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유럽의 위기와 지정학
조지 프리드먼 지음, 홍지수 옮김 / 김앤김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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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프리드먼은 헝가리 태생의 유대인으로 미국 코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루이지애나 주립대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특이하게도 미 국립국방대학과 랜드 연구소 등 정부와 연관된 교육 기관 및 연구소에서 국제정치 및 주요 국제현안에 대한 강의, 자문을 맡은 바가 있습니다. 그는 여러해 동안 이러한 활동을 통해 미국내에서 신뢰받는 국제전문가로서 명성을 얻기도 했는데요. 이와는 반대로 프리드먼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이들은 그를 ‘국제정치학계의 예언자’로 격하해서 부르기도 하는데요. 물론 저자인 프리드먼을 판단하는 것은 각자 개인의 몫이기도 합니다만 어떤 현안에 대해서 보이는 그의 직관은 개인적으로 꽤 놀랍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소개해 드릴 이 책은 학문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약간 난감하기도 한데요. 일단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뒤에서 하는 것으로 갈음하겠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5년 “Flash Points” 라는 원제로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가장 최근인 2020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국내 번역본에는 예상대로 서두에 이춘근 교수의 추천사가 있으며, 번역은 피터 자이한의 글을 번역했던 홍지수씨가 맡았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3부로서, 이하 16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거의 1억명의 목숨을 앗아간 2차대전 그리고 냉전을 거쳐 현재의 유럽과 유럽연합이 내포하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을 중점으로 꽤 에세이적인 형식의 글로 저자는 차분히 풀어내고 있는데요. 서두에서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부모를 따라 공산치하의 헝가리를 탈출하는 장면과 현재의 유럽인들이 ‘과거 31년을 계승한 사람들’이라는 외연 확장과 더불어 피로 쓴 그들의 과거사를 제대로 씻어내지 못했는가에 대해서인지 아니면 인종주의적 국가 압사의 과오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에 대한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에서 서술되어 나타나는 인식이나 평가가 과연 면밀한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료성을 떠나 너무 유럽의 상황에 대해 편파적인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러시아가 굴복시킨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프리드먼은 NATO가 연약해졌다는 식으로 서술해 내고 있습니다만, 우크라이나의 경우 러시아와 합의한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에 대해 미국이 연대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은 국제정치학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음에도 이것에 대한 서술은 쏙 빠져 있는 것은 저자의 명성을 생각해 봤을 때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활화산에 끼얹은 기름이 되었던 민족주의는 1871년 비스마르크가 초안한 독일 제국에 의해 비롯됩니다.저자인 프리드먼은 사실상 그 당시 발칸반도를 비롯한 유럽 전지역에서 피올랐던 민족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데요. 이후 2차대전에서의 민족주의가 인종주의와 결합해 600만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역사적 사건을 연계해 해석하고 있습니다. 종전 이후, 오늘날 세계 4위의 경제 국가가 된 독일이 과거 그들이 행했던 인종주의적 말살로 인해 확실한 재무장과 보통 국가로의 이행이 독일 국민 대다수의 신중함에 가로막혀 있다고 봐도 무방해보입니다. 독일인들은 그 특유의 절제와 인내심 그리고 신중함으로 유럽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국가로 부상했지만, 아직까지도 꽤 진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 드골 치하의 프랑스는 핵을 보유해 발언력이 강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려고 하였고, 영국은 전후에도 대영제국의 경계를 유지하고 싶어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기도 합니다.

소련의 붕괴와도 거의 일치하는 1991년의 마스트리트 조약은 현재의 유럽 연합을 있게 한 장면이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소련은 개혁 개방의 길에 들어설 즈음, 레이건과의 담판에서 NATO가 더이상 모스크바와 가까워지는 것을 동결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지만, ‘유럽 연합을 확대하려는 욕구’와 더불어 NATO의 확장은 결국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사태를 초래했습니다. 사실상 이것의 전제는 NATO가 효과적으로 푸틴 치하의 러시아를 제어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며, 이것의 책임의 상당 부분은 미국에게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과거 드골은 “미국이 유럽을 위해 시카고를 잃는 위험을 감수하리라고 믿지 않았다”는 저자의 인용은 본질적으로 국제 정치가 어디에 수렴되어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문장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은 조지아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것이 확실했다”는 문장 하나 만으로 미국의 불개입이 정당성을 답보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NATO에 대한 미국의 기여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NATO자체가 미국의 그림자라고 봤을 때, 현실주의자인 푸틴이 그러한 도발을 감행하고 국제사회에 의해 어떠한 응분의 조치를 당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부정적이다 라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프리드먼은 유럽의 여타 상황을 꽤 편안하게 서술하면서 우크라이나를 경계로 동쪽은 유럽의 본토로 서쪽은 유럽의 반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즉 유럽 번도를 90도로 비틀어 버린 것과 같죠. 이러한 해석대로라면 남쪽으로 밀려드는 러시아의 의도를 밑의 반도에 해당하는 국가들이 저지해야만 하는 상황일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독일의 재무장과 경제력의 유지는 매우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 또한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는 프랑스와 이제는 한발 멀찍이 서 있는 영국을 고려한다면 남부 유럽의 PIIGS의 경제 불안과 그 중의 그리스의 쇠퇴는 프리드먼이 어떠한 말을 하고 싶은지 짐작할 만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유럽의 위기는 영국, 프랑스, 독일이 처한 입장의 급격한 변화와 유럽 전체에 드리우는 이슬람의 그림자와 호시탐탐 러시아와 서유럽 전체의 완충지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전복이 앞으로의 방향타를 좌우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저역시 절로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전 정권과는 달리 좀 더 고립주의로 다가가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이러한 전유럽의 위기 상황은 더욱 가중되고 있는데요. 독일이 자원을 매개로 러시아에 대한 접근과는 별개로 푸틴은 앞으로도 미국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위험한 오판을 또 감행한다면 우크라이나로 시작되는 위기가 과연 어떻게 변질될지는 매우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와 동맹관계였던 폴란드가 어떠한 취급을 당했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영국까지 끼어들어 폴란드를 기만하기까지 했는데요. NATO의 확장과 더불어 더욱 가까워지고 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과 모스크바는 아예 발칸과 동부 유럽의 완충지대를 자신의 영향하에 두는 감히 신냉전의 초래를 바라게 될지는 아직까지는 일말의 확대해석에 비중을 둘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러한 현재의 유럽 내부의 모순과 혼란의 가능성이 오로지 유럽인들의 문제로만 먼 발치에 두고 과거처럼 미국이 수수방관한 한다면 러시아의 오판을 부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학계와 관료계에서 꽤 면밀한 관찰과 연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해봤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헝가리인이었으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동화되지 않았던 자신의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은 유대인이 장악한 은행, 공산주의, 진보주의에 의해 피해를 당했다”는 꽤 솔직한 고백에는 일개 독자지만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유대인의 고유한 독립성에 의해 독일이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해석에는 절대 동의할 수가 없으며, 인종주의적 말살에는 어떠한 근거를 대서는 안된다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에 동의할 수 밖에 없음을 밝혀두고 싶군요. 물론 앞뒤 맥락을 고려한다면 저의 해석은 다소 확대일 수도 있겠으나, 유대인이면서도 반유대주의자임을 먼저 고백했던 저자의 솔직함에 꽤 감명을 받았다고 치부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꽤 신경질적인 평가일 수도 있으나 글의 61페이지에 ‘아버지의 모친’이라는 표현에 대해 홍지수 선생께 정정을 요구하고 싶은데요. 이미 ‘조부’라는 단어나 등장함에도 왜 아버지의 모친이라는 구어를 ‘조모’로 의역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 한나 아렌트를 ‘해나 아렌트’로 표기한 것은 애교로 받아들여도 충분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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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독식 사회 -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들의 열망과 위선
아난드 기리다라다스 지음, 정인경 옮김 / 생각의힘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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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시건 대학과 영국의 옥스포드를 거쳐 뉴욕 타임스의 유명한 칼럼니스트였던 아난드 기리다라다스는 인도 출신의 부모를 둔 언론인이자, 정치 분석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1981년 생으로 그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꽤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한데요. MSNBC와 아스펜 연구소에서의 이력들도 꽤 흥미로웠습니다. 현재는 하버드 대학의 박사과정을 진행중이므로 그의 과거 경력을 감안하더라도 정치 분야의 연구를 하고 있는 한 명의 학자로서 이 글은 꽤 통찰력을 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미국 정치 무대와 관련된 훌륭한 경험들이 앞선 평가의 기반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아주 간단히 말해 현재의 심각한 불평등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점은 칭찬받아야 한다고 여겨졌습니다. 이 책은 원제 “Winners Take All”로서 지난 201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9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7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전체적으로 글 전반은 어떤 학문적 주장이라기 보다는 현재의 체제를 이끌고 있는 정치사회 시스템적인 상황과 이러한 현실에서 자신의 이상과 가치를 위해 일하는 여러 인물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서사적 관점의 글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약간의 르포 형식의 글로 봐도 오해가 아니라고 여겨지는데요. 물론 저의 개인적인 느낌은 그러합니다만 정확한 판단의 몫은 독자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겨두고 싶습니다.

대략적으로 여기에 관통하는 주제는 “수많은 엘리트들 자신의 선한 인식이 명백하게 한계를 갖고 있으며, 시스템 자체를 변혁시키고 개선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라 기존의 시스템 하에서 다른 시민들이 어떻게 하면 순조롭게 적응해 나갈 수 있겠느냐 라는 인식과 행동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상황에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이 민주주의 체제 어떠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 충분히 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회 구조상의 맨 상층부에 있는 엘리트들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바로 이 책이 제공하고 있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선을 행하기 위해 큰 경제적 희생을 기꺼이 치르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은 많은 엘리트들이 바로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보호받기 위해 그동안 무엇보다 정부를 우회하기 위한 시스템적 기반을 쌓아왔다”는 것과 다름 아닐 텐데요. 일부 이들 가운데 선한 목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소위 ‘윈윈주의’의라는 명제로 모두가 적당한 이득을 얻는 것의 결과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득권과 비기득권이 모두 누리는 이득 말이죠. 그런데 외형상 이러한 가치추구는 꽤 설득력이 있긴 하나, 실제적으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이 책에서는 묘사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현재의 악화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 또한 그러한 인식을 타개하기 위해 필요한 실효적인 시스템의 개선 없이 즉, 어느 것도 희생하기는 어렵다는 식의 안일주의가 그 원인이 되고 있다고 봐야할 텐데요. 앞선 이들 엘리트들이 이러한 현실적 문제에 있어 스스로가 도덕적 책임감을 인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경우에 있어서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글에서도 볼 수 없는 통찰력을 저자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나 대니 로드릭과 같은 경제학자들은 “중산층의 공동화, 포퓰리즘, 민족주의, 외국인 혐오”를 비롯해 사실상 미국이 사유화 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여기에는 자신 스스로가 분명 엘리트이자 기득권층인 도널드 트럼프가 오히려 수많은 기존 엘리트들을 비난하는 신뢰성의 문제와 인종차별주의, 권위주의와 종족적 민주주의로 무장한 근본적인 탈정치의 화신이 미국 정치 무대에 들어섰다는 것 만으로도 이 “포퓰리즘적 분노”가 얼마나 왜곡적 현실을 불러 일으켰는지 책을 통해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선동되어졌다는 말 이상으로 트럼프의 교묘한 언설과 도덕적인 의무감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만연한 타성에도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인을 분리해 낼 수 있는 시민의 변별력을 먼저 언급하기 전에 그동안 미국이 심각한 불평등화 과정에서 시민의 기본적 기반이 위태로운 수준을 벗어나 2008년의 주택 시장 붕괴와 같은 정치와 경제적 기반의 침몰이 바로 트럼프의 탄생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러한 인식을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트럼프의 출현에 일반 시민들의 책임이 아니라 이러한 불평등을 가속화 시킨 엘리트들에게 먼저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밝혀두기 위함입니다. 여기에는 자신들이 피해자인 척 하는 부유층들과 자본주의 시장을 왜곡하는 역외 금융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시민의 의무인 세금의 의무를 회피하는 등의 ‘탈도덕적인 정당화’가 한 몫을 하였습니다. 역외 금융과 같은 문제들을 대중들이 집중하지 못하게 언론들을 움직여 왔다는 저자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근거가 됩니다.

글의 1장에서는 앞선 ‘소위 선한 엘리트들의’ 마켓월드 MarketWorld에 대해 먼저 글의 맥락을 위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마켓월드는 현 상태로부터 이익을 얻으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도 해내는 일종의 신흥 권력 엘리트들의 세계로 이것이 일반적인 리버럴한 엘리트들의 특성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부유층 엘리트들의 독서모임’과 같은 얼마나 순진무구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지 글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 글을 통해 드러난 이들의 순진함이 단순한 가치판단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기존의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당위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득권층이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희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에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즉, 엘리트들의 입맛에 맞는 시스템에 대한 적당한 비판을 해오고 있는 지식 소매상들을 다루고 있는 4장은 이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지식 소매상들의 범람은 샹탈 무페가 강조한 지식인의 숭고한 책무인 “권력에 대한 견제와 비판”을 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설 땅을 쉽게 무너뜨리고 있으며, 앞선 지식 소매상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는 부유층과 기득권의 행보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들이 추구하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이미 일반 시민들과 엄청난 재력과 사회적 자원을 가진 부유층 엘리트들이 자신들이 실제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이상 이 시스템을 바꾸려하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명백합니다. 겉으로는 어떤 대안을 표명하면서도 속으로는 어떠한 대안도 바라지 않는 이들의 도덕적 위선은 사실상 지그문트 바우만이 강조한 시민들이 품위있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문제제기와 그 궤를 같이합니다.

이러한 논리적 서술 가운데 6장은 많은 부유층이 자신들의 관대함이 기반이 된 기부 행위로 시급한 사회적 정의로 대체하려고 한다는 것을 의심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카네기와 포드는 앞선 관점으로 기부를 활용했으며, 노조를 카르텔이라 모함했던 것은 돈으로 쌓은 권력을 선민주의에 이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제가 몇번이나 다른 책들에서 반복해 왔지만, 탈자본주의로의 이행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장 자본주의에 마땅한 정치적 기본 가치를 다시 부활시키자는 취지의 주장을 해왔는데요. 마찬가지로 “엘리트들이 본질적으로 민주주의 그 자체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저자의 평가 역시 저의 인식과 유사하다고 여겨집니다. 시장에 면밀한 정치적 감시를 회복하자는 많은 정치학자들의 주장을 공염불로 만들어내는 엘리트들과 지식 소매상들의 결합은 “제도와 법 위에 시장 자본주의가 서야 한다”는 사활적 물음에 반하는 것으로도 봐야겠죠. 마찬가지로 책의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7장에서 인용된 대니 로드릭의 “세계 경제가 직면한 대다수, 그것이 무역 규제이든, 금융 불안정성이든, 아니면 적절한 발전의 부재와 세계적 빈곤을 비롯한 다른 어떤 문제이든 간에, 이 수많은 문제들은 사실 우리의 지역 정치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그 심각성은 훨씬 더 줄어들 수 있을 겁니다”라는 제언은 그 의미하는 바가 실로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과거 다소 진정성을 갖고 있던 힐러리 클린턴과 같은 리벌럴이 골드만삭스와 돈으로 연계 되면서 시민에게 그 신뢰를 잃게 되었다는 대니 로드릭의 다른 관점도 설득력을 더하고 있었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한 사회의 공유된 민주적인 제도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도와야 하고, 이것의 맥락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인 평등의 기반에서 이뤄진다는 점은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일 것입니다. 물론 민주주의를 외길로 몬 자유시장주의가 전세계 사람들을 빈곤에서 구해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이 시장 자유가 만연하여 발생하는 문제들을 우리가 양가적 측면으로 눈을 감고 외면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떤 식으로 붕괴하게 될지 예견할 수 있을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규제의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대중에게 견디는 자세만을 알리려고 하는” 노골적인 의도와 건전한 비판의 눈을 끈으로 가리는 것과 같은 조작이 우리 삶의 피폐화를 초래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얼마나 우리가 더 노력을 해야하느냐에 대한 볼멘 소리가 이어질 것입니다만 요즘과 같은 엘리트 지배체제가 얼마나 타성에 젖어 있었는지 이 지점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모두가 나아가야 되지 않을까 이 책을 통해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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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사다리 - 불평등은 어떻게 나를 조종하는가
키스 페인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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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키스 페인은 행동과학과 인지심리학 분야의 전문가이기도 한데요. 그는 사회학적 측면에서의 다중 인간 심리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다수 인간의 집단 행동 연구와도 유사한 연구 궤적을 그가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근래 많은 학자들과 지식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소위 ‘불평등 문제’와 관련해 아주 단적으로 이를 ‘공중보건의 문제’라고 확정짓는 것은 공통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의 소개는 의미심장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원제, “The Broken Ladder”로 지난 2017년 출간된 이 글은 국내에도 역시 같은 해인 2017년 12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종의 사회과학 범주안에 들어가도 무방한 책임에도 번역은 꽤 잘되었다고 여겨졌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키스 페인의 이 글이 최근 이어지는 사회적 문제 내지는 관심사를 반영하는 판매고를 올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점은 작성된 서평 글 수를 봐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우선 글의 결론인 9장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키스 페인의 근래 불평등 문제와 관련한 해석과 관련한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불평등을 줄이려면 많은 문제들을 한꺼번에 다룰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불평등을 도덕적으로 고찰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이를 공중보건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것은 종래의 심화된 불평등 문제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던 수많은 지식인들과 그들의 진단과 비판과는 약간 상이한 관점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도덕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을 시도했던 학자들도 분명 있었으나, 근본적으로는 불평등 문제가 현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작게는 개인의 능력차나 크게는 사회적 자원과 효용성을 발휘하는 측면에서의 차이가 매우 차별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들을 요약해서 분석들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의 중산층들이 여러가지 이유에서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유리 바닥을 만들어주고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있는 것을 도덕적으로 마냥 비난할 수는 없기에 모두가 동등한 선에서 출발할 수 있는 최소한의 평등주의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와 관련해 일본 전 총리인 고이즈미는 “격차가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반문한 것과 같은 불평등 문제와 관련한 명사의 몰이해적인 측면은 이것의 인식차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굳이 자본주의적 상황에서 개인의 인센티브 문제를 제기하지 않더라도 개개인들의 합리적 이기심이라는 전제에는 많은 역사적 사례들을 보더라도 합당하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4장에서는 ‘합리적인 사익 추구’라는 것이 현실 가능하다고 봤던 일련의 경제학자들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4장은 통념적인 좌파와 우파의 틀로 인식되는 불평등의 관념적 측면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진보적인 엘리트와 노동계급 보수주의자”와 같은 태생적 이분법 말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가 밝히고 싶은 것은 미국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들이 보수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갖고 있다는 점과 유사한 판에 박힌 계급적 정치의식에 대해 반대하면서, “낙태를 반대하는 자들이, 사회적 복지 제도의 강화를 주장 할 수 있다”면서 반론을 제시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개인의 이념적 성향이나 정치 성향이 시시때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며, 우리가 내면화된 가치로 어떤 신념을 쭉 지켜내기란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국 시민들의 민주당 지지와 관련된 지도에서도 실질적으로 중산층 이하의 가난한 계층들이 폭넓게 지원하고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노동계층이 언뜻 공화당을 더 지지하는 것으로 통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는 더 많은 노동자들이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 책에서는 밝혀냅니다.

그래서 키스 페인은 불평등과 일반적인 사회학적 관점과 관련해 우리의 편견을 타파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불합리내지는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그래도 사회는 정의롭다 혹은 정의로운 세상”이라는 결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세뇌시키는 편견에 대해서도 저자는 비판을 하고 있는데요. “재능과 노력과 운의 복잡한 조합으로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현실 세계”에 자신이 마땅히 원하는 것을 얻어야만 한다고 인식함으로써, 이 세상은 아직은 정의롭다고 여긴다고 측면은 6장에서 다른 여러 사례들을 통해 입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점은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그를 무능하거나 이기적이며 비합리적인 사람으로 평가했다”는 어느 실험 사례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극단적인 측면으로 여길 수 있지만 이미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을 결여한 채로 얼마나 부정적일 수 있느냐”에 대해 철학적 접근을 해온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에 소개되는 여러 결과론적 인식을 통해 전반적인 불평등 상황이 사회 내에서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서로간의 이해를 제한시키며, 끝내는 “불평등이란 서로 공유하는 공간이 없음을 의미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이와는 약간 별개로 “불평등은 본질적으로 공통적인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불평등을 공유하는 공간이 전무하다는 것은 시민들의 사회적 단절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욱, 사람들의 편견이 더 심해지는 특정 상황은 “돈과 권력 및 불평등이 관련되어 있다”고 저자는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5장의 불평등은 생과 사의 문제라는 표제는 제가 임의로 발췌한 것에 불과하지만 원칙적인 측면에서는 이 문제가 생과 사를 좌우하기도 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꼭 돈의 차이 때문에 개개인의 수명 차이가 발생한다는 여러 주장들을 귀담아 두지 않더라도 가용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의 개별 차이와 이것의 결핍과 관련된 정신적 및 육체적 질병의 문제는 분명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 대해 어떠한 연민과 관심이 없는 것처럼 분명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음에도 계급간의 단절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은 모두가 부정할 순 없을테죠.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불평등 자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능력, 책임을 중시하다보면 불평등이라는 결과물이 생길 수 밖에 없다고 여긴다”는 인과론에 대해 유독 보수주의자들의 자기 방어적인 주장에서 뿐만 아니라 진보나 그외의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까지 이 불평등 문제가 아주 자연적이고 태생적인 문제여서 어떤 인위적인 개입을 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 아직도 의구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많은 서평에서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 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많은 불평등의 여건에서 우리의 민주 정치와 민주주의가 과두제와 포퓰리즘이라는 악의 쌍두마차로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해왔습니다. 애초에 시민 다수의 삶의 인간다운 영위에 대해 사실상 많은 정치 엘리트들은 관심이 없으며, 여기에 합세한 경제 엘리트들 역시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회 구조를 더욱 강화하는 것에만 신경쓸 따름이지 허버트 스펜서 류와 같은 그냥 ‘자연의 섭리’에 불평등 문제를 맡길 것을 바라고만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끝으로 이 책을 다 일독하고 나서 드는 생각은 얼마전에 접했던 리처드 윌킨슨의 글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많은 사회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이 이 책에 인용되고 있었는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마틴 길렌스의 다른 논저들이 하루 빨리 번역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수많은 사회적 실험과 모의 실험은 흥미로운 점들이 많았습니다만 몇가지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소득이 높은 이들은 남의 말에 신경쓸 일이 많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다른 기회를 잡기 위해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게 된다는 것에는 다소 동의하기 힘들더군요. 또한 선진국일수록 종교의 필요성에 구애받지 않고 후진국 내지는 보수적인 전통국가는 종교적 믿음에 집중하는 것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는 수긍이 가지만 오늘날 미국과 같은 나라는 오히려 사회에 있어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고 많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믿음에 대해 언론을 통해 어김없이 밝히고 있다는 점은 꽤 예외적 사례로 불릴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광범위한 불평등 문제에 대해 이렇게 약간 상의한 접근의 글 또한 나름 필요하다고 인식되었는데요. 아예 불평등 문제가 개인의 심리적 문제와 질병 등에 어떻게 더 작용하는지와 같은 연구가 좀 더 이뤄지면 어떨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논하고 있는 다양한 사례와 실험들이 꽤 신선하다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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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정책은 국내에서 시작한다 - 미국은 자기 집부터 정리해야 한다
리처드 하스 지음, 우정엽 옮김 / 아산정책연구원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뉴욕 브룩클린의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오하이오주에 있는 미국 명문 사립인 오벌린 대학을 거쳐, 미국에서 영예로운 장학금인 ‘로즈 장학금’으로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 유학한 리처드 하스는 2003년부터 현재까지 미국외교협회의 회장직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그는 콜린 파월 전 국무부 장관의 상임 고문을 맡았고 2003년에는 북아일랜드의 평화협상 과정을 지원하기 위한 평화특사로 파견되었으며, 조지 H. W. 부시 정권 시절 당시, 새로운 외교 정책을 세운 공로를 인정 받은 바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근 번역된 그의 논저 “혼돈의 세계”의 서평을 작성한 이후, 두번째로 접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13년 원제 “Foreign Policy Begins at Home : The Case for Putting” 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약간의 참고로 책의 출판을 맡은 아산정책연구원은 과거, 로버트 케이건과 같은 네오콘에 속하는 학자들이나 정치 관료들의 글을 번역해 온 것으로 유명했는데요. 더불어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실질적인 정책 행위자들로 유명했던 네오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을 때, 저 역시 레오 스트라우스와 아인 랜드의 글을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내에서 손꼽히는 외교 학자이자 정책 관여자였던 리처드 하스가 이 글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것은 “세계의 모든 인도주의적이고 인권을 보호하는 개입을 포함한, 정치군사적 투입에 더이상 미국의 여력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특히 이러한 환경적 변화 요인에 미국 국내적 상황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에 따른 비용은 2001년 이후 누적된 연방정부의 15퍼센트 정도”라고 저자는 소급해 이해하고 있기는 하지만, 2008년 이후 세게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의 재정적 여력이 한계에 이르렀으며, 연방 정부의 적자 규모 또한 나날이 누적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의 전쟁 비용 지출과 같은 재정 조력이 사실상 힘들어지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인 리처드 하스는 2부 마지막 주제인 ‘옹호할 수 있는 국방’에서 오늘날 현대전에서는 막대한 지상군 투입이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일본과 EU와 같은 국방비 지출의 후발 주자보다는 전략적이고 대외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국방비 유지를 전제조건으로 옹호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스는 지상군 투입이 선결조건이라 할 수 있는 미래의 현대전은 한반도에서의 작전 밖에 예상되지 않으므로 꽤 주도면밀하게 공군과 해군에 대한 규모 유지가 필요하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우선 글이 시작되는 1부에서는 냉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후, 일종의 다극체제로의 변화 가능성으로 대두하고 있는 여러 국가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브라질, 멕시코, 인도네시아, 호주, 일본, 한국 등 각 국가별로 간략히 분석해내고 있는데요. 이에 저자는 냉전의 종식 이후 바로 미국이 주도해 국제 관계에서 갈등과 대립을 조정시킬 수 있는 일종의 국제적 협의체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을 아쉬움으로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기존의 UN을 비롯한 국제 외교 무대의 한계로 볼 수도 있겠는데요. 하지만 이러한 저자의 토로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도 중국은 과거에 자신들이 참여하지 않은 국제 조약과 기준에 상당한 거부감을 밝히고 있는데 과연 명확한 국제 기준과 합의가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중국 전문가로 불리우는 조반니 아리기 역시 중국이 어느 정도 민주화가 진행되는 것이 중국 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게도 이득이라고 했던 것은 그 의미가 명확해 보입니다. 특히 많은 서구의 학자들이 민주화 없는 베이징 컨센서스에 우려를 표명했던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일 것입니다.

다만, 현재의 상황과 과거에 있었던 다소 고립주의적 정책에 기반하는 복고주의를 설명하면서 논증 가운데 몇가지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우선 “중국, 일본, 한국. 그리고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의견 불일치를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는 의견은 약간 반감까지 들었는데요. 청산되지 않은 역사 문제를 단순히 의견 불일치로 이해하는 점은 전형적인 미국인의 몰이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자신들이 2차 대전 당시 일본 제국과의 교전 당사국이었지만 안마당인 태평양 지역의 안보를 위해 일본 제국의 과오를 서둘러 봉합한 것은 주변국들의 이해에 기반한 것은 아닙니다. 냉전 시기에도 소련의 위협이라는 문제 앞에 일본과 주변 당사자들의 강제 화해를 주도하고 결국 일본에게는 어떠한 역사적 참회를 철저히 미연에 방지시킨 결과는 과연 누구의 책임인지 짚어보고 싶습니다. 또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지역에 대한 이해와 동맹의 의무를 고려했을 때 군사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압박이 클 것이다”라는 서술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는데요. 한미동맹과 같은 비대칭 동맹 관계에서 미국이 항상 연루의 위협에 직면해 있지만, 다른 미국과의 우호국 내지는 동맹관계를 고려했을때 압박이라는 표현은 동맹의 의무라는 입장에서 다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몇번이나 미국내 여러 지식인들이 서울이 핵공격의 위협과 동시에 LA이나 샌프란시스코에 핵위협 가중될 때, 과연 미 당국이 한국에 대한 핵우산을 지킬 수 있을지에 설왕설래가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동맹에 대한 의무는 단순한 조약의 서명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한반도에서의 재래전이 핵전쟁으로 발화될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도 미국이 동맹의 의무를 지켜낼 수 있을지에 대해 누구나 확신을 갖기 어렵다는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마찬가지 측면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초기 재래전과 같은 대결이 결국 양국 사이의 핵전쟁으로 귀결될 가능성 또한 상당하기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의 사소한 국지전이라고 할지라도 국제사회 차원의 개입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즉, 한반도에서의 무력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주변국의 노력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사례와 같은 엄중한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집니다. 앞선 주장과는 논외로, 저자인 리처드 하스 역시 “파키스탄의 증가하는 핵무기는 거대한 위협중에 하나”라고 인정하고 있는데요. 파키스탄의 국내 정치가 사실상 부족 중심의 체제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과연 자신들의 핵무기가 2010년 오바마 대통령이 확언한 만큼 과연 안전하고 통제권에 있는지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파키스탄 서북부에서 암약하고 있는 테러 단체의 존재를 감안해본다면 파키스탄 정부의 핵무기가 언제까지 안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군요.

하스는 자신이 공화당 당적을 갖고 있는 학자이자 정치인이기도 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책의 기조를 “전략적이고 제한적인 개입”을 미국의 대외정책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3부에서 밝히는 미국 국내적 요건과 관련해 “미국의 GDP 5분의 1이나 되는 비용을 의료보험제도에 투입”하고 있다는 것을 예로 들며 이것의 감축을 주장하고 있는데요.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과도한 의료보험비용을 지출하고 있으면서도 600만이나 되는 미국인들이 변변한 의료보험 조차 없이 지내는 것이 사뭇 이해가 안될 정도입니다. 2008년 이후 미국 경제가 다시 회복기에 이르고 있지만, 여러 국내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미국 정치가 꼭 누군가를 지칭한 것처럼 “포퓰리즘을 등에 업은 가짜 리더십”을 꼬집고 있는데요. 저자인 그도”민주주의는 단순한 선거 이상의 것이고, 선거 또한 선거 당일에 일어나는 일 그 이상의 것이라는 점이 강조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미국 정치가 ‘민주주의의 쇠퇴’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그 포퓰리즘을 등에 업은 리더가 앞으로 어떠한 결정을 하게 될지에 대해 누구보다도 우리의 미래와 운명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 실로 뜨악한 현실이기도 할텐데요. 저자의 예견과는 약간 상이하게 미국이 경제 발전과 꾸준한 국방비 투사가 함께 이뤄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연방 정부의 재정악화와 대외 경제의 불안감이 미국의 패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앞으로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지켜봐야 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모든 것을 다할 수 없다”는 의미 역시, 아마도 과거의 미국과 다른 현재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책의 39페이지 하단에 서술된 “쿠웨이트에서 이란을 내쫓았으며..중략”는 아마도 이라크를 이란으로 잘못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장이 시작되는 “중간의 1990년대에는..” 이라는 시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라크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이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오타라고 할 수 있으니, 기본적인 역사조차 인지하지 못한 역자의 책임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다만 이란의 영문표기인 Iran과 이라크의 Iraq는 뒤의 마지막 자음에 헷갈려 할 수 있지만 이 부분도 완전히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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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권력을 시민에게 - 시민주권 시대, 직접 민주주의를 말하다
토마스 베네딕토 지음, 성연숙 옮김 / 다른백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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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저자인 토마스 베네딕토에 대한 짤막한 소개에 따르자면, 그는 이탈리아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로서 또한 지방 행정 전문가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저는 매번 서평을 쓸때마다 저자에 대한 구글링에 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만 이번 토마스 베네딕토와 관련해서는 매우 짤막한 이력 정도만 이탈리어로 검색되고 있어 제 한계를 여실히 느끼고 말았습니다. 또한, 그는 볼자노 지역의 EURAC라는 연구소와 협업을 하고 있는듯 한데요. 이 EURAC는 사립 사회학 연구기관으로 이 곳에 대한 정보 또한 많지는 않았습니다. 주로 세계화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는 곳으로 추정됩니다. 이 책은 원제 “Piu potere ai cittadini?”로 지난 201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올해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국내 번역과 관련하여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전문 출판사가 아니라 사단법인이 관여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아마도 이 사단법인은 이와 같은 출판물들을 꾸준히 낼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우선 이 글의 중요한 관점은 번역된 제목대로 “직접 민주주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좀 더 엄밀히 말씀드린다면 “정치적 사안에 대한 확정적 국민투표 (레퍼랜덤)와 국민 발안”이라고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을 읽는 여러분들의 오해를 피하고자 저자는 이 직접 민주주의가 오늘날의 대의 민주주의를 대신하는 정치 체제가 아니라 “일종의 대의 민주주의의 보완재”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총 15장의 내용적 구성에서 8장인 ‘직접 민주주의의 실행 특성과 효과’부터는 직접 민주주의가 우리의 정치에서 얼마나 긍정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증하는 것처럼 단순한 보완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글 도입인 1장과 2장에서 저자가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과 효용성을 믿고 있으며, 오히려 대의 민주주의 체제 하에 직접 민주주의적 기능적 요소를 도입해 사실상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다양한 정치 무대에 있어서 숙련된 테크노크라시와 같은 소위 직업적 엘리트들에 비해 일반 대중이 각각의 정치적 이슈에 대해 노련한 이해와 자질을 보일 수 있느냐에 대해 전자의 이들이 사뭇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이러한 선입견에 대해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더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시민들의 역량 부족을 주장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논지이다”라는 반론에 대해서 말이죠. 저역시 이 점에 매우 동의하고 민주주의 자체가 다수의 시민들에 의한 정치체제라는 것은 설사 그것이 책에서나 나오는 이상주의라 할지라도 반드시 이것을 옹호해야 한다는 것을 먼저 밝혀두고 싶습니다.

약 1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스위스의 직접 민주주의 체제는 저자의 논증을 통해 글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연 3회에서 4회에 이르는 레퍼랜덤 (확정적 국민투표)은 저자가 강조하는 시민들의 더할 나위없는 행복과 정치적 고양감에 이르며, 이렇게 시민 개개인이 첨예화 된 정치적 논제에 자신의 선택을 더할 수 있다는 ‘체험’은 단순히 4~5년 주기의 투표권의 행사와 더불어 정치권력과 멀어진다는 소외감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게 만들어주는 직접 민주주의의 덕목이라 할 만합니다. 제가 이 부분에 대해 머릿속으로 한번 그려보기도 했는데요. 예를 들어 요즘 논란이 되었던 ‘선거제도 개편’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해당 투표로 제 의사를 정치권에 전달하는 것과 같은 국민투표는 시민들에게 꽤 정치적 참여 의식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자는 단순히 이상론에 그치지 않고 스위스에 소요되는 이 국민투표와 관련된 비용을 소개하고 특히 자신의 모국인 이탈리아 정치에서 정치인들에게 각종 자문을 해주고 세금을 뜯어가는 대략 40만명이나 되는 자문단체 및 자문위원의 현금 지급 등을 꼬집으며 이탈리아의 같은 경우도 쓸데없는 세금 낭비를 제거한다면 충분히 한정적 국민투표제에 들어가는 소요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사실 직접 민주주의에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공포심을 의회 정치인들과 정치 권력 엘리트들이 조장해 왔던 면이 분명 존재하며, 아예 저자는 스스로 납세의 책임을 갖고 있는 시민들의 권리가 특히 국가 부채와 관련된 문제에서 전혀 의견이 반영되지 않고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한 시민들의 적극 참여가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 유독 국가 부채 문제에 있어서만 다수의 시민들의 의견이 무시되고 있는가”에 대해 저역시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매번 민주주의와 관련한 여러 논저들을 읽을 때마다 “민주 사회에서 정치 참여는 기본권에 속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맥락에서 직접 민주주의는 정치 행위에 대해 적법성 legitmacy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가히 그 의미가 가볍지 않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저자는 15장에서 ‘스위스의 직접 민주주의를 어떻게 하면 유럽과 전세계에 이식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 가능성들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이를테면 전자 투표를 획기적으로 보안 기능을 삽입하여 인터넷 망에서의 실시간 1인 1투표를 돕는 기술적 보완을 언급합니다. 아주 간단히 살펴보면 요즘 스마트 폰들에 들어가 있는 지문인식이나 안면인식과 같은 보안 장치를 바로 실시간으로 투표 참여에 연동시킬 수 있는 기능상의 지원 또한 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앞의 부분은 제가 다소 단순화 시켜 봤지만 정부와 여러 자문 단체들이 이와 관련된 논의를 한다면 획기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열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아주 직접적인 반감으로 제시할 수 있는 ‘숙련되지 않은 시민의 정치 참여’와 ‘각 단계에서 소요되는 비용 문제’는 이렇듯 제반 사항을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근래 문제가 되고 있는 ‘포퓰리즘의 대두’와 관련해서 이어지는 저자의 여러 논증들을 통해 약간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즉, 어떠한 대안도 없는 선동 정치인이 직접 민주주의를 빌미로 자신의 주장을 듣고 있는 시민들에게 일어서서 행동하라는 식의 과격한 선동은 그 자체로 견고한 민주주의적 이념과 체제를 갖고 있는 국가에서는 포퓰리즘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며, 이것이 그냥 말장난에 불과하더라도 어떤 정치적 이슈에 대해 시민들이 저절로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국민 투표의 시행’이 오히려 이를 효과적으로 방지하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많은 정치 이론가들이 다원주의적 설득과 서로간의 깊은 이해 내지는 활발한 토론을 통해 민주주의가 보다 더 민주주의다워지는 유일한 길임을 주장해 왔습니다만, 시민들이 스스로 고도화 된 정치적 분별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오늘날 드러나는 모든 정치적 논쟁과 대결에 대한 관심과 자신의 고유한 의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민주주의에 있어 애초에 어느 것이 먼저 선결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역으로 민주주의와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때부터 차례대로 성취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인식으로 “전문가 정치가 그 무엇보다 ‘투명성’이 필요”하다는 관점은 이들이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민주주의가 왜곡 되었고, 바로 이런 엘리트 정치인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시민들의 역할이 부족했기 때문에 ‘포퓰리즘’과 같은 비정상적인 도출로 나타났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최종적인 진술로, “직접 민주주의가 제대로 발달한다는 것은 계급적 권력이 덜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언급 역시 엘리트 지배체제에서 일반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효과라고 봐도 지나친 해석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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