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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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다.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p. 110



인생은 여행길이고 나그네길이고 소풍길이란 얘기들을 하지만, 나는 그러한 태도의 이면이 ‘기적으로서의 삶‘에 대한 회파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한쪽은 ‘기적으로서의 삶 life as a miracle‘이 있다면 다른 한쪽엔 ‘여행으로서의 삶 life as a tour‘이 있다.

누가 여행을 하는가? 자신의 삶을 기적으로 만들고 연출하기가 두려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의 기적과 남들의 기적을 ‘구경‘하러 다닌다. 그리고 그런 기적들 옆에서 사진을 찍은다. 남들의 기적이 자신에게 옮기를 바라는 듯이.

그들은 자기 자신이 ‘기적을 행하는 자 miracle-maker‘라는 걸 알지 못하거나 부인하는 건 아닐까?

˝평생 동안 단 한 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은 채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러시아 작가 다닐 하름스의 단편 <노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기적을 행하는 자‘의 라캉적 명칭은 ‘주인‘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며 나는 내가 말하는 바다.˝ 여기서 기적이란 내가 나인 것이다.

왜냐하면, ˝상징적인 동일시와 상상적인 동일시는 불가능하며 그것은 반드시 어떤 잔여물을 남기기 때문이다.˝ 지적,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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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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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건 교양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그 책의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종종 그 책의 ‘상황‘, 즉 그 책이 다른 책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의 내용과 그 책이 처한 상황의 이러한 구분은 중요하다.

사실 나의 지적 도서관은 다른 모든 도서관이 그렇듯이 여러 구멍과 빈자리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사실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32쪽

어떤 책은 우리 인식의 장으로 들어오는 즉시 낯선 책이 아니게 되며, 그 책의 내용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해도 그 책을 꿈꾸거나 그것에 대한 토론을 하는 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호기심과 교양을 갖춘 사람은 책을 펼쳐보기 전에, 책의 제목이나 표지를 한 번 흘깃 보는 것만으로도 일련의 이미지와 인상들을 떠올리게 되며, 이 이미지와 인상들은 일반 교양이 책들 전체에 부여하는 표상의 도움을 받아 곧 최초의 견해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책을 그런 식으로 극히 일과적으로 만났을 뿐 영원히 그 책을 펼쳐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비독서자에게 그 만남은 진정으로 그 책을 자기 것으로 만다는 단초가 될 수 있으며, 그겋게 볼 때 처음 만나는 순간 곧바로 낯선 책이라는 지위를 잃게 되지 않는 책은 없을 것이라 할 수 있다.

33쪽.

무질의 사서가 택한 비독서의 특징은 그의 태도가 수동적인 게 아니라 적극적이라는 점에 있다. 교양을 쌓은 많은 이들이 비독서자라면, 역으로 말해 많은 비독서자들이 교양이라면, 그것은 곧 ‘비독서가 독서의 부재가 아님‘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책들 속에 침몰당하지 않기 위해 그 책들과 체계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하나의 진정한 활동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옹호 받아야 할 뿐 아니라, 나아가 교육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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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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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의 사생활에서 돈과 섹스의 영역을 제외하고 독서의 영역보다 더 확실한 정보를 얻기 힘든 영역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따금 우리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중요하게 꼽는 어떤 책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인정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워하고 있다.

책을 대충 뒤적거렸거나, 다른 사람들이 어떤 책에 대해 하는 얘기를 들었거나, 읽었지만 잊어버린 경우 역시, 정도는 달라도 크게 보아 비독서의 범주에 속한다.

나는 반드시 어떤 책을 읽어보아야만 그 책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러므로 나로서는 내가 접하는 책들에 대해 비록 내가 그것들을 잘 알지 못하거나 얘기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 책들에 대한 나의 견해를 제시하지 못할 어떤 이유도 없다.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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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피스토펠레스 - 악의 역사 4, 근대세계의 악마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영범 옮김 / 르네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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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을 통해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가 갈라지면서 분열의 과정이 시작되지만, 원래 프로테스탄티즘은 악마론에 관한 한 가톨릭의 전통을 따라왔기 때문에, 이 개념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것은 17세기 말에야 겨우 가시화된다. 

그 당시에, 마녀광란이 불신을 받게 되자 악마의 개념도 함께 불신을 받게 되었고, 18세기 계몽주의에 나타난 합리론적인 철학들은 기독교 전통의 인식론적인 토대를 침식해 들어갔고 더 나아가 악마론도 약화시켰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대부분의 교육받은 사람들(기독교인들을 포함해서)은 악마의 개념을 폐기할 태세였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강력하고 양의적인상징으로서 악마가 되살아났다. 낭만주의 시대의 악마는 독재에 대항하는 고귀한 저항으로 인격화되거나 적어도 자유와 자기애(自己愛)라는 다소 모호한 전형의 역할을 하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악마는 인간의 타락과 어리석음에 대한 냉소적인 은유로, 문학, 그리고 음악에서 상당히 대중적인 상징이 되었다.

20세기의 대량 학살과 전쟁은 근본적인 악에 대해 진지한 철학적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고, 악마는 다시 한번 근대 신학이 다루는 진지한 주제가 된다.

8쪽.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에서처럼 그렇게 악의 그림자가 극악무도하게 집단화되면서, 개인적인 김정에 연연하는 낭만주의자들은 무의미한 존재로 그 빛이 바래진다. 책임감이라는 것이 관료화되면서 근대 사회에서 엄청나게 집단화된 세력들에게 안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악이란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게 되어버렸다. 

서류가 작성되면 유태인들은 신속하게 가스실로 보내질 수 있다. 익명으로 좌표가 설정된 지도가 만들어지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폭탄병들은 학교나 병원을 폭파할 수 있다. 이런 세계에서라면, 사자처럼 세상을 주유(周遊)하는 것보다는 책상 뒤에 앉아 있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악마는 분명히 알게 된다.

 20세기 중, 후반에 기독교적인 전통은 점점 쇠퇴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개종 이래 최초로, 서양 문명의 본토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장 기본적인 종교적인 교리를 거의 전적으로 무시하면서 성장해왔다. 

이러한 공백 상태를 어느 정도는 마르크스주의(그 자체가 다양한 종교인)나 자유주의적 진보주의가 메워왔는데, 이 두 가지 사상은 모두 인간이 진보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비록 진보론자들은 대체로 예정된 진보의 목표를 정의하지 않은 채 남겨두지만,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근거도 없는 믿음과 더불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파우스트적인 신념은 선과 악에 대한 직관을 어떠한 초월적인 실재에 근거하지도 않고 물질적, 기계적인 용어로 설명되는 심리적인 현상으로 환원해 버렸다. 그 결과, 모호하지만, 도덕적인 상대주의가 팽배하게 된다.

406쪽

대중적인 상대주의는 절대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명제를 제외하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한다. ‘초월적인 가치‘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개인이나 사회적인 선호도에 따라 전적으로 상대적이다. 

진리란 역시 선호도에 의존한다. 지적인 유행들이 차례대로 끊임없이 서양 지성계의 관심을 끌어왔는데, 그 이유는 어떤 사상의 유효성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진리에 얼마나 근사하는가보다는 그 사상의 ‘참신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말이 다가옴에 따라,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 무시된 채, 두 가지 세계관이 지배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상대주의, 허무주의 그리고 문화적인 절망이,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진보에 대한 희망. 

이 두가지 부류의 사상은 절대적으로 모순이 된다. 왜냐하면, 목적이 없는 진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보스턴으로 정해졌다면, 보스턴을 향하는 한걸음 한걸음은 아주 작은 전진을 의미한다. 그런데 목적지가 없다면, 1만 마일로 날아가는 제트기를 타고 있어도 조금도 전진한 것이 못 된다. 

어떠한 초월적인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목적은 상대적이고 자의적이며, 변화하고 있으므로, 전반적인 진보라는 사상은 허튼 소리가 될 뿐이다. 우리가 상대주의와 진보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어쩌면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거짓에 집착하게 된다.

4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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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문화 - 인간의 몸을 해석하는 다양한 문화 담론들
홍덕선.박규현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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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트루비우스의 비례론에 대한 도해> 

신체의 비례를 나타내는 이 도해는 르네상스 시기 신체의 이상형인 ‘균형잡힌 인간‘ 이라는 관념을 구현하고 있다. 조화로운 신체상의 척도는 운동과 정지, 행위와 사색 그리고 좌우의 긴장된 다리와 이완된 다리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성취되었다. 상반되면서도 서로를 보완해주는 이 모든 역학이야말로 인물상에 한층 광범위한 철학과 문화적성향을 집약하는 내적 균형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9쪽

 <그랑 오달리스크> 

이슬람 왕실의 어자들이 거처하는 곳을 재현한 이 그림은 사실상 서구인들의 환상을 투사한 것이다. 동양 여성에 대한 서구인의 성적 에로티시즘을 앵그르는 그대로 반영한다. 

사실성을 벗어나 신체를 왜곡시켰던 이유도 이러한 서구인의 오리엔탈리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의 이면에는 여성의 몸을 에로티시즘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남성적 사고도 반영되어 있다. 여성과 남성의 몸이 각각 대변하는 이미지가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앵그르의 〈그랑 오달리스크〉(1814), 루브르 박물관, 파리

10쪽

 1808년 5월 3일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은 그 전날인 5월 2일 나폴레옹 군대에 저항한 민중의 동기에 대해 프랑스 군대가 그 주동자를 처형하는 장면이다. 흥미로운 것은 처형을 집행하는 프랑스 군인들의 모습에는 얼굴이 그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얼굴은 몸 전체를 대신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림에는 다만 기계처럼 가지런히 금속성을 드러는 총구들만 강조되어 있을 뿐, 군인들의 인간적인 체취는 흔적이 없다. 폭력에 젖어 있는 주체들의 비인간화와 기계화로 인간의 몸이 소멸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 (1814), 프라도 미술관

11쪽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

 고갱은 인간본연의 원시적 순수성을 주로 여성의 육체를 통해 표현한다. 그는 유럽이 코르셋과 거들 덕분에 여성을 인위적인 존재로 만들고, 여성을 예민한 연약성과 육체적 열등성이라는 특징 속에 가두려하며, 보호하는 체하며 성장의 가능성을 모두 박탈한다고 보았다. 

반면, 그를 매혹시켰던 타이티 여인의 관능은 동양의 신비한 베일에 싸인 숨겨진 관능이 아닌 자연 속에 혼융되어 스스로의 알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관능이다.

고갱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1897), 보스턴 미술관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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