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 대중 혐오, 법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피에르 소베트르 지음, 정기헌 옮김, 장석준 해제 / 원더박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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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공저자 중 한 명인 피에르 다르도는 크리스티앙 라발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공통된 주제를 연구하는 철학자이자 지식인입니다. 그는 1988년 파리 낭테르 대학에서 자크 비데의 지도 하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특히 다르도는 마르크스 연구에 대한 평생의 헌신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음 크리스티앙 라발은 파리 낭테르 대학의 철학 및 사회학 연구자로 공리주의의 역사과 고전 사회학에서의 역사 및 교육 시스템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라발은 다르도와 함께,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전략과 그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지속하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피에르 소베트르는 파리 정치 대학에서 정치학, 사회학, 철학 박사를 취득하고 현재 파리 낭테르 대학의 소이파폴 연구소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 게강은 프랑스 국립 예술 공예원의 철학 교수이자, 신자유주의적 주체화 방식과 피에르 부르디외 및 정의 사회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학자로 그녀 역시, 현재 파리 낭테르 대학의 소피아폴 연구소의 일원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집필에 참여한 이 책은, 원제 "Le Choix De La Guerre Civile"로 지난 2021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는 이 논저를 "신자유주의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이자, 그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라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미 신자유주의화가 완료된 미국과 영국을 비롯, 유럽 일부 국가들과 더불어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비판은 물론 신자유주의 자체를 토론의 대상으로 입에 담는 것조차, 경우에 따라 상대로부터 상당히 자극적인 언설까지, 감내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를 8장 이후에 드러나는 '신자유주의적 교조화'에 단편적으로 연결시킬 필요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동적 우파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시장 자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행 부분에서 여실히 결탁했던 점을 인지하고 받아들인다면 이런 교조화의 개연성이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47년의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의 출범과 그 이전의 '이데올로기 투사인 하이에크'에 의해 비로소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이 글의 8장 이후의 논증과 개인적으로는 그동안의 독서를 통해 알게 되었던 핵심이기도 한, 과거 전통적 자유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자 가치임을 명백히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자유주의의 계승자이면서 권위주의와 사회주의에 맞서 싸웠고, 이를 좀 더 과장하여 소위 "문명의 수호자"로 스스로를 각색하기도 합니다. 8장에서 공저자들에 의해 분석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자유란, "자연법, 인민주권, 인권, 의회정치, 인민의 자결권"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기 하이에크와 같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단순히 사회주의 영역의 확장에 맞서, 서구 문명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희생적 투사로서 사회를 개변시키기 위한 숭고한 목적이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대부분의 신자유주의자들은 '개인 선택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고 그것을 위한 헌법의 개조, 더 나아가 1970년대 칠레와 같은 국가에서는 민주주의 정부를 붕괴시키는 불법적인 군사 쿠데타까지 지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미제스와 하이에크 뿐만 아니라 기존의 엘리트 지배 세력 역시, 대중이 주역이 된 민주주의에 대해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많은 시민들은 신자유주의가 "그럴 리가 없다"고 항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이 글의 2장에서, 대중 민주주의에 대한 엘리트 세력의 공포, 그 이전의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귀스타브 르 봉의 가히 적대적인 논저들은 파시즘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자들에게도 큰 사상적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세금 경감과 사회적 비용 절감이라는 미명하에, 정부의 사회적 복지 철폐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많은 시민들이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사회 부조가 붕괴된 시점에 '민간 보험'을 통해 스스로 자구책을 찾는 것을 '신자유주의의 유일한 성과'라고 비꼬는 저자들의 언급은 그만큼 민주주의의 축소로 읽힙니다. 하이에크는 이미 '사회적 정의'따위는 필요없다고 강조한 바가 있는데요. 일전에 낸시 프레이저에 의해 증명된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가 추동했던 비정상적인 능력주의도 마땅히 초래될 수밖에 없던 '경제적 불평등'을 개인적 차원에서 겸허히 받아들이고, 심지어 직업 선택의 이익으로 작용하는 유용한 사회적 정보들이 보다 돈이 많은 계층에게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목놓아 외쳤던 '유토피아'에 대한 언설이 얼마나 하등 쓸모가 없었는지 이 글의 여러 논증들에서도 분명히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대니 로드릭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따른 민주주의의 축소를 예견한 바가 있습니다. 로버트 커트너 역시 이에 동조하는 의견을 거듭 개진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예 노골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기만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 자유 지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가 시장을 통제하는 것에 아예 기를 쓰고 반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3장에서부터 이어지는 진술이기도 한, "신자유주의가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의 통제를 격멸하기 위해, 심지어 권위주의적인 폭력"까지 서슴치 않았던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특히 칠레의 사례는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당시 CIA의 불법적인 작전은 물론 제임스 뷰캐넌으로 이어지는 엘리트 지식인들의 개입, 피노체트에 의한 신자유주의화의 완료 이후, 이에 대한 언급을 기피했던 하이에크의 일화는 대체로 이들 거의 모두가 반민주주의에 가깝다는 결론에 저는 이르렀는데요. 여기에 "교육 받은 노동자들의 출현"을 반기지 않았던 이들의 입장을 고려해 본다면, 결국 신자유주의자들이 바라는 정치 형태는 시민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소수 권력자들의 임명에 국한된 제한적인 민주주의이거나, 극단적으로 소수의 엘리트 지배 세력이 정치를 이끄는 철저하게 융합된 과두제를 추종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후반부에서 더 보충되기에 이릅니다.

여러분 모두 민주주의 정치에서 헌법의 기능과 그 의미가 얼마나 막중한지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는 헌법의 정당성을 통해, 각 사회에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은근히 바라는 바대로, 극단적인 권위주의 통치를 재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고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의 통제는 견실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헌법을 통해 작용하는 만큼 헌법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고치는 것이 그들의 중대한 목표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크나큰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인물이 바로 카를 슈미트입니다. 마크 릴라에 의하면 슈미트는 죽을 때까지, 나치에 부역한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은 거의 반동적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바이마르 시대의 자유주의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었고, 소위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권력과 같이, 헌법을 초월한 계엄이라는 비상식적인 '예외 상태'를 인정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자를 추종하고 자신의 사상적 단초를 거듭 발견했던 이가 바로 하이에크였습니다.

이처럼 헌법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이 추종하는 '경제적 헌법론'은 시장을 위해, 헌법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고 받아들인 것인데요. 하이에크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이 강력하게 추종한 개념이 바로 카를 슈미트의 '결단주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결단주의와 일반적인 헌법은 매우 상충되는 측면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자들은 외형적으로는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인정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명백히 개조된 민주주의'입니다. 시장이 알아서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다는 관념 체계를 여기에서 다시금 비판적으로 분석해 볼 수도 있지만 이러한 문제는 이미 과거 여러 사례를 통해 허구로 밝혀진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이는 여전히 확실하고 견고한 이들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8장 이후 드러나는 신자유주의의 비열하고 노골적인 사회적 작업들의 근간이 바로 이러한 주장들에 우선적으로 결부되어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하이에크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사법(私法)의 개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저자들은 이에 대한 분석으로 "사법(상법과 형법을 포함한)의 규칙들이 헌법의 위치로 격상되는 것"을 골자로 한 소위 '시장의 입헌주의'라는 용어로 보충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뒤이어 이어지는 하이에크식으로 해석해 본다면 여기에 민주주의를 대입해, "민주주의의 남용을 방지하는 헌법을 고안"하는 일종의 사법의 형성 혹은 확대를 추인하는 동시에 이 자체는 신자유주의에 있어 중요하고도 새로운 헌법적 맥락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전통적으로 도덕적 가치나 도덕주의에 회의를 갖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신보수주의자들과 손을 맞잡은 것은 단순히 원칙과 이에 대한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하더라도 기술적으로는 목적을 위해 무엇이든 이용하는 이들의 저열한 습성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헌법이 무력화되었던 파시즘을 다수의 신자유주의자들이 경멸했으면서도 외부 정치에 대한 쿠데타는 물론, 권위주의적 방식의 폭력적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기의 공저자들은 파시즘과 신자유주의를 명백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정치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정당적 절차와 토론 없이 막후에서 시민의 동의는 배제하고 '예외 상태'로 해결할 수 있다는 그런 관념 자체가 얼마나 헌법을 포함한 민주주의 자체에 해악이 되는지에 대해 다시금 이 자리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더욱이 파시즘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인식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권위주의 방식의 국가 권력 동원을 용인하고, 심지어 하이에크는 과거 파시즘과 나치즘의 부상이 사회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바로 그 경향에서 비롯된 결과였다고 역설한 측면은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넘어 국가 권력을 대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이중성을 드러낸다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다시금 강조하지만 민주주의가 시민 다수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정치 체제인 만큼, 반대로 신자유주의가 '공익'과 '공리주의' 내지는 '시민의 권리'에 웃는 외양을 한 채, 속으로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시민들 모두는 이를 유념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본격적으로 논증이 이뤄지는 글 중간에, "신자유주의가 진행되었거나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복지를 공격하면서도 이 사회적 부조를 완벽하게 제거할 수는 없다"는 논평 내지는 분석은 실로 저에게 처참한 감상을 느끼게 했는데요. 이는 그야말로 현재의 민주주의가 제한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동시에, 신자유주의 자체를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것만이 정치의 건전성을 답보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제가 최근에 일독한 앤드루 갬블의 여러 제안들과 일맥상통한 부분이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역사학자인 딘 베이커가 과거 신자유주의적 흐름 속에, 미국의 리버럴 정치인들이 신자유주의에 투신한 사례를 강도 높게 비판했듯이, 진보 좌파의 기형적인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전반적인 이들의 궤멸은 신자유주의의 오판을 최종적으로 막아내지 못한 근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은 이 책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는데요. 진보주의 세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선명성을 유지하고 이를 통해 권력 바깥의 시민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야 했지만 현실은 68혁명 이후, 급격하게 붕괴되어 왔습니다. 과거 68혁명 자체에 지독한 거부감을 갖고 있던 극단적 보수 세력과 신자유주의의 결탁은 심하게 말하면 진보 세력의 목숨 줄을 끊어 놓은 결과로 이어졌고, 심지어 독일을 비롯한 사회 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불신과 만연된 억측의 상황을 초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일관된 사실과 증거가 명백함에도 소수의 부유층과 엘리트 지배 세력에 봉사한 신자유주의를 여전히 현대적 금융 자본주의를 선도한 무슨 경제적 사조 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시민들이 적지 않은 상황은 흡사 아이러니하다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서 분명한 것은 현재의 신자유주의자들이 허버트 스펜서를 비롯한 사회진화론과 은연중 인종주의를 신봉하고, 서구 유럽에 의한 전세계 문명의 선도와 과거 귀스타브 르 봉의 유산이기도 했던 대중 민주주의의 혐오에 기반한, 거의 체제 반동적인 성격의 세력이라 여겨집니다. 더욱이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운명이 해가 갈수록 불확실하다는 부분, 그리고 2008년 이후 신자유주의가 전혀 수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 시민이 포함된 일반적인 미래는 다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몇 세대 동안은 진정 암울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새로운 자유주의가 구축한 세계가 얼마나 바람직하지 않은지 이제부터라도 시민 모두가 고찰해 봐야 되지 않을까, 글 말미에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책에서 언급된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의 멤버들이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대해 보인 호의와 관심은 이들이 기반이 된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민주주의를 증오하는지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저 개인적으로는 이 논저를 통해, 카를 슈미트의 '정치적 낭만주의'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결국 슈미트는 전통적 자유주의를 혐오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 경멸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민주주의가 자유 시장에 가하는 ‘경제의 정치화‘ 위협이다.

헌편, 신자유주의적 폭력은 국가의 외부자로 지목된 공동체에 대항해 정동을 동원할지언정 그들에게 파시스트적 폭력을 가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중 모든 신자유주의자가 첫째로 꼽는 것은 개인-소비자의 주권 보장을 전제로 한 경쟁이다.

군사 정권의 권력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스만은 카를 슈미트가 고안한 ‘제헌 권력(pouvoir constituant)‘ 개념을 동원했다.

몽펠르랭 협회 회원들이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보인 호의는, 평등과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너무도 잘 드러내는 예시다.

그런데 이를 ‘법 앞의 평등‘으로 재해석하는 걸 자발적으로 소득과 재산의 분배를 바로잡으려는 모든 시도를 저지하는 데 목적이 있다.

신자유주의를 이해하려면, 산업혁명이 낳은 엄청난 불평등과 그로 인한 여러 형태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보험을 비롯한 재분배 메커니즘이 도입되던 시기를 살펴야 한다.

이들의 도덕적 이상에 따르면, 존경을 받아야 할 이들은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가족과 사업의 미래를 살피는 신중한 사람, 좋은 가장과 공급자이다.

대처는 일찍이 가부장적 가족에서부터 국가에 이르는, 전통과 관련된 모든 보수주의적 주제들을 시장의 회귀와 정치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역사적으로 독특한 위치를 점했다.

서구의 우월함에 대한 믿음과 위협에 처한 정체성에 대한 편집증적 방어를 결합한 이 새로운 ‘자유‘정신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우파와 반동적 우파가 공공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 행위를 정당화하는 자양분이 되어주고 있다.

좌파의 변신은 신자유주의의 지배를 제한하거나 분쇄할 수 있는 모든 정치적 대안을 향한 길을 장기적으로 봉쇄해버렸다.

신자유주의 국가는 사회복지를 축소함으로써, 국민을 불안정한 상태로 몰아넣는 동시에 국민을 계속해서 보호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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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묘가 일부 계층에게 있어 큰 반감을 일으키는 모양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과거 일본 메이지 시대의 정한론(征韓論)은 그 시대의 일본 지식인들과 소위 천황주의자들을 대변했던 사상입니다. 저 천황이라는 단어는 입에 담기에도 역겨운 것이지만 글을 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에 의해 강제 개항을 당했던 일본은 꽤나 짧은 기간에 근대화를 이루게 됩니다. 아마도 그 자신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일본은 이웃 나라인 조선을 그토록이나 경멸하고 멸시하게 됩니다. 이는 중국 중심으로 돌아가던 동아시아 권력 지형을 거두고 자신들이 이제 아시아로 나아가야 한다고 저들은 조금씩 믿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서구 유럽의 제국주의가 전세계 바다와 땅을 유린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제국주의를 견인했던 복합적인 측면의 근대화는 반대로 아시아인들에게는 크나큰 역사적 재앙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이웃인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서 말이죠. 당시 일본에게는 대만의 점유와 더불어, 조선 반도를 침탈하는 것이 저들 말로는 자신들의 이익에 무조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조선에 정치적으로 견고한 독립국이 유지되는 것은 전혀 바라지 않는 일이었죠. 더욱이 자신들의 왕을 소위 천황으로 받들면서 주변국의 전제 왕정은 사실상 일본의 지배에 걸림돌로 취급했습니다. 여기서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조슈 번의 대두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요시다 쇼인을 포함해, 그토록 정한론을 꺼내든 저들의 요구는 결국 우리에겐 비극적 현실이 되었습니다.


제가 굳이 정한론을 꺼내 들게 된 것은 우리 나라 저변에 깔려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것들이 실상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일본이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조선을 먹어야겠다고 한 것인데, 그저 쌀 수탈을 비롯한 자원 수탈과 인력 송출을 위해 알량한 사회 기반 시설을 깔아 놓은 것이 과연 순수하게 조선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이 부분과 관련해 역사학자 알렉시스 더든은 과거 일본의 조선 지배를 "계몽적 통치"라는 말로 비꼬기까지 했습니다. 더욱이 이점은 일전에 영국이 인도에 사회 기반 시설을 어느 정도 구축한 사례와 더불어 이해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지난 조선이 1860년 이후의 그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써버린 것은 당시 정치 권력의 무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제 왕권이 근본적으로 유지하고자 했던 점은 소수의 지배 계층이 향유하고 있던 권력의 독점이기도 했지요. 고종 시대를 뭔가 재조명하고 싶어했던 이태진 선생의 취지는 어느 정도 존중합니다만 지난날 우리의 양반님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위해, 조선의 국왕과 체제 전반을 개혁하기 위한 진정한 시도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요. 주변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체 말입니다.


양날의 보도처럼 현재 우리 나라에서 쓰이고 있는 것이 '반일주의'입니다. 우선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기 이전에, 현재 일본 대형 서점들 곳곳에는 '혐한(嫌韓)'을 주제로 한 책들이 아주 미친 듯이 팔리고 있습니다. 일본 출판계에서는 이미 혐한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아주 명확히 알고 있는데요. 그래서 소위 우리나라의 대형 언론사 몇 곳도 일본에서 현지어 서비스를 하며, 혐한의 유사한 형태로 아주 기깔나게 팔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기서 자세한 내용은 따로 담지 않겠습니다. 이 반일과 관련해 우리가 인지해야 되는 점은 과거 역사가 결코 청산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와 일본 양국에서 말입니다. 1945년 이후, 맥아더가 당시 USS 미주리호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으면서 천황에 대한 일종의 양해 혹은 양보를 일본 측에 하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노골적인 전쟁 책임을 천황에게 하지 않겠다, 뭐 이런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일본 천황제의 존속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것은 미국 측의 당면한 국익에 따라 당시 군부와 행정 권력이 서로 공감하고 동의했던 부분인데요. 냉엄하고 절차적인 국제적 전범 재판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이 비참한 전쟁이 여타 잡음과 갈등 없이 신속하게 끝나야만 하는 정치적 요구가 있었던 것이죠. 미국과 일본에서 말입니다. 


결국 일본 천황은 전쟁 범죄에 대해 면죄를 미국에 의해 확약받았고, 일본은 이러한 맥락의 왜곡된 전후 과정을 경험하고 나서, 추후에 이것이 자신들의 국가적 가치관과 역사를 보는 관점에 심각한 문제를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뭐 그것은 아주 '자의'에 가까운 의도로 말입니다. 특히 역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 있는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는 주변국들에 대해선 오로지 국익을 방패 삼기도 합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맞은 자신들도 알고 보면 전쟁의 피해자라면서 말입니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당시 일본 지도층들은 아마 이런 말을 했다죠. "우리가 미국에게 진 것이지, 타이완과 조선, 중국에 진 것은 아니다." 제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자들은 정말 치를 떨 정도로 역겹고 감히 인두겁을 쓴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흡사 반일은 우리 나라에서 마법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요술봉과 같습니다. 일본에 대한 겸허한 역사적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는 일반 시민들의 요구를 '좌파'로 매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까도 언급했다시피 일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친일 청산 문제에 있어선 진정한 반성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반민 특위는 차치하더라도 일본의 뿌리 깊은 잔재가 여전히 사회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곰곰히 생각해 보면, 불행한 우리 민족의 운명과 졸속으로 처리된 일본의 전쟁 책임,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비판에 대한 목소리를 좌파로 몰고 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사회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저의 마음을 너무나 저리게 만듭니다. 그런 연유에서 황현필 선생도 이와 같은 심정을 느끼셨을 것 같은데요. 과거 일본 제국이 이 땅에 저지른 수많은 만행과 그런 절망의 시대에서 자신의 알량한 이익을 살뜰히 챙기면서, 피땀 흘려 목숨을 바쳐 가며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운 선열들을 욕보이는 것은 물론 "나도 일본이 이렇게 일찍 패망할 지 몰랐단 말이다!"라는 지독한 변명으로 일관했던 자들의 민낯은 참으로 3월의 어느 날을, 처참한 기분에 빠지게 만듭니다. 최소한의 금도라는 것도 없는 자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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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3-06 1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터님 책 외에 이런 글도 무척 잘 쓰시는 것 같아요. 밀린 글을 다 확인 못해서 이제서야 찾아 읽었습니다. 신문 사설 읽은 기분입니다^^ 어제 친구랑 파묘를 보고 왔어요. 너튜브에서 황현필 쌤 구독하고 있는데 등장인물들이 거의 다 독립운동가들 이름을 가지고 있다해서 궁금했거든요.

친일청산을 못한것이 두고두고 나라에 큰 걸림돌이네요.
그것 때문에 불필요한 이념 전쟁이 끝도없이 이어져 뉴스만 보면 답답합니다. 건국전쟁같은 영화도 분노를 일으키고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베터라이프 2024-03-06 23:26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미미님 ^^

너무 과찬을 해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ㅠㅠ 사실 이 글을 쓴 계기가 된 것이 미미님도 말씀해주셨지만 황현필 선생과 관련된 터무니 없는 비난 때문이었습니다. 영화 파묘도 일부 사람들에게 가당치 않은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고요.

일전에 슬라보예 지젝이 그랬던가요. 하나의 사실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비틀어서 아예 다른 측면의 주장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하고 나서 새롭게 발견된 요즘의 신기한 현상이라고 말이죠.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
 
투쟁 영역의 확장 블루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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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셸 우엘벡은 1956년에 스키 강사이자 산악 가이드인 부친과 의사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곳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프랑스 레위니옹인 코르시카 섬입니다. 여기서 그를 대표하게 된 우엘벡이라는 필명은 자신의 할머니가 결혼 전 쓰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작품들 가운데 필히 관통하는 주제는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사랑을 위한 경쟁이 어떤 식으로 개인들을 더 인간의 근본적인 측면이기도 사랑과 멀어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천착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투쟁 영역의 확장'이 이런 그의 작품 세계에 있어 두드러진 주제 의식을 보이고 있는데요. 이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는 그간의 세계에 있어 미덕으로 이어져 내려온 인간 본연의 온 관계와 인간성 자체를 붕괴시켜 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인식에서 가장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작가가 아마도 여기 미셸 우엘벡이 아닐까 싶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그의 작품 세계 이외에 사회정치적인 측면에서 민주주의 체제의 버팀목이라 볼 수 있는 사법에서 판사들을 국민의 투표로 뽑아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전반적으로 엘리트 지배 체제와 기득권 정치를 비판하고 있지만 이러한 아이디어는 꽤 의외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Extension du domaine de la lutte"로 지난 199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3년 1월에 초도 번역되었고, 제가 읽은 이번 판은 열린책들의 '블루 컬렉션'으로 2017년에 재번역이 이뤄졌습니다. 현재 이 번역판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현대 산업의 맹아라고 볼 수 있는 정보 기술을 전공한 이 작품의 주인공 '나'는 우엘벡의 여느 남자 주인공 인물 조성 답게 시니컬하고 매사 의욕을 잃은 사람입니다. 저자는 다른 화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서술하고 있듯이 주인공의 내면은 꽤나 독특한 편입니다. 직접 최신의 기법을 다루면서도 기술 만능에 빠져 있지 않은, 그러면서 동물을 소재로 독특한 소설을 쓰고 있는 취미를 갖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대목은 초반부에 주인공의 입을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의미를 잃어가는 시대'에 그나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끊임없는 독서 뿐이라는 언급은 제게도 뭔가 마음의 공명이 되었습니다. 이미 주인공은 인간 관계 그리고 사회 전반에 대해 극심한 회의주의를 갖고 있는데요. 자신을 포함한 대다수의 남자들에게 그럴듯한 삶이 주어지지 않기에 이런 세상에서 독서가 그나마 의미가 될 수 있겠다는 체념 아닌 체념을 하고 있는 것이겠죠. 이러한 주인공의 우울한 회색빛 사고는 이어지는 2부에서 사랑이 인간의 근원적인 부분이라고 거듭 강조하면서도 섹스를 포함한 애정과 감정이라는 양가적인 정보의 교류와 이에 제외되어 있는 다른 남성들을 에둘러 언급하는 듯 보입니다. 특히 십대를 지나 젊음의 상징처럼 열정에 빠지게 되는 섹스 자체를 좀 더 노골적으로 해석한다면 '남성이 경험해야 할 권리'로도 읽히게 됩니다. 이는 경우에 따라 꽤나 지나치게 보이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엘벡이 섹스에 대한 지나친 의미 부여와 적나라한 묘사를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여러 상징들과 복잡한 복선의 의미를 고려해 봤을 때, 엘리엇 로저와 같은 소위 인셀 Incel의 아류와 같은 것으로 그의 이 작품을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인 '그'는 일 때문에 부득이하게 출장으로 방문한 루앙에 대해 무질서한 도시 전반을 언급하며 저렇게 사람들이 모였던 옛 광장에서 성녀 잔다르크를 화형에 처하게 했던 뼈아픈 역사적 사실을 끄집어 냅니다. 지난날 루앙의 이 비극적 연대기는 바로 그런 도시에 삶을 뿌리내리고 있는 어쩌면 사람들에 대한 비꼼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요. 또한 혁명으로 왕정을 무너뜨리고 루소의 공화주의적 맥락을 현실로 옮긴 지난 역사에서 마찬가지로 '무정부주의'를 언급하는 우엘벡의 상당한 거친 도발은 마치 작금의 민주주의가 '시장 자유'의 손아귀에 있는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더욱이 급격한 서사와 전개에 따라 막다른 길로 치닫는 3부에서, 오로지 경제적인 이유로 다리를 다친 노인을 진정제로 안락사에 이르게 하는 '의사들'의 존재와 오로지 돈만 밝히는 듯한 치과 의사들의 행태 또한 현실에서 드러나는 신자유주의의 그림자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간접적으로 사회가 이렇게 비굴해지는데도 어떠한 문제 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향해 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충격과 다름없는 굴절된 사회의 단면을 자신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가톨릭 신부에게 '고해 성사'와 같은 진배없는 고백으로 접하는 부분은 프랑스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 점을 달리 말하자면 현시대의 사회가 맘편히 대화도 나눌 수 없고, 과거에 숱하게 기록되었던 애정의 기억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소실된 것과 유사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작가인 우엘벡이 주인공의 회의주의적인 시각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거의 명백합니다. 자유 시장주의, 즉 신자유주의가 앞서 잠시 언급한 대로 인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사랑마저도 쟁탈의 방식인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내몰았다는 점입니다. 남자가 여자의 구애를 얻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돈과 지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과 이처럼 물질적 허영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실질적 조건 자체가 과거의 연애 담론과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소위 현대의 사랑일겁니다. 이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도태된 평범한 남자들은 인간의 본질로써 작용하는 연애와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요. 전반적으로 이러한 원인과 그것의 책임이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 될 수 없다는 것이 우엘벡의 일관된 주장이기도 합니다. 만약 우엘벡의 서사대로 사랑이 예전 자유주의 시대의 낭만적인 소산이라면 지금과 같은 시장 자유의 시대에서는 그런 과거의 법칙과 여유를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러한 문제적 인식 하에 저자는 이 '완전 자유 섹스 체계'가 본질적으로 사랑이 가미된 인간의 관계를 '자유 시장주의'가 요구하는 물질적 조건과 인간성이 결여된 경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요. 이는 마찬가지로 체제 비판의 성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엘벡이 지난 언론 인터뷰에서 이슬람 교를 신랄하게 비난했던 것처럼 일견 스스로 오해를 사는 듯한 여성의 몸에 대한 정돈되지 않은 표현과 섹스를 남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점은 여전히 수용하기가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일반적인 남자들은 단순히 말하자면 여성의 몸에 관심이 많고 남녀 간의 육체적 관계에 대해 열망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아무리 앞선 인식을 기본 바탕으로 잡고 주인공을끊임없이 이해해보려고 해봐도 여전히 한계는 노출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후반부에 예견되는 몰그의 락을 위해, 동료인 라파엘 티스랑을 추한 외모와 공감할 수 없는 인물로 설정해, 비극적인 죽음으로 모는 장면은 아무리 봐도 섬뜩했는데요. 그의 죽음에 절반쯤 관여했다고 봐야 하는 극단적인 주인공의 행태와 그 상황 묘사는 계속 곱씹어 봐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는 사르트르의 언급대로 어떤 한 사람의 파멸을 누군가 직접적으로 겪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이 지극히 냉소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관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쳐도 스스로 공감할 능력을 상실한 소시오패스의 전형과 같은 모습과 언행을 수차례 보이고 있는 점은 그가 속한 사회에서 한발 물러서서 현실을 비웃고, 평범한 인간 관계조차 거듭 회피하고자 하는 그 자체로 굴절된 인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은 시대와 사회에서 평범한 인간이 때에 따라 마음의 병을 얻을 수밖에 없다는 비참한 분석과 더불어, 그러한 수많은 삶들의 비틀어지는 그 근본적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우엘벡은 특유의 시선으로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와 한국어 제목은 의미상 상당한 차이가 있기도 한 데요. 역자의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2부에 언급되는 "자유주의 경제는 투쟁 영역의 확장이다"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소 집중해서 읽지는 못했지만 우엘벡 특유의 귀납법 방식의 서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번역된 제목이 저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차츰 불가능해지고, 그런 만큼 인생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줄어 간다. 온갖 화려한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다. 21세기가 어떨지 뻔하다.

인간에게 사랑에 대한 욕망은 근원적인 것이다. 그 욕망은 놀랍도록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많은 잔뿌리들이 마음이라는 물질 속으로 파고든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그 존재론적인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힘의 속성들을 가져왔고, 또 지금도 가지고 있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는 분명히 섹스도 차별화의 또 다른 체계를 보여준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돈과는 전혀 무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또한 냉혹한 차별 체계인 것이다.

정신분석가들의 손에 맡겨진 여자는 결국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된다는 것을 나는 여러 차례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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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양장)
앤드루 갬블 지음, 박형신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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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갬블은 영국의 정치학자로 케임브리지에서 학사 과정을 마치고, 영국의 공립 연구 대학인 더럼 대학에서 정치 이론과 관련해 석사를, 이후 모교인 케임브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갬블은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이자 퀸즈 칼리지에서 연구 교수로 일했는데요. 그는 2003년에 자신의 논저인 "유럽과 미국 사이"가 그해 정치학 분야 최고의 책으로, W. J. M 매킨지 상을 수상하고, 2년 뒤인, 2005년에는 PSA로부터 평생 정치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이사야 벌린 상을 받습니다. 이런 갬블의 최근 주요 연구 주제는 자산 기반의 복지 제도와 국제 관계로서의 영미 관계입니다. 특히 그는 근래 경기 침체와 그에 따른 자본주의적 정치의 위기에도 큰 관심을 두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Can the Welfare State Survive?"로 지난 201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12월 번역되었습니다.

미국과 더불어 철저한 신자유주의 국가로 읽히는 영국에서 저자와 같은 강단 지식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꽤 흥미로운 부분인데요. 물론 저자인 갬블이 본래 정치학자이기 때문에 오늘날 전혀 퇴로가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의 일상적 폐해'에 양심 상 입을 닫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자본주의에 있어 오래된 해결책으로 이해되는 복지 혹은 복지 시스템은 20세기 유럽으로부터 시작된 그야말로 사회적 유산에 가깝습니다. 바로 이 책의 서론은 복지의 그와 같은 연원을 다루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조금 이른 결론이지만 갬블의 이 글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기도 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왜 시민들에게 복지를 제공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우리 스스로 그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명확히 고찰해 봐야 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1929년에 전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 준 뉴욕 증시 발 대폭락은 바로 대공황의 시발점이었습니다.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롯, 소위 '뉴딜 엘리트'들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해법을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동시에, 다수 시민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중첩된 복지 프로그램'을 자본가들의 동의와 폭넓은 공감대를 우선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그 시대의 자본가들이 매번 이러한 요구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손익에 있어 무엇보다 체제 안정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식했던 점인데요. 특히나 서구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 과정에서 과거로부터 심각하게 분열된 계급 사회를 이미 경험한 일반 시민들 그리고 자본가들이자 보수주의자들은 "모든 시민을 위한 관대한 복지 국가가 있어야만 한다"는 일종의 당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을 전통적인 사회적 합의로 봐야 할지는 의문이 듭니다만 설사 그것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치밀한 계획이라 할지라도 이들도 보편적 공익에 동의했던 것이 아닐까 순진한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물론 보편적인 사회주의자들 역시 이 '양보'에 마땅히 동의했습니다만 1930년대 이후, 조직된 노동 계급의 스스로 삶을 통제하기 위한 자기 방어 기제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직된 힘'이 서서히 무력화 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제가 갬블의 이 글을 통해 그저 과거를 엿본 것이지만 동시에 자본가들과 이에 결탁한 보수주의자들이 정치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겠다는 '최종 결론'에 이르렀던 점도 거의 진실로도 읽혔습니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광범위한 복지 제도와 관련해, 특유의 정치학자 답게 민주주의 하에서 시장의 매커니즘으로 이익을 창출하는 자본주의는 원칙적으로 시민을 위한 사회 부조를 거부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민권과 관련된 리처드 벨러미의 논증과도 매우 유사한 점인데요. 즉, 복지 국가에서 시민은 자신이 이룩해 온 성과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시민권에 근거해 부여되는 불가침의 사회적 권리를 갖는다는 당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적지 않은 수의 신자유주의자들 역시, 시장의 지속적인 이익을 위해 무엇보다 사회 체제가 안정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일전에 데이빗 코츠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의 순진한 생각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이 신자유주의자들을 무턱대고 저열한 음모론자들로 취급할 수는 없지만 이들이 다소 일관되지 않은 화법으로 시민들에게 혼란을 끼친 부분은 사실로 밝혀졌는데요. 결과론적이지만 이러한 문제는 저자의 분석대로 신자유주의가 단일한 교의가 아니었다는 점에도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복지와 대립되는 신자유주의적 기법을 분석하는 논증 가운데, 이를 명확하게 "시장 자유지상주의"로 다루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하이에크와 더불어 강고한 신자유주의자로 알려진 그들 세계의 석학, 밀턴 프리드먼을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로 해석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와는 약간 별개로 사회학에서 자유지상주의는 어느 정도 철지난 멸칭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앞선 프리드먼에 대한 저자의 이 같은 의도는 과연 무엇일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대다수 신자유주의들이 주장하는 시장 자유주의적 발상과 노골적인 사적 이익 추구, 이를 통한 강고한 개인주의화는 단순히 복지 담론을 넘어, 사회에 당면한 문제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저 도식적으로 공리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러한 사적 이익화를 필두로 시민을 파편에 이르게 했던 개인주의에 대한 맹신은 특히 신자유주의자들을 포함한 이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들의 흔들리지 않는 교리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저자의 논증을 통해 다시금 밝혀지고 있지만 이 양자가 공통되게 수용하는 부분은 바로 시장 자유 하에 '사회 정의'는 필요 없다는 인식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가 안전하고 무엇보다 누구에게나 정의롭기를 바랍니다. 사유 재산에 관련된 부분, 사적 이익화에 대한 부분을 여기에서 다 다룰 수는 없지만 이미 인간성이 결여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그동안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는지는 거의 명백합니다. 그래서 복지는 바로 그런 정의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는 미국과 같은 완벽한 신자유주의 국가가 자신들의 국민을 위한 사회 부조를 완벽히 철회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것의 수사가 어떤 식으로든 본질적 의미를 왜곡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된 자본주의적 폐해를 단순히 일원적으로 분석할 수 없듯이, 오늘날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맥락은 저자의 말마따나 정치경제학적으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시장의 이익을 위해 국가와 시장을 비롯, 전지구적 생물권이 이에 동원되고 있고, 이러한 일관된 전개 과정은 보편 타당한 복지 시스템 없이 평범한 시민이 과연 자신의 삶을 지켜낼 수 있을지 의문을 들게 하는데요.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복지 전반은 큰 틀에서 우리 민주주의를 위해 요청되는 것이고 작게는 시민 각자의 삶이 폭력적인 자본주의적 불평등에서 일상을 보전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장책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리버럴의 항복과 더불어,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엘리들이 신자유주의적 교의에 표면적으로는 함께하게 되면서 반대의 큰 국가론에 맞섰고 이와 동시에 복지 비용까지 큰 폭으로 삭감하며 이런 사활적 문제를 그저 개인의 책임으로만 국한시키는 사회적 작업에 온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는 지난날 아이젠하워 행정부 이후, 노동 조합이 신자본가들이 추동한 사회경제적 압박에 의해 급격히 힘을 잃어 갔고,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시민의 도태와 분리 그리고 계급화가 더 맹목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금융 규제를 철폐하고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제한하여, 기업과 경제 주체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그런 단편적인 작업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위한 소위 사회 개조가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데요. 앞선 리버럴 정치인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적극적 편입과 더불어 유럽을 비롯한 진보 좌파의 몰락은 바로 이러한 일방적 이행을 부추겨 왔습니다. 

단순히 자본가 계급에 의한 비용 문제로 백안시 되는 복지 문제가 '어른이 된 시민'에게는 그저 불필요하다는 주장과 신자유주의가 맹신하는 능력주의 체제에서 밀려난 자들은 당연히 도태되어야 한다는 소위 과거 허버트 스펜서류의 사회 진화론자들과 같은 주장들에 대다수 시민들이 이에 동의하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경제적 침체 시기에 시민들을 위한 복지 비용을 충원하기 위해, 다방면의 정치적 토론은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하에서는 분명 필요한 부분입니다. 또한 19세기 자유주의 시대를 거쳐 끈질기게 우리가 옹호해 온 이 복지 제도와 그것을 보장한 복지 국가 자체는 어떻게 보면 홉스가 부정해 온 현실에 맞서, 우리 인류가 지켜온 유산이기도 한 데요. 더욱이 일전에 피터 플레밍과 같은 학자들이 분석했던 바대로, 부유층들이 자신의 부와 권력을 일관되게 무리 없이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대다수 시민 계급의 경제적 안정이 무엇보다 - 그것의 맥락이 일견 모욕적이긴 하지만 - 시급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의 금융 자본주의적 헤게모니에서 자본주의와 더욱더 멀어진 인간성을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겠는가를 정치철학적으로 고민하는 것보다 시민 사회가 기존의 기회의 균등, 평등, 시민의 자유, 사상의 자율성을 답보하기 위해서라도 국가의 의무 자체가 바로 우리의 세금으로 가용된다는 점을 우선 잊지 말아야 됩니다. 이런 인식은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에 대해 소극적인 권력 관계가 아님을 시민들에게 주지시키는 것인데요. 결국 복지 프로그램은 누구에게 얼마간의 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유주의가 그동안 옹호해 온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공동선에 기반한 가치를 최소한으로 유지하기 위한 원천적 수단이 아닌가 싶습니다.    

끝으로 곳곳에 보이는 저자의 신랄한 논증을 통해,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엄연히 이 사회에 실존하고 있으며, 이들이 사회 각 분야에 뿌리 내리고 있다는 점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는데요. 이것은 그동안 보수 우파들이 신자유주의는 실체가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주장들과 간혹 맞물려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더불어, 현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이 우리가 알고 있던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아님을 저자를 통해서, 다시금 여실히 깨닫게 되었는데요. 모두가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기 불편한 지난날의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결탁', 이러한 결합 형태가 저자가 밝히는 복지에 대한 이들의 근본적인 거부감 뿐만 아니라, 이들이 다른 모든 형태의 타협 불가능한 주장들에 비해서, 사실상 민주주의를 자본주의의 시녀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추정하건대, 과거 루퍼트 머독과 같은 언론계의 보수주의자가 마거릿 대처와 같은 정치인들과 자신들의 국가와 사회를 위해 논의했던 바는 거의 분명해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결국 국가는 시민들의 보모가 아니라는 것이었겠죠. 이러한 연장선 상 가운데, 개인주의와 능력주의 그리고 심각한 불평등이 이렇게 신자유주의적 이행 초반에 필연적으로 잉태되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글의 4장에 복지를 설명한 저자의 문장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는데요. 글 말미에 이 문구를 따로 남기고자 합니다. 


"복지국가는 다양한 수준의 불평등과 양립할 수 있으며, 불평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결코 복지국가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그러나 복지 국가를 구축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삶의 기회를 보다 평등하게 만들고, 사회적 최소한도를 제공하고, 모든 사람이 시민적 권리, 정치적 권리, 사회적 권리를 누리는 공동의 시민권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간 복지 체제의 핵심 교의 중 하나였다." 


그러나 2008년 금융 붕괴와 그것이 초래한 심각한 여파로 인해 복지국가는 축소와 긴축의 새로운 시대에 직면해야만 했다.

많은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당신은 복지국가가 살아남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도, 복지국가를 해체하는 데에는 정치적 장애물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복지 국가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우울하게 결론 내릴 수도 있다.

금융 붕괴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사상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전략에는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의회의 과반수를 확보하고 국가 관료제의 기존 기구를 장악함으로써 정치권력을 획득하여 자신들의 강령을 실행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브레턴우즈 고정환율 체제 Bretton Woods fixesd exchange rate regime가 해체된 이후 훨씬 더 개방적이 된 세계 경제에서 자국 경제는 국제금융시장으로부터 덜 보호받았고, 자본통제 종식, 규제 완화, 민영화, 소득과 부에 대한 세금 인하, 그리고 고용권 및 노동조합의 약화를 통한 유연한 노동시장 창출 등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많은 나라에 도입되었다.

복지국가가 그간 표명해 온 약속은 모든 시민은 자신이 시장에서 이룬 성과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시민권에 근거하여 부여되는 불가침의 사회적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국가를 이용하는 것의 실질적인 이점이 명백해지자, 사회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국가를 변화시켜 왔고 자신들이 국가를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무엇인가로 만들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에 일부 보수주의자들이 시장 자유지상주의자 및 다른 신자유주의자들과 제휴하여 고도 집산주의 시대 - 복지국가가 미래의 물결일 것처럼 보였던 시대 - 의 혜택을 일부러 줄이고자 했던 이유이다.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들에 따르면, 개인은 자녀의 교육에 대한 비용을 스스로 지불해야 하며, 건강상의 위험이나 실업 또는 장애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20세기 대부분 동안의 도덕적 논쟁에서는 국가의 복지 제공을 확대하고 개인이 삶에서 직면하는 위험과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승리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재정 긴축에서 앵글로-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질서-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모두가 채무불이행에 대해 취한 입장은 세금이 아닌 지출을 줄이는 것이었고, 그리스와 몇몇 다른 질서-자유주의적 국가에서 이것은 핵심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의 삭감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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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2-23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주주의를 자본주의의 시녀쯤으로 여긴다‘는 부분에
씁쓸하게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복지국가라는 북유럽 나라들에
의외로 노숙자가 많다는데 유일하게 핀란드는 그 수를
줄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방관할 경우 사회적 비용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고 아예 살곳을
마련해주었대요. 물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요. 길에서 폭력,마약,도둑질..등 문제를 일으킬때보다 훨씬 적은 비용이 들었고 다시 사회로 복귀할 기회도 높였다네요.

우리나라도 극도로 보수적이다보니 복지가 퍼주기라는 인식이 만연한데
세세하게 따져보고 복지에
대한 인식을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알아야할게 너무 많은것 같고요. 덕분에 이부분에 대한 생각을 한번
정리해볼 기회가 되었네요.
베터님 잘읽었습니다^^

베터라이프 2024-02-24 06:46   좋아요 2 | URL
복지국가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해당 시민들이 사회 민주주의적 개념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복지 자체가 예전 자유주의적 소산임을 인식한다면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과거 자유주의와 상이한 차이가 있는지
변질된 보수주의 정치와 연계해서 개념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민주주의 정치 기반에서는 말이죠

소위 ‘퍼주기 복지‘와 관련해서도 과거 레이건 행정부 때
당시 신자유주의자들이 저런 식으로 포커스를 맞춰
사회 부조에 대한 혐오감을 시민들에게 안겨줬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구조적으로 정치공학이 관여해 왜곡된 기본 인식들이
제가 알기로는 전통적인 보수정치의 연원은 아님은 분명합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신자유주의 국가에 보수를 자처하는 대다수의
정치 세력들은 기득권 세력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영국도 그런 부분에서 많이 변질 되었죠

항상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미님 ^^
 
밀입자
엘리에트 아베카시스 지음, 길해옥 옮김 / 여백(여백미디어)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엘리에뜨 아베카시스는 1969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모로코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양친 가운데 그녀의 부친은 유명한 유대인 사상가였는데요. 덕분에 그녀의 어린 시절은 스트라스부르 유대인 공동체의 일상적 삶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소위 말해 세파르딕 유대인들의 공동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유년 시절을 보낸 아베카시스는 프랑스의 4개 고등 사범학교 가운데 한 곳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ENS)에 수학하고, 프랑스 공교육 시스템에서 소위 교사 자격을 부여하는 아그레가시옹 (Agrégation)을 무난히 통과합니다. 이후 그녀는 프랑스 캉에 위치한 캉 노르망디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게 되는데요. 1992년에는 도미하여, 하버드 대학에서 1년 간 수학하고 그즈음에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로 인해, 스스로에게 명성을 안겨 준, '쿰란'의 모티브가 됩니다. 그녀는 이외에도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프랑스 록그룹인 DSLZ를 위해 곡을 만드는 등 다방면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Clandestin"으로 지난 200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5년 2월 번역되었습니다. 현재 이 작품은 국내에서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아마도 밀항자, 불법 이민자들을 뜻하는 은유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는데요. 작가인 아베카시스는 이 제목의 의미를 작품속에서 꽤나 복합적인 의미로 전개했습니다. 이를테면 여주인공인 '그녀'가 자신의 삶에 있어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흡사 수동적인 태도로 거의 위선에 이르지 못한, '이방인'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바로 '그녀'가 프랑스에서 소위 엘리트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행정 계통의 일을 통해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는 커녕, 때론 위선적이고 때론 가면을 쓰면서 이런 조직 문화에 적응해 가는 여타 인물들과는 달리, 어렸을 적의 가정 불화와 자신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사회와 본질적인 삶에 있어, 거의 이방인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측면으로, 이 작품의 제목은 이처럼 여러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조금 창백하고 어두운 계통의 피부색을 갖고 있는 남주인공인 "그"는 설정상 '짙은 푸른 눈'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소설의 문맥상 "그"가 프랑스의 남쪽 해안을 통해, 이 나라에 밀입국을 한 것으로 보아, 알제리를 비롯, 옛 프랑스의 식민지 출신으로 보이지만 작가 자신이 모로코 출신의 유대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앞선 푸른 눈과 "그"에게 종교적 색채가 완전히 배제된 점은 마찬가지로 의도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현재 프랑스 내부의 이민자 문제를 다루면서도, "어떠한 한 인간을 민족과 종교의 배경 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그녀 스스로의 철학적 관점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다만, 주인공인 "그"가 자신의 모국에서 숱한 여자를 관능의 측면에서 만나왔고, 남녀 관계에 있어 남자로서 어느 정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던 것으로 보아, 프랑스와 그의 정체불명의 모국은 남녀의 사회적 지위가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작가의 서사를 통해, "그"는 자신의 형과 프랑스에 밀입국을 했지만, 자신의 모국과 완전히 상관없는 프랑스 내에서의 보장되지 않는 법적인 지위와 그로 말미암아 국적과 신분이 전혀 인정되지 않는 '국외자'로서 매번 사회의 감시로부터 쫓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소설의 중후반부에서 암시되는 그의 형에 대한 불행과 이들 형제가 모국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은 지식인 계층임에도 불구하고, 타국에서는 그 신분이 전혀 보장 받지 못하는 상황은 법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어떠한 현실에 놓여 있는지 이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새삼 깨닫게 만듭니다. 작가에 의해서 거듭 강조되는 '자유의 나라 프랑스'는 이처럼 사람에 따라 여실히 이중적인 관념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또한 '스스로가 자유의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상실된 인간이 과연 바뀐 현실에서 사랑을 갈구할 자격이 있겠는가'라는 본질적인 측면을 작가는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는데요. 여주인공인 "그녀"가 "그"에게 있어 그동안 만나왔던 관능적인 여성이 아닌, 정숙한 여성이라는 설정도 그렇거니와, 이들 두 사람 사이에 놓여있는, 어느 역의 플랫폼과 서로 간의 진정한 이해를 방해하는 현실의 장막은 그만큼 복잡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거의 처음 대면하게 되는 사람의 지나온 삶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의 한 방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자신이 묵묵히 걸어온 삶이 결국은 누군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축복일 수도 있다는 냉엄한 현실과 그것이 직면한 관념이 서로 교차되고 복잡한 심성으로 자신을 혼란으로 이끄는 와중에도 서로를 보는 시선이 묘하게 일관된 듯한, 서사 전반은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미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도 한두 번쯤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순수한 호의를 갖게 되었던 신기한 경험을 해보셨을 텐데요. 물론 이 작품에서 그와 그녀는 서로에게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는 어느 정도 긴밀히 연결된 맥락이 존재하지만 다른 이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이 에로티시즘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에 대한 터무니 없는 그녀의 호감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스스로의 삶에 수동적이고 의미를 찾지 못하는 그녀에게 있어, 이 작품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그만큼 복합적입니다. 누구에게나 치열한 삶 속에서 극적으로 부정되는 사회 속의 이방인과 다른 한편으로 법과 사회의 범주 밖에 있는 밀입자 혹은 (불법) 이민자의 정체성은 이처럼 이질적이게도 서로 맞닿아 있는데요. 결국 "그"와 "그녀"는 서로에게 매우 필요한 존재들이지만 이들의 상이한 가치적 삶과 각자의 공간을 분리시키는 엄혹한 현실의 문제는 사실상 외형적 관계마저도 거의 파편에 이르게 만듭니다. 따라서 이런 모든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 국한시키는 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작가는 이를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끝으로 어느 정도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는 것처럼 보이는 비극적 결말 또한 우리 스스로가 주체적 삶을 견지하고 지향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주인공이 힘겹게 서로에게 향하게 되는 발걸음은 그 의미하는 바가 가볍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진정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놓여진 현실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용기로 이어졌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점은 사랑의 다른 형태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런 연유로 도입부의 "그"가 "그녀"를 보며, 문득 사랑이라는 감정을 읊조리는 장면은 후반부의 전개 과정을 예견한 중요한 복선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관능과 대치되는 정숙과 신중함 등으로 "그녀"를 규정해 나갔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거의 명백하게도 "그"에게 있어,"그녀"가 바로 자신이 바라던 새로운 세계 그 자체였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늘 변화가 따르는 법, 모든 시름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마음을 달래고 있어야 할 이 감미로운 순간마저 삶은 여지없이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바꾸어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란 그저 인간이 만들어낸 늘 가식적이며, 늘 관념적인 허울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단지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버리고 마는 객(客)이며, 따라서 그와 같은 시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이 직업에 종사한 이래 여러 부류의 이방인들을 보아 왔다. 그들은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유를 찾으며 애썼으며, 자유를 위해서라면 전기에 감전되어 죽든 자동차에 깔려 죽든 독가스에 질식되어 죽는 상관없이 무장돼 있었다.

그녀는 단지 그를 돕기 위해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에게로 돌아왔던 것이며 그녀는 오직 그만을 위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협박과 구금, 거주지 이주 권유와 국경 추방 명령, 경찰관들의 폭력행위, 그렇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이상의 것들도.

사람들은 삶과 삶에 대한 의문과 그에 따른 제반 문제들을 회피하려고 하며, 특히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근본 문제를 회피하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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