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소설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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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4.작가소설-아리스가와 아리스

다른 삼류 작가나 자칭 소설가들이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눈물을 쏟아낼 작품을 쓰는 겁니다. 쓰고, 쓰고, 또 쓰는 겁니다. 미친듯이 써서 기관총처럼 쉴 새 없이 서점에 콱 박아 넣는 거예요. 서점 책장을 당신 저서로 꽉꽉 채우는 겁니다. 할 수 있어요.(26~27)

다른 작가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소설을 쓰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작업일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다.

...

마감이 닥쳐오면 고작 한 가지 발상을 얻기 위해 여덟 시간 정도 서재에 틀어박힌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영감이 그리 내 맘대로 쉽게 솟아날 리 없다. 산더미 같은 메모를 뒤지고, 팔짱을 끼고 돌아다니고, 한숨을 쉬고, 헛되이 흘러가는 시간을 걱정하여, 모방의 유혹과 싸우고, 아이디어를 몇 가지 메모해, 그 모든 것에 불만을 느끼고, 커피를 마시고, 재능이 바닥난 것 같다고 절마하여, 자포자기하고, 비누로 손을 씻고, 다시 메모를 읽어본다. 결코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91~92)

소설만 타인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야. 음악이나 미술 작품도 그렇잖아. 작품이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지. 그건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가 누구인지 인식할 수 있으니까.(135)

이렇게 하면 소설가가 될 수 있다, 그런 비결은 없어. 다만 포기하지 않으면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아.(139)

아무리 따뜻한 가정이 있어도 작가란 원고를 마주할 때는 절대적으로 고독한 법이잖아. 누군가 이런 말을 했지. '작가란 집에 있으면서도 가출한 상태다'라고.(216)

"...그런 숭고하고 특권적인 순간이 우리 작가들에게 있어?"

"유감이지만 그건 없어. 비교적 잘 씌었네, 라고 생각하는 정도지."(226)

일단 써야지. 쓰고, 쓰고, 계속 써대는 인간만이 일류라 불리는 작가가 되는 거야.(245)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삶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작가는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글을 쓰는지가 궁금했던 시절이 분명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저는 과거처럼 작가의 삶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작가들이 작가와 작가의 삶을 주제로 쓴 소설들을 지속적으로 읽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소설들을 읽으며 작가라는 존재가, 글이라는 삶의 무게를 지고 가는 걸, 직업인으로서 버거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실감했기에 작가의 삶에, 작가라는 직업에, 환상을 가질 수 없게 되었죠. 이렇게 작가들이 작가 자신의 삶을 토대로 쓰는 일종의 '작가소설'은, 외부자들이 관찰해서 쓰는 외부자들의 소설과는 달리, 내부자들만이 아는 내부자들의 진실을 알려주는 '내부자 소설'의 묘미를 보여줍니다. 그 묘미 때문에 제가 계속해서 '작가소설'을 읽는 것 같습니다.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쓴 <작가소설>도 작가들이 쓰는 내부자 소설의 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나카야마 시치리가 쓴 <작가탐정 부스지마>와 비교해서 한번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양한 추리소설을 쓰며 '나카야마 시치리 월드'라는 특유의 세계관을 축조해가는 나카야마 시치리가 쓴 <작가탐정 부스지마>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이용해서 작가들의 삶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작가탐정 부스지마가 작가들이 얽힌 살인사건을 해결하며 작가들의 삶과 작가라는 직업의 현실을 보여주는 형식. 그 책도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작가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라는 공통점으로 묶여 있습니다. 그에 비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가소설>은 다양한 이야기로 작가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은 <작가탐정 부스지마>와 비슷하지만, 각 작품들간의 응집력은 약합니다. 마치 그때그때 저자가 작가들에 관한 소설을 써놓고 나중에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처럼. <작가탐정 부스지마>에 비해 일관성과 응집성은 약하지만 형식도 다양하고, 작가에 관해서 훨씬 더 넓은 영역을 다룬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서로 상이한 다양한 소설들이 모여 있는 작가소설집이라고 해야할까.

읽으면서 느낀 거지만 저는 이 책에 나오는 작품들 하나하나가 작가의 어떤 상황이나 모습에 대한 형상화라고 느껴졌습니다. 묶인 채로 죽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써야 하는 '글 쓰는 기계'가 나오는 <글 쓰는 기계>는 글 쓰는 기계로서의 작가의 모습을 비유하는 것 같았고, <죽이러 오는 자>에서는 자신이 쓴 글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싫어하는 작가의 모습을 독자를 죽이는 작가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 같았고, <마감 이틀 전>에서는 마감 때문에 힘들어하다 환상에 빠지는 작가의 모습을 통해 마감의 고통을 나타내는 것 같았고, <기쓰코 선생>에서는 고등학생의 인터뷰에 삐딱하게 대응하는 작가의 모습을 통해 힘겨운 작가의 현실을 잘 나타내고, <사인회의 우울>은 작가가 겪어야 할 사인회의 모습을 악몽의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작가 만담>에서는 대화의 형식으로 작가들이 가진 세상에 대한 인식과 그들만의 가치관을 잘 나타내고, <쓰지 말아주시겠습니까>에서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소설로 써낼 수 밖에 없는 작가의 애환이 공포스런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고, <꿈 이야기>에서는 이야기 창조자로서의 작가의 모습이 판타지적인 느낌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책의 내용이 이렇다 보니 읽다보면 독자는 작가에 대해서 예전보다 더 잘 알 수밖에 없습니다.

뭐 제가 예전보다 작가에 대해서 관심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작가소설> 같은 작가에 관한 소설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라는 존재는 무엇이든 글로 써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자신들이 잘 알고 있고 잘 쓸 수 있는 작가에 관한 소설을 쓸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내부자 소설로서의 묘미도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런 책들이 계속해서 나온다고 한다면 책을 읽는 독자는 작가에 관한 소설을 읽을 준비를 해야합니다. 그 소설들이 어떤 다른 방식으로 작가와 그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그런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작가소설'을 읽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작가소설>은 그런 우리의 준비를 위한 좋은 대응 교재가 될 것입니다. 작가소설이 앞으로도 어떻게 쓰여질지를 예측하는 대응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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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1 09: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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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5 20: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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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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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3.미겔 스트리트-V.S. 나이폴

"그런데 그 사람이 왜 그 소녀를 버렸을까?"

...

"그야 우리들 사이에서 사내답게 살기 위해서였지."(19)

우리 거리에서는 아무도 포포가 파렴치한 행위 때문에 감옥게 가게 된 것을 딱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우리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30)

엘리아스의 입에서 나온 그 '문핵'이란 말은 내가 들어본 말 중 가장 아름다운 낱말이었다. 그 말은 먹을 수 있는 것, 그것도 초콜릿처럼 맛이 아주 풍성한 그 어떤 것으로 들렸다.(52)

너 또한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 그런데 너도 시인이라면 모든 것을 보고 울게 된단다.(72)

삶이란 참으로 끔찍스러운 것이라고. 불운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니. 그저 앉아서 그 불운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니.(148~149)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딸이

양키의 돈을 벌러 일하고 있네.

온 나라에 양키의 돈!

오, 양키의 돈이여!(239)

트리니다드에서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고도 처벌을 면한 적이 있어? 트리니다드에서는 사람들이 결백하면 결백할수록 감옥살이를 더 많이 해야 하고 뇌물도 더 많이 먹여야 해.(265)

저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이야기에 푹 빠져 지냈고, 이야기를 모아놓은 이야기책을 즐겨 읽었습니다. 이야기에 홀려 있다고 해야할까요? 이야기에 홀린 사람이 현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을 그저 지나칠 수는 없겠죠. 맞습니다. 저는 이야기에 홀린 사람답게 현대의 이야기인 소설을 즐겨 읽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연속적으로 써 온 서평중에 90프로 이상이 소설에 관한 서평이니 말 다 했죠. 물론 저라고 소설만 읽는 것은 아닙니다. 올해 초부터 5월까지는 소설은 거의 안 읽고 동양고전,서양고전에 엄청 빠져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5월말 쯤에 칸트의 책 중에 <실천이성비판>인가 <판단력비판>인가 하는 책을 읽는데(정확하게 어떤 책인지 기억이 안 납니다^^;;) 갑자기 구토가 나올려고 하더군요. 책 읽다가 구토가 나올려고 하는 것은 거의 처음이라서 당황했습니다. 제가 사르트르의 <구토> 속 주인공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지. '이런 이해도 안 되는 어려운 책을 왜 읽냐'하는 회의감도 들고, 읽으려고 책을 펴면 머리 아프고 도저히 못 읽겠고. 그래서 저는 책읽기를 포기했습니다. 완벽한 올스톱. 책읽다가 체한 셈치고 책읽기를 포기하고 두 달동안 지냈습니다. 책 말고 다른 걸로 취미생활을 하면서. 두 달의 휴식기간을 거치고 한 권씩 읽어보니 이제 읽을만 하겠더군요. 아직 완벽한 회복은 안 됐다고 생각해서 요새에는 제 전공분야인 이야기쪽으로만 파고들어 읽고 있습니다. 이야기에 홀린 사람이 자기 본분을 회복했다고 해야할까요?

현대판 이야기인 소설을 계속 읽다보니 저 나름다로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이야기꾼들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고대와 중세의 이야기꾼들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현대판 이야기꾼들의 소설을 읽을 때면 저는 즐겁고 너무 기쁩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파고들어가서 이야기해보죠. 어떤 면에서 본다면, 현대의 소설가들은 모두 이야기꾼들의 후계자들입니다. 하지만 전통적 서사를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소설가들을 굳이 이야기꾼의 범주에 넣을 필요는 없다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소설을 이야기꾼의 소설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소설은 그들 나름의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취향의 측면에서 저는 그들의 소설보다는 이야기꾼들의 소설을 더 즐겁게 봅니다. 취향의 문제라서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저는 저를 즐겁게 하고 빠져들게 하는 소설이 좋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 서사를 거부하는 소설가들의 소설을 안 읽는 건 아닙니다. 그런 소설들을 읽을 때는 이야기꾼들의 소설과는 다르게, 편하지 않은 마음으로 읽어나간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이야기꾼들의 소설을 좋아하고 그들의 소설을 읽을 때는 아이처럼 기뻐한다는 건 사실이라서, <미겔 스트리트>가 좋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네요. ㅎㅎㅎ <미겔 스트리트> 서평을 쓰면서 <미겔 스트리트> 이야기가 이제야 나온다니 해도해도 너무하네요.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는 인간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이번은 앞의 말들이 너무 많네요^^;; 앞으로는 서두 부분의 말을 줄이고 본문의 말을 늘이도록 하겠습니다.(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미겔 스트리트>로 돌아가죠. <미겔 스트리트>를 읽으며 다른 작가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중국의 모옌. 나이폴처럼 모옌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죠. 이야기꾼에 속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비슷하게 여겼던 건 작품에서 드러나는 '어떤 느낌'입니다. 모옌은 평범한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며 인간 삶의 복잡미묘한 부분을 복잡미묘하게 잘 드러내는 작가입니다. 어딘가 유머러스하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유머러스한 삶의 진실을 이야기로서 잘 풀어낸다는 말입니다. <미겔 스트리트>는 저한테는 모옌의 소설과 같은 느낌을 전해주었습니다. 나이폴은 트리니다드 섬의 수도인 '포트 오브 스페인'의 하층민 거주지인 미겔 스트리트 사람들의 삶을 어린 '나'의 시선으로 그려냅니다. '나'의 눈앞에 포착된 그들의 모습은 어딘가 우습고 권태롭고 그러면서도 슬픕니다. 비극과 희극인 기묘하게 섞여들어간 그들의 삶을 어려운 말 쓰지 않고 이야기로서 술술 풀어내며 비극도 아니고 희극도 아닌 '삶의 극'으로 묘사해내는 게 '모옌'과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잘 쓰여진 이야기들은 비극과 희극을 넘나든다는 측면에서 비슷한 부분이 분명히 있는 거 같습니다.

차이점도 분명합니다. 모옌이 격동의 20세기 중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나이폴은 트리니다드 섬의 수도인 포트 오브 스페인에서 살아가는 식민지를 경험한 이들의 삶을 그리고 있거든요. 격동의 흐름 속에서 엄청난 파고를 겪었지만 모옌의 중국인들은 공통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고, 실제 현실이 어떻든 자기 삶을 살아나가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나이폴의 식민지인들은 다릅니다. 노예로서 아프리카에서 강제로서 건너온 흑인들과 식민지 시절 식민지 경영을 위해 식민지 종주국이 강제로 이주시킨 인도계 사람들이 대다수인 트리니다드 섬은 모옌의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의식이 없습니다. 그들은 다 개개의 사람들로서 존재합니다. 강제로 '이식된 삶'을 가진 식민지 거주민들이 단일한 국가의식이나 공동체 의식을 가질리는 없는 것이죠. 단일한 공동체적 정체성이 없으니 그들은 '주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식민지 종주국에 사회적,문화적,의식적으로 종속된 채 그들은 백인들의 삶과 문화를 동경하며 자신들의 삶과 문화를 끊임없이 평가절하합니다. 공동체적 정체성이라는 뿌리 없이 식민지 종주죽에 종속된 객체로서의 삶이 트리니다드 섬 사람들의 삶입니다. 개개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부패와 부도덕이 널리 퍼진 건 말할 것도 없겠죠.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성공적인 삶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공된 삶을 살지 못하니 허무하며 권태롭죠. 허무와 권태, 부패, 부도덕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몸부림치는 성공하지 못한 삶. 그게 나이폴이 <미겔 스트리트>에서 그려내는 트리니다스 섬 사람들의 생활입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가 섬을 빠져나가는 걸로 끝납니다. 마치 나이폴이 식민지를 빠져나가 영국에 가서야 자기 정체성을 자각한 것처럼, 소설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나'도 최후의 출구로서 식민지를 빠져나가는 걸 선택합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는 책을 읽는 독자들이 생각할 일이죠.

그렇다고 해서 소설에서 그려내는 식민지인들의 삶이 지옥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나름 몸부림치고, 나름 서로간에 온정을 간직하고, 서로를 돕기 위해 노력합니다. 온기와 온정, 연대의 몸부림, 동정 등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바탕인 거죠. 그곳은 지옥이 아니라 힘겹고 고달픈 삶이 사는 이들이 가득한 곳일 뿐입니다. 나이폴은 유머러스하면서도 슬픈 이야기로 그들의 삶을 우리가 쉽게 읽을 수 있게 풀어냅니다. 이야기꾼의 재능으로 너무나 먼 곳의 삶을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죠. 나이폴의 손 끝에서 빚어내는 이야기의 힘을 통해 독자의 삶에 그들의 삶이 다가온 순간 이야기의 마법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이 놈의 마법 때문에 제가 이야기를 끊을 수 없나 봅니다. 그리고 저 놈의 마법 때문에 앞으로도 나이폴 같은 이야기꾼들의 소설을 계속해서 읽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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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처 소나타 똘스또이 클래식
레프 톨스토이 지음, 김경준 옮김 / 뿌쉬낀하우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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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2.크로이처 소나타-톨스토이

평생을 한 남자 또는 한 여자만 사랑한다는 건, 글쎄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마치 양초 한 대가 영원히 꺼지지 않고 불을 밝혀 줄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은 겁니다.(27)

남편과 아내는 겉으로는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의무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두 달 째부터 이미 서로를 증오하게 되고 헤어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래도 그냥 사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끔찍한 지옥이 사직되는 거지요.(29)

진정한 타락이라는 건 말입니다, 육체적 관계를 맺은 여자에게는 윤리적인 처우를 해 줄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짓입니다.(34)

여자들은 남자들이 숭고한 감정에 대해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라는 걸, 남자들이 필요로 하는 건 몸뚱이 하나뿐이라는 걸,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은 온갖 추잡한 짓을 일삼고 여자는 용서해도 꼴사납고 촌스럽고 추한 옷을 입은 여자는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겁니다.(49)

우리는 같은 쇠사슬에 묶여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서로를 독으로 중독시키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애써 보지 않으려 하는 두 명의 죄수였습니다.(107)

원래 음악이란 거 자체가 끔찍한 거지요. 그게 뭡니까? 이해가 안 갑니다. 음악이 뭡니까? 음악이 뭘 만들어 낼 수 있죠? 음악이 뭔가를 만들어 낸다면 도대체 왜 그런 걸 만들어 내려는 거죠? 흔히들 음악은 정신을 고양시켜 준다고들 합니다만 다 헛소리고 거짓말입니다! 음악이 하는 거라곤 끔찍함을 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음악은 저의 정신을 조금도 고양시켜 주지 않죠. 정신을 고양시켜 주지도, 그렇다고 나락으로 떨어뜨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흥분만 돋을 뿐이죠.(149~150)

정말로 끔찍한 게 뭔지 아십니까? 제가 하등의 의심도 없이 아내의 몸에 대한 소유권이 오롯이 저에게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제 몸도 아닌데 말이죠. 게다가 아내의 몸을 소유할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아내의 몸은 제가 소유한 몸이 아니기 때문에 아내는 본인 마음대로 자기 몸을 쓸 수 있는 거 아닙니까?(168)

저번에 <신채호&함석헌> 서평을 쓰면서, 저는 비록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도 해도 현재에 충분히 도움이 된다면 그 유효성이 있고 그것을 쓸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맞는 말이죠. 철지난 과거의 것이라도 해도 현재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면 받아들여 쓸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해보면 철지난 '시대착오적'인 것으로서 현재의 우리에게 도움이 안 되는 과거의 것을 굳이 지금 이 시대에 받아들여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도 맞죠. 괜히 과거의 잘못된 것들을 받아들여 현재의 잘되고 있는 점을 버리면서까지 과거로 돌아가는 퇴행적 행동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과거의 것으로서 현재에 쓰이기 어려운 시대착오적인 것은 과거라는 시대의 틀속에 묻어버리고 놔두면 됩니다. 그게 가장 좋은 행동일 겁니다.

<크로이처 소나타>는 지금 다시 쓸 수 없는 과거의 유산 같은 소설입니다. 이 책에는 톨스토이 말년의 기독교적 금욕주의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성욕을 적대시하고, 섹스를 경계하며, 피임과 그에 관련된 근대과학을 불신하고, 낭만적 연애를 싫어하고, 성과 성관계와 그것을 둘러산 그 시대 러시아의 가치관을 맹렬히 비판하는. '성욕'이라는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을 불신하고, 그것 때문에 남녀관계의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하며 사랑과 결혼과 섹스와 성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 소설을 표현하는데 '시대착오적'이라는 말보다 더 적절한 말이 어디 있을까요? 저자인 톨스토이는 소설로 자신의 주장을 표현하다 못해 '에필로그'를 덧붙이며 자신이 생각하는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는 일단 먼저 '금욕'을 주장하고(^^;;) 그 다음으로는 기독교에 기반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농민상이 할만한 순수하고 서민적인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아니, 성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그것을 강제로 억제한다고 해서 남녀 사이의 문제가 다 해결됩니까? 사랑을 오직 정신으로만 해야하는 겁니까? 육체를 통한 사랑도 남녀간의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나온다면 그것 또한 사랑인데 부정할 이유는 뭡니까? 도대체 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악마화해서 없애버려려는 겁니까? 주류적인 역사 해석에 따르면 1990년대에 공산권이 붕괴한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인위적으로 제어하려고 해서라는데, 그렇다면 이 책에서 톨스토이가 주장하는 금욕주의도 몰락한 공산권 국가들이 행한 것처럼 너무 억압적인 것이 아닐까요? 소설을 읽다가 온갖 반론이 떠올라서 힘들었습니다. 역시 지나가버린 낡은 것은 낡은 것으로 봐야겠습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너무 황당한 면이 많아서요.

그런데, 이런 낡은 생각으로 가득찬 이 소설이 그냥 '낡은 것'으로만 치부되는 의미 없는 책일까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소설의 매력은 책에서 말하는 저자의 주장에 있지 않고, 문학적인 섬세한 심리 묘사에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한 인간의 내면의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그려내고 있습니다. 읽은 것만으로도 한 인간의 내면 풍경을 다 파악할 수있고, 내면의 심리적 변화과정을 세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질투심에 살인을 저지르는 인간의 몰락해가는 내면 풍경을 섬세하고 꼼꼼하게 그려내면서, 톨스토이는 인간이 어떻게 파멸하고 몰락해가는지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마치 오셀로가 질투심에 서서히 사로잡혀 데스데모나를 죽이는 과정의 심리적 변화과정을 톨스토이식으로 풀어낸 느낌이라고 해야할까요? 문제는 오셀로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의 결정적인 원인이 이아고라는 외부의 악한 인물에 있다고 한다면, <크로이처 소나타>의 주인공 뽀즈드느이셰프에게는 내면의 '성욕'이 '악'에 해당한다는 점입니다. 성욕의 악마화와 금욕의 강요만 아니라면, 이 소설은 충분히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걸 견디는 게 쉽지는 않겠죠. 앞으로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을 읽으려면 그걸 잘 견뎌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의 '낡음'을 더욱 더 잘 견디는 미래를 그리며 이제 이 글과 이 책의 독서과정 자체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찾아뵙도록 할께요. 그럼 이만.

*참, 톨스토이의 이 소설과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복잡한 면이 있어서 이 글에서는 하지 않겠습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다면 하도록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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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4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5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이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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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1.핀치콘티니가의 정원-조르조 바사니

미콜 머리 위쪽의 새파란 하늘은 어느새 구름 한 점 없이 뜨거운 여름 하늘이었다. 그 하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할 것 같지 않았고,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만큼은 실로 그 무엇에도 변함이 없었다.(63)

사물들도 죽어, 친구. 그러니까 사물들도 죽어야 한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죽게 놔두는 게 더 나아.(146)

가장 증오할 만한 반유대주의는 이런 것이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고 불평하다가, 또 반대로 그들이 주변 환경에 거의 완벽하게 동화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라고, 그러니까 평균적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불평하는 것이다.(208)

언제든 내 편에서 마음대로 현재를 사랑하고 응시할 수 있기에 현재가 순식간에 과거가 되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나의 불안감은, 그녀의 불안감이기도 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악습이었다. 즉 앞으로 나아가면서 항상 고개는 뒤를 향해 있는 것.(276)

그녀는 미래를 증오했고 미래보다는 "순결하고 강인하고 아름다운 오늘"을, 그리고 과거를, 친근하고 달콤하고 성스러운 과거를 훨씬 더 사랑했으니.(367)

문학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저는 지금까지 서평을 쓰면서, 독서모임에 나가면서 이 질문에 대한 백가지 서로 다른 대답을 한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이 글을 통해 문학에 대한 백 한번째 다른 정의를 내려보겠습니다. 문학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을 존재하게 만들거나(여기에는 SF나 판타지 문학이 속하겠죠.), 과거에 존재했지만 사라져버린 것이나 잊혀져버린 것들을 다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문학이라는 말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개인적으로 저는 어려운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문학은 언어로 '부재의 현전'을 만드는 예술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왜 뜬금없이 '부재의 현전'이라는 어려운 말로 문학의 정의를 내린 것일까요? 그건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때문입니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이라는 소설을 설명함에 있어서 '부재의 현전'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이죠. 이 소설은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반의 이탈리아 도시 페라라의 유대인 공동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배경으로, 현존하지 않는 그 때의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모습을 되살려내기 위해, 작가인 조르조 바사니는 자신의 기억을 최대한 활용하여, 부재가 현전하는 소설을 만들어냅니다. 그의 손끝에서 빚어진 '부재의 현전'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수용소로 들어가서 참혹하게 죽었거나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된 이탈리아 페라라의 유대인들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지금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작가는 이렇듯 생생하게 되살려낸 부재의 현전으로 그 시대의 삶을 증언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던 유대인들이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고립되어 가고, 어떻게 몰락해가는지를. 그 중심에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와 핀치콘티니 가문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이자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는 인물인 '나'는, 유대인 중산층 가문 출신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아오면서 이탈리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핀치콘티니 가문 사람들은 부유한 유대인 가문으로서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거대한 저택을 짓고 거기에 틀어박혀 다른 이들과 교류하지 않고 고립된 삶을 살아온 이들입니다. 1938년에 '인종법'이 이탈리아에서 발표되며 유대인들이 본격적으로 차별을 받기 시작하자, 페라라의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핀치콘티니 가문 사람들도 여러가지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제서야 다른 유대인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고, 그 때에 그들 가문과 교류하기 시작한 사람들 중에 '나'가 있습니다.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가문이 외부의 강제적 고립에서 생겨나는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으로 도시의 다른 유대인들과 교류를 선택한 것이죠. '인종법' 이후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던 '나'는 핀치콘티니 가문 사람들과 교류하며 외부 상황에서 겪는 불만족이나 내면에 간직하고 있던 고민들을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으로 대표되는 핀치콘티니가의 공간은, 자신의 불만과 고민이 해소되는 공간이자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가지게 만드는 꿈과 희망이 깃든 이상적인 공간처럼 보입니다. 특히 그들 중에서 가문의 딸인 미콜은 나에게 자신이 생각하던 이상의 정수처럼 보이는 인물입니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죠. 이상은 이상일 뿐이고, 그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 '이상'은 더 이상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죠. 사랑이 실패하고, 자신이 이상처럼 생각했던 그녀가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더 나아가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이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도 파악하게 됩니다. 꿈에서 깨어나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죠. '현실의 직시'는 나를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현실의 직시는 또다른 냉혹한 현실과 직면하게 만듭니다. 유대인 차별과 2차 대전이라는 현실. 그 현실 앞에서 가문의 사람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습니다. 내 눈앞의 현실에서 시대적 현실이라는 더 거대한 현실로의 상황 변화. 소설은 그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하며, '나'가 전쟁이 끝나고 몇십년의 세월이 지나 나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 모든 과정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들은 첫 부분에서 시작된 과거 회상의 이야기였습니다. 어른이 된 '나'가 자신이 어른이 된 과정을 회상하는 것이 이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제가 가장 독특하게 느꼈던 것은 이 소설의 담담함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사회가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고립으로 몰아넣는 시대적, 정치적 상황은 이 소설의 분위기를 이룹니다. 마치 공기처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감싸고 있는. 소설은 그런 정치적이고 시대적인 상황을 하나의 배경처럼 쓰며, 인종차별적인 분위기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중점을 둡니다. 등장인물은 자신들을 차별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삶을 살아나갑니다. 저자는 '피해자로서의 유대인'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유대인'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것처럼 생각됩니다. 저는 저자가 유대인들이 피해자로서 시대에 차별받고 희생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비록 차별받고 피해받았지만 다른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게 '문학적인 인간성의 복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시대적,정치적 사실을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도 문학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죠.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을 읽어보시면 알 수 있지만, 조르조 바사니는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그의 펜 끝에서 페라리의 유대인들은 인종차별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사랑하고, 미워하고, 말다툼하고, 서로 존중하고, 실패하고, 좌절하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됩니다. 오직 희생자의 틀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조르조 바사니의 <핀치콘티니가 정원>은 그래서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 됩니다. 홀로코스트 문학이 시대적,역사적,정치적 상황을 증언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인간적인 양상으로 형상화하는 것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문학적 자산으로. <핀치콘티니가 정원>이 알려주는 그 아름답고 슬픈 문학적인 진실 앞에서 저는 그저 감탄, 또 감탄을 할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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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9-11-11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축하해요

짜라투스트라 2019-11-11 13:2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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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0.단 하나의 문장-구병모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날카로운 면도날들을 저마다 혀 밑에 숨기거나 손끝에 꽂고 있어서(36)

펜 끝에서 한번 번져 나가기 시작한 말들이 그리는 궤적을 바라보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은 흘러가는 말들을 포착하여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은 물방울의 표면에 새겨나가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지금은 원래의 가장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기에, 그리고 말의 죽음을 맞이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간일 뿐이다.(39)

서영에게는 그 모든 장면이 원래의 속도와 부피를 잃은 채 잼과 같은 감촉으로 자신의 피부를 훑고 슬로모션으로 지나가면서 자신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로 느껴졌다. 부패한 암죽처럼 흘러내리는 현실, 흩어진 윤곽, 한낮의 악몽.(119)

무조건적 애도를 받아 마땅한 위치에 그들의 이름을 올려 클릭 한번을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미디어의 본분. 분명 사실도 있고 진실도 잇는데 그중 쓸 만한 화소의 조합으로 인해 원래의 발화와 뉘앙스와는 사뭇 다르게 번역되는 진술들. 한때 내가 했던, 지금도 남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고 다듬을 때 종종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인데 이때 숭배할 만한 대상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서사적 전략이며, 나이가 어릴수록 여성일수록 미모가 뛰어날수록 그 대상으로 등극할 가능성은 무한등비수열로 높아진다.(208)

전복된 말에서는 비밀스러운 힘이 빠져나가고 말이 구현하던 세계는 실재의 선로에서 이탈한다. 모든 말에는 그것과 본질적으로 무관한 사물 및 사태가, 대체로 과잉과 혼동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담보로 부여되므로, 말이 지닌 힘과 더불어 기왕에 펼쳐진 현실을 축소하고 접어 가두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압축과 생략 그리고 전복이다.(219)

서평을 줄이고 줄여서 한 문장으로 쓴다면 어떤 문장을 쓸 수 있을까요? 서평에 쓰여진 언어를 다 제거하고 오직 하나의 문장으로만 나타내야 한다면 어떤 말을 해야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서평을 줄여서 한 문장으로 쓴다면 딱 두 가지 가능성의 한 문장만 남습니다.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 저는 여기서 모든 서평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에 다른 것들을 덧붙이면서 서평이 태어나는 것이죠.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서의 하나의 문장이 존재하고 거기에 다른 것들을 덧붙이면서 서평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이건 서평뿐만 아니라 영화평,드라마평,예능프로그램평에 다 적용되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서평이 이 하나의 문장에만 머문다면, 아무리 많은 말과 문장이 있어도 '재미있다'와 '재미없다'라는 말에만 머문다면 그게 좋은 것일까요? 처음에 쓴 서평이 아니라, 이후에 쓴 수십 개, 수백 개의 서평이 오직 '재미있다'와 '재미없다'라는 영역에만 머문다면 그건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요? 그 글이 글을 쓴 사람에게 의미가 있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글을 지속적으로 쓰면서 처음 시작했던 영역에 머문다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요? 이건 저한테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도 처음 서평을 썼을 때 '재미있다'와 '재미없다'의 영역에서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서평을 쓰면서 변화의 욕망을 느꼈습니다. '재미있다'와 '재미없다'의 영역을 벗어나야 한다는. 그 이후의 제 서평들은 저 몸부림의 흔적입니다. 어떻게든 '재미있다'와 '재미없다'의 영역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몸부림으로서 글을 쓰면서 저는 차자 글에서 재미의 중요성을 약화시켜 갔습니다. 물론 필요하면 재미에 관련된 것들을 글로 썼죠. 이 말은 재미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책을 읽는 사람에게 재미는 중요합니다. 재미가 없다면 왜 책을 읽겠습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책을 읽고 나서, 그 책을 읽고 나서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한 그 무엇을 '서평'이라는 형식의 글로 쓰고자 한다면, 오직 '재미'에만 머무는 것이 너무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거죠. 서평을 계속해서 쓴다는 건, 어떤 변화와 발전의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말과 다름없는데, 그 변화와 발전의 방향성이 처음 글을 쓴 것과 똑같다면 그게 무슨 변화와 발전입니까? 아니, 그건 과거의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행동에 불과할테죠. 저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글을 쓰고자 한다면 처음의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고, 저는 거기에 맞춰서 글을 써나갔습니다. 그게 잘됐는지 안됐는지와는 별도로.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저같은 아마추어도 저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소설가들은 어떨까요? 그들도 그들 나름의 변화를 위한 욕망을 가지고 글을 써나가지 않을까요? 구병모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 <단 하나의 문장>을 읽으며 저는 구병모 작가의 변화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습니다. 그 이전까지 제가 읽은 구병모 작가의 소설들에서 구병모 작가는 '이야기 제작자'의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집에서 구병모 작가는 이전까지와지는 달리 '이야기 제작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내비치며, 그 몸부림의 흔적으로서 책 속의 소설들을 독자에게 제시합니다. 책 뒤에 나오는 문학평론가의 해설에서는 이 욕망을 작가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이야기 제약자가 되고 싶다는 말로 표현하고, '작가의 말'에서는 '이야기의 너머에 또는 기저에 닿고 싶어진 것이다'라는 말로 나타냅니다. 표현이 어떻든 간에 중요한 건 작가가 변화하고 싶어한다는 것이고 그 변화의 욕망을 소설 속에 녹여냈다는 거죠. 제가 가장 변화를 크게 느낀 건, 책을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제게 찾아오는 불편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그 이전까지 제가 읽은 구병모 작가의 작품들이 무조건 술술 잘 읽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이 책처럼 저에게 지속적인 불편함을 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친절하지 않은 서술의 형식도 그렇고, 군데군데 내비치는 쉽지 않는 표현도 그렇고, 어딘가 이 사회의 폐부를 꿰뚫고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면모를 적나라하게 내비치는 내용도 그렇고. 특히 제가 가장 불편했던 건, 저라는 인간이 가진 어떤 어떤 면모가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에서는 한 소설가가 소설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익명의 군중들의 쉽게 내지르는 말의 흐름 속에서, <지속되는 호의>에서는 거리를 두고 사람을 대하면서도 정작 사람의 관심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무기력해지는 도시인의 모습 속에서,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에서는 농촌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지나치게 예민한 한 여인의 모습 속에서, <미러리즘>에서 한 남성이 약물 테러를 당해 여성으로 변화하면서 여성의 삶을 체험하고 나서야 알게 되는 현실 속에서, <웨이큰>에서는 한국에 사는 한 필리핀 주부의 입을 통해 사이버 테러를 막으러 나섰다 의식을 잃게 된 한 남자가 일깨워주는 이 세상의 진실 속에서, 저는 저 자신의 모순적이고 나약하고 무기력하며 둔감했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봤기에 저는 불편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봤던 저의 모습은 이 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바꾸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나이면서 나와 다른 또다른 '나'가 되도 상관없는. 작가는 불편한 이야기들을 써내면서 이전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써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소설들에서 작가는 자신의 변화의 욕망을 공공연하게 작품을 통해 드러냅니다. <사연 없는 사람>에서는 나의 욕망이 다른 이를 위한 욕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곰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에서는 언어가 사라지는 극단의 상황 속에서, <오토포이에시스>에서는 이야기가 아닌 단 하나의 문장을 좇는 한 인공지능의 모습을 통해서.

어쩌면 구병모 작가가 좇는 목표는 불가능할 것일수도 있습니다. 이야기의 너머 또는 기저에 닿고 싶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불가능을 향한 도전을 통해 자기 자신이 변화하고, 자신의 작품이 변화한다면, 그것은 목표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변화 자체에는 성공한 것이 됩니다. 불가능을 향한 도전이 자신의 삶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발전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목표에는 도달 못하더라도 그 과정이 변화를 이끌어냈기 때문이죠. 그걸 저 자신에 적용해봐도 비슷합니다. 재미의 영역을 벗어나는 서평을 쓰고 싶다는 제 욕망이 쉽지 않을지라도, 그 과정을 통해 저와 제가 쓰는 서평이 변화했다면 저는 이미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겁니다. 제가 했던 변화의 과정을 통해서 발전의 방향을 내다볼 수 있다면 저는 묵묵히 제길을 가면 됩니다. 구병모 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 없이 한발한발 내딛으면 변화는 한 개인을 스쳐 지나며 삶과 세계관 전체를 변화시킬 것이고, 어느 순간 변화한 모습으로 살아나갈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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