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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 감는 새 연대기 1 - 도둑 까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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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태엽감는 새]를 읽었습니다. 새 번역본은 어떨지 궁금해서 구입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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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 농촌총각의 투르크 원정기
안효원 지음 / 이야기쟁이낙타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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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안효원의 [고맙습니다]를 읽으면서 비로소 생각난 듯 터키, 라는 나라를 찾아봤다. 아침마다 크로와상을 그렇게 먹어대면서도(크로와상은 오스트리아가 오스만투르크(터키)의 침공을 막아내고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만든 빵이다. 터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국기인 초승달을 포크로 찍어먹는 치욕적인(?) 역사인 셈이다.)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라가 터키다. 누군가 내게 터키로 여행가지 않을래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거기 뭐가 있는데요,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검색을 좀 더 해보니 세계문화유산도 가득하고 지중해에서 레포츠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세계 3대 음식 중 하나가 터키 음식이라는 것도 나온다. 슬슬 무식(?)한 티가 나는데... 여하튼, 그런 나라에 그가 다녀왔다.

터키에 관심도 없는 내가 터키 여행기를 집어들었을리 만무하다. 이 책을 손에 쥐게 된 건 순전히 책 표지에 비뚤비뚤하게 쓰인 ‘고맙습니다(테쉐큐르 에데림)’라는 글씨 덕분이었다. 책을 두어 장 넘기면 진해보이는 커피 사진 옆에 “그동안 만난 사람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 앞으로 만날 사람들 모두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고맙습니다”라는 글도 적혀있다. 아무리 책장을 넘겨도 이 책에는 터키의 유명 관광지라던가 음식점에 대한 소개가 없다. 터키 지도라던가, 여행한 루트도 그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는 터키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다른 여행 서적들(사실은 여행 서적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다른’이라고 표현할 만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이 보란 듯이 적어놓은 정보들과 큼지막한 사진들이, 이 책에는 없었다. 이 조그만 책에는 관광지보다, 음식점보다, 풍경보다, 이야기가 있었다.

여행작가 노동효씨는 추천의 글에서 이 책을 두고 ‘터키 세밀화’라고 표현한다. 책을 읽는 내내 그 말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을 했다. 글쓴이 안효원이 그려낸 터키의 풍경들을 두고 한 말이겠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그곳의 사람들 혹은 여행하는 사람들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가 세밀화 같았다. 터키 생활 세밀화 같은 느낌이랄까. 그는 꽤나 덤덤한 말투로 이야기하지만 그가 그려내는 사람들이 매우 따뜻했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그리고 삶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터키가 아니라 한국에서도 볼 수 있고, 앙카라가 아니라 서울에서도 볼 수 있는 사람들. 불쑥, 여행이 생각만큼 특별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9일 동안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을 여행한 저자의 특별함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 먼 곳에 있는 사람들도 언어와 피부색이 다를 뿐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는 ‘평범함의 진리’를 생각했을 뿐이다.

그는 터키 여행을 마치며 이렇게 쓴다. “터키 여행의 끝자락에서, 인생이란 긴 여행을 다시 시작한다.” [고맙습니다]는 내게 터키의 특별함보다 터키 사람들의 평범함을 이야기해주었다. 나를 둘러싼 평범함이 특별함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생각에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터키’로 떠나기보다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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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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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고 반성하며 읽은 리영희 선생의 일생

책 이야기에 앞서 개인적인 이야기.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전환시대의 논리]가 많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게 사상적 충격을 주고 있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비롯한 몇몇 책 때문에 반공법으로 구속되었던 리영희 선생도 만기출소 했던 때다. 그때 태어난 나는 자라면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지도, 리영희 선생의 이름을 듣지도 못했다. 서른이 넘어서야 선생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돌아가실 즈음에서다.

2010년 12월, 신문매체론 종강 후 학교 앞 조그만 치킨 집에 모인 우리의 화제는 15일 돌아가신 선생이었다. 교수님은 ‘언론계에서 존경할 만한 분이 많지 않은데 리영희 선생님은 큰 어른 역할을 해주셨다’고 이야기하셨다. 부끄러웠다. 신문방송을 전공한 건 아니었지만 언론을 공부하겠다고 학교에 다니면서 리영희 선생도 모른다는 게, 부끄러웠다(우린 강준만 세대라고 변명해봐야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다. 나는 강준만 선생의 책도 많이 읽진 않았다). 내가 리영희 선생을 알지 못했던 건 그럴 필요가 없는 세대였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의 대표작 [우상과 이성]을 구입했다. 하지만 먼저 읽게 된 건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이었다. 이것 역시 게으름 때문이지만, 나름 생각으로는 무작정 저작에 접근하는 것보다 선생을 먼저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제법 시간을 들여 [리영희 평전]을 읽어낸 후에야, 또 다른 후회를 했다. 소중한 것을 잃고 난 뒤에 그리워한다던가. 그 분이 살아계실 때 한번이라도 뵐 기회가,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을 텐데 그 기회를 놓쳐버린 게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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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을 통해 읽은 선생의 인생과 글은 (감히 그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매우 훌륭했다. 수십 년 전 쓴 글인데도 낡음이 없고, 선명하면서도 탄탄한 지식과 필체가 살아있는 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조건반사의 토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등은 어느 사상가보다도 통찰력과 호소력을 갖는 표현들이었다. [리영희 프리즘]에서 고병권 선생이 쓴 글은 리영희 선생의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스승이란 우리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우리를 각성케 하는 모든 존재에 부여할 수 있는 이름이다.”

신문기자로서 선생이 탁월한 기자였다면, 혼탁한 언론계를 꾸짖을 수 있는 스승이기도 했다. 한국기자협회보에서 청탁받아 쓴 ‘후배 기자들에게 당부- ‘신문지’를 만들지 말고 ‘신문’을 만들자’는 글이다. “지난 한 세월 동안 내게는, 이 사회에 ‘신문지’는 있어도 ‘신문’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넋두리를 인쇄한 ‘..지(紙, 종이)’는 내게 조석으로 배달되어 왔지만 ‘새 소식(신문)’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소식이라는 것도 하나같이 권력을 두둔하는 락은 것이고, 권력에 아부하는 구린내 나는 내용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따위 ‘신문종이’를 만들어내는 신문인들이 감히 ‘언론인(言論人)’을 참칭할 때 나는 그들을 ‘언롱인(言弄人)’이라는 호칭으로 경멸해왔다.”(443쪽)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지금은 신문의 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이 신문을 읽는 것 자체가 낡은 일이 되어버렸다. 소식은 이미 인터넷 등을 통해 무엇보다 빨리, 많이,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종이 신문들은 그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지금 색깔논쟁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신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선생이 조금 더 오래 펜을 잡고 활동하셨더라면 방향을 일러주시지 않았을까. 적어도 고민하라고 혼을 내지 않으셨을까. 어쩌면 이 책에도 언급되는,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출판기념회에서 말씀하신 것이 그 답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5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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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은 리영희 선생의 굴곡진 인생을 잘 풀어내기도, 또 선생의 글을 적절히 인용하기도 했지만 곳곳에서 과잉된 표현들도 눈에 띈다. “리영희가 유럽 중세에 태어났으면 이단심문소에 끌려가 화형을 당했을지 모르고, 나치시대에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살았으면 레지스탕스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춘삼월 날씨가 풀리면 만화방초가 다투어 피어나지만, 동짓달 서릿발 치면 소리 없이 시들고 잎이 진다. 송백이나 국매쯤 되어야지 오연하게 푸름을 지키고 꽃송이를 돋운다.” 이런 표현들과 고문들을 인용한 추앙(?)은 선생의 인간적인 면모를 잃어버린 부분도 있지 않은가 싶다. 물론 리영희 선생의 평생은 인간적인 면모를 넘어서기도 하지만. 선생은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비인간적(?)으로 훌륭하셨다. 2009년 7월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인권실천시민연대 창립 1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 강연은 여전히 시퍼런 서슬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일 년 동안 이명박 통치시대는 비인간적, 물질주의적, 반인권주의적 파시즘시대의 초기에 들어섰다.”(42쪽)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답답함도 꽤 느꼈다. 우리, 적어도 나는 따라갈 수 없을 것만 같은 큰 그림자를 느꼈다고 할까. 그 그림자를 벗어났을 때의 시퍼런 바람을 견뎌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서평마다 쏟아지는 찬사도 약간은 불만이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으며 종종 투덜거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불만이 선생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나 보다. 선생의 인생이나 글에 대해 좋지 못한 말이라는 걸 전혀 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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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 주세요.

식량의 종말 
폴 로버츠 (지은이) | 김선영 (옮긴이) | 민음사 | 2010-12-31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병익.권영빈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철학자의 서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프레시안 기획 / 알렙 / 2011년 1월












대칭
마커스 드 사토이 지음, 안기연 옮김 / 승산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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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2-18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이 의외로 많이 소개하시네요.
저는 내심 이 책 선정되기를 바라는 1人입니다.
평전을 낸 출판사가 제가 좋아하는 출판사이기도 한 것도 있구요,, ^^;;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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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노엄 촘스키, 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시대의 지성’ 촘스키와 푸코가 만나 대담을 나눴다는 것만으로도 관심이 갔던 책. 서로 자국(미국과 프랑스)에서 지식인으로 명성을 쌓아가며 이름을 들었겠지만 이렇게 대면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게다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촘스키는 언어학자이면서 사회문제에 앞장섰고 푸코는 철학자이면서 역사와 언어에 관심이 많고 또 사회문제에도 뛰어들었으니 넓게 보면 유사한 관심사도 많았을 듯하다. 물론 미시적인 부분에서는 아주 많이 달랐겠지만.

이들은 1971년 11월 네덜란드 TV 프로그램에서 네덜란드의 사상가 폰스 엘더르스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대담을 진행했다. 대담의 내용은 인간의 본성과 정치(사회)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그리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는 않고, 이후 쓴 저작물들을 일부 싣고 있다. 강연 또는 후술한 내용 역시 정치나 권력에 대한 내용들이지만 이 대담을 위해 쓴 것들은 아니고, 대담 내용과 유사한 부분(물론 촘스키가 대담 내용과 관련해 푸코를 언급한 내용도 있지만)을 함께 묶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 책 자체로 완성도 높은 담론을 펼친다기보다는 관련 내용들을 엮어놓은 자료집 성향이 강하다. 게다가 이 책에서는 ‘인간의 본성’보다 ‘정치(사회)와 권력’에 대한 논의들이 더 많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 내용들이라면 촘스키나 푸코 모두 많은 저작과 논문, 강연집을 낸 터라 굳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틀에 맞춰 묶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더욱이 두 사상가에게서 얻은 ‘인간의 본성’은 (물론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짧은 시간과 제약 등으로 심도깊게 논의되지 못했다. 관념론적인 주제여서 일반 독자/ 시청자들이 받아들이기에도 벅찬 주제였다. 당시의 대담을 ‘정치(사회)와 권력’에 집중해 우리 시대를 톺아보는 계기로 만들었다면 이해도 쉽고 좀 더 시대적인 대담이 되었을 듯하다. 또한 후술된 내용은 이들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강연은, 분명 논문이나 저작에 비해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부분이 있지만 개념에 대해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렵더라도 원 저작(또는 이를 해설하는 책)을 읽고 강연집을 접하는 게 더 좋다는 쪽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표피적인 이야기를 듣는데 끝날 수도 있다.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 컬럼비아 대학 교수 존 라이츠먼이 서문에서 각각의 사회자와 대담자들에 대해 언급하기는 했지만 실제 챕터에서는 폰스 엘더르스, 미추 로나, 강연 장소 등에 대한 소개가 없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촘스키와 푸코의 대답만이 아니다. 질문자들이 어떤 사상과 생각을 가지고 질문을 던졌는가는, 대답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더불어 가능하다면 각 챕터에서 이들의 사상을 이해하는 가이드 페이지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포괄적인 해설이 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담과 강연을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을 듯하다. 가령, 폰스 엘더르스는 두 철학자를 비교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산의 양쪽에서 터널을 뚫어 오는 사람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같은 산에서 터널 작업을 하면서도 상대방이 반대쪽에서 작업하고 있음을 모릅니다.”(24쪽)라고 했지만 나 역시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들이 터널 작업을 끝까지 해나간다면 중간에서 만날 수 있는 지점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이 책의 행간에서 얻을 수 있는 몇몇 가지가 있었다. 촘스키의 견해들이 권력-언론을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것과 푸코가 펼친 정치에 대한 생각이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담백했다는 것.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촘스키는 다분히 미국적인 사람이고 푸코는 다분히 프랑스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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