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옆 카페에서 읽는 인상주의 - 모네의 빛에서 고흐의 어둠으로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이봄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빅뱅, 바로크 등의 말이 조롱의 의미가 담긴 말이었듯 인상주의도 조롱의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이 그림은 대체 뭘 그린 걸까? 벽지라도 이 그림보다는 낫겠다. 필시 이 그림에는 인상이 듬뿍 담겨 있으리라...”처럼. 이 그림이란 모네의 ‘인상, 해돋이’이고 그런 혹평을 받게 된 것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려다 보니 붓질이 빠르고 거친 데다가 간혹 칠하다 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상이란 말은 인상비평 등의 말을 통해 만날 수 있는데 이는 물론 부정적이다.


인상주의도 여러 가지여서 하나로 묶을 수 없다. 고흐는 인상주의로 분류하기에는 너무 독창적이었고 세잔은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좇다 보면 인간과 사물의 형태가 불명확해진다는 점을 용인하지 못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인상(印象)을 시뮬라크르(사건, 이미지, 감성적 언표 등등)에 비유할 만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림을 문학으로부터, 역사로부터, 신화로부터, 주제로부터 떼어내 독립시키려 했다. 인상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데생이 변변치 못함을 지적한다. 화법에 집착하여 주제를 버리다 보니 그림에서 이야기, 나아가 정신성까지 사라져 버려 식상하다는 말도 한다.


하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근대’를 그렸다. 인상주의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두 가지 기술은 튜브 물감과 사진 기술이다. 튜브 물감 이전 시대인 16세기에 활약했던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90 - 1576)는 워낙 톡특한 붉은 색으로 그림을 그려 그가 사용하는 색은 피를 섞어 만든 것이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인공 염료와 달리 당시의 물감은 금방 굳어 버려 사용할 만큼 매번 새로 준비해야 했다. 공방들마다 제조 기법이 달라 미묘한 색조 차이도 두드러졌던 시대이기도 했고.


J 모 시인의 신간 시집을 “심장의 피를 비커에 받아 가을 햇살로 우려내면 저런 숨 타는 소리가 나올까 싶은 시편들로 빼곡”한 시집으로 표현한 K 시인의 말을 접하며 문득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일화를 떠올려 본다. 사진의 경우도 흥미롭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화가처럼 움직이는 대상을 잡아내려 했지만 손이 흔들려 화면이 흐려지거나 프레임이 흔들려 예상 밖의 영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프랑스 제2 제정기(1852 - 1870)는 인상주의의 여명기와 겹친다. 에밀 졸라는 왕성한 미술평론가이기도 했다. 마네, 세잔, 드가, 모네 등과 친하게 지냈고 대중이 인상주의 회화를 수용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인상주의가 거센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봉오리를 피우고 마침내 커다란 꽃송이를 활짝 피어올린 때는 1870년대 말부터 1900년 사이였다. 산업혁명의 시대, 빛나는 근대화의 시대, 영광스러운 유럽의 시대였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대부분 파리의 거리를 캔버스에 담으려 했다.


거리 이야기가 나왔기에 하는 말이지만 당시에 이미 젠트리피케이션에 해당하는 기획이 있었다. 오스만 남작의 파리 개조 사업의 중요한 목적은 맹렬한 기세로 지방에서 유입되는 빈민(잠재적 범죄자로 여겨진)들을 일소하는 것이었다. 빈민을 중심부에서 몰아내려면 땅값을 올려 부자만 살 수 있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는 육체 노동자의 실상을 통해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모양새는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 한 것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신화, 성경 등의 내용에 주목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에 육체 노동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반면 일하는 여성은 빈번하지는 않지만 그림 속에 등장했다. 인상주의 화가들 중 로트레크, 고흐 등이 압생트 중독이었다.(20세기 초 제조 및 판매가 금지되었는데 오늘날 압생트와 전혀 다른 술이다.) 인상주의 화가 가운데 드물게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 - 1895)가 등장한다. 여자는 자유롭게 외출도 할 수 없었던 시대의 화가로 그로 인해 그녀는 주변 사람들과 주변 풍경들만을 그릴 수 밖에 없었다. 사소설 외의 것을 쓸 수 없게 강제된 소설가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로트레크가 반 고흐의 그림을 헐뜯는 사람을 때리려고 덤벼들었다는 에피소드와 고흐에게 남프랑스 아를로 가라고 권유했던 사람도 로트레크였다는 이야기도 흥미 거리이다. 고흐는 초기 작품만 보면 이런 그림으로 잘도 화가가 되려고 했구나, 하고 아연해질 실력이었음을 생각하면 악착 같이 밀어붙이면 사람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견본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흐는 자연광을 있는 그대로 붙잡으려 했던 모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고흐의 색채와 모네의 색채는 너무 다르다.


서양 회화는 여러 세대에 걸쳐 2차원의 화폭에 3차원 입체를 구현하기 위해 고심을 거듭하고 골똘히 궁리했는데 아예 그것을 문제삼지 않은 우키요에의 경쾌함과 자유로움이 고전의 속박에서 빠져나오려 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인상주의와 미국은 깊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롭고 젊은 미국이 프랑스 문화를 사랑(해 그림들을 구매)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새로운 화가들이 한껏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미국의 덕을 보았으면서도 벼락부자라 해서 경멸했다.


인상주의 회화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이유는 밝고 화사한 화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좋은 기분 좋은 분위기, 위로를 주고 지식이 없어도 즐길 수 있는 특성 등을 지녔기 때문이다. 물론 재해(災害) 장면을 보며 그저 감상의 대상으로 여겨 그림을 그리는 것은 독(毒)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그럼에도 아름답다’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독(毒)이자 매력이라 말한다. 이 책을 읽고 생각한 것은 역사적 지식, 문화사적 배경을 충분히 갖추는 것이 그림을 이해하는 데 필수라는 점이다. 그래야 올바른 설득력 있는 감상을 즐길 수 있다. ‘미술관 옆 카페에서 읽는 인상주의’를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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