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옛길 느리게 걷기 - 건축가 엄마와 함께
최경숙 지음 / 라의눈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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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역사가 오랜 만큼 이야기거리가 많다. 시각이나 관점도 다양하다. 내게 서울을 논한 책들이 몇 권 있다.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 ’서울, 성 밖을 나서다‘,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번에 서울을 다룬 책 한 권을 샀다. ’건축가 엄마와 함께 서울 옛길 느리게 걷기’(20167월 출간)란 책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서울에서 건축 일을 시작했고 지금도 서울 하늘 아래 산다는 저자는 옛 장소와 옛 사람을 만나는 답사(踏査) 역시 건축 행위의 연장선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부암동, 한양도성 낙산성곽길, 서촌, 성북동, 북촌, 정동과 덕수궁 등이 저자가 아이와 함께 답사해 책에 실은 곳들이다. 이례적으로 한양경성, 그리고 서울이라는 챕터가 있다. 부암동편에는 윤동주 문학관, 무계원, 안평대군 집터, 자하미술관, 창의문, 환기미술관, 백사실 계곡 등이 포함되었다. 한양도성 낙산성곽길편에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흥인지문, 낙산성곽길, 혜화문 등이 포함되었다.

 

서촌편은 두 편으로 나누어 조선 왕조의 흔적, 조선 중후기 중인들의 흔적, 친일파의 흔적, 근현대 인물의 흔적(이상 1), 겸재 정선 그림 따라(이상 2)으로 편성했다. 성북동편은 성북천길, 최순우 옛집, 간송미술관, 수연산방, 심우장, 성락원, 실상사 등이 포함되었다.

 

북촌편도 두 편으로 나누어 북천 계동길, 중앙고등학교, 가회동 11번지 일대(이상 1), 아라리오 뮤지엄, 북촌문화센터, 북촌로 1, 윤보선길, 이화각 갤러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율곡로 1(이상 2) 등으로 편성했다. 정동과 덕수궁편은 옛 러시아 공사관터,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중명전, 정동교회, 배재학당, 서울성공회성당, 황궁우, 덕수궁 등을 편성했다.

 

유교적 이상 도시를 찾아서를 제목으로 한 한양편에는 경복궁, 창덕궁, 종묘, 사직단 등이 포함되었다. ’땅에 새겨진 역사의 문신을 제목으로 한 경성, 그리고 서울편은 남산의 옛 일본 신사를 찾아서, 북촌 아래, 종로 vs 남산 위, 혼마치, 일본이 세운 좌표건물을 찾아서 등으로 편성했다.

 

저자는 서울의 민낯 중 부암동(付巖洞)을 가장 먼저 택한 이유로 자연 자체가 조선시대를 기억하는 장치이자 역사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제시한다.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 위 시인의 언덕에 오르면 정선(鄭敾)의 그림 장안연우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윤동주 문학관은 북악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창의문은 서울 4소문 중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문이다. 청운동 일대는 개성의 자하동처럼 골이 아름답다 해서 자핫골이라 불렸고 그 이름을 따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린다.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은 높이 125미터로 그 모습이 낙타 등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혜화동 성당편에서 만나는 사람은 그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이희태이다. 김수근, 김중업 등과는 다른 이력을 가진 분이다. 경복궁 서쪽의 마을인 서촌은 청운동, 효자동부터 사직동까지 아우른다. 저자는 이 챕터를 시대별로 접근하지 않고 길따라 만나는 이야기로 풀었다.(기억은 시간 순이 아니라 사람이나 사건 순이기 때문이다.)

 

한양 안에는 북악산과 인왕산에서 발원하는 물길이 많았지만 인구가 증가하면서 자연스레 도로로 변했다. 산 모양 따라 휘어져 돌던 골은 그렇게 길이 되었다.(72 페이지) 서촌 옥류동천길에서 윤덕영(순종의 황후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이 언급되는데 15년간 순종 황제의 관리를 담당한 조선총독부 사무관 곤도 시로스케의 '대한제국 황실비사'란 책에 윤덕영이 가장 중대한 일을 했다는 내용이 있다.(고종 독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정선의 수성동편에서 저자는 "조선의 선비들은 자연을 벗하는 것이 멋을 아는 것이요, 예술을 아는 것이요,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라 여겼다"는 말을 한다.(84 페이지) 조선 건국 초기 서촌에는 아무나 살 수 없었다. 왕족 일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89 페이지) 서촌은 세종이 태어났기 때문에 세종 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광해군은 서촌에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 해서 자수궁(慈壽宮: 태조와 계비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 무안대군 방번이 살던 곳), 인경궁(仁慶宮), 경희궁 등을 지었다. 만약 지난 것을 모두 헐고 새로운 건물만 들어선다면 도시는 기억상실증에 걸릴 것이다. 그래서 옛 골목, 옛 집, 역사 유적은 도심의 생각구멍이자 숨구멍이다.(91 페이지)

 

서촌에 여러 계층의 삶의 켜가 고루 섞여 있는 것은 경복궁 옆이라는 정치적 이점과 인왕산이라는 지리적 이점이 버무려진 결과다. 왕이 되지 못하는 왕족이 머물던 서촌은 훗날 조선의 왕을 배출하는 땅이 되었다.(92 페이지) 서촌의 묵은 땅은 기록도 유산도 아닌 옛 그림 속에서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겸재 정선은 인왕제색도와 수성동, 백운동, 청풍계, 인곡유거, 필운대 등 인왕산과 관련된 그림을 많이 그렸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통해 지금은 없어진 풍경과 그 안에서 피어난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그의 그림이 역사 기록인 셈이다.(98, 99 페이지) 청운동이란 이름은 청풍계와 백운동이 합해진 것이다.(112 페이지)

 

백운동에는 백운동천이라는 각자(刻字)가 있다. 독립운동가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 1922) 선생이 새긴 글자이다. 저자는 이항복의 직계 자손인 독립운동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英: 1867 1932) 선생을 언급한다.

 

이회영을 포함한 6형제는 서울 명동, 개성, 양주, 평택 등의 땅을 소유한 재력가였다. 중요한 사실은 이 분들이 집안의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아낌 없이 내놓았다는 사실이다.(121 페이지) 서촌에 우당 기념관이 있다. 성북동의 미술사학자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 1984) 옛집은 자형 본채와 자형 바깥채가 마주보는 튼 자형 한옥이다.

 

자형 한옥은 자연스럽게 앞마당을 만든다.(131 페이지) 4대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 선생은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란 책으로 유명한 분이다. 최순우 옛집은 내셔널 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제 1호로 유명하다.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시민의 모금, 기부, 증여를 통해 보존 가치가 있는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사들여 영구 보전, 관리하는 단체다.(134 페이지)

 

성북동에서 간송 전형필을 빼놓을 수 없다. 전형필은 서울 종로에서 부를 쌓은 선대로부터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받아 일제 강점기에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아낌없이 재산을 쓴 수장가이다. 그가 1938년 세운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의 전신이다. 전형필이 일본의 마에다로부터 국보 제 68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구입하기 위해 기와집 20채 가격을 망설임 없이 내놓은 것은 유명하다.

 

성북동에서는 만해가 타계 전까지 거했던 심우장(尋牛莊)을 빼놓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를 조선의 감옥이라 생각한 만해는 따뜻한 방에서 편히 자는 것을 스스로 거부했다. 더구나 심우장은 북향이다. 조선총독부를 등지고 지었기 때문이다. 심우장 건너편 골짜기에는 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의 별장인 성락원이 있다.(142 페이지) 현재는 개방을 하지 않아 직접 볼 수 없다.

 

옛 이름이 대원각인 길상사도 성북동의 명물이다. 대원각, 삼청각, 오진암은 3대 요정(料亭) 정치의 근거지였다. 현재 삼청각은 레스토랑이 되었다. 무계원은 안평대군의 무계정사터에 서울시 등록 음식점 1호인 오진암의 자재들을 재활용해 지은 문화시설이다. 무계정사터는 안평대군이 꿈을 꾼 도원과 흡사해 안견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곳이고 정자를 지어 시를 읊고 활을 쏜 유서 깊은 장소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인 북촌도 중요 이야기거리이다. 계동, 가회동, 삼청동, 소격동, 안국동, 원서동 등이 속한다. 1960년대만 해도 북촌은 가회동 31번지의 풍경처럼 도시한옥으로 빼곡히 차 있었다. 그러다 1970년대 강남 개발로 경기고, 휘문고, 창덕여고가 이전하고 그 자리에 대기업과 기관이 들어서면서 개발이 가속화되었다.

 

1991년 한옥보존지구가 해체되면서 북촌은 급속히 다세대, 다가구, 빌라, 근린생활시설로 채워지면서 1,500동이던 한옥은 900여 동으로 줄어들었다. 위기를 느낀 북촌 주민들이 서울시에 공식적으로 보존 대책을 요청했고 서울시는 2000년 북촌 가꾸기 사업 시행을 발표한다.

 

북촌을 역사문화미관지구로 지정하고 공공자금을 투입해 한옥 보수, 수리에 들어갔다. 소유주가 자신의 한옥을 등록하면 심사 후 개보수 비용을 시에서 지원했다. 대신 지붕, 안마당, 길에 면한 한옥의 외관을 공공영역으로 인식하도록 했다. 서울시는 일부 한옥을 매입해 시민들에게 교육기관과 문화센터로 개방했다. 북촌문화센터가 그중 한 곳이다.(168 171 페이지)

 

윤보선길을 보자. 덕성여고는 숙종이 인현왕후를 위해 지어준 감고당(感古堂)이 있던 자리다. 덕성여고 아래, 풍문여고에도 원래 안동별궁이 있었다. 안동별궁은 왕실의 거처이자 순종의 혼례가 치러진 곳이다. 안국동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백인제 가옥 이야기를 하자.

 

이 가옥은 가장 먼저 이완용의 조카 한상룡이 지은 집이다. 소유주가 여럿 바뀌었는데 백인제 즉 백병원 설립자가 마지막으로 소유주가 되었다. 백인제 가옥이란 이름은 이런 연유로 붙었다. 창덕궁 담장을 따라 원서동길을 걷다 보면 길이 두 갈래로 갈리는 지점이 나온다. 저만치 왼쪽 길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화가 고희동이 살던 집이 있다.

 

고희동은 휘문, 보성보통고등학교 교사 시절 전형필, 이상 등의 제자를 기른 분이다. 정동(貞洞)에서는 덕수궁과 관련한 아픈 역사를 만나게 된다. 고종 승하 후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 덕수궁을 해체했다. 저자는 옛 러시아 공사관터를 정동 답사의 첫 순서로 삼는다. 고종이 왜 덕수궁을 정궁으로 만들었고 아관파천을 단행한 이유는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한다.(208 페이지)

 

고종은 덕수궁을 확장할 때 선원전과 환구단을 가장 신경 썼다. 선원전은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신 곳이고 환구단은 하늘에 제를 올리던 곳이다. 환구단은 원구단과 황궁우로 이루어졌다.(219 페이지) 황궁우(皇穹宇)는 환구단 안에 하늘과 땅의 모든 신령의 위패를 모시던 곳이다.

 

황궁우 자리는 원래 선조의 아들 의안군의 제택(第宅: 살림집과 정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었다. 고종은 바로 그 장소에 환구단을 지어 중국과의 오랜 사대 관계를 끝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천명했다.(221 페이지) 정동길은 조선에 유입된 기독교 문화가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224 페이지)

 

저자는 정동길에서 만난 것은 낭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숱한 물음과 깊은 쓸쓸함이 계속 침전되었다. 빼앗긴 자리, 팔린 자리, 훼손된 자리를 대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들은 덕수궁에서 정점을 찍는다.”고 말한다.(235 페이지)

 

덕수궁의 울창한 숲은 언제 와도 좋다. 창덕궁 후원처럼 마음 먹고 가지 않아도 되고 경복궁처럼 한참을 걷지 않아도 된다. 덕수궁 숲은 도심 앞에 바로 다가와 있다.(237 페이지) 도시는 권력의 자양분을 먹고 자란다. 도시 환경은 사람들의 사고와 태도에 영향을 끼치기에 권력은 도시라는 틀을 이용해 사람들을 통제해 왔다.

 

정치적 라이벌이자 이전 권력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기념비적인 건물을 세우기도 한다.(240 페이지) 20세기만 해도 경복궁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해방이 되고도 반세기 동안이나 조선총독부 건물이 앞을 가리고 있었으니 말이다.(245 페이지)

 

저자는 이방원이 종묘 바로 위에 창덕궁을 지은 이유가 정도전에 의해 주도된 한양 프로젝트의 의미를 희미하게 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251 페이지) 창덕궁과 종묘를 붙여 놓음으로써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묘우사였던 구조가 힘을 잃었다. 그는 종로에 시전을 만들어 전조후시 개념도 깼다.(252 페이지)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립 구도를 설명한 저자의 글을 읽으며 생각한 것은 김사행(金師幸)이란 건축가이다.(이한우는 경복궁과 관련해 정도전이 한 일은 태조 412월 경복궁이 완성된 후에 전각(殿閣)들의 이름을 지은 것뿐이라 말한다. 경복궁,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강녕전 등의 이름이 바로 그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20060925일 주간조선)

 

종묘 건물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평으로 긴 형태를 띠고 있다. 장식은 절제되고 기둥과 공간이 반복되면서 장엄한 아름다움을 만든다.. 세계 유명 건축가들도 종묘에서는 모두 숨죽이며 신으로 승화된 공간을 낮은 자세로 바라볼 뿐이다... 종묘는 1995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원래 종묘와 창덕궁은 한 공간이었다. 일제는 그 사이에 율곡로를 놓으면서 그 맥을 끊어놓았는데 최근 둘을 잇는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274 페이지) 1926년 경복궁 앞 조선총독부가 완공되기 전 일본의 통치기관은 어디에 있었을까? 예장동이다. 예장동 일대는 임진왜란 시절 일본군이 성을 쌓고 머물던 왜성대가 있던 곳이다. 그렇게 예장동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탈취하기 위해 온갖 책략을 짜냈던 일본의 본거지였다.(289 페이지)

 

예장동은 조선시대 군사 훈련장인 무예장을 줄여서 예장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288 페이지) 서울을 걸으면 서울이 깊다는 것을 알게 되고 진심으로 서울을 사랑하게 된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312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나라보다 도시가 콘텐츠가 되는 시대인 현대(274 페이지)를 사는 우리는 도시, 그 가운데서 서울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을까?

 

건축가 엄마와 함께 서울 옛길 느리게 걷기에는 내가 친숙하게 보아왔던 곳들과 낯선 곳들이 함께 있다. 더 배우고 익혀야 할 곳들이 있고 충분히 설명하고 해설할 수 있는 곳들이 있다. 익숙한 곳도 좋지만 낯선 곳, 생소한 곳들을 거듭 발굴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좋을 책이 건축가 엄마와 함께 서울 옛길 느리게 걷기이다. 서울을 다룬 다른 책들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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