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런 바라드 컴북스 이론총서
박신현 지음 / 컴북스캠퍼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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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런 바라드를 안 것은 박준영의 ‘철학, 개념’을 통해서다. 바라드는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에 기반하여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함을 넘어 그릇된 것이라 말했다. 바라드가 제시한 대안은 하이젠베르크의 스승 보어에게서 나온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아닌 보어의 상보성 원리이다. 바라드는 물리학 박사 출신의 철학자다. 신유물론 페미니스트로 분류된다. 바라드는 몸이란 단순히 세계 안에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몸과 환경은 내부 작용으로 함께 구성된다는 것이다. 인간 몸을 포함한 모든 몸은 본질적인 경계와 속성을 지니지 않고 내부 - 작용의 개방된 역동성을 통해 특정한 경계와 속성을 획득하게 되는 현상이다.


바라드에게 세계와 우주, 공간성과 시간성도 내부 - 작용의 역동성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현상이다. 바라드는 과거와 미래가 서로를 통해 거듭 재형성된다고 본다. 바라드에게 개방성은 존재론적 비결정성과 직결된다. 바라드는 비결정성이 물질의 존재뿐 아니라 비존재론의 열쇠라고 설명한다. 바라드가 제시한 보어의 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려는 자연의 일부다. 보어에게 사물은 본질적으로 확정된 경계나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또한 언어는 본질적으로 확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보어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는 데카르트적 믿음과 뉴턴 물리학의 재현주의에 의문을 제기한다. 보어가 양자이론의 인식론적 의미에 집중하는 데 그쳤다면 바라드는 보어의 통찰에 함축된 중대한 존재론적 차원들을 탐색한다. 보어가, 이미 존재하는 인간 관찰자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인간중심적 한계를 지녔다면 바라드는 보어의 통찰력 안에서 중요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함축을 탐색해 발전시킨다. 바라드는 양자이론이 미시세계뿐 아니라 거시세계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바라드에 따르면 양자물리학의 일반적 관념은 없다. 


바라드는 양자물리학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은 명시적으로 정치적인 물리학이라고 말한다. 이는 물리학은 이미 중립적이지 않으며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바라드는 2007년까지 양자역학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다가 2012년 이후 양자장론을 면밀히 다루기 시작했다. 양자장론으로 확장된 얽힘과 기억, 미결정성과 무한성, 무와 진공에 대한 바라드의 사유는 더욱 심화된다. 바라드는 이런 물리학의 통찰을 바탕으로 윤리, 정의, 역사에 대한 성찰과 전망을 제공한다. 바라드는 양자역학을 일반 독자들에게 이해시킬 언어를 찾느라 이미 충분히 힘들었는데 양자장론을 설명하는 데에는 더욱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바라드에게 실험하기, 이론화하기, 알기, 측정하기, 관찰하기는 모두 물질적인 실천들이며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참여다. 바라드는 보어의 양자이론 외에도 푸코의 담론 - 권력 지식 실천이론,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 이론을 또 다른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바라드에게 현상은 관계의 원자다. 이러한 현상들이 현실을 구성한다. 바라드가 만든 내부 - 작용이란 말은 핵심적 개념이다. 이는 얽혀 있는 행위성들의 상호적인 구성을 의미한다. 이는 상호라는 말 대신 내부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세계는 이런 내부 작용의 역동적 과정이며 우주는 내부 작용으로서 계속 생성중이다. 


행위적 실재론에서 분리는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의 본질적 특성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차이, 물질화하는 차이다. 바라드에게 존재의 기본 단위는 본질적 경계와 속성을 지닌 독립된 사물이 아니라 현상이다. 현상은 영원히 다시 주름 잡히고 다시 형성된다. 바라드는 개별 행위성이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 - 작용을 통해 창발한다고 설명한다. 행위성들은 개별 요소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 얽힘의 관계 속에서 구별된다. 실험실에서 행하는 측정이 내부 - 작용의 예다. 


바라드는 기구들(apparatuses)이 단순한 관찰도구가 아니라 물질이 되는 경계 - 그리기 실천이며, 세계의 특정한 물질적 재현이라 본다. 바라드에게 공간적 분리가능성 대신 행위의 분리가능성과 행위적 절단이 객관성을 위한 조건이 된다. 행위적 실재론에서 물질은 고정된 물체가 아니다. 물질은 내부 - 작용하는 생성중인 실질이고, 사물이 아니라 행위이며 행위성의 응결이다. 바라드에게 몸은 물질적 담론적인 현상이다. 다른 모든 몸처럼 인간 신체는 내부 - 작용의 개방된 역동성을 통해 특정한 경계와 속성을 획득하는 현상이다.


인간은 자신이 참여하는 물질적 담론적 실천을 통해 내부- 작용하며 함께 구성되는 주체로서 나타난다. 여기서 인간 주체는 기구의 외부적 관찰자도, 기구의 작동에 개입하는 독립된 주체도 아니며 단순히 기술의 산출물도 아니다. 불가사리의 동족인 거미불가사리는 뇌도 없고 눈도 없지만 전체 골격이 하나의 커다란 눈을 형성하고 있는 동물이다. 거미불가사리의 골격계는 죽 늘어선 마이크로렌즈들, 표면 위에 정렬된 작은 방해석 수정 돔들로 구성되어 있다. 널리 퍼진 신경계의 일부로서 빛을 모으고 집중시키는 이것들은 일종의 합성 눈으로 기능한다. 


바라드는 거미불가사리의 시각 시스템이 육체화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거미불가사리는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눈이다. 그 자체가 시각화하는 기구이며 살아 숨쉬고 변형하는 광학 시스템이다. 거미불가사리는 몸이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거미불가사리는 주변 환경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빛에 반응해 착색을 변화시킬 수 있다. 포식자에게 잡아먹힐 위험에 빠지면 신체 부분을 끊어버리고 다시 재생시킬 수 있다. 이는 육체가 세계 안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며, 사물이 아니라 수행성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육체화는 세계 안에 구체적으로 위치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역동적 구체화 속에서 세계의 일부가 되는 문제다. 아는 것은 인식론적인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아는 것은 세계에 대한 특정한 참여이고 존재론적인 수행이다. 우리에게도 아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얽혀 있는 물질적 실천이다. 아는 것은 직접적인 물질적 참여이며 세계의 일부로서 세계와 내부 - 작용하는 실천이다. 바라드에 의하면 기구는 특정한 물질적 담론적 실천이다. 기구는 중요한 차이들을 생산한다. 기구는 물질과 의미를 형성하고 현상을 생산하며 그 일부가 되는 경계 - 만들기 실천이다. 


기구는 세계의 물질적 형성/ 역동적인 재형성이다. 기구는 그 자체가 현상이다. 기구는 내재적 경계를 지니지 않고 개방된 실천이다. 기구는 세계 속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성과 공간성, 시간성을 재형성한다. 바라드는 몸 경계가 자명해 보이지만 본질은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특정한 신체적 수행의 반복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바라드는 우리가 어떤 가장자리를 자세히 보면 우리가 보는 것은 빛과 어둠 사이의 선명한 경계가 아니라 일련의 빛과 어둠의 띠들 즉 회절 패턴이며 이는 물리광학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한다. 


바라드는 도나 해러웨이가 표현했듯 만들어진 신체가 아닌 만들어지는 신체를 이야기한다. 바라드는 어떻게 신체가 세상 안에 자리 잡고 위치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신체가 세계와 함께 또는 세계의 일부로서 구성되는가 즉 세계 안의 존재가 아니라 세계의 존재인가를 논증한다. 바라드는 몸의 물질성에 집중하면서 물질 자체가 얽힘을 수반하며 얽힘이 물질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회절(diffraction)은 바라드가 사용하는 방법론적 접근 방식을 은유하는 중요한 물리적 현실이다. 회절에는 물리학적으로 심오한 암시가 담겨있다. 회절은 파동들이 겹칠 때 결합하고 파동들이 어떤 장애물들과 만날 때 휘어지고 퍼지는 방식과 관련된다. 연못에 던져진 돌이 일으키는 교란이 겹칠 경우 파동들이 서로 간섭한다고 말하고 창조된 패턴은 회절 패턴이라 한다. CD 표면 위의 무지개 효과는 회절 현상이다. 공작 깃털, 나비 날개 위 무지개빛도 회절 효과다. 고전물리학에 따르면 오직 파동만 회절 패턴을 만든다. 입자는 그렇지 않다. 


양자물리학은 어떤 상황 아래서는 물질도 회절 패턴을 만든다고 말한다. 단지 빛뿐 아니라 물질은 어떤 상황들에서는 입자 행동을 나타내고 다른 상황에서는 파동 행동을 나타낸다. 이를 파동 - 입자 이중성 역설이라 한다. 인식론과 방법론에서 반영(reflection)과 회절(differection)은 서로 대조되는 광학적 은유다. 해러웨이는 회절을 반영이라는 낡은 은유에의 대안으로 제안한다. 반영과 회절은 공히 광학적 현상이지만 반영은 반사하기와 동일성에 대한 것인 데 반해 회절은 차이의 패턴들에 주목한다. 


과학적 사실주의는 과학적 지식이 물리적 실재를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믿는다. 사회적 구성주의자들은 지식을 자연보다는 문화의 반영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반영성은 세계를 멀리 떨어져서 본다. 반영성은 반복적인 모방일뿐이다. 반영적 방법론은 원본과 일치하는 복사물, 사물을 왜곡 없이 반영하는 언어를 믿는다. 회절적 방법론에서 내부와 외부의 절대적 분리는 없으며 주체와 객체는 미리 존재하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내부 - 작용을 통해 창발한다. 바라드에게 회절 패턴은 경계의 비본질적인 본성, 경계의 반복적인 재형성, 차이들의 얽힘을 의미한다. 


회절은 주체와 객체,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 유기체와 비유기체, 인식론과 존재론 사이의 본질적 분리가능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현상이다. 회절은 경계의 확장성과 영속성의 한계를 표시한다. 회절은 사소한 차이들을 존중하는 방법론이다. 바라드에게는 시간과 공간도 현상이다. 시간과 공간은 내부 - 작용으로 생산된다. 우리는 우주의 물질적 생성의 행위자적 일부이므로 우리가 실행에 참여하는 절단이 중요하다. 바라드는 내부 - 작용이 언제나 특정한 배제를 수반하며, 배제는 결정론의 가능성을 저지해 열린 미래의 조건을 제공한다고 강조한다. 


내부 - 작용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반복적으로 재구성한다. 가능성들은 가만히 정지해 있지 않는다. 가능성들은 그 실현 속에서 좁혀지지 않으므로 지금은 배제되었지만 가능했을 수도 있는 새로운 가능성들이 열린다. 가능성들은 재구성되고 재구성하고 있다. 우리는 우주의 중간에서 만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우주와 교섭하고 우주와 의견을 조율하면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책임지는 겸손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 


바라드는 세계 자체가 매우 퀴어하다고 주장한다. 바라드는 만약 자연 그 자체가 퀴어라면 어떨까?라고 질문하면서 퀴어란 자연/ 문화 이분법을 포함해 정체성과 이분법에 대한 급진적인 문제 제기라고 논한다. 바라드에게 퀴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고정되지 않고 살아서 변화하는 유기체, 욕망하는 급진적인 개방성이라고 할 수 있다. 브루스 베이지밀은 우주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더욱 퀴어하다는 진화생물학자 홀데인의 유명한 말로 시작하며 세계는 각양각색의 동성애, 양성애, 트랜스젠더 생물들로 가득하다고 쓴다. 


번개도 퀴어하다. 번개가 치기 전 지상과 하늘 사이에서 흥미로운 소통, 일종의 더듬거리는 수다가 벌어진다. 하늘에서 스텝리더라는 최초의 몸짓이 뻗어져 나오면 땅은 스스로 위쪽을 향하는 신호로 반응한다. 하늘로부터의 스텝리더가 땅에서 10~100미터 안에 있을 때 땅은 이제 그곳에 거대한 과잉 전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땅 위의 어떤 사물들이 스텝리더를 향해 작은 흐름들을 내보냄으로써 응답한다. 바라드는 “이 하늘과 땅 사이 소통의 교환 속에서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알게 되기도 전에 이러한 상호 교환이 일어날까? 어떻게 알게 되기도 전에 이러한 상호 교환이 일어날까? 어떻게 땅은 자신의 미래 대화자를 향해 활동하게 될까? 송신자가 전송을 하는 순간에 아직 특정되지 않는 수신자에게 메시지를 전송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고 묻는다. 


노랑가오리의 신경수용 세포 역시 역설적인 소통의 사례다. 노랑가오리의 신경수용기 세포는 신비로운 투시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메시지가 언제 자신들에게 보내질지 예측할 수 있다. 바라드는 원자보다 더 퀴어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원자의 본성과 정체성은 비결정성 자체다. 바라드는 모든 몸은 세계의 반복적 내부 - 작용을 통해서 물질화되며 물질성의 본질 자체가 얽힘이라고 본다. 바라드는 우리가 외부의 타자를 만짐으로써 타자와 맺는 관계성뿐 아니라 자기 몸을 스스로 만짐으로써 내부의 타자들 즉 우리 몸을 지나쳐간 수많은 다른 존재들에 대해 깨닫게 되는 감수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라드에게 책임이란 응답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바라드는 페미니즘을 물리학에 가져오는 만큼 물리학에 페미니즘을 가져옴으로써 사회 정의에 기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바라드는 느끼고 욕망하고 경험하는 것은 인간 의식만의 고유 특성이나 능력이 아니라고 말하며 물질은 느끼고 대화하고 고통받고 욕망하고 갈망하며 기억한다는 견해가 페미니즘적 참여임을 강조한다. 바라드는 우리 존재가 물려받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로질러 무수한 타자들과 관계 맺고 있으므로 타자에 대한 책임은 무한히 확장하고 도래할 진정한 정의를 향한 노력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삶과 죽음은 둘이라고 하기도, 하나라고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바라드는 양자 얽힘을 묘사하기에 하나는 너무 적고 둘은 너무 많으며 사이 개념이 새롭게 사유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바라드는 시간과 장소, 존재의 경계들이 결정되더라도 고정된 것은 아니며 현존하지 않는 타자성일지라도 없어진 것은 아니며 언제나 되돌아오고 도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바라드는 산타크루즈의 해변을 산책하며 “지금 여기에 다수가, 그 특수성 안에 무한성이 응축되어 있다. 각 모래알과 흙 한 줌은 시공간을 가로질러 회절하고 얽혀 있다. 책임지는 것,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우리를 관통하는 시공간물질의 두터운 얽힘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라드는 양자장론에 따라 텅 빈 공간은 전혀 비어 있지 않으며 무(無)는 무한한 풍부함이라고 강조한다. 바라드는 양자물리학이 공간적 회절을 넘어서 시간적 회절의 가능성도 연다고 설명한다. 시간적 회절은 비결정성 원리의 결과로서 한 주어진 독립체는 다른 시간들의 중첩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입자가 비결정적으로 여러 번 가령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공존하고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바라드는 모든 이론화는 정치적이며 물리학과 정치는 언제나 이미 서로를 통과해 나아간다고 설명한다. 바라드는 과학은 중립적이지 않기에 어떤 양자물리학 통찰도 무비판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바라드는 자신의 양자물리학에 대한 행위적 실재론 해석 역시 정치적 물리학이라고 밝힌다. 바라드는 어떤 물리학인가, 누구의 물리학인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바라드에게 시학이란 기존 표현 양식에 따라 측정된 어떤 표현불가능성에 직면할 때 표현을 향한 계속되는 열망과 관련이 있다. 바라드에 의하면 시위자들은 경찰과 직면할 때는 얼음처럼 단단해지고 도시의 협소한 거리를 통해 탈출할 때는 물처럼 유동적이 되고 갑작스러운 군중 시위를 위해서 이슬처럼 모이며 체포를 피하고 또 다른 날 싸우기 위해서 안개처럼 흩어진다. 바라드는 양자물리학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독립체를 사이의 관계가 아닌 관계성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는 개인들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다르게 생각하려는 것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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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 본 한반도 - 북녘을 향한 물음에 인공위성이 답하다
임철희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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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 온 한반도’라 하지만 과학 책이 아니다. 부제는 ‘북녘을 향한 물음에 인공위성이 답하다‘다. 저자는 2021년부터 인공위성으로 지구의 산림 환경변화를 관찰하고 기후변화에 따른 미래를 전망하고 있는 국민대학교 교수 임철희다. 인류가 쏘아 올린 인공위성은 지구의 진짜 위성인 달보다 가깝게, 밤하늘의 별보다 많이 지구를 돌고 있다. 지구를 관측하는 인공위성이 가장 많이 활동해야 할 곳이 한반도다. 갈 수 없는 북녘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본 한반도란 제목은 북한은 항공기나 드론으로 관측할 수 없는, 인공위성을 통해서만 관측할 수 있는 곳이기에 나온 말이다. 인공위성 분야에는 시간 해상도란 말이 있다. 공간 해상도가 화소(?素)와 관련된 용어라면 시간 해상도란 인공위성이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같은 영역을 관측하게 되는지와 관련된 용어다. 북한은 1993년 밤하늘의 인공 조명이 밝다가 한동안 어두워졌고 2013년에 조금 나아졌다. 이른바 전력이 부족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의 북한의 실상을 증거하는 자료다. 


큰 기근이 찾아온 북한의 1990년대를 고난의 행군 시기라 부른다. 지금 한반도는 그저 공간이지만 어제의 한반도와 내일의 한반도 또한 지켜보고 있기에 시공간이란 저자의 말(프롤로그)이 이해된다. 그런데 내일을 지켜본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저자에 의하면 우주에서 본 야경은 그저 빛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현상을 대변하는 자료다.(40 페이지) 남북 경제협력이나 통일의 경제적 효과를 논할 때 항상 등장하는 단골손님이 북한의 광물자원이다. 마그네사이트 광석 매장량은 세계 1위이고 텅스텐, 흑연 매장량도 세계 10위권에 해당한다.


함경북도 무산광산은 북한 최대의 철광석 부존(賦存) 지역이다. 부존 자원이란 경제적 목적에 이용될 수 있는 모든 천연 자원을 의미한다. 자원의 내수 활용에 한계가 있는 북한에서 철광석 채굴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은 흥미롭다. 북한은 2017년 4차 핵실험으로 유엔 안보리에 의해 모든 광물 수출을 금지당했으나 공해상 선박간 환적 방식으로 중국에 석탄, 철, 철광석 등 광물을 불법으로 수출했다. 선박간 환적이란 한 선박에서 다른 선박으로 화물을 이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 함경남도 검덕지구 광산은 50여개의 광산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전 세계 국가들이 석탄 사용 및 개발을 줄이려 하는데 비해 김정은 정권(2011년 집권)은 석탄 개발을 장려하고 있다. 백두산 천지에서 유일하게 물이 빠져 나가는 협곡을 달문(?門)이라 한다. 여기에서 물이 흘러나와 비룡폭포를 만들고 송화강까지 흘러간다. 백두산은 북서쪽은 중국 영토에 속하고 남동쪽은 북한 영토에 속한다. 최근 창바이산(중국명)이란 이름으로 세계 지질공원에 등재되었다. 


한국전쟁은 산림 훼손 전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북한 자강도의 도 소재지인 강계는 한국전쟁 당시 임시 수도 역할을 한 곳이다. 혜산시는 탈북민이 많이 거쳐 오는 곳이다. 파주 통일전망대에서 보이는 개성은 그로 인해 다른 곳보다 적극적으로 산림을 복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공위성에서 관측하는 온도는 대체로 지표온도를 말한다. 인공지가 많은 도시에서는 지표온도가 대기온도보다 높아 열섬현상 관측의 주요 지표가 된다.


기후변화로 겪는 가장 큰 재난은 수문학적 재해로 나타난다. 가뭄과 홍수가 대표적인데 인공위성은 이런 재난 발생을 대비하거나 피해 현상을 파악하는 데 효과적이다. 북한은 연소율과 열효율이 낮은 취사, 난방 연료와 질이 낮은 석탄을 많이 사용하는 탓에 초미세먼지가 많이 배출된다. 2015년 기준 북한의 에너지 소비량은 남한의 1/25에 지나지 않지만 미세먼지, 초미세먼지 배출량은 2.6배, 2.3배에 달한다. 


북한의 하수 처리 비율은 14% 정도다. 상류에서 배출된 하수가 그대로 상수원으로 유입되어 식수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도시나 공장, 광산 지역 등을 지나는 북한 주요 강들의 오염도는 매우 심각하다. 북한의 강들은 수질이 아주 나쁘다. 북한에도 갯벌들이 존재한다. 사실상 서해안 전체에 갯벌지대가 존재하며 압록강 하구, 청천강 하구 지역이 특히 유명하다. 동해안에도 두만강 갯벌이 있다. 


해마다 8만 마리 이상의 물새가 서식하며 동아시아 ~ 대양주(EAAFP) 철새 이동 경로 파트너십으로 등재된 청천강 하구의 문덕 갯벌은 2008년 람사르 습지에 등재되었다. 나선 철새보호구 또한 람사르 습지로 등재되었고 금야철새 보호구는 동아시아 ~ 대양주 철새 이동 경로 파트너십으로 등록되어 있다. 북한에서도 간척이 많이 이루어져 갯벌 환경파괴가 우려된다. 북한의 식량문제로 인한 갯벌 간척은 오랜 시간 이루어지고 있다. 평안북도 신미도 주변 외에도 북한 서해안에는 수많은 간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인공위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갯벌은 해산물 공급처를 넘어 수많은 생명의 보고, 탄소 저장고, 새들의 서식지다. 갯벌이 간척되고 나면 되돌리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전 세계가 북한이란 작은 나라를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북한의 잦은 군사도발과, 하지 말라는 핵무기 개발을 계속 시도하기 때문이다. 영변은 북한의 대표적 핵시설단지다. 그 외에도 북한에는 우라늄 농축시설, 우라늄 광산, 원자로, 핵폐기물 저장소 등 핵과 관련한 다양한 시설들이 전국에 위치한다. 


북한 핵 연구의 고장이 영변이라면 핵실험의 중심지는 풍계리다. 핵실험과 핵무기 개발의 주원료인 우라늄 채굴은 평산광산이 대표적이다. 경수로 냉각수로 인해 겨울철 구룡강의 얼음이 녹는 현상과 열적외선 관측에서 원자로 온도가 높게 관측되고 있다는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영변은 여전히 바쁘다. 풍계리는 해발 2,205미터의 만탑산을 비롯 기운봉, 학무산, 연두봉 등 해발 1천 미터 이상의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암반 대부분이 화강암으로 핵실험 이후 발생하는 각종 방사성 물질의 유출 가능성도 크지 않아 핵실험 장소로 낙점된 것으로 보인다.


일부 전문가들은 풍계리 핵실험장이 백두산 지하 마그마 지대와 인접하여 북한의 잦은 핵실험이 백두산 화산 폭발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함경남도 요덕군에 위치한 요덕 정치범 수용소의 모습도 보인다. 여느 마을 같은 곳이다. 통일이 되거나 군사적 긴장감이 줄어든다 해도 인공위성의 역할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같은 인공위성에서 관측한 동일 정보도 시각을 달리하면 군사에서 민간용으로 활용도가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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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의 역사 - 한반도 정전체제와 비무장지대
한모니까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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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평화기행'의 공저자 중 한 분인 한모니까님의 'DMZ의 역사'. 저자에 의하면 DMZ를 만들자고 제안한 나라는 미국이나 중국이 아닌 영국이었다. 미국 다음으로 한반도에 달려온 영국의 내각과 참모부는 중국군이 참전한 1950년 11월 확전을 막을 방안의 하나로 북위 40도선 정도에서 진격을 중지하고 완충지대를 만들고 이 지대에 공산군이 재침략을 위해 집결하면 공중폭격으로 분쇄하자는 의견을 냈다. 영국 외무부가 구상한 완충지대 범위는 정주~흥남 라인에서 한만(韓滿) 국경까지였다.(1980년대까지 한만국경이라 불렸고 그 이후 북중(북한 중국) 국경이라 불린다.) 

'대한민국 평화기행'의 공저자 중 한 분인 한모니까님의 'DMZ의 역사'. 저자에 의하면 DMZ를 만들자고 제안한 나라는 미국이나 중국이 아닌 영국이었다. 미국 다음으로 한반도에 달려온 영국의 내각과 참모부는 중국군이 참전한 1950년 11월 확전을 막을 방안의 하나로 북위 40도선 정도에서 진격을 중지하고 완충지대를 만들고 이 지대에 공산군이 재침략을 위해 집결하면 공중폭격으로 분쇄하자는 의견을 냈다. 영국 외무부가 구상한 완충지대 범위는 정주~흥남 라인에서 한만(韓滿) 국경까지였다.(1980년대까지 한만국경이라 불렸고 그 이후 북중(북한 중국) 국경이라 불린다.) 


영국은 연합국이 중국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고 미국은 군사적 우월을 자신했다. 미국과 한국은 비무장지대를 만드는 것은 자유진영의 패배라고 강력 반대했으나 대세는 설치쪽으로 흘러갔다. 미국이 비무장지대안을 검토한 것은 자체적으로 비무장지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유엔의 확전 우려와 비무장지대에 대한 지지 분위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군사 전문가 마샬 콘월은 정치적 경계선과 그에 평행하는 두 곳의 중립지대를 설정해 거기에 무기와 군대를 제한하거나 금지시키는 원칙이 필요하다고 하며 그런 비무장지대를 지리적 군축이라 표현했다. 


1950년 10월 중국이 참전했고 1950년 11월 30일 트루먼은 핵무기 사용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인도 등은 핵 사용 및 확전 반대를 표명했다. 12월 중국군은 철수하는 미8군의 뒤를 따라 38선까지 내려왔다. 군사적으로 전황이 유리하던 중국은 정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비무장지대 설정을 통해 정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미국 및 서유럽 국들과 인식을 같이했다. 4km 폭의 비무장지대를 제안한 것은 공산군 측이었다. 현재의 전선에서 양측이 2km씩 후퇴하고 그 사이의 지대를 비무장지대로 둘 것을 제안한 것이다. 


양측은 처음 비무장지대 가 32km(유엔군) 또는 20km(공산군)는 되어야 한다고 보았지만 방어의 관리와 효율을 고려하여 폭을 좁혀갔다. 양측은 모두 개성을 차지하고자 했다. 개성 문제는 공산군 측이 38선이 아니라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는 문제를 수용하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38선을 고수하면 개성을 남측에 돌려주거나 최소한 비무장지대 안에 두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군사분계선 표식물은 7피트 높이의 금속이나 목재로 만들어진 말뚝 형태였다. 군사분계선은 말뚝 형태로만 표시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흔히 군사분계선은 선이 아니라 1292개의 점이라고 알려졌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300-500미터 간격으로 표식물이 있다고 해도 월경의 가능성은 충분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표식물과 표식물을 연결하는 가는 선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물론 이때의 선은 오늘날 철책처럼 공고하게 전면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고 말뚝과 말뚝을 단순히 연결하는 정도였다. 더구나 말뚝과 말뚝을 연결하는 선도 관리가 되지 않으면서 군사분계선을 표시했던 선은 없어지고 말뚝도 훼손되어 갔다. 


군사분계선과 더불어 식별 가능한 비무장지대 남북 경계선도 설치했다. 표지판 형태의 접근 경고용 선이었다. 성근 철조망을 잇는 비무장지대 경계선이 곳곳에 표시되었다. 북. 중측이 주장한 비무장지대 내 질서 유지를 위한 민정 경찰 배치가 받아들여졌다. 민정 경찰이 무기를 휴대할 수 있게 되자 후에 이는 비무장지대 무장화의 시작이 되었다. 북한은 비무장지대에 지하갱도(땅굴)를 만들었다. 1950년대 말 미국의 신형 무기(특히 핵무기) 도입 때문이었다. 북한의 지하갱도는 1974년 연천, 1975년 철원, 1978년 파주, 1990년 양구 등에서 발견되었다. 


1960년대 북측 비무장지대에서 땅굴과 같은 지하 요새화가 진행되었다면 남측 비무장지대는 감시초소 형태의 요새화가 추진되었다. 경계초소 또는 감시초소가 등장한 것인데 이는 관측용인 전초(op; outpost)였다. 일부 전초가 군사분계선에 가깝게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전진배치된 전초가 전진 관측소로 분류되고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경계근무를 하는 초소가 되었다. 그리고 비무장지대 남쪽 경계 즉 남방한계선상에 있는 전초는 관측소(observation post; OPs.)라 불렸다. 이 과정에서 특히 전진 관측소의 요새화가 진행되었다. 이 전진 관측소가 경계초소(guard post; GP)다. 


북측은 1963-1965년 군사분계선 북쪽의 자신들의 초소들을 광범위하게 연결시키는 요새화된 진지를 구축하고 그것을 식목(植木)으로 위장했다. 남측은 경계 강화를 위해 진지를 구축했다. 1960년대 후반 비무장지대가 무장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철책의 설치였다. 이전에도 남북방한계선에 철조망이나 목책이 설치되어 있었다. 끊기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던 목책이나 철조망을 포함하여 비무장지대에서는 1967년 후반부터 대대적인 철책 교체 작업이 진행되었다. 지뢰, 트립 플레이와 부비트랩 등으로 강화된 100미터 폭의 이중 철조망이 설치된 것이다. 


미국의 베트남에서의 철책 설치와 같은 시기의 일이다. 철책 공사는 1968년 1, 21 사태 이후 피치를 올려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철책 구축과 함께 대침투체계의 하나로 초목 통제 프로그램이 시행되었다. 고엽제가 살포되었다. 군 경계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철책 주변의 시야를 가리는 풀과 나무를 제거한 곳을 불모지 지역이라 한다. 비무장지대의 자연생태는 군사적 통제 덕분에 확보되었지만 동시에 이를 훼손하는 군사작전 또한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1966년 비무장지대 생태 연구는 스미스소니언 생태 프로그램의 일부로서 미 공군과학연구실의 지원을 받으며 시작되었다.


철책선 주변 불모지는 사계청소(射界淸掃)라는 이름의 군사적전의 결과다. 비무장지대의 무성한 식물은 자연생태 회복의 상징적 존재이지만 군사작전의 측면에서 보면 시야를 방해하는 요소다. 비무장지대 안에는 두 개의 마을만이 존재한다. 남측의 대성동, 북측의 기정동이다. 대성동과 기정동은 장단(長湍) 사천강(沙川江)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인접한 마을이다. 대성동은 마을에 있는 대성(臺城; 봉화대 주위에 들러 쌓은 성)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기정동(機井洞)이란 한자 표기에서 알 수 있듯 옛날 기계(방아)로 물을 퍼 올린 마을이란 의미다. 행정상 대성동은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에 속했고 기정동은 대성군 동면사무소가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두 마을 모두 사천강 줄기를 수원으로 이용한 논이 발달했고 서울보다는 개성 권역에 가까운 경제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다. 대성동 주민의 법적 지위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유엔군 사령관 통제하의 주민이었다. 


한반도 비무장지대는 냉전이 응축된 공간이자 냉전의 전형적인 양상이 담긴 공간이다. 이곳은 세계 냉전의 형성기에 벌어진 열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것도 중국의 참전으로 한국전쟁의 양상이 한. 중국 국경을 넘어 확전의 조짐을 보였을 때 서방의 강대국들이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시키기 위해 구상한 것이었다. 70년전에는 정전(停戰)의 조건으로서 정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비무장지대의 역할이 필요했다. 이제는 평화의 조건이 되고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 될 비무장지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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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로 산다는 것 - 왕권과 신권의 팽팽한 긴장 속 조선을 이끌어간 신하들의 이야기, 개정판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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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參謀)에 대해 특별히 아는 바가 없다. 책사(策士)와의 차이도 그렇다. 신병주의 ‘참모로 산다는 것’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정도전, 조광조, 조식, 정인홍, 이원익, 조경(趙絅), 김육, 허목 등에 관심이 있지만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책을 7개의 장으로 나누었다. 새 왕조를 설계하다, 국가의 기틀을 다지다, 당쟁의 시대와 철학 등. 책에 의하면 17세기 소신과 원칙, 직언의 정치인 조경은 6장 명분과 실리 사이, 인조 반정에 넣었고 남인의 영수 허목, 고학에 심취하다는 7장 당쟁의 시대와 실학에 넣었다. 


익숙한 인물만 계속 공부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신병주의 책을 산 것은 미수 허목 때문이다. 내가 미수 허목에 대해 잘 아는 걸은 아니지만 모르던 것을 알았다. 미수 허목이 그가 중시한 육경 가운데 춘추에서 존군비신(尊君卑臣)의 이념을 골라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주목할 사실은 복재(復齋)/ 화담(花潭) 서경덕이 미수 허목 학문의 연원이라는 점이다. 이는 허목 부친 허교(許喬)가 서경덕의 제자 박지화에게서 배웠다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용주(龍洲) 조경과 허목의 우정이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9세로 조경이 연상이다. 


두 사람의 인연의 중심에 거창(居昌)이 자리한다. 조경은 광해군의 정치가 싫어 거창으로 가 은거했고 허목은 부친 허교의 부임지인 거창에 함께 내려갔다. 조경이 남인으로 인식되는 데 중요 근거가 된 것은 훗날 남인의 영수가 된 허목과의 친분이다.(375 페이지) 허목은 스스로 박학불무택(博學不無擇; 여러 학문을 하여 선택에 힘쓰지 않음)을 인정했다. 이는 거창에 갔다가 성주에 들러 만나 스승으로 모신 정구에게서 비롯된 바다. 정구는 영남학파의 영수인 조식과 이황의 학문을 함께 계승한 학자다. 정구의 박학풍이 허목에게도 이어진 것이다.(413 페이지) 


허목의 학문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 들 또 한 사람은 오리 이원익이다.(오리 이원익의 손녀 사위가 미수 허목이다.) 이원익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각 두 번씩 모두 여섯 차례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이원익은 원균을 변호하는 이산해와 윤두수에 맞서 이순신의 공을 높이 샀다. 이순신은 자신이 군사들로 하여금 목숨을 아끼지 않도록 한 것은 이원익 대감의 힘이었다고 말했다. 이원익은 조선 후기 최고의 세제 개혁인 대동법 실시의 주역이다. 인조와 서인 정권은 광해군 흔적 지우기로 일관했지만 영의정만은 예외였다. 광해군 때 두 번이나 영의정에 오른 이원익이 인조 정권의 첫 번째 영의정에 오른 것이다. 광명시 소하동의 관감당은 인조가 이원익에게 하사한 집이다.(334 페이지) 이런 사례는 숙종과 미수 사이에서도 있었다. 숙종이 허목에게 연천에 7칸의 집을 하사하자 허목이 임금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당호를 은거당(恩居堂)이라 했다. 미수는 은거당 뒤의 바위를 일월석, 용문석호라 이름했다.(418 페이지) 


황희 역시 정승을 오래 역임한 인물이다. 미수 허목의 기언에 의하면 임금이 정승 출신의 신하에게 집을 하사한 경우가 셋(이원익, 허목, 황희)이다. 이 책(‘참모로 산다는 것‘)에는 이원익의 사례, 미수 허목의 사례가 언급되어 있지만 황희의 사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원익의 수(壽)는 88세였다. 미수 허목과 같은 연수다. 이원익이 선조, 광해군, 인조 대에 영의정을 지냈다면 장만(張晩)은 선조, 광해군, 인조 대에 활약한 장군이자 문신이다.(장만의 사위가 최명길이다.) 광해군 대의 요직을 두루 지낸 장만은 광해군이 만년에 궁궐을 조성하기 위해 토목공사를 추진하자 이를 적극 비판해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자 미련 없이 관직을 그만두었다.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만은 정묘호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연안으로 유배를 갔다. 장만은 계보 중심, 당쟁사 중심의 역사 연구로 인해 큰 활약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저자는 장만, 최명길, 김신국, 이산해, 이항복 등 조선이라는 나라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었던 인물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바란다는 말을 한다. 2022년 11월 백사 이항복을 모신 포천 화산서원 해설을 했다. 당시 알게 된 바는 백사 이항복은 서원, 묘지 모두 포천에 있고 친구인 한음 이덕형은 서원은 포천에, 묘지는 양평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용주 조경(趙絅)의 포천 묘지도 함께 해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경은 미수 허목처럼 원종(인조 아버지) 추존을 강하게 반대했다. 이에 조경은 외직인 지례(知禮; 경북 성주) 현감으로 밀려났고 1632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거창 등지에서 보냈다. 성주는 미수 허목이 아버지의 부임지인 거창에 갔다가 들른 곳으로 미수가 스승 정구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조경은 1차 예송인 기해예송 때 윤선도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였다. 조경은 남인이긴 했지만 당파적 입장이 그리 강하지 않았는데 소신에 의해 윤선도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려 확실한 남인 정치인으로 인식되었다.(384, 385 페이지) 


조경이 원종 추존을 반대해 외직인 지례 현감으로 밀려났다면 미수 허목은 정거(停擧) 처분을 받았다. 1628년의 일이다. 당시 용주는 43세, 미수는 34세였다. 미수는 벌이 풀린 뒤에도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고 광주(廣州) 자봉산 자락에 은거하면서 독서 및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미수가 존군비신을 생각했다면 정도전은 재상 즉 신하의 역할을 특히 강조한 정치를 시스템화하려 했다. 정도전의 이런 구상에 강력하게 반발한 사람이 이방원이었다. 미수가 조선 초의 인물이었다면 정도전 vs 이방원의 대립에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궁금하다. 이방원에게 제거된 후 역적의 대명사로 인식되던 정도전은 정조대에 삼봉집이 간행되면서 어느 정도 멍에를 벗었고 1865년 대원군에 의해 문헌공이란 시호를 받았다.(24 페이지) 


태조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태종에게 하륜(河崙)이 있었다.(25 페이지) 하륜은 1388년 최영의 요동정벌에 반대해 양주로 유배를 갔다. 하륜은 태조의 계룡산 정도(定都)를 반대해 한양 정도를 주장한 인물이다. 하륜이 주장한 곳은 지금의 신촌 일대인 무악(毋岳)이었으나 정도전, 무학대사 등에 밀렸다. 세종의 참모 장영실은 과학자라는 점에서 남다르다. 흥미로운 점은 장영실을 발탁한 사람은 세종이 아니라 태종이었다는 사실이다. 세종은 강무(講武)할 때에 장영실을 자신의 곁에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고 썼다. 장영실은 광물 채취 및 제련 기술도 가지고 있었다. 세종과 장영실의 만남은 아름다운 인연의 대표 사례다. 신분보다 능력만을 보고 확실히 지원해준 것만으로도 세종의 이름은 길이 빛날 것이다. 


세종 대에 집현전 학사로 뽑힌 성삼문은 계유정난(1453년) 2년 후인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상징하는 옥새를 전해주는 비서의 자리가 예방승지(우승지)다. 성삼문이 예방승지가 된 것은 기구한 운명을 증거하는 바다. 단종 즉위 후 왕권과 신권의 조화가 무너졌다.(62 페이지) 김종서, 황보인 등은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세종의 3남인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 안평대군은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던 성삼문과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이후 완전히 다른 길을 갔다. 


세조 제거를 위한 거사 당일 성삼문은 신숙주는 나의 평생 친구이지만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성삼문은 세조를 제거하려는 계획이 연기된 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윤영손이 신숙주를 죽이려 하자 이를 막아주는 마지막 우정을 보여주었다. 세조 제거 계획이 발각되어 성삼문 일행이 체포되자 세조는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였는가?”라고 추궁했다. 성삼문은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했을 뿐입니다. 천하에 그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제 마음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이거늘 어찌 배반이라 하십니까? 나리는 평소에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끌어 댔는데 주공에게 또한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제가 이렇게 한 것은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주공은 어린 조카 성왕을 잘 보필했다. 서거정은 신숙주처럼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서거정(徐居正)의 거정은 춘추의 공양전에 나오는 군자대거정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다. 항시 정도를 지키며 살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다. 서거정은 세종에서 성종 대까지 6명의 왕 아래에서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학자다. 문병을 장악했다는 말은 과거의 시관(試官)을 맡은 것을 이르는 말이다. 서거정은 법전, 역사, 지리,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책을 썼다. 


강희맹은 서거정과 쌍벽을 이룬 조선 전기의 문장가다. 강희맹은 서거정과 절친한 사이였다. 사마천, 한유, 유종원, 구양수에 비유되었다. 역시 문장이 뛰어났던 강희안은 강희맹의 형이다. 강회백이 할아버지다. 세종 비 소헌왕후 심씨가 큰 이모다. 강희맹과 서거정은 관중과 포숙의 사이였다. 칠삭둥이 한명회는 자라면서 기골이 장대해졌다. 한명회는 1456년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운동을 벌였을 때 특유의 정치적 감각으로 이를 좌절시키는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세조는 한명회를 나의 장자방이라 칭했다. 압구정(狎鷗亭)은 송나라 재상이었던 한기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며 머물던 서재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은 평생 재야에서 은거의 삶을 선택했을 것 같지만 세조, 성종 시대에 관료 생활을 한 관료학자였다. 소학동자 김종직이 사림파의 영수로 확실하게 각인된 것은 그의 사후인 1498년 일어난 무오사화로 인해서다.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은 표면적으로는 항우에게 희생당한 어린 조카인 초나라 희왕(의제)의 죽음을 조문(弔問)하는 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이다.


’참모로 산다는 것‘에 한(限)하는 일은 아니지만 역사 책을 읽으면 어떤 이의 정체성과 길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오사화로 희생당한 사관 김일손(金馹孫)은 문장을 쓰려고 붓을 들면 수많은 말들이 풍우같이 쏟아지고 분방함과 웅혼함이 압도적인 기상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을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개혁적 제시에도 적극적이었다. 김일손은 호매(狐邁; 호탕하고 영민함)하고 강직했다. 본문에는 추폐(追廢)라는 말이 나온다. 김일손이 세조 집권 후 추폐된 소릉(昭陵)과 현덕왕후의 신주를 복위하여 문종에 배향할 것을 주장했다는 대목에 나오는 말이다. 추존의 반대어라 할 수 있다. 추탈(追奪)이란 말도 있다.(163 페이지) 


김일손이 처형을 당할 때 냇물이 별안간 붉은 빛으로 변해 3일간 흘렀다고 하여 붉은 시냇물이란 의미의 자계(紫溪)라는 이름이 붙었다. 경북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은 김일손을 배향한 서원이다. 김일손을 추존하는 데 가장 많은 힘을 기울인 김대유(김일손의 조카)는 남명 조식이 존경했던 인물이다. 김일손의 사림파 정신은 김대유를 거쳐 조식으로 이어졌다. 악학궤범의 편찬을 주도한 성현은 성종을 음악과 학술 분야에서 보좌한 대표적 참모였다. 성종과 성현의 관계는 세종의 명을 받아 궁중음악을 정리한 박연의 관계와 유사하다. 


악학궤범 서문에 이런 글이 나온다. 모든 고르지 못한 소리를 융합하여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임금이 그를 어떻게 지도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이를 보면 정도전이 경제문감에서 사용한 구절을 연상하게 된다. 정도전이 쓴 구절은 도견(陶甄)을 잡는다는 말이다. 도견이란 도공이 질그릇을 잘 만들어내는 것처럼 임금이 선정(善政)을 펼쳐 천하를 잘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참모로 나온다. 운평(運平)이란 말이 있다. 연산군(延山郡) 시절 여러 고을에 널리 모아 둔 가무(歌舞) 기생(妓生)을 말한다. 이들 가운데서 대궐로 뽑혀 온 기생을 흥청(興淸)이라 하였다. 흥청 중 왕을 가까이서 모신 사람은 지과흥청(地科興淸), 잠자리를 같이 한 사람은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하였다. 흥청망청(興淸亡淸)이란 말은 연산군의 방탕, 난잡함을 조롱한 말이었다. 장녹수는 흥청 중 최고였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광기를 거의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는 존재였지만 오히려 연산군의 음탕과 악행을 더욱 부추겼다.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폭정에 기름을 부은 대표 인물이 희대의 간신 임사홍이다. 그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문제를 2100년이 지난 뒤까지 아무도 논하지 말라는 성종의 유명(遺命)을 어긴 사람이다. 임사홍 류의 간신으로 중종의 참모였던 사람이 남곤이다.(조광조는 중종의 핵심 참모는 아니었다.) 연산군은 부왕 성종이 신하들과 경연을 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았다. 왕권이 신권에 휘둘리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남곤의 순탄한 행보에 조광조는 걸림돌로 작용한 셈이었고 중종은 결국 조광조가 아닌 남곤을 택했다. 조광조는 경학(經學)을 중시하는 사림파였고 남곤은 사장(詞章)을 중시한 훈구파였다. 


조광조는 짧은 삶을 살았음에도 조선왕조실록에 910건의 이름이 나올 정도로 불꽃 같은 삶을 산 인물이다. 조광조가 만난 주요 인물은 김굉필이다. 17세의 조광조가 평안도 어천 찰방(察訪)에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 만난 인물은 무오사화의 여파로 회천에 유배되어 있던 김굉필이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과의 만남은 조광조가 성리학의 이념과 실천에 빠져든 확실한 계기가 되었고 훗날 사림파 학맥의 중심에 서게 된 중요 배경이 되었다. 


조광조가 중종을 만난 것은 성균관 유생 시절이었다. 1515년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한 알성시에서 중종은 오늘날과 같이 어려운 시대를 당하여 옛 성인의 이상 정치를 다시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란 책문(策問)을 던졌다. 조광조는 공자의 도는 천지의 도이며 공자의 마음은 천지의 마음이기 때문에 이를 실천해야 한다, 왕이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 항상 삼가는 태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를 삼을 것을 결론으로 하는 답안(答案)/ 대책(對策)을 제출했다. 책문은 정치에 관한 계책(計策)을 물어서 답하게 하던 과거 과목을 의미하고 대책은 책문에 대한 답이다. 


조광조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정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기존의 과거 시험 대신 추천제 시험인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추진하였다. 조광조는 위훈(僞勳)삭제(削除)를 추진했다. 훈구파의 반격을 맞은 조광조의 중요 죄목은 붕당을 맺어 자신의 세력을 확산시켜 나간다는 것이었다. 반정에 의해 추대된 왕이었지만 점차 자신의 왕권을 확대해가려는 중종과 성리학의 이상론에 입각해 왕권을 견제하려는 조광조의 입장이 충돌한 것이다. 반정공신들과 훈구대신들의 견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조광조를 파격적으로 기용했던 중종은 어느 정도 정치적 기반을 잡자 더 이상 조광조에게 휘둘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인종(仁宗)의 스승 하서(河西) 김인후는 가장 관심이 가는 인물이다. 김인후는 호남 지역에 성리학을 전파한 학자다. 김인후는 인종이 내린 묵죽도에 대한 답례로 인종을 대나무에 비유하고 대나무 주변의 돌은 자신과 같이 충성스런 신하로 비유한 답례의 시를 올렸다. 인종은 성리학을 숭상하는 한편 기묘사화로 희생된 사림파들의 명예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인종이 희구했던 성리학 중심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사림파 학자로서 김인후의 위상을 다시 한 번 끌어 올린 인물은 정조다. 정조는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했다. 김인후는 정조가 호남 끌어안기의 상징으로 지목한 인물이었다. 


이황이 살아간 시대는 크게 사림파의 성장기로 볼 수 있다. 이황은 사림파의 학문적 기반인 서원이 자리를 잡는데 역할을 했다. 주자 성리학이 발상지인 중국에서보다 조선에서 더욱 이론적으로 체계화되고 사회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도 이황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남쪽의 아득한 바다라는 의미인 남명(南冥)이라는 호는 장자의 소요유에서 인용된 것으로 남명이 성리학 이외에 노장 사상에도 깊이 빠졌음을 보여준다. 정확하게 말하면 북명(北冥)이란 말을 남명으로 바꾼 것이다. 


남명에게 부유한 처가의 경제적 힘이 크게 작용했음도 주목할 만하다. 남명은 잘못된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선비의 책무로 여겼다. 이황이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 발전시켜 당시의 지적 수준을 높여갔던 유학자라면 조식은 경과 의를 바탕으로 성리학의 실천을 중시한 학자였다. 조식이 사단칠정 논쟁에 대해 이것이 백성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일갈한 것도 이런 입장을 잘 보여준다. 이황과 달리 조식은 자신이 살아갔던 시대를 모순이 절정에 이른 구급(救急)의 시기로 파악했다. 


이황이 일본과의 강화 요청을 허락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등 주로 교린정책을 견지했다면 조식은 일본에 대한 강력한 토벌 정책을 주장했다. 이황의 성리학이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큰 영향을 준 것, 조식의 문하에서 많은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스승의 성향과 연결고리를 갖는 부분이다. 이이는 어린 시절 조광조의 문인이었던 성수침의 가르침을 받았고 성수침의 아들 성혼과 친분을 유지했다. 훗날 두 사람은 서인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이가 공물과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제안한 수미법은 훗날 대동법의 발판이 되었다. 


선조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이라는 말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급급했던 왕, 전쟁 영웅 성웅 이순신의 공을 시기하고 이순신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비겁한 왕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있는가 하면 목릉성세(穆陵盛世)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학문과 문화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라는 완전히 상반된 평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조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뉜다고 해야 하는가? 과(過)가 훨씬 크고 결정적이었고 학문과 문화의 전성기란 것도 민생이나 평화 또는 전쟁 승리와 무관한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정철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는 표현도 문제적이다. 정철은 문학 분야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이며 최고의 작품을 썼지만 정치인으로서는 기축옥사 사건 수사를 맡아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등 가혹하고 무자비한 면모를 보였다.(희생자 가운데 조식의 수제자 최경영, 서경덕의 수제자 이발도 있었다.) 정철은 기축옥사의 원래 수사 담당이었던 정언신을 정여립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모함해 정언신을 유배 가게 했다. 정철은 정치적 잔혹함이라는 허물이 문학적 재능을 퇴색하게 한 사례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 조헌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고 정철과 함께 서인 강경파에 속했다. 조헌은 이지함을 평생토록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모셨다. 조헌의 개혁론이 유형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 후대의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의 선봉이 되었다가 조선에 귀화하여 일본 공격에 앞장 선 인물이다. 김충선의 일본 명은 사야가(さやか)다.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을 항복한 왜군이라 하여 항왜(降倭)라 한다. 사야가는 처음부터 조선을 동경해 투항을 결심했다. 사야기는 오랑캐의 문화를 가진 일본에 태어난 것을 탄식하던 중 가토 기요마사 군대의 선봉장에 임명 되었다. 


의롭지 못한 전쟁임을 알았지만 예의지국 조선을 구경하고자 선봉장이 되어 조선에 오게 되었다. 사야가가 김씨 성을 갖게 된 것은 바다를 건너온 모래를 걸러 금을 얻었다는 선조의 생각에 따른 결과다. 충선은 忠善으로 충성되고 착하다는 의미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에 충성하는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다. 선조 시대는 당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시대였던 만큼 선조대에 활약한 참모들은 대부분 당파의 영수였다. 유성룡이 남인, 정철이 서인의 영수였다면 이에 맞서는 북인의 영수로 활약한 대표적 인물은 이산해였다. 한산 이씨인 이산해는 목은 이색의 후손이자 토정 이지함의 조카였다.(한음 이덕형이 이산해의 둘째 사위다.) 


이산해는 기축옥사 때 정여립과 같은 동인이었던 까닭에 곤욕을 겪었다.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을 총애한다는 사실을 알고 유성룡, 정철 등과 한 광해군 책봉 건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다. 유성룡은 정철이 먼저 말을 꺼냈다가 선조가 분노하는 것을 보고 감히 말하지 못했다. 성질 급한 정철이 화를 당했다. 정철은 강계로 유배를 갔고 서인의 영수 정철의 자리를 북인 이산해와 남인 유성룡이 채웠다. 이산해는 숙부 이지함, 이지함의 스승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실용 중심 사상을 갖추었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천거하고 영의정으로서 전쟁의 현장에서 중요 사항들을 결정했던 인물이다. 유성룡의 호 서애(西厓)는 안동 하회마을의 서쪽 절벽을 의미한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에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했고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했다. 두 건 모두 신의 한수로 불릴만하다. 유성룡은 이발, 정인홍, 이산해의 북인과 맞서는 남인의 영수가 되었다. 유성룡은 조선이 초기 전투에서 패배한 중요 원인을 진관체제를 버리고 제승방략 체제를 고수한 것에서 찾았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사수를 포기하고 피난을 하려는 선조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1598년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와 지휘관 양호 사이의 내분이 일어났다. 유성룡은 선조가 자신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고 이항복과 윤두수를 추천해 결국 탄핵을 당했다. 1598년 11월 19일의 일이다. 이 날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기도 하다. 파직당한 유성룡은 고향 안동 하회마을로 돌아와 징비록 집필에 착수했다. 1607년 5월 유성룡이 사망했다. 이 해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이덕형은 당색이 뚜렷하지 않고 관료적 성향이 강한 인물이다. 이덕형의 장인이 북인의 영수 이산해다. 그럼에도 이덕형은 뚜렷한 당론을 형성하지 않고 서인 및 남인의 관료, 학자들과 두루 교분을 형성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시대적 책무를 해결해 나갔다. 이덕형은 자신보다 3년 앞서 진사 시험에 합격한 이항복과 1580년 알성문과에 함께 급제하여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인연을 맺었다.(이항복이 이덕형보다 5년 연상이다.) 


이덕형은 관직생활 초기 유성룡, 김성일, 이산해, 이원익 등과 친분을 맺으며 동인과 가깝게 지냈고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뉜 이후에도 남인과 북인의 중도파였지만 시종일관 당인의 입장보다 관료로서 능력을 발휘했다. 1610년 북인의 핵심 정인홍은 스승 남명 조식을 문묘에 추존하고자 했다. 정인홍의 제자들은 영남에서 집단 상경하여 조식의 문묘종사에 반대하는 이덕형 등의 대신들을 비방하는 상소를 올리고 농성했다. 


광해군은 기존 궁궐을 중건한 창덕궁, 창경궁보다 새 궁궐 건설에 집착한 가운데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교하 천도를 할 것이라 결정했다. 이덕형 등 여러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교하 천도가 실현되지 않자 광해군은 인경궁과 경덕궁 건설에 총력을기울였다. 광해군의 무리한 궁궐 조성 사업은 결과적으로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왕통상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악행을 자행하게 했고 이는 결국 정권 붕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허균은 무수히 탄핵을 받은 인물이다. 허균에 대한 탄핵은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끊임없이 가해졌다. 허균은 선조 시대에서 광해군 시대를 살다 간 문장가이자 사상가였고 개혁가였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호가 초당으로 서경덕의 문인이었으며 동인과 서인이 분당되었을 때 동인의 영수로 지목될 만큼 명망이 높았다. 허균의 스승 손곡(孫谷) 이달(허균의 중형 허봉의 벗)은 시를 짓는 재능이 뛰어났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은 것은 스승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허균은 스승의 전기에서 글재주가 뛰어나도 세상에 쓰이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허균의 학문과 사상에서 주목할 것은 허균이 성리학뿐 아니라 불교, 도교, 서학 등에 두루 관심이 깊었다는 사실이다. 허균은 백성을 호민(豪民), 원민(怨民), 항민(恒民)으로 나누었다. 호민은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백성, 원민은 정치적으로 피해를 입지만 원망만 하고 스스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백성(나약한 지식인), 항민은 무식하고 천하며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는 백성이다. 


허균은 칠서사건의 당사자들인 서얼의 실질적인 후원자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대북정권의 최고 실세이자 글방 동문이었던 이이첨에서 도움을 청했다. 이이첨의 후원 속에 허균은 집권 대북 세력에 적극 협력하면서 광해군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허균은 폐모론과 같은 정국의 최대 이슈에 직면하여 인목대비의 처벌을 강경하게 주장하면서 광해군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폐모론으로 대북 중심의 강성 정국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광해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허균은 뜻밖에 내면으로는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위험한 발상까지 했다. 


허균은 동료였다가 인목대비 폐출을 계기로 반대의 정치 노선을 걸었던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이 자신의 역모를 고발하는 비밀 상소문을 올리는 바람에 궁지에 몰렸다. 1618년 허균의 역모를 확증하는 격문이 남대문에 붙었다. 광해군을 비방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내용의 이 격문이 허균의 심복이 한 짓이라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허균은 빠져나갈 곳이 없게 되었다. 허균은 죽는 순간까지 역모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를 변호하는 세력은 없었다. 1618년 허균은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되었다. 파란만장한 50세 의 생애를 마친 것이다. 허균에 대한 평가는 조선시대 내내 부정적인 흐름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오늘날에는 점차 그의 진보적인 사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허균의 비극적 생애는 무엇보다 스스로의 표현대로 불여세합(不與勢合;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것)하는 기질과 혁신적인 사상, 자유로운 행동가적인 면모에서 기인하였다.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허균은 세상을 자신에게 맞도록 바꾸려 했으나 생각만 앞선 무리한 시도로 역적이란 부메랑을 맞았다. 한때 광해군의 큰 총애를 받았지만 결국 왕을 배신함으로써 처형으로 삶을 마감했다. 


광해군 시대 정국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남명 조식의 수제자, 광해군의 남자, 의병장 등으로 기억되는 북인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이다. 당시 정국은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출산해 북인이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으로 나뉜 상황이었다. 소북의 핵심은 유영경이었고 대북의 핵심은 정인홍이었다. 정인홍 사상의 중심은 군주를 정점으로 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보민(保民)이었다. 정인홍은 구양수의 붕당론을 인용하여 군자, 소인의 구별을 엄격히 하였다. 이는 자신이 속한 대북이 군자당이라는 자신감에서 기인한 것이다.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서 내쫓는 대신 스승인 조식의 문묘종사를 강력 주장하여 사류들의 반발을 샀다. 이를 회퇴변척(晦退辨斥)이라 한다. 정인홍은 서인 정철과 성혼의 기축옥사 때의 행적에 대해 “간악한 정철을 부추겨 고명한 선비를 죽이게 한 성혼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부추겨 조선을 침략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비유할 만하다.”고 말할 만큼 극단적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정인홍은 89세였지만 반정의 주축이었던 서인 세력은 정인홍을 살려두지 않았다. 처형된 정인홍은 국가에 대한 의리(의병장), 왕에 대한 의리(광해군에 대한 충성), 스승에 대한 의리(스승 조식을 극진히 받음)를 일관되게 지킨 인물이었다. 


광해군의 참모 김개시는 상궁 출신으로 국정을 좌지우지한 인물이다. 광해군은 자신이 하고 싶은 정치적 행위를 대리해서 처리해주는 김개시에게 인사권, 청탁권, 경제권까지 무한 권력을 부여했다. 광해군 집권 내내 국정을 농단했으나 정작 마지막에는 광해군의 편이 되지 못하였다. 장녹수가 연산군과 최후를 함께 한 것과 대비되는 장면이다. 김개시는 반정군 측에 포섭되어 김자점 등에게서 뇌물을 받고 여러 차례 반정을 알리는 상소를 받은 광해군을 안심시켰다. 인조반정의 성공에 일정 부분 기여했던 김개시는 반정군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광해군은 지지 세력인 대북 중에서도 이이첨에게 지나치게 의존했고 정인홍을 정권 홍보의 중심으로 삼았다. 상궁 김개시의 국정 농단은 광해군을 더욱 파국으로 몰고 갔다. 술사(術士)에게 의존하면서 무리하게 천도를 계획하고 궁궐을 조성하면서 광해군은 더욱 벼랑으로 나아갔다. 1612년 9월 술사 이의신이 한양의 기운이 쇠했으므로 명당인 교하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자 광해군은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신료들의 강한 반대로 천도가 추진되지 않자 궁궐 조성 사업으로 방향을 돌렸다. 끝이 보이지 않던 공사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중지되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폐위된 후 교동도로 유배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623년 3월 광해군 정권을 타도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정인홍, 이이첨 등 북인 핵심이 제거되고 빈자리에 이귀, 김류, 최명길 등 서인 공신들이 들어섰다. 선조 때부터 서인 강경파로 활동하던 이귀는 광해군 정권 때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인조반정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이귀는 아들 시백, 시방, 양아들 시담까지 모두 반정에 참여시킬 정도로 광해군 폐위에 모든 것을 걸었다. 


후추(後?) 김신국은 광해군과 인조 시대의 국방 및 경제 전문가였다. 최명길은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장유와 함께 양명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최명길의 실리론적 견해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은 양명학이었다. 최명길은 1624년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642년 최명길은 명나라와 연락을 도모한 일이 청나라에 발각되어 임경업과 함께 봉성으로 압송되어 심양의 북관에 억류되었다. 1643년 4월에는 남관으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이 김상헌이었다. 남한산성에서 주화와 척화를 놓고 대립했지만 두 사람은 시까지 주고받으며 서로를 이해했다고 한다. 


1644년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청나라는 조선과 명의 연결고리가 확실히 사라지자 1645년 2월 청에 인질로 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귀국을 허락했다. 인조실록을 편찬한 주체 세력들이 대부분 척화론과 명분론을 중시한 사람들이었기에 같은 서인인 최명길을 크게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김육(金堉)은 실물 경제 감각으로 성과를 보인 학자 관료다. 김육의 호는 잠곡(潛谷) 또는 회정당(晦靜堂)이다. 김육이 낸 큰 성과는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한 것이다. 


김석주는 숙종 시대 정치 공작의 달인이다.(김석주는 김육의 손자다.) 송시열은 실록에 삼천 번 넘게 등장한 인물이다. 송시열은 효종이 북벌 구상에 힘을 실어줄 인물로 선택한 인물이다. 1649년 송시열은 북벌론이 담긴 기축봉사를 올렸다. 다음 해 2월 김자점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이 속한 산당 세력 다수가 조정에서 물러났다. 송시열은 북벌 추진에는 무모함 때문에 소극적이었지만 청나라를 오랑캐라 인식하면서 언젠가 우리가 물리쳐야 하는 이적이라는 의식을 확고하게 해나가는 데는 핵심적이었다. 


효종 시대 이후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 나가야 한다는 대명의리론이나 소중화 사상이 자리 잡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서인이 소론, 노론으로 나뉜 것은 송시열이 제자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에 고인을 조롱하는 표현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윤증을 지지하는 소장층은 송시열에 맞서 소론으로 결집했다. 장희빈의 아들의 원자 정호(定號)로 인해 송시열은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다. 노론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의 출산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원자 정호를 반대한 송시열은 제주로 유배를 간 상황에서 계속 숙종을 자극하는 상소문을 올린 끝에 한양 압송 명령을 받았다. 


남인들이 거듭 송시열 처형을 요청했고 숙종은 정읍에서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렸다. 송시열은 올바른 길을 가려다가 죽는 것이니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파(自派)를 위한 길이 옳은 것이라 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최석정은 현실 가능한 정책을 제시한 소론 정치가다. 최석정은 수학, 천문학, 서학 등 다양한 학문을 수용했다. 이건창은 조선시대 당쟁의 역사를 정리한 인물이다. 당의통략(黨議通略)이 그것이다. 이건창은 1852년 조부 이시원이 개성유수로 재직할 때 개성 관아에서 태어났으나 대부분의 생애는 강화에서 보냈다. 당의통략은 강화도에서 탄생했다. 


정약용은 정조의 참모로 관료와 실학자라는 두 길을 걸었다. 정약용이 태어난 1762년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해다. 1767년 부친의 임지인 연천에서 살면서 부친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794년 정약용은 경기도 적성, 마전, 연천, 삭녕 등지를 암행하면서 백성들의 현실을 직접 목격했다. 경기 암행어사 시절 정약용은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의 부정과 비리 사실을 직언하였다. 이는 정치적 고비마다 서용보가 정치적 고비마다 정약용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학의 집대성자 정약용은 물과 인연이 깊은 학자다. 고향인 마현(현 경기도 남양주시 능내)은 남한강과 북한강의 물길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근처이고 유배지 강진도 바닷가가 바라 보이는 곳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흐르는 물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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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시대 - 제5회 창비청소년도서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고 17
강창훈 지음 / 창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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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철과 함께한 시간은 약 4천년이다. 인간은 강함을 상징하는 철을 이용한 욕망 실현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지구를 구성하는 물질의 19%에 달하는 철은 산소(50%)에 이어 2위를 차지하는 중요 물질이다. 지구 전체 질량 중 34%에 이르는 철은 중량면에서 단연 으뜸을 차지한다. 철은 별의 온도가 40~60억도일 때 만들어진다. 빅뱅 후 10억년 후의 일이다. 철 이후 27번 원소인 코발트에서부터 92번 원소인 우라늄까지의 66종의 원소가 만들어졌다. 철까지는 핵융합으로 즉 별이 살아 있을 때 만들어지고 그 이상은 별이 죽으면서 만들어진다. 철의 원자핵에 있는 일부 중성자가 붕괴해 양성자로 변함에 따라 구리, 은, 금 등의 새로운 원소가 만들어졌다.


철을 비롯한 원소들은 우주 곳곳으로 튕겨져 나갔다. 원소들은 모여 성간 매질이라는 이름의 기체 구름을 형성했다. 성간 매질은 조건이 맞는 곳에 이르러 서로 뭉쳐 수많은 별을 만들었다. 그렇게 생성된 별들 중 주위에 행성을 거느린 별도 있었다. 태양도 그 중 하나다. 철은 인간이 생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원소다. 지구는 태양을 이루는 물질들로 이루어졌다.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물질들은 서로 부딪히고 뭉치면서 점점 커졌고 결국 현재와 같은 크기의 지구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구 온도가 올라갔다. 작은 천체들과 충돌했기 때문이고 크기가 커지면서 내부 압력이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온도가 올라가자 지구 내부가 녹아내렸다. 철과 같은 무거운 금속 물질들이 중심부로 내려앉아 지구 핵을 이루었다. 지구 외핵은 액체여서 구성 성분 중 무거운 철은 아래로 가라앉고 규소 등 가벼운 물질은 맨틀과의 경계인 위쪽으로 떠오른다. 이런 현상을 대류현상이라 한다. 이로 인해 지구는 자석 같은 상태가 되어 자기장을 발생시킨다. 자기장은 태양풍을 막는 역할을 한다. 태양풍은 대부분 지구 자기장에 막혀 흩어지지만 일부는 지구 자기장에 이끌려 대기권으로 진입해 빛을 낸다. 이를 오로라라 한다. 


철에게는 산소라는 친구가 있다. 자연 상태에서 철은 늘 산소와 붙어 지낸다. 산소와 결합한 철을 산화철이라 한다. 산화철의 색은 붉다. 산화철은 녹슨 철이다. 인간은 산화철에 열을 가해 산소를 떼어냄으로써 유용한 철을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철은 다시 산화된다. 철과 산소 사이에는 남조류(시아노박테리아)라는 중매(仲媒)가 있었다. 남조류는 바닷물을 빨아들여 수소를 먹고 산소를 뱉어내는 최초의 광합성을 했다. 이 결과 지구에 산소가 엄청나게 만들어졌다. 당시 바다에는 철이 무수히 떠돌았다. 남조류가 만든 산소가 철을 산화시켰다. 산화철은 물과 분리되어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철을 산화시키고 남은 산소는 오존층을 만들었다. 생명체가 더 이상 바다에 갇혀 살 필요가 없게 되면서 육상 생물이 출현했다. 원래 육상에는 태양에서 오는 자외선을 막아주는 오존이 없다가 위의 작용을 거쳐 육상 생물이 출현한 것이다. 철의 산화가 끝난 것은 18억년전이다. 인체에는 평균 3그램 정도의 철이 있다. 이 가운데 60%가 혈액에 존재한다. 혈액이 붉은 것은 철 때문이다. 혈액의 주요 구성 성분인 적혈구 속에는 헤모글로빈이 있다. 헤모글로빈의 철 원자 4개가 산소와 결합하여 몸 구석구석으로 산소를 나른다. 


약 6천년전인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불로 흙을 구워 토기를 만들다가 발견한 것이 구리다. 구리는 약 1,084도에 녹는다. 가마의 온도가 1,100도 가까이에 이르자 구리가 녹아 토기 표면에서 흘러나왔고 온도가 내려가자 구리끼리 뭉쳐 고체 덩어리로 굳었다. 좀 더 강한 재료를 바라던 인간 앞에 나타난 것이 청동이다. 청동도 우연의 산물이다. 구리를 제련하는 과정에서 어쩌다가 주석이 조금 섞인 합금 즉 청동이 만들어졌다. 청동은 철보다 약하지만 쉽게 산화하지 않는다. 철은 토기에서 청동기까지 기나긴 기술 축적 과정이 있었기에 인간과 만날 수 있었다. 


철기 시대 이전에도 인간은 철을 알고 있었다. 바로 운철(隕鐵)을 통해서다. 운철은 운석 중 철광석이 많이 포함된 것이다.(우주를 떠도는 작은 암석들 중 지구 인력에 끌려 대기권으로 떨어지는 것을 유성이라 한다. 유성은 대부분 불에 타 없어지지만 땅까지 도달하는 것이 있다. 이를 운석이라 하고 운석 중 철광석이 많이 포함된 것을 운철이라 한다.) 운철은 돌보다 물러 변형이 잘 되지만 두드릴수록 단단해졌다. 우주에서 온 운철의 성분은 지구의 지각에 존재하는 철과 성분이 다르다. 운철의 철은 산화철이 아니다. 대기권을 통과할 때 높은 마찰열을 받아 산소가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운철은 힘들게 달구지 않고 두드리기만 해도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 운철이 인류에게 곧바로 철기 시대를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원한다고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토기를 굽다가 구리를 발견했듯 청동기를 만들다가 우연히 철을 만났다. 산불로 인해 철을 발견했다는 가설도 있다. 히타이트가 서아시아에서 강자가 된 것은 메소포타미아 민족이 잘 모르는 철 생산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타이트는 물론 철기를 처음으로 생산한 민족이 아니다. 철기 시대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1000~500년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철기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히타이트가 몰락하고부터다. 


이집트는 철을 제련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 부족했다. 산화철에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철을 생산하려면 불의 온도를 최대한 높여야 한다. 그러려면 땔감이 많아야 하는데 이집트는 목재가 풍부하지 않았다. 철에 대한 욕망이 크지 않은 점도 작용했다. 이집트는 토양 특성상 철제 농기구가 없어도 농사를 짓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중국에서 철기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춘추시대다. 한반도에서 철, 하면 생각나는 나라가 가야다. 


철을 제련하는 것은 재료의 성질을 바꾸는 일이다. 산화철을 제련하는 데 필요한 높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충분한 땔감이다. 인간은 처음에 나무를 썼고 후에는 석탄을 사용했다. 철 생산이 늘어날수록 숯 사용량도 늘어났다. 이 때문에 곳곳에서 삼림이 사라졌다. 철 생산은 대규모 삼림 벌채를 초래했다. 삼림 감소는 동식물의 다양성 상실, 토양 침식, 기후 변화 등 다른 환경 문제를 야기했다. 인간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더 많은 곡식을 얻기 위해 철을 깨웠다. 그리고 철을 이용해 권력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우고 제국을 건설했다. 


철기 시대가 시작된 이래 인간은 계속 철의 혁신을 꿈꾸었다. 철 덩어리를 불로 달구고 망치로 때리기를 반복하면 산화철이나 불순물이 많이 제거되어 그럭저럭 순수한 철에 가까운 덩어리를 얻을 수 있다. 이를 연철(軟鐵)이라 한다. 철기 시대가 되었다고 철기가 곧바로 다른 도구를 압도한 것은 아니었다. 옛사람들은 운철뿐 아니라 철광석에도 신성한 의미를 부여했다. 운철은 하늘의 신이 준 선물, 철광석은 대지의 신이 준 선물이라 생각한 것이다. 


부국 및 강병을 실현시켜주는 가장 좋은 수단은 철이었다. 풀무 덕에 액체 상태의 철을 만들 수 있었다. 이 철을 선철(銑鐵)이라 한다. 선철을 한 번 더 녹여서 거푸집에 부었다. 이것을 주철이라 한다. 선철이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전쟁에서였다. 중국의 철 생산량이 최고조에 이른 것은 송나라 때인 11세기였다. 수력 풀무가 발명되고 천년 가량 지났을 때였다. 송나라 때 철 생산량이 급증한 것은 땔감으로 숯 대신 석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소동파도 석탄에 대한 글을 남겼다. “팽성에는 과거 석탄이 없었다. 1078년 12월에 비로소 사람을 보내 백토진 북쪽에서 석탄을 찾아냈는데 철광석을 녹이고 특별히 날카로운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송나라 사람들은 석탄을 코크스(석탄에서 유황 성분 등을 제거한 순수 덩어리)로 만들어서 땔감으로 사용했다. 코크스는 불을 붙이기 어렵지만 숯보다 발열량이 훨씬 커서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송나라는 철을 주로 군사적 용도로 썼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와 관련이 있다. 송은 개국 이래 여진, 거란 등에게 시달렸다. 송나라는 제철 기술은 뛰어났지만 철제 무기를 개량하는 역량은 부족했다. 오히려 제철 기술이 거란과 여진으로 새어 나가 두 나라의 군사력 강화를 돕고 말았다. 칭기즈칸은 중국 대륙에서 들여온 철로 무기를 개량하여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사방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 첫 번째 희생자는 여진이었다.


인간은 연철과 선철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혁신에 목말라했다. 연철은 부드러워 좋고 선철은 단단해서 좋다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연철은 걸핏하면 휘고 선철은 툭하면 깨진다는 불만을 품었다. 이런 불만 때문에 생긴 것이 강철이다. 엄밀히 따지면 연철과 선철은 모두 철과 탄소의 합금이다. 순수한 철은 심지어 알루미늄보다 무르다. 숯이나 코크스를 이용해 제련하는 과정에서 탄소가 철에 들어가 비로소 단단해지는 것이다. 철에 탄소가 얼마나 포함되느냐에 따라 녹는점, 강도, 연성, 탄성 등 성질이 천차만별로 변화한다. 


탄소 함유량은 철의 종류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연철은 탄소 함유량이 0.01 퍼센트 미만인 철이다. 선철은 탄소 함유량이 3.0~4.5 퍼센트인 철이다. 연철처럼 무르고 선철처럼 단단한 철이 강철이다. 탄소 함유량을 0.02~2.0 퍼센트로 조절하면 강철(鋼鐵)이 된다. 옛사람들이 지금처럼 철과 탄소의 관계를 이해하고 계획적으로 탄소 함유량을 조절한 것은 아니다. 연철, 선철, 강철의 순서로 철을 발전시킨 것은 더더욱 아니다. 철 생산 초기에 세 가지 철이 뒤섞여 있었다. 점차 경험을 축적해 원리를 터득하면서 철의 종류를 체계적으로 파악했다. 


대항해 시대에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점선에는 작지만 매우 중요한 철이 있었다. 나침반이 그것이다. 나침반은 철이 없었다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발명품이었다. 나침반은 중국에서 발명되었다. 나침반을 항해에 이용한 것은 송나라 때부터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항해사들은 주로 별과 바람을 읽어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파악했으나 구름이 낀 날은 읽기 자체가 어려웠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중국에는 장작처럼 불이 붙는 검은 돌이 있다. 장작보다 화력이 훨씬 강하고 때로는 이튿날이 되어야 불이 꺼진다.”고 썼다. 


사람들이 석탄에서 유황을 제거하는 데 몰두한 시기가 있었다. 송나라는 코크스 제조법을 알아낸 나라다. 철이 더 강해지고 많아지면서 인간은 새로운 욕구를 갖게 되었다. 상품을 빠른 시간에 대량 생산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팔고 원료와 노동력을 가지려는 것이었다. 철은 증기기관을 탄생시켰다. 철 생산을 늘리려면 석탄을 더욱 확보해야 했다. 광산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문제는 갱내에 생기는 물이었다. 산업 혁명을 이끈 증기기관은 광산에서 만들어졌다. 산업혁명은 광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증기기관은 산업용 동력 장치로도 이용되었다. 그 결과 산업혁명이 궤도에 올랐다. 증기기관은 대량 생산 시대를 열었다. 


상품을 운송할 교통수단이 필요했다. 트레비식이라는 기술자가 증기기관을 철도 동력으로 활용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혁명으로 불리는 것은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을뿐 아니라 상품을 실어나르는 새로운 교통수단 즉 철도와 증기선의 발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철도 역시 광산에서 만들어졌다. 갱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하수만이 아니었다. 갱도가 길어질수록 채굴한 광물을 밖으로 나르는 일이 어려워졌다. 광산업자들은 갱도에 레일을 깔 생각을 했다. 나무 레일에 이어 철제 레일을 떠올렸다. 증기기관이 그랬듯 철제 레일도 새 욕망을 자극했다. 철제 레일을 갱도 밖에서 사용할 수 없을까? 철제 레일을 이용해 철광석과 석탄을 제철소로 운반할 수 없을까?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기관차가 필요했다. 


증기기관차가 발명되었다. 증기기관을 만든 트레비식이 증기기관차를 개발했다. 증기 기관차가 등장하면서 영국은 철도 시대에 돌입했다. 헨리 베서머가 강철을 대량 생산했다. 선로의 내구성 문제가 해결되었다. 철기 시대가 시작된 이래 인간이 철을 가장 많이 활용한 곳은 전쟁터였다. 휴전선은 철책으로 되어 있다. 철조망의 역사는 가시철사에서 시작된다. 가시철사는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대륙 횡단 철도가 개통되고 수많은 사람이 이주하면서 미국 서부의 드넓은 땅에 목장이 속도로 늘어났다. 농부들은 이웃 목장의 가축 떼로부터 작물을 지켜야 했다. 가시철사가 발명되었다. 


이내 철조망은 전쟁에서도 쓰이게 되었다. 1898년 미국 ? 스페인 전쟁, 1899년 보어 전쟁, 그 이후 1차 세계대전 등에서 요새 방어를 위해 철조망을 사용했다. 철조망은 2차 대전 이후 포로수용소를 만드는 데 아주 효율적인 재료가 되었다. 철은 냉전을 상징하게 되었다. 철은 여러 번 재활용이 가능한 물질이다. 철 스크랩이란 말이 있다. 고철을 재활용하는 것이다. 화석 연료 사용을 줄이는 방법의 하나다. 


인간이 철을 만들며 배출한 이산화탄소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 중 하나다. 철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철을 효율적으로 쓰는가가 관건이다. 철은 지구 온난화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철은 바닷속에 살고 있는 식물성 플랑크톤이 성장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성분 가운데 하나다. 철이 풍부하면 식물성 플랑크톤의 수가 급증해 광합성으로 이산화탄소 농도가 감소하게 된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녹으면서 철이 바다로 유입된다. 이로 인해 식물성 플랑크톤이 증가하면 대기 중 많은 이산화탄소가 흡수되어 지구 온난화가 저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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