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끝내고 논문 쓰기만 남았음을 일컫는 ‘all but dissertation’이란 단어를 안 것은 ‘퀀트’라는 책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장을 한참 들여다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니 몇 해 전 한 수레 분량의 책을 고물상에 내다 버릴 때 처분된 것 같다.

정확한 제목이 ‘퀀트, 물리와 금융에 관한 회고’인 ‘퀀트’는 quantitative analyst(정량 분석가) 즉 물리학을 전공하고 증권 또는 금융 회사에서 일하는 전문 인력을 말한다.

저자인 이매뉴얼 더만은 컬럼비아 대학 이론 물리학 박사 출신의 금융 공학자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 보니 나온 지 10년이 넘은 책이다.

당시만 해도 나는 물리학과 금융에 두루 관심을 가졌었다.

각설(却說)하고 에세이를 쓰려 했지만 논문 같다는 평을 들은 한 페친의 사례를 보며 그 분의 타임라인에 ‘all but dissertation이 아니라 all but essay네요.’란 댓글을 달았다.

그 페친이 쓰려 한 것은 경수필(輕隨筆)인 miscellany가 아닌 중수필(重隨筆)인 essay일 것이다. 신상 이야기가 아닌 한자 이야기이니.

나는 요즘 논문, 비평, 문학 작품(시, 소설)은 물론 서평마저 어렵게만 느껴진다. 어렵지 않은 것이 없는 듯 하다.

페친 김정란 교수님의 ‘비어 있는 중심 – 미완의 시학’이란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글 쓰는 자의 영혼의 결이 환히 드러나,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축제와 같은 글쓰기”란 말이다.

이는 교수님이 쓰기를 원하는 유형의 글이다. 그것들은 조르주 풀레의 형이상학적 비평, 리샤르의 우아하고 섬세한 꼼꼼히 읽기, 얀켈레비치의 가볍고 명랑한, 그러나 너무나 명석한 스토이시즘 등의 글로 교수님은 이런 글들을 흠모한다는 말을 했다.

리샤르는 장 피에르 리샤르인 듯 하다. 얀켈레비치는 장켈레비치라고도 불리는데 2016년 11월 ‘죽음에 대하여’란 책이 번역 출판되었다.

얀(장)켈레비치의 글이 많이 인용된 책으로 김형효 교수의 ‘베르그송의 철학’을 들 수 있다.

이 책에 인용된 얀(장)켈레비치의 여러 말 가운데 ‘새는 날고자 했기 때문에 날개를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날 수 있었다는 말’(‘베르그송의 철학’ 142 페이지)이 가장 인상적이다.

다시 각설(却說)하고 말하자면 에세이가 많이 대접받고 읽혔으면 좋겠다.

인용된 얀(장)켈레비치의 글이 “가볍고 명랑한, 그러나 너무나 명석한 스토이시즘”적 글쓰기인지 모르지만 인상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올해는 프랑스 비평가들의 글에 조금이라도 친숙해지는 시간들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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