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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11시 무렵 동기(同期)에게서 톡이 왔다. 창경궁의 ‘느티나무 – 회화나무’ 뭉치(이 표현은 나의 표현)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를 묻는 톡이었다. 연리목(蓮理木)인가 혼인목(婚姻木)인가 하는 물음이었다.

지난 여름 연구원 면접시에 내 왼편에 앉았던, 정말 곱고 차분한 여 동기이다.

곧 하게 될 숲 해설 시연에서 창경궁을 맡았는데 예의 그 나무 부분에서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 톡을 보낸 것이었다.

團톡방에 묻지 않고 나에게 물은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사실 나는 창경궁은 잘 모르고 나무는 더 더욱 모르는데다 찾아 보니 궁궐로서의 창경궁을 다룬 책은 하나도 없다.

급한 김에 나무를 다룬 장세이의 ‘서울 사는 나무’가 있어 들춰보니 이런 구절이 있다.

”창경궁에는 아주 큰 혼인목이 있습니다. 홍화문으로 들어선 다음 바로 오른편으로 길을 잡아 조금 걷다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나무입니다. 혼인을 올린 두 나무는 느티나무와 회화나무입니다.“(327 페이지)

전문가급의 사람들에게는 어려울 바가 없지만 나 같은 나무 비전문가에게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는 구별하기 쉽지 않은 나무들이다.

주(周)나라가 조정(朝庭)에 회화나무를 심어 그들의 조정을 괴정(槐庭)이라 한다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한 식물학자가 회화나무꽃을 괴화(槐花)라고 하는데 괴의 중국어 발음이 회여서 ‘회화나무’ 혹은 ‘회나무’가 되었다는 말을 했다는 인터넷 자료를 보았다.

혼인목은 서로 다른 종(種)이 연결된 것이고 연리목은 같은 종이 연결된 것이라는 책의 결론을 전하니 동기는 연리지는 영양분까지 서로 공유하는 경우이고 혼인목은 그저 서로 기대어 자랄 뿐 영양분을 공유하지는 않는 사이라고 배웠다는 말을 했다.

나는 내일(9월 19일) 왕릉 연구팀 선생님들을 만나 여쭙고, 숲 해설 선생님들께도 여쭌 뒤 답해드리겠다고 말했다. 물론 창경궁 해설사분들께도 물을 것이다. 어떤 결과가 날지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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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에서 피해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어제 정동(貞洞) 해설에서 고종이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머물게 된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커피를 접했고, 정관헌(靜觀軒)은 고종이 커피와 과자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전각이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고종이 아관파천 이전에 이미 커피를 접했다는 기록이 있다. 1884년부터 3년간 고종의 어의(御醫)를 지낸 알렌(Horace Newton Allen)이 쓴 ‘Things Korean‘이란 책에 의하면 아관파천 이전 궁궐에서 고종은 커피를 접했다.

이런 기록은 후에 언급할 퍼시벌 로웰의 책에도 있다.(‘Things Korean‘은 ‘조선견문기’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한편 고종 실록에 의하면 정관헌은 어진(御眞)을 모신 곳이다. 물론 정관헌은 어진 봉안에 적합한 신성한 분위기보다 서양식 카페 분위기가 나는 곳이다. 이런 점 때문에 정관헌과 고종의 커피 사랑을 연결지어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현실적으로 모든 자료를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자료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대한제국 시기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 사람들이 쓴 책들이 내 관심을 끈다.

고종의 어의였던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 – 1932)의 ‘조선견문기’와 ‘알렌의 일기’, 여행가이자 작가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 – 1904)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천문학자이자 작가였던 퍼시벌 로런스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 1855 – 1916)의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 등이다.

순서가 바뀌었지만 대한제국에 대한 관심은 유럽 스타일의 고풍스러운 정동(貞洞)에 대한 관심이 촉발한 것이다. 어제 내가 택한 동선은 정동 극장, 경운궁 중명전, 정동제일교회, 이화여고(손탁 호텔 터), 옛 러시아 공사관, 캐나다 대사관, 프란치스코 회 등이다.

이제 경운궁도 포함하고 배재학당, 영국문화원, 성공회 성당, 세실극장 등을 포함하는 종합 시나리오에 도전해보고 싶다. 어떤 면에서는 종묘(宗廟)보다 정동(貞洞) 일대가 내 주 해설처가 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드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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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내 관심권에서 멀다. 하지만 피곤하고 마음이 무겁고 휑한 바람 같은 것에 점령될 때 횔덜린은 내게 온다.

그가 내 구원은 아니다. 다만 그의 무겁고 어두운 시가 내 마음을 위로해 주고 그처럼 불행한 사람도 있다는 생각이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가정교사로 일하던 집의 여주인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가 서른셋의 나이로 죽자 정신착란 징후를 보이다가 정신병원에 강제 이송되기도 했던 그는 반평생을 정신착란 상태로 지낸 불행한 시인이다.

“오직 쓰라린 내면의 고통 속에서만 내가 사랑할 가장 아름다운 것 태어나네.”(Und unter Schmerzen nur gedeiht. Das Liebste, was mein Herz genossen.)..

이 구절은 ‘운명(Das Schicksal)’이란 제목의 시의 한 구절이다. 그의 삶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면 무례할까?

‘하이페리온’이란 시에서 그는 “이기심으로 얼룩진 인간들끼리의 일들은 잊도록 하라. 그리고 온갖 번민과 슬픔으로 가득 차서 갈구하는 마음이여, 돌아가라! 그대의 근원인 자연으로, 방황이 없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그 품으로.“란 말을 했다.

‘저녁의 환상’이란 시에서는 “하지만 나 어디로 가나?/ 속세의 인간들/ 그 노력과 댓가로 살며, 거듭되는 어려움과 안식 속에서/ 모두 즐겁게 지내는데, 왜 내 가슴 속/ 가시만은 잠들지 않는가?”라는 말을 했다.

절실하고 무겁고 슬픈 언어들이 그의 시의 주조(主調)이다.

“그의 죽음의 잠의 침대 머리맡에는/ 초 한 자루 없어요. 당연하죠. 뭣에 쓰겠어요?/ (하지만 생전에 그가 켰던 초들이/ 일제히 밝혀져 있는 걸 내가 못 보는 건지도 모르죠.)”로 시작되는 시..

황인숙 시인의 ‘시인의 묘’라는 시가 횔덜린을 염두에 둔 것인지 생각한 적이 있지만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불행하고 슬프게 살다 간 사람들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오전에 정동 순례를 마치고 오후에는 윤동주문학관과 청운문학도서관에 들러 어슬렁거렸다. 할 일이 많은데 시작하기까지 많이 미적거리는 습관의 일환이 아니라 기분 전환을 위한 것이다.

자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것이고 횔덜린처럼 ‘나 어디로 가는가.. 왜 내 가슴 속 가시만은 잠들지 않는가.‘ 같은 탄식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일은 나의 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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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는 정동(貞洞)에 가면 자주 들을 수 있는 이름이다. 정동 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세운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이화여고 6대 교장을 지낸 그분의 따님 아펜젤러..

정동 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세운 아버지 아펜젤러는 헨리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1858 – 1902)이고 이화여고 6대 교장을 지낸 따님 아펜젤러는 앨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 1885 – 1950)이다.

헨리 아펜젤러는 44세에 성경 번역을 위해 목포로 가는 배에서 한국인 소녀를 구하다가 물에 빠져 목숨을 잃는다.

마이어 구겐하임의 여섯째 아들인 벤자민 구겐하임이 1912년 딸 페기 구겐하임의 생일에 가려고 타이타닉호에 탔다가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여자와 아이들을 구명 보트에 태우고 자신은 정장 차림으로 신사답게 죽을 것이라면서 구명 조끼를 거부하고 죽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아,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

앨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는 1912년 이화여고 교사가 되었고 1922년에는 교장이 되었다. 이화여고 창립자는 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 1832 – 1909)이다.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가 배재학당을 설립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이화학당을 설립했다.

한편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주치의이자 선교사였던 알렌은 호레이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 – 1932)이다.

헨리 아펜젤러와 동갑이다.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 – 1916)이다.

그런데 “정오가 되면 성공회쪽 담을 넘어 종소리가 들린다/ 시내의 한복판에서 듣는 종소리는 일종의 슬픔과 같은 것이었다..”는 김용범 시인의 시는 어디서 전문(全文)을 찾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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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은 현재 경운궁 밖에 위치하고 있다. 정동극장을 나와 바로 우회전 해 십여 미터 가면 만날 수 있다. 지난 8월 경운궁 답사에서 동선을 설정하며 문의했는데 경운궁 경내에서 중명전을 보기 위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나는 중명전을 보러 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동선을 취해도 되는지를 물었었다. 당연히 안 된다는 답을 들었다.

중명전의 옛 이름은 수옥헌이다. 중명전이 궁 밖에 위치하게 된 것은 일제가 궁을 축소하기 위해 석조전과 중명전 사이에 도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중명전은 궁 밖으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전각이자 고종의 서재로 쓰이던 곳이다. 고종은 이곳에서 여러 외국 사신을 접견했다.

긴박한 대한제국기에 서재라니 할 수도 있다. 1904년 경운궁의 대화재로 고종은 수옥헌을 임시 거처로 쓰며 전각의 이름을 중명전으로 격상시켰다.

궁궐 전각에도 위계가 있다.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이 그것이다. 근정전, 자선당, 곤녕합, 비현각, 집옥재, 영춘헌, 경회루, 향원정 등이 그 예이다.

이 여덟 전각들 중 일곱 전각은 경복궁의 것들이다. 하나 예외인 것은 영춘헌이다. 창경궁의 건물로 정조의 서재로 쓰인 곳이다. 정조 역시 책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군주이다.

모레 치를 시연 준비를 하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나 역시 미적거리고 있다. 그래도 나는 내일 치를 시연을 아직 준비하지도 못했다는 분에 비하면 나은 걸까?

미적거리다가 꼭 마감에 임박해 글을 쓰는 경향이 있는데 일단 시작을 하면 어떤 미지의 힘이 자신을 쓰기 모드로 몰고 간다는 분의 글을 최근 읽었다.

글과 달리 해설은 쓰고 외워 말로 설명까지 해야 하니 더 어려운데 참 길게 미적거린다는 생각이 든다. 완벽주의 탓도 아니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쓰다가 자신감이 떨어지면 중단하는 이 것, 양가감정일까?

그나마 글을 외우기 좋게 쓰는 비결 같은 것을 조금 알게 되었다. 다행이지만 그것을 믿고 미적거린다면 문제이다. 뒹굴거리다가 영감이 생기기를 바라는 거라면 의도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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