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급 관심 대상으로 떠올랐다. 광해군은 종묘(宗廟)의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을 증축한 임금이다.
광해군의 증축은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종묘를 다시 세우며 이전보다 신실(神室)을 늘린 것이다.
광해군 외에 명종, 영조, 헌종, 고종이 정전을 증축했고 현종, 헌종이 영녕전을 증축했다.
헌종도 2관왕이지만 그는 조선에서 존재감이 미약한 임금들인 명종, 정종, 현종, 경종 등과 비슷한 레벨의 임금이다.
이 분들은 모두 불천위(不遷位)를 모시는 정전이 아닌 마이너 리그격인 영녕전에 봉안(奉安)되었다.
광해군은 폐위된 군주이지만 연산군과는 성격이 다르다.
광해군이 안타까운 것은 그가 종묘 봉안을 염두에 두고 정전과 영녕전을 증축한 것은 아니겠지만 증축 2관왕으로서 정작 자신은 종묘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광해군이 종묘를 증축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된 종묘를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니 불가피한 면이 있다.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패륜도 저질렀지만 명나라와 후금(後金) 사이에서 펼친 양면 외교 또는 실리 외교는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소득이 많은 사람이 세금을 더 내는 대동법을 실시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해명해야 할 부분은 광해군이 서인과 북인의 당파 싸움으로 희생되었다는 부분이다.
문제는 패륜(悖倫)과 치적(治積) 사이의 부조화이다. 궁색하게 들리겠지만 광해군은 자신을 왕이 되게 한 대북파가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라고 극성스럽게 주장하자 하늘을 보고 탄식했다고 한다.
전쟁 이후 경희궁과 인경궁을 지은 광해군의 무리한 토건정책도 지적되어야 한다.
패륜과 치적 사이의 부조화보다 더한 문제는 내정과 외치 사이의 부조화인지도 모르겠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일파)는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지는 나라 명에 의존하다가 청(후금)으로부터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다.
광해군은 오늘 우리에게 화두를 던져준다. 아니 그의 시대가 그런 것이라 해야겠다. 광해군과 그의 시대는 오늘 우리를 보는 듯 하다. 역사가 흥미로운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