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에 이어 두해 째 왕릉(王陵) 연구팀에 속해 올해 첫 숙제를 했다. 융건릉(隆健陵)에 다녀오지 않아, 참가한 팀원들과 달리 소략(疏略)한 숙제를 맡게 되었다. 가지 않은 것은 지난 해 9월 동작(銅雀)에서 간 일정에 참여했었기 때문이다.

 

또 갈 수도 있었는데 내키지 않았다. 외적 요인으로 시큰둥한 것이 아니라 공부하기 위해 들어갔지만 왕릉은 궁()이나 묘()에 비해 다루기(?)가 난감하다. 신이 나지 읺는다고 해야겠다.

 

사도세자(장조)의 융릉(隆陵)과 아들 정조의 건릉(健陵) 이야기를 각각 한 편씩 하는 숙제를, 여러 편의 글을 읽고 내 생각으로 정리, 재편하는 형식으로 마무리짓지 못했다. 내켰다면 정조의 풍수 활용에 대해서도 썼을 것이다.

 

이종호의 책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 답사기에서 읽은 다음의 글이 마음을 풀어주었다. “능호를 건()이라 한 것은 쉬지 않고 가는 하늘의 도를 상징한 것이다.”(362 페이지) 정조의 능에 대한 이야기이다. 굳셀 건이지만 하늘의 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일리가 있다 여겨진다.

 

하늘이니 건()이고 그것을 건()으로 바꿀 법도 하다. 지난 해 나온 박현모 교수의 정조평전의 부제가 생각난다. ‘말 안장 위의 군주라는 부제다. 이 부제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군주는 물론 늘 목숨을 위협 받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군주 정조를 상징하는 절묘한 중의적인 말이다.

 

나는 정조(正祖)로부터 주역(周易)의 하늘 곧 건괘(乾卦)를 연상한다. , 하면 용()이 생각난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세운 원찰 용주사(龍珠寺)를 생각하고 하는 말은 아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전면에 보이는 안산(案山)을 여의주로 인식하였고 그 중요성에 대해 굉장히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박정해 지음 사찰에서 만나는 불교풍수참고) 용주사 자체가 정조의 깊은 관심 속에 입지선정이 되고 건설된 사찰이다.

 

물론 나는 풍수를 논할 실력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올해 임기봉 교수의 임금의 도시를 읽고 풍수를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중요한 점은 풍수는 자연친화적이기에 인간에게 유리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 차원 말고 죽은 조상이 살아 있는 후손과 감응(感應)한다는 것은 너무 막연하고 주관적이다. 표면은 발복(發福)이고 실제적으로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물론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명당을 고른 정조의 경우를 보면 정치적 차원과 무관한 경우도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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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9 0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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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0 04: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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