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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 - 1946)에 관심이 간다. 하위징아에 대해서 '호모 루덴스'보다 '중세의 가을'이 실제적이라는 점에서 적어도 나에게는 더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중세의 가을이란 하위징아가 전성기를 지나 쇠락해가는 시기로 알려진 14, 15세기를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로 나아가는 시대로 보았다는 뜻이다.

 

하위징아는 낡은 사상의 형식들은 죽어 버리지만 그와 동시에 같은 토양 위에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와 꽃피기 시작한다는 말을 했다.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 1932 - 2016)는 중세는 단일한 특성을 지닌 하나의 세기가 아니고, 유럽 문명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암흑기가 아니었고, 고전 문화를 무시하지 않았고, 화형의 불꽃은 다른 시대에도 타올랐다는 말을 했다.

 

중세를 이야기하려면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 1924 - 2014))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책 가운데 '연옥의 탄생'이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일로나 예르거(Ilona Jerger)'두 사람 - 마르크스와 다윈의 저녁 식사'에 천국, 지옥, 연옥 이야기가 나온다.

 

지옥은 자본주의, 천국은 공산주의, 연옥은 평화로운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폭압적인 중간 단계)로 소환되었다. 다윈과 그의 주치의인 베케트 박사가 마르크스의 사상을 두고 나눈 대화에 나오는 내용이다.(다윈은 마르크스의 선동을 못마땅해 하고 베케트는 지지한다.)

 

그리스도교와 스탈리니즘의 세부 사항들을 대응시킨 최인훈(1936 - 2018)'광장'이 생각난다. 에덴시대 vs 원시공산사회, 타락 vs 사유 제도의 발생... 천년왕국 vs 문명공산사회 등이 대응되었지만 연옥은 나오지 않는다.

 

고프는 연옥 개념이 정립된 12세기에 주목했다.(연옥 개념은 12세기에 갑자기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다.) 12 세기는 르네상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회와 문화 수준이 최고점에 오른 중세의 한 시기다. 후일 프로테스탄트가 되는 세력들은 연옥 개념을 부정했다.

 

고프에 의하면 천국보다 지옥에 가깝지만 그 자체로 천국을 향한 낙관적인 전망과 열망에서 나온 연옥 개념은 민중 통제를 위해 교회가 만든 제도라기보다 중세인들의 망탈리티 속에 자리잡았던 합리와 낙관의 요소들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다시 내 이야기를 하자면 지금까지의 수사(修辭)적 말들에도 불구하고 중세에 대한 내 관심은 결국 도서관(수도원)에 대한 관심인 셈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자료들을 찾는 일이 남았다. 기존의 3D에 하나의 D(Depressive; 두달이고 석달이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외딴 곳에서 발굴을 하니 우울한..)를 더해 자신들의 직업을 4D 업종이라 말하는 고고학자가 된 마음으로 지층을 파헤쳐 결과를 얻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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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로드 4000km - 대한민국 100년,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임시정부 투어가이드
김종훈 외 지음 / 필로소픽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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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독립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인 2019년은 뜻 깊은 해다. 많은 관련 책이 나왔고 기념식도 성대하게 거행될 것으로 보인다. '임정로드 4000km'도 관련 책들 가운데 하나다.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항저우, 창사, 광저우, 류저우, 충칭 등지를 떠돌았다. 그 길이 4000km라는 사실은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임정로드 4000km'는 세세한 여행 안내가 돋보이는 책이다. 특징적인 것 중 하나는 김구 선생의 효창원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부분을 0부로 정했고 마지막 10부를 번외편 일본과 대만 우리가 잘 몰랐던 영웅들의 마지막 걸음으로 정했다.

 

도입부라 할 0부에서 만나게 되는 사연은 이승만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다. 그는 김구 선생 묘소인 효창원을 무력화하기 위해 반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앞에 거대한 효창운동장을 조성했다. 임정로드 4000km의 시작점은 예전에는 김신부로(金神父路)로 불렸던 서금2(瑞金二路)이다.

 

"임정로드 4000km팀이 카메라와 삼각대, 지도 한 장을 들고 첫 걸음을 뗀 곳이다."(유래가 정확하지 않은 서금이로는 서금 1로와 함께 하는 이웃 길인 2로이고 김신부로의 김신부는 김대건 신부를 말하는 것으로 김신부로는 속칭이다. 서금을 중국어로는 루이진이라 한다.)

 

예관(?觀) 신규식 선생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리라. 흘겨본다는 뜻의 예관이란 호를 가졌던 선생은 중국 혁명 지사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상하이 지역에 독립운동 기반을 닦은 분으로 예관은 을사늑약에 분노해 음독 자살 시도 끝에 살아남았지만 오른쪽 시신경을 잃어 흘겨본다는 의미로 지은 호이다.

 

저자들은 걷고 또 걸어야 길이 생긴다는 말을 한다. 걷지 않는 길은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의미다.(110 페이지)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듯 임시정부는 우리의 뿌리이자 정신이다. 더구나 올해는 임정수립 100주년의 해이니 더욱 각별하다. 임시정부가 처했던 여건은 여관(중국 용어로는 '여사: 旅社'.)을 거처로 삼기도 했을 만큼 열악했다.

 

파수꾼을 자처한 세 인물 김철, 송병조, 차리석의 이름도 기억해야 하리라. 특히 평안도 출신으로 신학문을 접한 뒤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가 되어 후학을 양성한 데 이어 비밀결사인 신민회 요원으로 활약했던 차리석 선생은 임시정부의 내일은 군주제의 청산이며 민주화의 새 출발을 기약함에 있다는 말을 남겼다.

 

저자들은 우리가 치욕스런 역사까지 기억하고 보존하는 중국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172 페이지)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위안부 관련 진열관 하나 없이 소녀상 하나 세우는데도 일본의 눈치를 살폈다.(176, 177 페이지)

 

저자들은 정부가 지켜주지 않자 학생들이 나서서 할머니들을 지키겠다고 나선 것을 가장 안타깝고 아쉬웠던 지점이라 덧붙였다. 금릉대학(현 난징대학)은 여운형, 김약수, 조동호, 김마리아 등이 수학한 곳이고 약산 김원봉 장군이 의열단을 만들기 전 공부한 곳이다.(약산 김원봉 장군은 백범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이 컸던 유일한 인물이다.)

 

약산(若山)은 고모부이자 스승인 황상규의 주선으로 짓게 된 호다. 황상규는 김원봉과 김두전과 이명건을 의형제가 되게 했고 각각의 호도 지어주었다. 김원봉은 약산, 김두전은 약수(若水), 이명건은 여성(如星)이다. 산과 같다, 물과 같다, 별과 같다는 뜻이다.

 

정정화 선생이 장강일기(長江日記)’에 썼듯 김원봉은 해방 후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모욕을 당하고 결국 자발적으로 북으로 건너갔다. 약산의 금릉대학 동문 중 한 분이 몽양 여운형이다. 좌우합작을 위해 헌신했던 몽양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살을 당했는데 이는 약산으로 하여금 북으로 가게 한 위협이 되었다.

 

의열단을 창설한 약산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였었다. "애국지사에게 말씀 드리기 송구하지만"이란 말로 운을 뗀 저자들은 임정 멤버들이 정정화 여사의 사진을 보고 보인 첫 반응이 모두 똑같았다는 말을 전한다. 엄청 미인이라는 말이었다.

 

정정화 선생은 열살에 구한말 고위 관료인 동농 김가진 선생의 아들인 김의한과 결혼을 했다. 9년 뒤 시아버지와 남편이 아무 말 없이 상하이 임시정부로 전격 망명하자 선생은 시아버지와 남편을 찾아 1920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홀로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장강일기에 의하면 드디어 선생이 시아버지와 상봉하자 시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시아버지는 "네가 어떻게 여길 왔느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온 게야?"라고 말했고 정정화 선생은 저라도 아버님 뒷바라지를 해드려야 할 것 같아 허락도 없이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했고 시아버지는 "그래 잘 왔다, 고생했다, 참 잘 왔다, 용기 있다."고 답했다.

 

정정화 선생은 상대적으로 감시가 덜한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 독립 자금을 모으는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탐사팀은 심한 고생을 했다. 예정보다 일찍 떠나는 기차도 한 몫을 했다. 저자들은 이제 건국절 논란은 그만 하자고 말한다. 임시정부는 1921년에 외교권을 행사했다.

 

저자들이 말했듯 이승만 정권이 출범한 1948815일을 건국절로 못박는 세력들의 잘못을 알리고 임시정부 탄생일인 1919411일을 대한민국의 시작일로 알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저자들은 그런 점이 임정 프로젝트의 이유이자 목적이라 말한다.

 

9부는 해방의 감동을 느끼다란 부제가 붙은 충칭이다. .충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거처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역사상 최초로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한 곳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는 피난의 연속이었다. 상하이에서 12, 충칭에서만 4번 청사를 옮겼다.

 

김구 선생의 강력한 의지로 탄생한 광복군은 1942년 조선의용대와 합쳐진 후에야 대한민국의 정식 군대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김구 선생은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을 결정하며 조선의용대 총대장인 김원봉 장군을 광복군 부사령 및 1지대 지대장으로 선임했다. 군의 좌우 합작 뿐 아니라 임시정부 의정원에도 좌익진영 인사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1945815,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수년 동안 준비해온 국내 진입은 중단되고 말았다. 김구 선생은 3개월이나 해방 조국에 돌아가지 못했고 그 사이 미소는 한반도에 38선을 그었다. 한 달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마지막 부()에서 윤봉길과 윤동주, 송몽규의 묘한 인연을 보자.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태어나 용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시샤대학 영문과 재학중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송몽규는 만주 은진중학교를 거쳐 서울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후 1942년 도쿄 제국대학에 입학했다.

 

윤동주 생가를 관리하며 명동촌 촌장을 지낸 송길연씨란 분에 의하면 안중근 의사가 명동촌의 선바위에서 사격 연습을 했다. 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밀사로 파견(1907)된 이상설이었다. 이상설이 세운 간도의 첫 근대식 학교였던 서전서숙은 후에 명동서숙을 거쳐 명동학교로 발전했다.

 

안중근 의사가 간도로 갔는데 이유 중 하나는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였다. 충북 진천 출신인 이상설은 25세때 과거에 급제한 뒤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다섯 차례나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내던지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선 데 이어 이듬해에는 조선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간도 용정으로 갔다.

 

저자들은 다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고 말한다. ‘임정로도 4000km’는 중요 부분을 간추려 설명하는 압축적 편성이 돋보인다. 대장정이라 말하고 싶다. 감사드린다.

    

 

 * 네이버 작가 소영처럼님이 제공한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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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1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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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2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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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상 시인의 집(종로구 통인동)이 재개관되었다. 이상 시인이 1912년에서 1933년까지 거주한 곳이다. 이 집은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으로 지킨 건물이다.(원래 이상 시인의 큰아버지 집인데 이상 시인이 양자로 들어가 산 곳이다.)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된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산 기증과 기부를 통해 보전 가치가 높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확보, 시민 소유로 영구 보전하고 관리하는 운동을 뜻한다.(한국 내셔널 트러스트 이사는 건축가 김원이다. 러시아 대사관을 설계한 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본명이 김해경인 이상 시인의 '()'은 상자 상이란 글자이다. 알려지기로 서양화가인 친구 구본웅이 사생 상자(寫生 箱子: 스케치 박스)를 선물하자 상()에 들어 있는 나무<>이 들어 있는 성씨들 중 이씨를 택하고 상() 그대로를 취해 이상이란 필명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 철학자가 김해경이 자신의 필명을 이상으로 한 것은 각자의 직업에 붙들려 왜소해져가는 근대적 인간에 대한 풍자의 의미가 있다는 말을 했다. 이 철학자에 의하면 이상은 상자 속에 갇힌 인간을 부채꼴 인간이라 부르기도 했다.(부채꼴이란 원의 일부이니 상자 속에 갇힌 것이나 다름 없다.)

 

부채꼴 인간이란 부분적 인간이다. 전문성을 얻는 대신 전인성을 상실한 근대적 인간을 의미한다.('분류와 합류' 5, 6 페이지) 사생 상자를 선물 받고 상이란 글자로 필명을 삼았다는 이야기는 재기 있지만 깊이가 없다. 상자 속에 갇힌 인간 또는 학문에 대한 풍자는 당연히 의미롭다.

 

어떤 것이 맞든 상관 없다. 다만 재기보다 의미를 염두에 두고 상자를 취한 데에 이상 시인의 풍자적 무의식이 관련된 것은 아닌가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잘 알려졌듯 앞에서 말한 철학자는 김상환 교수다. "...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척도와/ 사물의 우매함과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로 끝나는 김수영 시인의 '공자의 생활난'에서 나는 죽을 것이다란 구절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말씀과 연결지어 풀이했고 풀이 눕는다는 구절이 인상적인 '', 태극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론적 질서가 무극에 의해 주도되는 시적인 질서로 반전되는 사건을 노래한 시로 풀이한 철학자다.(김상환 지음 '공자의 생활난' 참고)

 

시를 철학으로 해석하는 것이 시의 자연스러움을 해치는 행위라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런 점은 내가 걱정할 사안이 아닌 바 설득력 있는 점을 취하면 되리라. 아무래도 깊이보다 넓이를 지향하는 나는 흔쾌히 김상환 철학자의 해석에 표를 던진다. 관건은 깊이도 충분히 추구하며 넓이를 지향하는 것이다.

 

상자 인에 갇히지 않되(상자 속에서 나오되) 광장 이곳 저곳에 어느 정도는 충분한 깊이의 흔적을 남겨야 하리라. 상자를 밀실로 바꾸면 바로 '광장'의 최인훈(1936 - 2018) 작가가 생각난다.

 

'광장',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회색인'도 언제 다시 읽을 수 있을까? 시간이 없어서 아니 없으면 읽고 싶고 여유로우면 소설이 아닌 다른 장르를 찾는 ''가 문제다. 이렇게 시간이 간다. 그래도 기우뚱한 채 균형을 찾는 것이니 나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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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신경과학자이자 도시현실연구소 소장인 콜린 엘러드가 쓴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에 터키 남부의 우르파라는 도시 근처의 고대 유적인 괴베클리 테페 이야기가 나온다. 엘러드는 괴베클리 테페에서 건축의 기원을 찾는다.

 

11,000년 이상(문자 발명 6,000년 전) 된 괴베클리 테페의 건축물은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괴베클리 테페는 인간이 가축을 길들이고 정착한 뒤 농사를 지으면서 건축이 발전하고 마침내 도시가 형성되었다는 믿음을 뒤집었다.

 

괴베클리 테페의 석판은 정착해서 농사짓던 사람들이 아니라 짐승을 사냥해 먹고 살던 수렵채집인들이 쌓은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는 종교적 성소(聖所)이자 순례 장소였다.

 

엘러드는 괴베클리 테페를, 건축물을 지어 지각을 바꾸고 사고와 감정에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행동을 조직하고 권력을 행사하고 많은 경우 돈을 벌어들이는 인류가 가진 결정적 특질의 기원을 증거하는 것으로 본다.

 

신경과학과 건축, 환경 설계를 접목시킨 심리지리학의 창시자 엘러드는 전공에 합당하게 베드로 성당에 처음 갔을 때의 경험을 전한다. 진귀한 보물과 예술품으로 장식된 거대한 돔 앞에서 압도당하는 사람들 이야기이다.

 

엘러드는 이런 건축물은 우리의 지각 방식을 변화시키고 성스러운 우주와의 관계를 다시 평가하게 하고 내세를 약속함으로써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고 우리가 그곳을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도록 설계되었다고 말한다. 다치바나 다카시 역시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한 바 있다.

 

스페인 엘 에스코리알을 둘러보던 때의 일로 순례로 지친 몸을 이끌고 텅빈 대성당에 앉아 있었을 때 어디선가 파이프 오르간으로 연주되는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가 들려왔고 이에 다카시는 수년전 보았던 영화 페드라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이다.

 

다카시는 세상에는 그 공간에 몸을 두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무수히 많고 그런 감동을 맛보기 위해서는 바로 그 순간 내 육체를 그 공간에 두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여행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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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몇년 전이다. 김광현 교수의 건축 책을 시리즈로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나는 최근 안양 파빌리온도서관에 다녀와 글을 쓰다가 설계자인 알바루 시자를 통해 교양 수준이지만 건축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내가 쓰는 글의 분량은 일본의 대표적 다독가이자 저술가인 사이토 다카시가 잘 쓸 수 있는 안정 궤도에 오르는 것이 가능한 분량으로 제시한 원고지 10매 정도다.

 

파빌리온 도서관 인근에 김중업 건축박물관이 있는 것을 보며 인연을 생각 했다. 흥미로운 점은 알바루 시자가 설계한 홀(처음 알바루 시자홀이라 불렸다가 후에 안양파빌리온으로 불리게 되었다.)이 시적(詩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점이다.

 

건축물에 운율과 리듬이 살아 있다는 의미일 거라 생각된다. 검색을 해보니 정인하란 분이 쓴 김중업 건축론이 시적 울림의 세계라는 제목을 하고 있다.

 

김중업 건축가는 1971년 도적촌 사건을 다룬 글이 문제가 되어 프랑스로 강제 출국당한 뒤 파리 북동쪽의 시골 마을 페르 앙 따르드노아에서 책에 파묻혀 지냈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건과 성남시(당시 경기도 광주)의 개발 정책을 비판해 반체제 인사로 지목된 김중업 건축가는 세무 조사를 받고 엄청난 세금을 추징당해 10년 이상 다져온 기반을 잃었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불굴의 의지이다.

 

언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건축가의 꿈이 작품에 담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끊임 없이 설계하며 시련을 견뎠다.(안양의 김중업 건축박물관은 김중업 건축가가 설계한 유유산업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김중업 건축가와 르 코르뷔지에의 인연은 후에 써야겠다. 알바루 시자와 르 코르뷔지에의 인연도 찾아야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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