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태교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태교라는 말에 약간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임신한 뒤부터 나라는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 앞에 ‘태교‘가 붙는 것이 의아했다. 늘 하던 독서를 해도 "그래, 독서가 태교에 좋지"가 되었고 뜨개질이나 음악 감상도 "그래, 태교에 좋겠다"가 되곤 했다. 별생각 없이 건네는 말이라고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나를 건너뛴 채 배 속 태아와 주고받는 안부 인사처럼 어색하게 여겨졌다. 저기요, 저도 여기 있거든요. 유치하게도 그런 시선에 대한 반발심인지 더 잔인하고 더 피비린내 나는 음습한 이야기에 끌렸다. 평생 읽은 (얼마 되지 않는) 미스터리 소설의 대부분을 임신 기간에 읽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