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
소포클레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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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안티고네-소포클레스

 

<안티고네>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미처 쓰지 못한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에 대한 서평을 떠올립니다. 저는 그 글에서 용감함에 대해서 쓰려고 했습니다. 제가 그 책을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게 책의 저자인 정희진의 용감함이었거든요. 정희진은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에서 용감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편입니다.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자신을 비판하거나 비난할 것임이 눈앞에 보임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밝혔죠. 생활인으로서 비판받거나 좋은 소리 듣지 못한 말은 하지 않는 게 몸에 배어 있는 저의 입장에서는 정희진의 용감함이 충격적이었고 인상 깊었습니다. 그래서 용감함을 주제로 서평을 쓰려고 했었죠.

 

<안티고네>에서도 저는 용감함을 봅니다. 원래 이 책은 헤겔이 말한 인간의 율법과 신의 율법 간의 갈등이라는 해석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가장 유명한 해석보다는 저만의 생각으로 용감함에 대해서 말해보려 합니다. <안티고네> 속 주인공 안티고네는 용감합니다. 테베의 왕 클레온이 왕의 권위를 이용해서 테베를 침공한 안티고네의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지 말라고 명령했음에도 안티고네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오빠의 시신을 매장합니다. 분노한 클레온은 권위를 이용하여 그녀를 감금하죠. <안티고네>를 읽으신 분들은 알지만, 여기서 안티고네는 당당하게 클레온을 비판하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죠.

 

안티고네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며 근거로 삼는 건 이어져 내려온 관습,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도리 같은 것입니다. 헤겔의 신의 율법이라 말한 것들이죠. 그에 비해 클레온은 자신의 권위와 공동체의 율법을 내세우며 안티고네와 대립합니다. 오빠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해야한다는 안티고네와 왕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운 클레온의 대립. 이 중에 누구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지는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를 겁니다. 다만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안티고네의 용기입니다. 두눈 시퍼렇게 뜬 왕의 권위가 있음에도, 왕이 지키지 않을 시에 폭력을 행사하겠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네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주장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며, 행위의 결과를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같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하지 못하죠. 하지만 우리는 역사에서 그런 일들을 흔하지 않지만 종종 봅니다. 관동 대지진 이후에 유언비어 때문에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자 그것을 막아섰다 조선인들과 같이 맞아 죽은 소수의 일본인들,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본회퍼 목사, 나치에 저항하는 팸플릿을 썼다 목숨을 잃은 백장미단... 안티고네의 행동을 보며 그런 이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세상의 다수가 폭력 앞에, 주류 권력의 힘과 권위 앞에 침묵 할 때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행하고 그에 따라 용감하게 행위의 결과를 맞이한 사람들. 저에게 안티고네는 문학 속 인물이지만 그들과 같은 인물로서 기억될 겁니다. 문학적인 사람들이지만 역사 속에 존재하는 이들과 같은 용감한 사람들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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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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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오이디푸스 왕-소포클레스

 

1.

미루고 미루다 또다시 앉아서 씁니다. 글을 쓰기 싫었지만 글을 쓸 수밖에 없어서 씁니다. 이쯤되면 운명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죠.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쉽게 받아들이고, 글을 쓸 수 있겠죠. 그래, 운명이라고 생각하렵니다. 글을 쓰는 건, 책을 읽은 자의 운명이라고.

 

2.

운명이라는 말을 쓰다보니 <오이디푸스 왕>이 떠오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오이디푸스 왕>은 그리스 비극 중에서 운명의 힘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 같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그리스 비극을 읽고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 어머니와 결혼하고, 자기 딸이 자기 동생이 되는 운명이 있을 수 있지? 문학 작품의 결말 중에서 이렇게 충격적인 작품이 존재했던가? 그 충격을 몸에 받아들인 저는 나중에 독서 모임 나가서 이 작품을 가지고 독서 토론을 할 때, 제가 받은 충격을 말로서 토해냅니다. 인류 최초의 막장 스토리, 막장 오브 막장, 막장계의 마스터, 한국의 막장 드라마는 따라오지 못하는 범접할 수 없는 막장계의 전설이라고.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 앞에서 <스타워즈5:제국의 역습>에서 다스베이더가 루크 스카이워커에내 내뱉는 명대사 ‘I am your father.'는 힘을 잃고 스러져갑니다.

 

3.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힘이 강합니다. 처음에 가졌던 엔딩의 충격효과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그라들고 이 작품을 저는 다른 시점으로 보게 됩니다. 어쩌면 이 작품은 추리극일 수 있다며. 추리극이라고? , 맞습니다. 탐정이 나오고 범인이 나오는 추리극. 이 작품을 어떻게 추리극으로 볼 수 있냐고요? 작품을 바라보면 추리극으로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에 들이닥친 역병의 원인을 테베의 왕인 오이디푸스가 찾으려 하면서 시작합니다. 원인을 찾는 오이디푸스에게 신탁은 전대 왕을 죽인 이가 도시에 있기 때문에 역병이 돈다고 알려줍니다. 오이디푸스는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전대 왕을 죽인 인물을 찾으려 하죠. 여기서 추리극이 보이지 않나요. 전대 왕이라는 피해자가 있고, 피해자를 죽인 범인이 있고, 범인을 찾으려는 탐정역할의 오이디푸스가 있죠. 오이디푸스는 정말 최선을 다해 범인을 찾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범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게 드러나죠.^^ 추리극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작품은 결론부에 범인과 탐정을 일치시켜 버리며 추리극의 공식을 파괴해버립니다.

 

4.

추리극적인 요소도 그렇지만 저를 놀라게 한 건 오이디푸스의 성실함입니다. 그는 진실을 추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 진실의 끝에 자신의 파멸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파멸을 앞당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말입니다. 이 비극적인 아이러니와 역설이 <오이디푸스 왕>의 묘미인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인들은 이 비극성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운명의 무시무시한 힘을 실감하며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느낌을 실감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현대인들에게 <오이디푸스 왕>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인들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겁니다. 저에게는 운명의 힘 보다는 운명이 닥침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점과 파멸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이 비극은 인간의 품격을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고대와 현대를 넘어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품격과 엄정함을 보여주는 작품. 제게 <오이디푸스>는 계속해서 그런 작품으로 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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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3-01-15 19: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면 햄릿도 아버지를 암살한 숙부를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혼자 고민하고, 최선을 다해 복수를 위한 빌드업을 짜죠. 복수가 달성하는 순간 자신도 파국을 맞이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요. ^^

짜라투스트라 2023-01-15 21:26   좋아요 0 | URL
아, 햄릿을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햄릿이 그렇군요. ㅎㅎㅎ

기억의집 2023-01-15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해석 흥미롭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23-01-15 22:5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2023-01-21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1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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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데미안-헤르만 헤세


2023년에는 제가 읽은 책에 대한 서평을 빠짐없이 쓰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다짐은 다짐일 뿐, 새해가 시작된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지만 다짐은 사그라들고, 의욕은 사라졌습니다. 왜 그렇게 글쓰기가 싫은건지... 글쓰기 싫어하기가 지속되다보니 아예 글쓰기에 대한 의욕이 사라집니다. 그냥 글에 대한 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정신적 상태가 도래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줄 예상이라도 했던건지 2022년에 의도적으로 글을 쓸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을 만들어놨습니다.^^;; 강제적으로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이기에 글을 써야 합니다. 없는 의욕을 끌어올려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 자판을 두드립니다. 


자, 이제 글을 써봅시다. 그런데... 그런데... 역시나 떠오르는 건 없습니다. 읽은 책이 있지만 읽은 책 서평을 쓰기가 싫어집니다. 그냥 포기해버릴까? 포기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죠. 하지만 지금까지 항상 쉬운 일만 해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쉬운 일이 아니라 어려운 일을 선택해봅니다. 다시 글을 쓴다는 어려운 일을 선택한 것지요. 자, 다시 글을 써봅니다. 최근에 읽은 책이 아니라 과거에 읽은 책들을 떠올려봅니다. 어떤 책에 대한 글을 써볼까. 일단 철학책? 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픕니다.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책? 음, 글을 쓰려고 생각하니 뭔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나네요. 자료의 도움이 없으면 글을 쓰기가 어려운 느낌이라고 할까. 예술이나 역사책은? 아, 그쪽 글들은 뭔가가 아쉽네요. 어쩔 수 없이 과거에 읽은 고전들을 떠올려봅니다. 그래, 나에게는 고전들이 있었어. 특히 문학의 고전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내가 사랑하는, 잊을 수 없는 막스 데미안이네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글을 쓰기 싫어하는 나는 지금까지 나를 지배한 세계, 나의 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새로운 나로 태어나려면, 글을 쓰기 싫어하는 나라는 나의 알을 깨뜨려야 합니다. 지금 내가 앉아서 글을 쓰는 건, 나의 세계를 깨뜨리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내가 글을 쓰면서 추구하는 건, 지속적으로 글을 쓰는 나의 이상이 되려는 행위이죠. 그걸 신이나 아프락사스라는 이름에 비유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건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추구하는 이상이기에 나의 이데아 정도로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무언가가 되기 위한 과정에 있습니다. <데미안>에서 말하는, 선과 악의 양면성을 모두 포괄하는 총체적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삶은, 우리가 그걸 원하는 한 언제나 그 과정으로서 존재합니다. <데미안>에서는 그 과정을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 혹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서 표현합니다. 그걸 지금의 나에게 적용해보면, 지금의 글을 쓰기 싫어하는 나는 글을 쓰는 내기 되기 위한 과정에 위치합니다. 지금의 나는 미래의 글을 쓰는 걸 자연스럽게 하는 내가 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나에게는 그 과정을 돕는, 싱클레어의 친구 막스 데미안이 없지만,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글을 쓰는 나기 되기 위해 노력해 볼 것입니다. 2023년은 글을 쓰는 새로운 나가 되기 위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아니, 너무 확신은 하지 않을께요. 그저 새로운 나기 되기 위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기원해볼께요. 그 기원의 끝에 글을 쓰기 싫어하는 지금의 나가 산산이 부서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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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이면 을유세계문학전집 122
씨부라파 지음, 신근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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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그림의 이면-쓰부라미

 

사랑은 아름답다는 말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아름다운 건 아니죠. ‘사랑이 아름답다는 말이 맞으려면 아름다울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할 겁니다. 만약에 아름다울 수 없는 조건이라면, 그 사랑이 아름다운 게 될리는 없죠. 사회에서 지탄을 받는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이라는 조건이라면 거기에 아름답다는 말을 쉽게 붙일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이 거부하는데 다른 한 사람이 미친 듯이 사랑한다면 그것도 아름다울까요? 어쩌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스토킹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사랑이라도 상황에 따라서, 혹은 때에 따라서 아름다울 수도 있습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를 생각해봅시다. 이 영화는 바람피는 배우자를 둔 유부남과 유부녀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사랑을 그립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이 영화는 단순한 불륜 영화처럼 보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한 불륜 영화를 벗어납니다. 왜냐구요? 이 영화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 둘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미묘한 감정선과 상황들이 빚어내는 사랑의 느낌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죠.

 

어찌되었든 모든 사랑이 아름다울 수 없지만, 아름다울 수 없는 사랑이라도 아름다울 수 있는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고 스쳐지나간다면, 그런 모든 상황들이 아름다울 수 있는 조건으로 수렴된다면, 충분히 그런 사랑들도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쓰부라미의 대표작으로 태국을 대표하는 로맨스 소설 <그림의 이면>이 가리키는 사랑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소설은 30대의 왕족 출신 유부녀와 20대의 중상층 출신 일본 유학생의 사랑에서 다룹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이 소설도 단순한 불륜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단순한 불륜 이야기가 아닙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소설 내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둘은 끝없이 어긋나며, 결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으로 결론납니다. 처음에 일본 유학생인 남자가 사랑을 고백하지만 유부녀가 진정시켜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병이 지나가고 나서 남자에게는 그 기억이 추억이 됩니다. 태국으로 돌아온 남자는, 과거의 사랑이 대상이었던 여인이 죽기 전에 한 고백으로 인해서야 그녀도 자신을 사랑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나서야 둘이 서로 사랑했음을 알게 된 것이죠. 하지만 사랑은 지나가버렸고, 다시 돌이킬 수 없죠.

 

돌이킬 수 없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만약에 이루어졌다면 그게 아름다웠을까요. 현실이라는 힘 앞에서 그들의 사랑은 아름다움을 잃고 현실화되어 산산히 바스라지거나 그저 그런 일상의 삶이 되었을 겁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아름다움은,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사랑의 가능성과 아직 간직되고 있는 사랑의 낭만성과 순수함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그림의 이면>은 그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가능성과 낭만성 때문에 충분히 아름다운 사랑의 소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낭만주의가 이 소설을 아름답게 만든 것이죠. 저는 여기에 이 소설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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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감지 마라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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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눈감지 마라-이기호

 

이기호 작가의 <눈감지 마라>는 짧은 소설들 모음집입니다. 짧은 소설들 모음집답게 수십 개의 단편이 되지 못한 짧은 소설들이 모여 있습니다. 일반적인 짧은 소설들 모음집이라면 각기 다른 짧은 이야기들이 모여 있겠지만, 이 책은 전진만박정용이라는 두 사람의 삶의 이야기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구성입니다. 두 사람의 삶의 이야기로서 커다란 하나의 소설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각각의 소설들은 각기 다른 구성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전해준다는 말입니다.

 

소설들 전반에 깔린 건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삶의 비애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비극적이고 슬픈 분위기같겠지만, 이기호 작가의 특성상 소설은 슬픔이 가득한 무거운 분위기로 흐르지 않습니다. 이기호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함과 경쾌한 느낌은 희극적인 어조를 가져오며 소설 전반에 깔린 비극적인 분위기와 어우러져 희비극적인 느낌을 불러 일으킵니다.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우는, 그런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느낌.

 

그러면 왜 이 소설들은 희비극적인 느낌을 가지는 걸까요? 그건 전진만박정용이라는 두 주인공의 삶 자체가 가진 구조적인 요소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공부도 잘하지 못해 지방대에 들어갔고, 지방대 졸업 뒤에는 아르바이트와 파트 타임을 전전하며 살아갑니다. 사는 곳도 보증금 없는 원룸에 함께 월세를 보태며 살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 주위에서 마주치는 이들은 돈 없고 힘 없는 이들이고, 그들과 함께하는 그들의 삶에는 어찌할 수 없는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들은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도 쉽게 할 수 없고,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삶 속에서 그저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갑니다. 기본적으로 가난이 그들을 힘겹게 하지만, 가난이 불러 일으킨 다른 삶의 요소들이 더해져 그들은 더욱더 힘겨워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빡빡해지는 환경이 그들의 삶을 비극으로 몰아간다는 말입니다. 일을 하다 벌어지는 사고도, 심지어 죽음마저도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지나갑니다. 마지막에 진만이 떠나간 정용의 삶에 젊은 청년이 등장하지만, 그는 이름만 다른 또다른 진만으로서 정용과 함께 합니다.

 

사실 처음에는 슬프긴 했지만 이기호 소설 특유의 희극적인 느낌이 비극을 덜어주면서 슬프면서도 기쁜 느낌으로, 슬픔이 덜어지는 식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읽어나가다 보니, 삶의 비극에 비극이 겹쳐지면서 점점 슬픔이 커져가는 것이 아닙니까? 읽다가 더해지는 슬픔에 어느 순간 슬픔이 빵 터지며 지독한 슬픔이 들이닥쳤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어진 가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도 없는 삶, 그러면서도 울고 웃으며, 때로는 다른 가난한 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때로는 그들과 다투기도 하고, 가난한 삶의 구조이 자신을 옥죄는 삶의 비극의 끝에 결국 닥친 비극까지. 어찌할 수 없는 한국적인 삶의 비극 앞에서 저의 슬프고도 슬플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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