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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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루한은 이 옹호자들과 회의론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가해지는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결국 미디어 콘텐츠는 미디어 그 자체보다 덜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세상과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창으로서의 대중 매체는 우리가 보는 것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결정하고, 나아가 개인과 사회의 정체성을 바꾸어놓는다.

맥루한은 ˝기술의 영향력은 의견이나 개념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오히려 이 영향력은 ˝인식의 방식을 꾸준히, 아무런 저항 없이˝ 바꾸어놓는다는 것이다.

9쪽

미디어 재벌 데이빗 사르노프는 1955년 노트르담대학교에서 연설에서 그가 왕국을 세우고 부를 축적할 수 있도록 해준 매스미디어에 대한 비판을 일축했다. 그는 모든 부정적인 효과의 책임을 기수이 아닌 청취자와 시청자 탓으로 돌렸다.

그는 ˝우리는 기기를 만들어낸 자들의 죄를 기기 그 자체에 떠넘겨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 과학의 산물은 그 자체로는 선하거나 악하지 않습니다. 기기의 가치는 그것들이 사용되는 방식에 따라 결정됩니다˝라고 말했다.

맥루한은 이같은 발상을 비웃으며 ˝몽유병에 걸린 자의 말˝이라고 쏘아붙였다. 맥루한은 모든 새로운 미디어는 인간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미디어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인 반응, 즉 그것들이 어떻게 사용되느냐가 중요하다는 식의 생각은 기계에 대해 무지하고 무감각한 태도˝라고 적었다. 미디어 콘텐츠는 ˝정신의 감시견을 따돌리기 위해 도둑이 미끼로 던지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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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매체철학 -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철학의 정원 12
심혜련 지음 / 그린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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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매체는 예전에는 매체 생산물의 단순한 소비자 또는 수용자에 머물렀던 사람들을 생산자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1960년대에 리처드 로티Richard Rotty가 ‘언어적 전회‘ linguistic turn를 이야기한 이래,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될 때마다 전회가 논의되곤 했다. 

매체적 전회‘medial turn, ‘이미지적 전회‘iconic turn 그리고 고간적 전회 spatial turn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전회란, 단순히 사유 내용의 전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사유방식의 전회까지도 포함한다. 

각각의 전회는 언어, 매체, 이미지 그리고 공간을 새롭게 중요한 철학적분석 대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사유 그 자체를 언어적, 매체적, 이미지적 그리고 공간적으로 할 것을 요구한다. 

매체적 전회도 마찬가지다. 매체적 전회의 관점에서 진행된 철학적 탐구는 1980년대 들어서 매체철학‘ 또는 매체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철학 영역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14쪽

매체철학은 매체와 사유의 관계, 그리고 특정 매체 시대에 그 매체를 사용하는 주체의 변화 등에 주목한다.

매체미학은 이런 문제들과 더불어 매체와 지각 작용의 상관관계, 그리고 매체로 인한 예술작품의 생산과 수용의 변화 등에 주목한다.

16쪽.


귄터 안더스Günther Anders는 많은 면에서 아도르노의 이론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도르노가 문화산업이라는 이름 아래 대중매체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안더스 역시 그러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도르노가 주로 대중음악과 영화를 중심으로 비판하고, 또 진정한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문화산업 전반을 ‘예술의 탈예술화‘ 현상으로 보았던 반면, 안더스의 주된 비판의 대상은 텔레비전이라는 점이다. 이는 그의 이론이 1950년대의 문화 현상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는 데서 기인한다. 

또한 아도르노가 ‘관리되는 사회‘ 안에서 비판적 기능을 할 수 있는 예술을 기대했기 때문에 문화산업을 비판했던 것과는 달리, 안더스는 텔레비전 이미지를 중심으로실재와 가상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텔레비전 시대를 제2의 산업혁명 시대라고 규정하고, 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상황을 ‘인간의 골동품성‘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이 텔레비전 시대에 어떻게 혼란을 겪게 되는지를 서술한다. 

안더스 이론의 핵심은 텔레비전이 만들어 내는 ‘팬텀‘Phantom이 결국 실재를 지배하게 된다는 데 있다. 그는 단지 텔레비전만을 중심으로 이러한 상황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기술그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19쪽

프리드리히 키틀러Fridrick Kittler는 20세기에 등장한 대표적인 아날로그 매체로 축음기, 영화 그리고 타자기를 꼽으면서, 축음기는 소리를, 영화는 이미지를 그리고 타자기는 문자를 기록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시대의 기록매체들이었다. 

그는 이들의 기록 방식을 분석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들 각각을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패러다임과 연결시킨다. 축음기는 실재계와, 영화는 상상계와 그리고 타자기는 상징계와 연결시켜서 아날로그 매체들이 어떻게 이러한 정신분석학적 패러다임을 대체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키틀러는 디지털 매체 시대에는 이러한 매체적 분리가 해체된다고 보았다. 딱히 키틀러의 이론을 비롯한 매체철학적 관점을 취하지 않더라도,
즉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디지털 매체의 특징은 여러 가지 분리된 매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복합매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날로그 매체가 대중매체라는 형태로 대중문화를 형성했다면, 디지털 매체는 개인용 컴퓨터와 태블릿PC 등 일인매체를 통해 이전과는 또 다른 개인매체 문화를 형성했다. 그런데 이 개인매체 문화는 동시에 대중문화이기도 하다. 

이러한 매체 상황 속에서 디지털 매체는 그것이 소리든, 이미지든 또는 문자이든 간에 디지트digit라는 비물질적인 정보의 형태로 모든 것들을 기록하고 전송한다. 

디지털 매체의 등장 이후 본격적인 매체철학이라는 분야가 등장했는데, 이는 디지털 매체가 우리의 일상생활과 문화예술 그리고 사유에 미친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21쪽

 디지털 매체 부분에서 가장 먼저 다루고자 하는 철학자는 장 보드리야르 Jean Baudrillard다. 보드리야르의 이론은 딱히 디지털 매체 시대로 한정할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매체이론은 아날로그 매체에서 디지털 매체 전반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의 이론은 어떤 측면에서는 아날로그 매체 시대에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실재와 가상의 문제를 분석했던 안더스의 이론과 같은 이론적 궤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보드리야르 또한 매체를 둘러싼 핵심 문제를 바로 실재와 가상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이 비판하고자 하는 핵심은 전혀 다르다. 안더스가 실재가 가상에 의해 지배받게 된 상황을 비판했다면,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실재라고믿었던 것의 가상성을 폭로했다. 가상은, 실재가 가상임을 감추기 위한 고도의 전략으로서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보드리야르가 새롭게 제시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과 하이퍼리얼Hyperreal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그가 이야기하는 실재의 가상성이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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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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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예전에 누리던 특별한 성소聖所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성소 지위의 박탈은 분명 노스탤지어의 시선으로 보자면 일종의 타락 현상으로보인다. 이슬만 먹고사는 듯 보였던 대학 안의 학자가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대학이 더 이상 사회의 특별구역도 아니고 학자가 대학이라는 기업화된 조직에 고용된 임금노동자의처지에 가까워지면서 얻게 된 가능성도 있다. 

이제 학자들은 성소가 아니라 세속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존재로서 자기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카데미라는 성소 속에서 보호받던 과거의 학자들은 갖지 못했던 보편적 삶에 대한 감수성은 그래서 중요하다.

사회학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때 존재 이유가 있다. 만약 사회학이 어떤 한 개인의 삶도 설명할 수 없다면, 혹은 그 연구대상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완벽하게 유리되어 있다면, 사회학은 학자라는 전문가 집단의 호사스러운 말잔치가 만들어 낸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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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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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고 악의 없는 상식적 희망도 악마적 결론을 낳을 수 있다. 개인은 소박한 꿈을 따를 뿐이지만, 부자 되기가 유일한 상식이 되는 순간 몰상식이 시작된다.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겠다고 부동산 투기에 나서고, 이과생들이 기초과학을 멀리하고 돈벌이가 된다는 이유로 모두가 의사만 되려 하고, 모든 의사 지망생이 성형외과 전문의를 선택하는 상황은 상식에서 분명 벗어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몰상식한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 각각이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각자 상식적인 판단을 한다. 단지 각자의 상식적인 판단이 모였을 때, 무시무시한 몰상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상식과 상식이 서로 견제할 때는 몰상식이 생겨나지 않는다. 하나의 상식만이 존재하는 사회가 비상식적인 사건을 낳을 뿐이다. (자폐적 사유가 자라는 온상)

<옥중수고>에서 그람시는 상식의 역설에 대해 성찰한다. 상식은 힘이 세다. 양적 다수에 근거한 보편성이기 때문이다. 상식을 잘 이용하는 사람은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기 쉽다. 자신의 생각을 시대의 상식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을 장악할 수 있다.

상식이 바람직함을 갖추면 양식이 된다. 하지만 상식은 양식보다 힘이 세다. (...)

상식에는 없는 올바름을 갖추고도, 양식은 상식과의 경쟁에서 대체 왜 늘 지고 마는 것일까? 이유는 상식과 양식의 말투 차이에 있다.

상식은 상냥하고 어루만져 주는 어투를 사용하지만, 양식은 공식적이고 엄격하고 훈계하는 말투를 사용한다. 상식이 나를 무조건 이해해 주는 연인 행세를 한다면, 양식은 냉정한 심사위원과도 같다.

27-29쪽.

진보주의가 가르치는 말투를 유지하는 한, 상식을 이용하되 상식의 잘못된 점은 문제 삼지 않는 대중문화와의 싸움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 상업주의와 보수주의자들이 대중의 상식을 기막히게 이용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면, 지식인과 진보주의는 상식을 대체할 양식을 훈계의 어투로 늘어놓는 능력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말투의 차이로 인한 설득력 때문에 올바른 내용일수록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지독한 역설이 벌어진다.

감옥에 갇힌 그람시는 지식인의 한계에 대해 생각한다. ˝대중적인 요소는 느낌인 반면 항상 앎이나 이해는 아니다. 이에 반해 지식인적 요소는 ‘앎‘이지만, 항상 이해는 아니며, 특히 느낌은 더더욱 아니다. …… 지식인의 오류는 이해나 심지어 느낌 및 열정 없이도 알수 있다고 믿는 데 있다. ..….…  즉 민중의 기본적 열정을 느끼고 이해함이 없이도 지식인일 수 있다고 믿는 데 있다.˝ 대중의 느낌을 장악하지 못하는 한 진보주의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도 대중을 얻지 못한다.

 대중의 상식과는 유리된 지식인들은 양식이라는 선한 삶이 냉철한 이성과 분석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여긴다. 그래서 양식을 전달하는 필독서의 어투는 냉정하고 분석적이며 중립적이지만 정서적이지는 않다.

˝우익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만 인간에게 말하고 있고, 좌파는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사물˝에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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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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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 취급을 받는 대학 울타리의 보호 속에서 학자가 특별하고 예외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1퍼센트에 속하는 특별한 사람과 그에 속하지 못하는 99퍼센트의 평범한 삶으로 갈라지는 양극화라는 광풍으로부터 대학도 안전하지 않다. 

대학은예전에 누리던 특별한 성소聖所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성소 지위의 박탈은 분명 노스탤지어의 시선으로 보자면 일종의 타락 현상으로 보인다. 이슬만 먹고사는 듯 보였던 대학 안의 학자가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대학이 더 이상 사회의 ‘특별구역‘도 아니고 학자가 대학이라는 기업화된 조직에 고용된 ‘임금노동자‘의처지에 가까워지면서 얻게 된 가능성도 있다. 이제 학자들은 성소가 아니라 세속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존재로서 자기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카데미라는 성소 속에서 보호받던 과거의 학자들은 갖지 못했던 보편적 삶에 대한 감수성은 그래서 중요하다.

사회학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때 존재 이유가 있다. 만약 사회학이 어떤 한 개인의 삶도 설명할 수 없다면, 혹은 그 연구대상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완벽하게 유리되어 있다면, 사회학은 학자라는 전문가 집단의 호사스러운 말잔치가 만들어 낸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대학과 학자를 둘러싸고 있던 ‘특별보호명령‘이 해체되었을 때, 호사가들의 허망한 지식 견주기나 사회조사기법의 현란한 테크닉에 의해 살해당할 지경에 처한 사회학이라는 학문은 그 ‘마지막 비상구‘를 사회 속에 살고 있는 구체적인 시람들의 삶을 설명할 수있는 능력의 회복에서 찾을 수 있다.

본래 학자는 사유의 대리인이다. 직접저그로 사회에 유용한 그 어떤 것도 생산해 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학자의 존재가 무익하다고 판단되지 않는 이유는 사유의 기능이 학자라는 전문집단에게 위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유의 대리인으로 위임장을 받았기에, 학자의 전문성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희한한 조어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보편적 삶에 대한 성찰을 대리할 수 있는 능력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6,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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