해 나서는 이야기를, SF가 아니면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그 이야기들은 충분히 SF적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이야기들은 작가 이름을 따서 '이산화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 '이산화적'이라는 말은 아직 명확한 정의가 내려진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느냐에 따라서 그 말은 점점 어떤 형태로서 나타낼 겁니다. 그날까지 저도 SF 독자로서 꾸준히 SF를 읽을 것을 다짐해봅니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닐 겁니다. 저는 과학적이면서도 비과학적인 SF의 주술에 홀린 독자이니까요. 여기까지 쓰고보니 확실해집니다.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제가 왜 SF를 계속 읽는지를 증명하고 싶어서였다는 사실을. 증명까지 하고 나니 다시 읽을 SF를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술에 걸린 독자에게 휴식은 없는 법이니까요. 영원히 충족할 수 없는 갈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저는 다음번 SF를 향해 내달려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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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연대기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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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7.돌의 연대기-이스마일 카다레

그 사지와 돌 갑옷 속에 사람의 생명을 간신히 품고 있었지만 그 생명을 찢고 할퀴며 온갖 고통으로 짓누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돌로 이루어진 도시여서 당연히 그 촉감은 거칠고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도시에서 어린아이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8)

여기저기서 글자들이 아찔할 만큼 빠른 속도로 달린다. 자음도 달리고 모음도 달린다 그것들이 모여 말이 되거나 우박이 된다. 글자들이 다시 달린다. 단검이 만들어지고 밤이 닥치고 살인이 저질러진다. 연이어 도로가 나타나고 문들이 덜컹대고 정적이 찾아든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끝도 없이.(91)

어쩌면 그게 살육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국가를 도살장으로 데려갈지, 그들의 울음소리가 어떨지는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투박한 검정 모직 옷차림의 시골 사람들. 흰옷을 입은 도살자들. 염소, 양, 새끼양 들. 그 광경을 보러 온 사람들. 기다리는 사람들. 그러다 마침내 올것이 오고야 만다. 프랑스. 노르웨이. 땅이 피로 물든다. 네덜란드가 매애매애 울어댄다. 새끼양의 모습을 한 룩셈부르크. 목에 큼직한 방울을 단 러시아. 염소의 형상인 이탈리아(125)

이 오래된 도시는 공습을 받았다. 유구한 세월 동안 노포나 대포알, 파성추의 공격을 무수히 받아온 도시. 이제 그 기반이 산산조각나 장님처럼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냈다. 겁에 질린 수많은 유리창들이 파편이 굉음을 내며 사방으로 튀었다.(131)

세상이 피를 갈아치우는 게지. .. 사람은 사오 년에 한 번씩 피를 갈아치우지. 세상은 사오백 년마다 그렇고. 우리가 사는 시대는 피의 겨울이야.(319)

세상이 문학을 파괴하려 할지라도, 문학은 세상을 더 아름답고 살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쓴다(394)

어른과 아이는 다릅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어른과 아이가 다른 이유는 삶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른은 아이보다 더 긴 시간을 살았고, 살아온 시간만큼 형성된 굳어진 '삶의 틀'이 있고 그에 따라 '어떤 전형성'을 가지게 됩니다. 반대로 아이는 어른보다 살아온 삶의 시간이 짧고, 짧은만큼 굳어진 '삶의 틀'이 없습니다. 굳어진 '삶의 틀'이 없는만큼 아이들은 저마다의 짧은 삶을 기반으로, 어른과는 다른 '삶에 대한 인식'을 보여줍니다. 풍부한 상상력을 토대로 굳어진 삶의 틀이 없어 전형성을 가지지 못한 아이들의 삶에 대한 인식은, 독창적이고 색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소설가들은 아이들의 시선을 이용하여 전형적인 삶에 대한 인식과는 다른, 색다른 시각을 가진 소설을 써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바니아를 대표하는 소설가인 이스마엘 카다레가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돌의 연대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은 '나'라는 아이의 시선으로,아이가 살아가는 '돌의 도시'를 휩싼 전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형적일 수 밖에 없는 전쟁의 모습은, 아이의 시선으로 새롭게 펼쳐집니다. 아이는, 도살장을 본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들간의 전쟁을, 양의 모습을 한 각 국가들이 도살장에 모여서 죽어가는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또 다른 장면에서 아이는 국가들간의 전쟁을, 우편 수집의 양상으로 그려냅니다. 전쟁뿐만이 아닙니다. 아이가 도시와 도시의 사물을 그려내는 방식도 어른과는 다릅니다. 집의 수조와 대화하는 아이는, 도시와 집과 각각의 사물들과 자연들이 살아있다고 여기며, 도시와 도시의 사물들과 도시를 둘러싼 자연을 생생히 살아 움직이며 서로 경쟁하고 교류하는 존재로 그려냅니다. 어른들을 보는 시각도 아이는 다릅니다. 아이는 어른들을 강하며 어딘가 신비에 싸인 존재로 바라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들의 생생한 치부를 가혹할정도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어른들의 영향도 강하게 받습니다. 도시를 지배하는 미신과 풍습과 관습에 현혹되어 주술을 피하고자 온갖 몸부림을 치기도 하고, 어른들이 가진 강력한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어른들을 벗어나는 몸부림도 보여줍니다. 외가 가족들이 싫어하는 외가에 하숙하는 여인을 남몰래 연모하고, 어른들이 싫어하는 비행장의 비행기를 너무도 좋아해서 온갖 망상에 빠져 지내는 모습으로. 어른들의 세상 속에서 아이는 어른들의 세계에 속한 내부인이면서 동시에 외부인의 모습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이 모순적인 모습이 빚어내는 간극의 힘이 <돌의 연대기>라는 소설의 색다름과 독특함을 형성하고, 책을 읽는 독자는 거기에 빠져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이의 시선이 소설을 색다르고 독특하게 만드는 것에만 기여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시선은 비단 색다름과 독특함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의 시선은 전쟁이라는 참혹한 비극을 '아이의 눈'이라는 여과기를 통해 보여주게 함으로써, 현실을 중화시켜 보여줍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현실이 아이의 눈 때문에, 그 참혹함과 잔혹함이 가진 강렬함이 줄어든채로 우리에게 다가가는 것이죠. 저는 여기에 이 소설의 또다른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의 참혹함과 잔혹함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강렬함을 줄인채로, 아이의 시선이라는 색다른 필터로 거른채로 보여주기 때문에, 진짜 리얼한 현실과 소설이 그려내는 현실 사이에는 일종의 공백이 발생합니다. 바로 이 공백 부분을 채우는 게 독자의 역할입니다. 여기서 이 소설의 또다른 독서가 시작되죠. 소설이 끝났다구요? 아닙니다. 이 소설은 끝나는 순간에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현실과 진짜 리얼한 현실 사이의 공백을 메우려는 '제2의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 이 소설의 결말입니다. 소설이 끝나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독서. 끝이 시작이 되는 독서. 저는 여기에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가상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독서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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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죄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은모 옮김 / 달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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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6.우죄-야쿠마루 기쿠

조금이라도 관계있던 사람이 자살하면 자신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아. 허울 좋은 소리라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자살을 막을 수 있는 건 사람과의 유대밖에 없어. 만약 그 사람과 좀 더 깊은 인연을 맺었다면... 누군가를 잃으면 반드시 그런 후회가 아픔이 되어 찾아오지.(57)

대중은 자기보다 불행한 사람을 보고 싶어서, 남이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을 엿보고 싶어서 돈을 내가며 주간지를 사는 거라고.(208)

늘 과거에 시달려. 어디로 달아나도 과거가 쫓아오지. 아무리 평범하게 살고 싶어도 다들 우르르 몰려들어 과거를 파헤치려고 해. 괴로워해, 괴로워해, 하고 몰아붙이지. 마치 너는 살 가치가 없으니까 죽으라는 것처럼...(276)

부모는 자식만은 절대로 체념하면 안 됩니다. 제 생각은 그래요.(443)

도망치지 말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직시하며 살기를... 그 뿐이야.(492)

이 책을 읽다가 감정이 너무 북받쳐서 당혹스런 경험을 했습니다. 갑자기 가슴 속에 감정이 차오르더니 눈물이 솟구치려고 하더라구요. 얼마나 당혹스럽던지. 책을 읽으면서 더욱 감수성이 풍부해진 인간답게, 가끔씩 이런 일이 있는데 오랜만에 경험을 하니 놀라웠습니다. 감정의 파고가 지나가고 책에 적힌 저자의 이름을 들여다봅니다. 야쿠마루 가쿠. 이 작가가 이제 인간의 감정을 잘 파고드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써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이 작가를 만났을 때는 무언가 강렬한 열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 다음 작품에서는 어딘가 방황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첫 작품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소년법'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고 그 주제를 소설 세계의 굳건한 토대로 삼은채로 그에 관련된 작품을 지속적으로 써내고 나니 어느새 이 작가는 사람의 흔드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돼 있더군요.

<우죄>도 야쿠마루 가쿠 답게 '소년법' 문제와 관련된 소설입니다. 소설은 두 명의 소년을 참혹하게 죽인 중3 학생이 소년원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사람답게 변화하고 성인이 되어 사회로 돌아오며 겪는 일을, 그가 사회로 돌아와서 만나게 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살인자로 과거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공장으로 들어오는 스즈키, 어린 시절 왕따 당하던 친구의 자살에 큰 죄책감을 가진 채로 저널리스트의 꿈을 꾸다 현실 속에서 좌절하고 공장으로 들어온 마스다, 도쿄에서 만난 나쁜 남자친구 때문에 AV 배우 시절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는 못하는 공장직원 미요코, 소년원의 정신과 의사로 스즈키에게 헌신을 다하다 아들에게 소홀해서 아들에게 미움받고 본인도 아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야요이, 이 네 명을 토대로 그들과 관계된 인물들이 엮이면서 소설이 전개됩니다. 나쁜 소설이 쉬운 질문에 쉬운 답을 내놓고, 좋은 소설이 쉽지 않은 질문에 쉽지 않은 대답을 내놓는다고 저는 생각하데요,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소설은 쉽지 않은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쉽지 않은 대답을 힘겹게 내놓고 있습니다. 죄와 속죄의 문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가해자의 삶과 그 인물과 연관된 삶의 문제, 죄와 우정과 사랑의 관계, 직업과 가족의 문제 같은.

사실 그렇습니다. 내가 친하게 지낸 사람이 과거에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과거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를 저지른 사람의 속죄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아니 속죄는 가능한가? 이런 질문에 쉬운 대답이 나올 수 있을까요? 질문 자체쉽지 않기에 대답이 쉽게 나올 수는 없습니다. 친구로 지낸 스즈키의 범죄 사실을 알고 고민하는 마스다나 연인 사이로 있다 스즈키의 과거를 알고 역시 고뇌하는 미요코의 행동은 거기에 우리 모두의 이름을 대입해도 별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 모두 고민하고 나름의 행동을 하겠죠. 하지만 그게 정답일리는 없고 그저 어쩔 수 없는 행동에 불과할 겁니다. 스즈키의 문제로 넘어가면 더 복잡해집니다. 죄와 속죄의 문제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제입니다. 종교,철학,법학,사회학,범죄학, 심리학 같은 다양한 영역들이 뒤섞인 복잡한 문제. 결국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의 태도를 제시합니다. 살아남아서 지속적으로 속죄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그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작가는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속죄는, 죄를 잊지 않고 그 죄의 무게를 짊어지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오지는 않고, 저지른 죄는 돌이킬 수 없기에 그게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의 태도일 겁니다. 그때의 속죄는, 속죄하는 이에게 저주이자 축복일 겁니다. 죄의 무게감을 덜 수 있는 축복이자 죄를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저주. 그 속죄의 압도적인 무게감을 알려주는 마지막 구절 앞에서 저는 그저 묵묵히 속죄의 어려움을 인정할 뿐입니다. 죄는 사라지지 않는 현실이고, 속죄는 그 죄의 현실감을 지우려는 불가능을 향한 몸부림일 뿐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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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 함석헌 : 역사의 길, 민족의 길 지식인마을 39
이흥기 지음 / 김영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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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5.신채호&함석헌:역사의 길,민족의 길-이흥기

국가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 의식은 신채호와 함석헌을 묶을 수 있는 공통분모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제시한 해결 방도는 달랐다. 신채호는 폭력 혁명을, 함석헌은 인간의 새로운 변화를 말한다.(18)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민족은 능동적인 사회 역사적 주체의 자리에서는 '민중'보다는 한층 내려와 있다. 조선 민족은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식민지 피지배 세력으로서 인민이 되었으나 민중의 혁명을 통해 그 살길을 보전할 수 있으리라는 논리가 된다.(95)

민중을 믿지 않고는 전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마치 신을 믿지 않고서는 신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씨알이 저를 깨고 나오는 날이 올 것이다. 깨기 전엔 씨알이다. 깨면 전체다.(124)

진리는 "항상 그 시대 최고 지식을 표현의 의상으로 삼는다"(183)

'시대착오'. 이 말을 써놓고 한번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현재 존재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거나 오히려 역행하는 것을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아마도 각 영역마다 그런 시대착오적인 것들이 있을 겁니다. 역사학이나 역사책에도 이런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을 갖다 붙일 수 있을 겁니다. 거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민중을 역사의 중심으로 내세우며 역사적 변화를 꿈꾸는 민중사관도 흘러간 시대의 유물일 겁니다. 민족주의적 역사관은 어떤가요?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를 쓰면서 민족주의를 비판한 것처럼 민족주의적 역사관은 아직도 시대에 큰 영향을 미치고는 있지만 역사학적 흐름에서는 이미 낡은 유물에 불과하고 그 설득력도 예전만큼 못한 게 사실입니다. 거시담론?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과 미시사의 등장 이래로 역사학의 흐름 속에서 '거시담론'은 흘러간 옛 노래가 됐죠. 그런데 제가 궁금한 건, 과거의 유물들이 항상 나쁘냐는 겁니다. 그것들이 항상 나쁘고 항상 옳지 않은 걸까요? 이 시대의 흐름에 맞는 트렌디한 것들만이 옳고 좋은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의 흐름에 맞다고 해도 틀리고 옳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고, 과거의 것이라고 해도 좋고 지금 필요한 것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과거의 것들 중에서 지금 필요한 것들을 취사선택하고 이 시대의 흐름에 맞게 쓰면 됩니다. 무조건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하며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채호&함석헌:역사의 길,민족의 길>은 신채호와 함석헌이라는 두 인물의 삶의 궤적과 그들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책입니다. 조선시대 말과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과 군사독재 시절에 걸쳐 독립과 저항과 자유와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두 인물의 이야기인 만큼 이 책의 서술 대다수는 과거의 목소리입니다. 조선말에 태어나 천재로 불렸지만 일본에 국가를 빼앗기게 된 상황에서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투사이자 민족 중심의 역사관을 토대로 책을 쓴 역사학자 신채호, 기독교인이지만 무교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종교관을 구축한 채 일제시대와 군사독재 시절에 걸쳐 저항하는 길을 걸어온 인물이자 민중 중심의 기독교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역사책을 쓴 함석헌. 두 인물의 삶의 궤적은 그들이 걸어온 길만큼이나 한 시대의 삶을 오롯히 증명하며 찬연히 빛을 바랍니다. 그들이 구축한 역사관과 그들이 쓴 책도 그들의 삶과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 만큼 그 뿌리가 깊고 강건한 기개를 뽐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관과 그들이 쓴 책이 현재 우리의 삶에 무조건 적용될 수 있는 책일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그들의 역사관은 흘러간 옛 노래입니다. 지금과는 다른 과거의 목소리가 스며 있는 시대착오적인 옛 노래.

그러나 앞에서도 적었지만 흘러간 옛 노래라고 해서 그 가치가 줄어드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닐 겁니다. 저는 오히려 신채호와 함석헌의 역사관과 그들이 쓴 책이 '시대착오적'이라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버려두고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민족주의적이고 민중 중심적인 사관은 오히려 지금이라서 더 가치가 있을 겁니다. 미시 담론에만 빠져드는 현대의 모습에 그들이 이야기하는 거시담론은 오히려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오직 나만 생각하기 쉬운 현대인들에게 이 사회의 전체적인 비전과 하나의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사고하게 만드는 그들의 역사관은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오직 돈만을 생각하기 쉬운 이 시대에, 두 사람의 빛나는 삶의 궤적만큼이나 낡았지만 힘있는 역사관은 돈을 벗어나는 사람의 길을 생각하게 해줄 겁니다. 그것이 쉽지 않을지라도, 저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사고하고 생각하기를 두 손 모아서 기도해봅니다. 그것만이 신채호와 함석헌의 삶의 유지를 이을 수 있는 우리만의 작은 길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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