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오고 햇빛이 또 가고˝.. 장석남 시인의 ‘감꽃‘의 한 구절이다. ˝여성으로의 도주, 여성으로부터의 도주˝.. 일본의 문학 이론가 미즈타 노리코가 일본 근대 남성 문학으로부터 읽어낸 키워드이다.
나는 이를 ˝책이 내게로 오고 책이 내게서 멀어지고˝라는 말과 ˝(하나의) 책으로의 도주, 그 책으로부터의 도주˝란 말로 바꾸어 나를 설명하고 싶다. 탐나는 책들이 매일 같이 쏟아지는 현실에서 내게 온 책을 통독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대부분의 책은 옆에 두고 때때로 펴보는 것이 되지 못하고 멀어지는 존재가 된다.
이런 현실은 하나의 책으로 도주했다가 다 읽었든 어렵거나 유익하지 않아 중도에 그만 두었든 다른 책으로 도주하게 되는 내 실상의 다른 말이라 해도 무방하다. 오늘은 아침부터 서둘러 함석헌 기념관을 들르고 동작 50플러스 센터를 들른 뒤 14시 30분 무렵 책방 순례를 시작했다.
교보에 들러 신간들을 체크한 뒤 영풍문고와 종로서적을 찍고 종로 알라딘에서 ‘글쓰기 비결 꼬리물기에 있다‘(박찬영 지음)와 ‘빅뱅에서 인류의 미래까지 빅 히스토리‘(이언 크로프턴& 재러미 블랙 지음)를 산 것이 16시 1분.
대학로 알라다에서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우에노 치즈코 지음)를 구입한 것이 16시 59분.
사이토 다카시의 ‘교육력‘이 합정 알라딘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갔으나 실종 도서로 분류되어 발길을 돌린 것이 17시 51분.
신림 알라딘으로 가 구입한 것이 16시 28분. 부천 알라딘에 오래 전부터 사려 했지만 비싸 손놓고 있던 홍준기 교수의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탄 전철이 신창행이기에 구로에서 인천 가는 것으로 바꿔 타야 했는데 한 정거장 지나 부랴 부랴 구로로 돌아가 인천행을 타고 제대로 도착해 산 시각이 19시 49분.
배고파 e 마트에서 빵과 프로바이오틱으로 요기한 후 20시 10분 소요산 행 전철을 타는데 성공. 아니 책을 뭐 이다지도 요란하게 좋아하는지.. 복잡한 전철 안에서도 책을 읽으며 가며 참 질긴 인연이라 생각.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닌데 좋은 책을 만나면 내가 아니면 누가 읽겠는가, 란 생각으로 구입하는 나를 본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만큼은 호사다마를 우려할 정도로 또는 무슨 복선이라도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컨디션이 너무 좋아 자축하는 마음으로 책을 샀다.
물론 그래 보아야 총액은 50000원을 조금 넘는다. 문제는 총액이 아니라 시간을 쏟아부으며 이리 저리 헤매 다니며 너무 산만하고 비효율적으로 책을 구입하는 것이다.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 가운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란 구절이 있다.
내게 스승 같고 친구 같았던 책들과 나는 많은 세월이 흘러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
나는 오늘 이렇게 산만하고 이기적으로 책을 찾아 다니는 아들을 너그럽게 봐주시는 어머니께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맺고 있는 모든 소중한 인연의 주인공들에게 감사한다. 특히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책이 인연이 되어 만나게 된 분들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분들이다.
21시 7분인 지금 전철은 청량리 도착을 앞두고 있다.
피로하지만 보람스러운 하루였다고 말하고 싶다. 아직 집에 가려면 한 시간은 더 필요하고 가서도 책을 읽느라 자정을 넘겨야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